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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주인공 박수정 님과 행정처(현 사무처)에서 한 팀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 활동 초기 회의에서 “시아버지가 너무 힘들게 한다”며 울던 도반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는 박수정 님의 나누기를 들으며 빵 터져 웃었습니다. 극T 성향인 박수정 님이 얼마나 황당했을지 짐작이 됐기 때문입니다.
“아니, 회의에서는 업무 진행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야지 갑자기 시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와? 나는 처음엔 무슨 이런 조직이 다 있나 싶었다니까요.”
회의 자리에서 남편, 자식, 시댁 이야기까지 오가는 분위기가 이상하고 난감해 ‘그냥 집에 갈까? 그래도 좀 있다 갈까? 오늘만 채우고 도망갈까?’ 고민했다는 박수정 님. 그런 박수정 님이 아직까지 정토회를 떠나지 않고 젖은 낙엽처럼 붙어 있는 이유, 지금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당시나 지금이나 일 중독자인 저에게 지인이 <깨달음의 장>을 권했습니다.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고, 여행 삼아 다녀오라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큰 기대 없이 참여했기에 마친 후 특별한 감흥도 없었습니다. 다만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 든 정도였습니다. 그 후 5~6년간은 법회에 들락날락했고, 불교대학도 다니다 말다 하기를 반복했습니다.
2014년에 하던 일을 잠시 쉬게 되었는데, 마침 집 근처에 양천 법당이 새로 개원했습니다. 입학만 하고 졸업을 못해 불교대학 재수강 3년 차였던 저는 ‘법당도 생겼으니 이참에 졸업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불교대학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재수강 3년 차라는 경력은 살짝 숨긴 채 조용히 불교대학을 다니던 저에게 이성미 국장님(현 향취 법사님)이 찾아와 정토회 일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시민단체에서 꾸준히 활동했던 제 이력을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생각이 없던 터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국장님이 두어 번 더 찾아오셔서 결국 ‘뭐, 그동안 정토회에 받은 은혜도 있으니, 일을 쉬는 1년만 정토회 소임을 맡아보자’는 마음을 냈습니다.
처음 정토회 활동을 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정일사’입니다. 정일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참여했는데, 첫 정일사 때 한 도반이 탈북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과 후 교육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도반은 그 사업으로 인해 너무 힘들고 지쳐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법사님이 저 도반을 위로하고 다시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시겠지!’ 싶어 어떻게 설득할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무변심 법사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는 보살님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업은 접어야 합니다.” 이 한마디에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사업보다 일을 하는 사람의 성장이 더 중요하며, 일은 그 성장을 돕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업을 접는다고? 지금까지 내가 속해 있던 그 어떤 조직도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일하는 사람을 바꾸거나 그만두게 했지, 사업 자체를 접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더욱 놀라운 건,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도 아닌데 도반을 향한 법사님의 태도에서 무한한 애정이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진심으로 챙길 수 있을까?’ 그 모습은 제게 충격적일 만큼 낯선 장면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를 <깨달음의 장>으로 이끌어준 지인이 떠올랐습니다. 그 지인은 40대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장에서 처음 무변심 법사님을 뵈었습니다. 각자 조문객으로 마주쳤지만 아마 법사님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날, 법사님께서 지인의 영정 앞에서 정성껏 염불하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사람을 챙기시는구나! 정말 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조직도 있구나!’ 정일사가 끝나고 다른 도반들은 모두 나갔지만, 저는 깊고 긴 여운이 남아 홀로 한참을 더 머물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어머니는 굉장히 사교적이고 사치를 즐기는 분이셨습니다. 늘 친구들과 계 모임을 하셨고, 계주를 맡았다가 돈을 들고 사라진 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어머니와는 정반대로 외상 거래조차 치를 떨 만큼 절제하는 분이셨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성향의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고, 아버지는 자식들이 어머니처럼 살까 두려웠는지 매우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저희를 키웠습니다. 어머니처럼 사치스러운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무섭게 통제했기에, 저는 규칙을 어기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모든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스무 살이 되자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일찍 독립했고, 그때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든 꼭 사장님과 부딪치곤 했습니다. 저는 저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에 대한 기대와 기준이 분명했기에, 아르바이트생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장님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사명감이 있고, 어려운 사람을 대변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밖으로만 떠돌던 어머니에 대한 결핍이 사장님이나 직장 상사에게 그대로 투영됐던 것 같습니다. 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은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기준이 뚜렷하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탓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토회에 와서도 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대의원 회의를 준비하면서 문서 작업과 편집까지 완벽히 마무리하고 회의 자료를 인쇄업체에 넘겼습니다. 하지만 행사 당일, 인쇄업체와 연락이 두절 되었습니다.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대의원 회의인데 회의자료가 없다니,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일단 회의자료를 USB에 담아 배포하겠다는 생각으로 참가자들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 노트북을 챙겨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국장님께 상황을 알리고, USB에 담아 배포하는 방식에 대한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촉박한 상황에서 연락이 닿지 않아 너무나 난감했습니다. 결국 대표님께 전화해 승인은 받았지만, 회의를 진행하는 문경은 시골이라 USB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주변 도시에서 USB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그제야 국장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통화가 되지 않았던 국장님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이 다 짜증스럽고 국장님이 미웠습니다. 그 순간 제 안에서 국장님이 어머니로 투영되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여놓고 야반도주하듯 사라졌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진 것입니다.
국장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쌓이고 몸도 아파 병가를 내고 집에 있었습니다. 정토회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둘 생각을 하니 여러 마음이 교차했고, 법사님께서 나누기 시간에 하신 말씀도 자꾸 맴돌았습니다. “걸림 없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저는 문제에 부딪히면 늘 외면하거나 도망쳤습니다. 이번에도 도망치면 앞으로도 영영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겠다는 마음으로 국장님과 솔직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이래서 서운했습니다.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쌓아두었던 마음을 차분히 꺼내어 털어내고 나니, 국장님도 저의 욱하는 성격을 감당하느라 힘드셨겠다는 게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제 마음을 잘 받아주시고, 기다려 주셨던 것도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오랜 대화를 나누고 국장님과는 그동안 불편했던 관계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가볍고 편안해졌습니다. 이후로 저는 “나도 누군가에게 숨구멍이 되어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도반들과의 관계를 통해 저를 비춰보니, 저는 늘 긴장한 채 모든 일이 제 계획대로 흘러가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100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1000까지 해내길 바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늘 힘들고 긴장할 수밖에 없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짜증이 났습니다.
이런 제에게는 명상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여름과 겨울마다 9박 10일간 진행되는 명상 수련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명상 기간 동안 무의식을 마주하고 바라보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많이 해소되었고, 긴장이 풀리니 다른 사람들의 말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조금씩 변화하는 ‘나 자신의 성장’이 정토회 활동을 이어가는 큰 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반들의 성장이 제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모자이크 붓다는 단순히 명심문 속 문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는 도반을 통해, 그 가르침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볼 때마다 감동이 밀려옵니다.
모든 걸 혼자 책임지고 혼자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긴장감이 팽팽했던 제가, 이제는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서로 협력해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 점점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져서 참 고맙습니다.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주지 않은 무거운 책임감을 고집스레 떠안고 일만 하다가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었을 겁니다. 물론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저는 여전히 ‘일 중독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반들과 함께 속도를 맞추고 의견도 나누며 나를 돌보면서 걸어갑니다.
1년만 하겠다던 제가 어느덧 전임활동가로 14년 가까이 정토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냥 주어지는 대로 일하려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을 통해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더 가볍고 행복해진다면, 저는 기꺼이 지금처럼 수행자로 살겠습니다.
“곁에 있는 도반을 통해 ‘모자이크 붓다’들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볼 때마다 감동스럽다”는 박수정 님의 소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성장은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좌충우돌하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극T인 박수정 님은 극F인 편집자에겐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소중하고 고마운 도반입니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다시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글_장수린(인천경기서부지부 인천지회)
편집_허인영(강원경기동부지부 화성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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