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눈 떠보니 집에 가야 할 시간

바라지장 소감문은 <월간정토>에 소개되는 글 중에 이야기가 비교적 단조롭지만 늘 잔잔한 감동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유윤정 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을 힘들 때 가서 가볍게 쉴 수 있는, 친정처럼 든든한 곳이라 표현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이 들게 되는지 궁금한 마음도 듭니다. 바라지장을 마칠 즈음 도반들과 함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함께 보았다 하는데, 그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네요.

수행자로 살게끔 인연 맺어준 아버지

문경에서의 하루하루가 너무 편안해서 집에 가는 게 서운할 지경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소감문을 작성하는데 친정 부모님께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유윤정 님
▲ 유윤정 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재를 경주 굴곡사에서 지냈습니다. 그곳 법사님을 통해서 정토회를 알게됐으니, 어쩌면 아버지가 수행자로 살게끔 인연 맺어주신 것도 같습니다. 친정아버지는 마치 철학자 칸트처럼 정해진 시간에 같은 장소를 가고, 늘 같은 시간에 식사하는 분이었습니다. 말수가 적고 책 읽고 바둑 두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엄했던 아버지는 이란성 쌍둥이인 저를 유독 싫어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뭔가 해드리면 못마땅했는지 둘째 언니나 막내 여동생에게 꼭 다시 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란성 쌍둥이로 30분 먼저 태어난 오빠를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다음 해에야 저를 입학시켰습니다. 저는 왠지 출생부터 인정받지 못한 느낌에 주눅이 들어 지냈고, 아버지는 제가 뭐든지 오빠보다 잘하면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는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5남매를 가르치려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 밑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10년간 심근경색으로 투병하셨는데 가까이에 사는 제가 보살펴드렸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저에게 고맙다는 표현도 여러 번 하셨습니다. 몇 년 전 제가 허리와 목 디스크 시술 부작용으로 2년 동안 걷지 못했을 때 친정엄마는 “네가 태어날 때부터 복이 없고,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상처로 남았는데 정토회 와서 수행하면서 비로소 웃고 넘기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된 줄 알았는데, ‘바라지장’에서 억눌려 있던 감정을 확인했습니다. 어릴 적 힘들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인정받고 싶어 몸부림치던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미워하고 원망하는 불편한 마음을 숨긴 채 괜찮은 척, 착한 척하며 살았기에 마음이 힘들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만큼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힘이 친정으로부터 얻은 자생력이 아닌가 싶어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도 듭니다.

버섯 다듬기(가운데가 유윤정 님)
▲ 버섯 다듬기(가운데가 유윤정 님)

“어멍이 하는 건 다 괜찮아”

시댁은 친정과 정반대의 분위기였습니다. 밥은 배고플 때 먹으면 되고, 잠은 졸릴 때 자면 되는 그야말로 정해진 게 없었습니다. 편하게만 보이던 시댁 분위기는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 달라졌습니다. 자라온 환경의 차이가 현실로 다가왔는데, 남편과 참 많이 싸웠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안 보이려고 속으로 삭이면서도 ‘내가 옳다’는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남편은 자유로운 사람이었는데, 월급을 받아도 생활비를 주지 않아서 제가 일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피부관리실에서 10년, 한의원 간호조무사로 6년, 지금은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봐온 시어머니는 저를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해주셨습니다. “도영이 어멍이 하는 것은 다 괜찮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들을 수 없는 시어머니의 따뜻한 말씀이 그간 제 외로움을 많이 달래주었습니다.

공양간에서(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윤정 님)
▲ 공양간에서(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윤정 님)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바라지장

‘깨달음의 장’을 마치면서 법사님께서 문경을 마음의 고향이자 친정으로 생각하라고 하실 때 내심 기뻤습니다. 마음 불편한 친정보다, 힘들 때 가볍게 가서 쉴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든든했습니다. 그 후 바라지장에 가게 됐는데, 봉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봉사단체보다 훨씬 적은 인원으로 손발을 척척 맞춰서 해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하기 힘든 재료 손질도 서로 의논해서 맞추다 보니, 다들 웃으며 소임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셋째 날 쉬는 시간에 도반들이 옹기종기 마루에 모여 있길래 다가가보니 손에 밤 가시가 박힌 도반을 한마음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저녁 공양 시간에 재료 준비를 끝내고 주변을 돌아보니 낮에 밤 가시가 박혔던 도반이 불편한 내색도 없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까지 하는 모습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녁 나누기 시간에 그 도반이 우리가 하나같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모습에서 감동받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처럼 친정이 불편한 도반, 정년 문제로 고민하는 도반, 어릴 적 따돌림으로 지금까지 일상이 힘든 도반, 친정 식구들이 불쌍해서 속상한 도반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제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가고 싶은 문경

때에 맞춰서 밥 먹을 때 밥 먹고, 자야 할 때 잠 자고, 정진할 때 정진하다 보니 어느새 집에 갈 때가 되었습니다. 눈 떠보니 집에 갈 때라니, 그동안 잘 쉬었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날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대웅전 앞에 6명이 쪼르르 앉아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풀벌레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있던, 숨소리조차 따뜻했던 그날의 문경을 떠올리니 다시 가고 싶어집니다. 바라지로 함께했던 도반들, 우렁각시처럼 힘든 일 도맡아 해준 윤심 팀장님, 저를 알게 해준 권순녀 팀장님, 저의 안내자 지광 법사님, 제주지회 도반들 그리고 저와 함께한 모든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바라지장 단체 사진(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유윤정 님)
▲ 바라지장 단체 사진(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유윤정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4년 12월 호에 수록된 바라지장 소감문입니다.

글_유윤정(서제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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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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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늘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며 일과 정진을 해가는 윤정님의 모습은 수행자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본인의 걸음으로 천천히 , 묵묵히 가시는 그 길을 응원하며, 저도 그 곁에서 함께 가봅니다.

2025-05-21 13:17:07

김용숙

유은정 도반님의 웃음만큼 따스한 글 잘 읽었습니다.
대웅전 앞에서 듣는
풀 벌레 소리, 별똥 별들....
모든 게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저도 조만간 문경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2025-05-21 13:09:16

웃음

누구가를 바라지하며 깨달으시는 수행자,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유윤정 님 언제든 문경에서 편안하게 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05-20 21: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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