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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쌀쌀한 초봄, 서제지부 환경실천담당 심재성 님을 만났습니다. 심재성 님은 정토회의 모든 활동이 너무 신나고 재미있다고 합니다. 여리여리한 모습과 달리 다부지고 단단한 정토행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평범한 주부로 아들 둘을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큰아이는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대학 입시에서 아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재수도 했지만, 결과는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복학도 했지만,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떨어지고, 공부가 잘 안돼요.”라고 슬쩍슬쩍 하는 말을 '그냥 하는 소리겠지.'라며 허투루 들었습니다.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을 때, 큰아이가 공부를 접었습니다. ‘하겠다, 안 하겠다.’라는 말도 없이, 한마디로 정지 상태! 제 인생 최대 고비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남편보다 엄마의 역할을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삶의 의욕도 없었습니다. 땅속으로 꺼질 듯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퇴근 후, 집에 오면 제 눈을 맞추며 “오늘 무슨 일 없었어? 당신 마음 불편한 일은 없었어?”라고 항상 저를 챙겼습니다. 한 번 정도 불편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든 저를 보살피고자 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한테 상처를 입히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되겠구나. 남편을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러면서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심리 상담도 받고, 행복학교1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큰아들이 중학생 때부터 절에 다녔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자 형제가 없어 아들 둘을 키우는 일이 버거울 때가 있었습니다. 강한 엄마가 되고 싶어 절에 다녔습니다. 108배도 꾸준히 했지만,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소원 성취 기도를 만들었나? 누가 들어준다는 거지?’ 경전 공부도 너무 어려웠습니다. ‘쉽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나? 경전 공부는 어렵고 힘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행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 놀랐습니다. 상대의 이야기에서 제 모습이 보였고,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경험도 했습니다. 활동하면서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행복학교 수업이 재미있어 ‘법륜 스님은 부처님 경전을 어떻게 설명할까?’라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평소 꼼꼼하게 알아보는 성격이지만, ‘가보고 재미없으면 그만두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입학식 날, 첫 수업 시간에 스님은 평소 제가 궁금했던 부분을 시원하게 설명했습니다. ‘아! 내가 만나야 할 스승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환희심이 생기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수행문에 나오는 ‘이 절 저 절 찾아다니는’ 구절이 제 이야기 같았고 ‘찾아 헤맨 보람이 있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경전 대학 졸업 후, 법문을 다시 듣고 싶어 진행자 신청을 했습니다. ‘안되면 어쩌나.’라며 마음을 졸였습니다.
남편은 좋은 사람, 좋은 어른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저보다 더 깔끔하게 정리하는 성격입니다. 남편이 정리 문제로 잔소리하면 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듣기 싫어 ‘저 입을 어떻게 다물게 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머릿속에서 '이 사람이 살아 있어 나한테 잔소리하는데, 입 다물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남편에게 사과하고, 앞으로는 그 어떤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다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오히려 당신이 그렇게 얘기하니 재미없어졌어. 이제 안 할 거야.”라고 했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내 마음이 바뀌니 상대도 바뀌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불교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매번 남편이 떠올랐습니다. ‘남편은 장점이 많은데, 내가 그건 보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이 고마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교대학에서 매주 진행하는 수행 미션 과제로 남편에게 절을 했습니다. 직장 다녀온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있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선 채로 3배를 했습니다. 1년 동안 매주 했습니다.
정토회에 처음 나갈 때 남편은 "절은 조계사, 봉은사, 이런 거지. 정토회, 그거 사이비 아니야? 너무 깊이 빠지지 마!"라고 했습니다. 저는 편안해져 좋은데 남편은 믿지 않는 것 같아 수업 후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오늘 무얼 배웠는지, 거기서 어떤 걸 알아차렸는지 설명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경전대학에 다니던 중 코로나로 법당을 닫을 때 남편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종교도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사업자가 돈을 버는 사업장을 닫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법당을 닫다니, 법륜 스님은 일반 종교 지도자와 다르다. 진짜 수행자이고, 정말 존경스럽다!”라며 마음을 열었습니다. 지금은 남편이 가장 든든한 후원자입니다. 친구들에게 정토회를 소개하고 아들에게도 "너희 엄마 보니까, 정토회 정말 좋아"라고 지지합니다.
저는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남편이 “당신, 화났어?”라고 물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닌데, 왜 그렇게 물어?”
“당신, 지금 화난 목소리야!”
남편이 이렇게 느끼면 밖에서 만나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지 모릅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공부를 통해 제 마음에 화가 많이 쌓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깨달음의 장〉2에서 더 명확히 알아차렸습니다. ‘원인 제공자가 있어 화가 난다.’라는 생각에서 ‘화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4박 5일 동안 조금씩 마음이 열렸습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인정하니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볍고, 인생의 답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잘 참는 사람입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참는 부분이 많습니다. 공부하던 중 마음에 걸리는 사건을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남편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아! 참 바보 같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고 나 혼자 추측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괴로워했구나!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없는데, 결국 오해도 내가 만든 거구나!’
이런 경험을 몇 차례 했습니다. 그 후로 마음에 쌓지 않고 그때그때 ‘당신이 그렇게 말해 섭섭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남편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나누기’ 덕분입니다. 나누기가 어려웠지만, 좋았습니다.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나누기 과정이 연습이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 답답하고 화가 쌓인다는 것도 알아차렸습니다. 예전에는 아들에게 권위 있는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지만, 지금은 제 마음을 표현합니다. 아이는 금세 받아들이고 "엄마, 저도 이럴 때 속상해요."라고 답합니다. 이런 과정이 참 감사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여동생을 키우기 위해 외갓집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어머니는 일 가고 이모들, 외사촌들과 재미있게 놀면서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할머니가 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촌들은 다 아빠가 있는데, 나만 아빠가 없구나’라는 생각에 허전했습니다. 그래선지 어릴 때도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이유 없이 불안이 확 올라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이 불안이 왜 생기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들 초등학교 때 친정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엄마는 혼자 우리 자매를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이들이 다 크면 더 자주 찾아뵙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슬픔과 죄책감에 힘들었습니다. 행복학교에 다닐 때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스님 법문을 들으며 누구나 헤어지고, 좀 일찍 헤어졌을 뿐임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은 2023년 종로에서 진행한 연등회 행사였습니다. 그 행사에서 정토회는 오랫동안 환경, 복지, 통일팀 부스를 열었습니다. 지부 실천활동 담당으로 맡은 첫 행사였습니다. 당시 처음 소임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 일도 파악하지 못한 채, 행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행사 관련 자료가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지부 담당자니, 뭐라도 알고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진짜 난감하고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저기 알아보며 퍼즐 맞추듯 한 조각 한 조각 맞출 때, 전 담당자가 기획안 같은 자료를 주었습니다. 그걸 기초로 지회 실천 담당자들과 회의하면서 함께 과제를 풀어 나갔고, 행사를 원만히 치렀습니다. 큰 경험을 했고, 도반들과 팀워크도 쌓고, 내면이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지회 담당자들에게 고맙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처음엔 안 될 것 같은 일도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자신감이 생기고, 일에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늘상 뒷걸음칠 궁리만 했는데, 비록 부족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펼쳐 놓으면 함께 만든다는 생각에 겁이 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위에서 아래로, 지부에서 지회로 뭔가 '내려줘야 한다'는 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 활동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도반들과 함께하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임을 체험하며, ‘내가 상을 세우고 있었구나!’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제일 힘든 것은 ‘네. 하겠습니다.’입니다. 잘 모르거나 어려워 보이는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법사님께 명심문으로 ‘네. 하겠습니다. 그냥 무조건 하겠습니다!’를 받았습니다. 수행 중 마음 깊은 곳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걸 알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아직도 두렵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에 빠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공양간 봉사를 하면서 잡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면서 집중하지 않으면 잘 간 칼에 다치기 쉽습니다. 일이 끝나면 머리가 가벼워지고 불안도 사라졌습니다. 또한 통일 의병 활동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보는 눈도 깊어졌습니다. 나와 세상이 깊이 연결된 것도 알았습니다.
큰아이도 집착하지 않고 한 발 떨어져 지켜보고 있습니다. 남편 말대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 아빠의 자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예전엔 ‘아이가 왜 저럴까? 우리가 꺼내줘야 해.’라며 전전긍긍했을 텐데, 이제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냥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아이는 운동도 하고, 베란다에 두었던 베이스 기타도 다시 자기 방으로 가져다 놓고, 자신을 추스르는 것 같습니다.
봉사 활동에서 받은 선물이 어마어마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삶의 조건은 크게 바뀐 것이 없지만,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감사합니다. 아침에 쌀을 씻을 때 이렇게 먹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남편도 "당신, 너무 행복해 보여."라고 말합니다. 내면의 불안이나 개인적인 문제도 작게 느껴집니다. 이런 경험은 모두 함께 수행하는 도반 덕분입니다. 함께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아 민망했다는 심재성 님. 하지만 ‘수행자로 살자, 편안해지자!’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조용히 풀어낸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습니다. 툭툭 털고 일어나는 그 모습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배웁니다. 수행자로 함께 하는 인연에 감사합니다.
글_박언희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경주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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