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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공동체 법사단 수련 4일차입니다. 농사 울력과 회향식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법사님들도 새벽 예불과 기도를 한 후에 간단하게 요기하고 울력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울력을 하러 갔습니다. 법사님들은 두 팀으로 나눠서 울력을 했습니다. 논둑 팀은 고인돌 집으로 가는 논둑길을 정비하는 울력을 했고 텃밭 팀은 모판을 이동하고 텃밭을 정리하는 울력을 했습니다.

어제 점검했던 논은 마을 가운데 있어 논둑 높이가 낮아 논에 물이 찼을 때 대나무숲을 지나 마을 주민 집으로 물이 넘쳐흐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나무숲 쪽에 있는 논둑길을 보완할 수 있도록 농기구를 이용해서 논과 논둑길 사이의 경계선을 잡아 주었습니다. 법사님들은 스님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기준 삼아서 낮은 논둑을 높였습니다.

스님은 논둑을 보완하는 데 여러 가지 조언을 했습니다. 논 안에 있는 흙을 많이 파내면 이앙기로 모를 심을 수 없으니, 한 삽 정도의 흙만 둑으로 올리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논 안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흙을 밟아 놓으면 모를 고르게 심을 수 없으므로 바닥을 다시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논둑은 어제 대나무를 잘라서 길은 겨우 뚫었지만,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매우 좁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는 폭으로 논둑길을 넓히고 정비하는 작업은 만만치 않은 일감이었습니다.

스님의 조언을 들으며 법사님들이 부지런히 삽질한 끝에 마침내 튼튼한 논둑길이 완성되었습니다. 모심기할 논이 써래질이 서툴러서 맞수평이 맞지 않아 한쪽은 바닥이 드러났고, 한쪽은 물이 깊었습니다. 모내기를 잘할 수 있도록 논바닥의 수평을 맞추는 일에 법사님들은 여러 번 써래질을 했습니다. 논둑 팀 울력이 끝났습니다.

장화에 진흙이 잔뜩 묻어서 개울가로 향했습니다. 개울가로 오는 길에 동네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길에서 동네 할머니에게 안부를 물으며, 전동차를 이용하실 때는 늘 조심하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밤에는 잘 보이지 않아서 위험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골목을 다닐 때 전동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전동차 뒤에 야광 안전 스티커가 없어서 밤에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 번은 밤에 스님이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에 전동차가 갑자기 나타나 위험할 뻔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지만 이후 스님은 마을 어르신들의 전동차 수를 파악해 야광 스티커를 다 붙여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스님은 밤에 정말 주의하면서 전동차를 타셔야 한다고 마을 어르신께 한 번 더 당부했습니다.
이어서 마당에 꽃과 텃밭을 예쁘게 가꾸어 놓은 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나누고 고인돌 주변 땅에 꽃밭을 만들 계획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현재 고인돌이 논 가운데에 있어서 여름철에 보러 오는 사람들은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돌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도록 고인돌 주위의 논에는 모를 심지 않고 꽃밭으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아주머니는 새로운 꽃씨가 생기면 고인돌 주위에 뿌려놓겠다고 스님과 웃으며 약속했습니다.

스님은 인사가 끝나고 개울가에 진흙이 묻은 장화를 씻고 곧바로 텃밭 팀이 울력하는 곳으로 와서 살폈습니다. 진행된 상황을 살펴보고, 필요한 퇴비나 유박을 찾아서 법사님들에게 주었습니다.

텃밭 팀 법사님들은 꽃대가 올라온 상추 텃밭을 정리했습니다. 상추와 고수 일부는 씨앗을 받기 위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나머지 텃밭에서는 상추를 모두 뽑아서 바로 먹을 것과 상추 김치를 담을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텃밭에 유박과 퇴비를 뿌린 뒤 삽질해 가며 흙을 위아래로 골고루 섞었습니다. 잘 만들어진 두둑에는 열무를 심었습니다. 지난번에 열무씨를 뿌렸는데, 물조리개의 물살이 너무 강했던 탓에 씨앗을 덮었던 흙이 다 씻겨 내려갔었습니다. 씨앗을 심었어도 싹튼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조심스럽게 다시 열무씨를 심었습니다. 텃밭 팀도 울력을 마쳤습니다. 오전 8시 스님은 법사님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 수련은 오전 10시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수련 시작 전, 스님은 농사팀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했습니다. 더운 날씨 속에서 며칠에 걸쳐 고생한 덕분에, 6,000여 평 논의 모내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모내기 상황을 살핀 후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사이 법사님들도 샤워를 마치고 스님과의 수련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수련 일정 중 마지막 점검 회의였습니다. 지난 3일 동안 깊이 논의했던 사항들을 최종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결론이 난 부분은 가볍게 확인하고 넘어갔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사항들은 논의를 좀 더 진척시켰습니다. 2시간 동안 꼬박 집중하여 안건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낮 12시부터는 공동체 법사단 수련 회향식이 법당에서 열렸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으로 회향식의 문을 열었습니다. 청법가와 청법 삼배로 스님께 법을 청했습니다.

마이크 없이 자연스러운 대화 형태로 법문이 진행되었기에, 법사님들은 방석을 당겨 스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늘 어려운 시대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것이 고통이었고, 해방 후에는 6.25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가난이 문제였고, 군사독재 또한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금을 돌아보면 전쟁도 없고 식민지 지배도 없고 독재도 없습니다. 굶주리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그렇게 놓고 보면 지금은 어렵다고 할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시대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늘 '지금이 위기다.'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어렵지 않은 시대는 없는 셈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들기 때문에 당대의 삶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죠.
어느 시대를 살든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입니다. 이것 때문에 어렵고 저것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을 하든 늘 괴롭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시대가 어떻든 괴로움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살아서 힘들다고 합니다. 결혼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또 결혼해서 힘들다고 하죠. 아이가 없는 사람은 아이를 갖고 싶어 힘들어하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아이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젊을 때는 공부하고 직장을 구하느라 힘들고, 나이가 들면 좀 편해야 할 것 같은데 눈이 침침하고 다리가 아프고 몸 여기저기가 불편해서 또 힘들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지금까지 전해져 왔는지 잘 이해가 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인생을 살아갈수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의 관점이 더 공감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좋은 소식을 전하듯 기쁜 마음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지만 어쩌면 앞으로는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밥을 못 먹으니까 먹는 것이 가장 급했고, 옷이 없으니 입는 것이 급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쟁을 멈추는 것이 급했고, 피난을 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라는 말이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당장 끼니가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조건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물론 지금도 집이 없어서 집을 사야 한다든지 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괴로움이 상황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예전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즘이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즐길 것이 너무 많아서 수행하기 어렵다고도 해요.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오히려 수행의 관점을 이해하기에는 더 좋은 시대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핑계를 대기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세상은 부처님 가르침을 더욱 필요로 하고, 법을 전하기에도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다만 사람들과 어떤 접점을 만들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어요.

부처님 당시를 보면, 부처님께서 일부러 괴로운 사람을 찾아다니며 법을 전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피한 것도 아니고, 찾아오는 사람은 받아들이며 만나는 인연을 따라 법을 설하셨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맞게 사람들을 만나고, 누구나 인연이 닿는 대로 가르침을 설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주변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즉 더 여여(如如)한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했으니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해 나가면 됩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때와 다른 또 지금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복이나 기적을 바라는 '종교적 관점'은 쉽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수행적 관점'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봅니다.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적 관점이야말로 갈수록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수행적 관점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통해 쉽게 공감하고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법을 전하기에 오히려 더 쉬운 시대라고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한마디로 '정의를 실현하자'라고 외치던 시대였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독재, 전쟁을 겪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약 8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엄청난 비극을 경험한 뒤에 사람들은 반성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가 협력하자는 취지로 유엔(UN)이라는 국제기구를 만들고, 경제개발 계획도 세우고, 이웃을 돕는 여러 단체도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독립해 나갔고, 성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을 없애는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독재 국가들도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기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 역시 경제적으로 성장해 왔고, 민주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대체로 이런 방향으로 흘러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과거의 고통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 탓인지, 혹은 너무 풍요로워진 탓인지 최근에는 오히려 극단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어요. 과거 같으면 경계했을 법한 파시즘적 주장까지도 점점 더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조차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러시아나 중국 같은 공산국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점점 독선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아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본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그런 과정이 점점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진보의 시대에는 마음속 생각을 함부로 드러내면 교양이 없다고 비판받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감정적인 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해도 되고, 그게 더 솔직하고 용기 있는 태도라고 여기는 쪽으로 시대가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트럼프 같은 정치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점점 힘을 숭상하는 시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닐 것 같아요. 조금 완화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도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의 배경에 기술의 발전이 있다고 봅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역량이 과거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같이 기술 발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자산이 수많은 사람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더 커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경제력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힘이 소수에게 쏠리게 됩니다. 서로 힘이 비슷해야 의논도 하고 타협도 하는데, 힘이 소수에게 쏠리면 힘없는 사람과는 굳이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트럼프가 ‘힘도 없는 유엔의 작은 회원국들과 자꾸 의논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힘 있는 나라 몇몇이 의논해서 처리하면 되지, 왜 그런 작은 나라들의 의견을 다 들어야 하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유엔 분담금이나 지원금을 줄이거나 국제기구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정치적 변화는 단순히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발전으로 인해 힘의 구조가 변화한 결과가 정치에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앞으로 인공지능이 본격화하면 이런 현상은 더 확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절대 빈곤은 줄어들 수 있을지 몰라도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거대한 부를 가진 장자들이 등장했듯이, 오늘날에도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부와 권력이 극단적으로 집중되면 힘없는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에게 맞서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하고 따라가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그런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난 80년 동안 민주주의와 상호 협력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가치들이 점차 약해지고, 과거에는 약간 배제되었던 힘 중심의 사고방식이 새로운 주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최근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1980년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추진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신자유주의 정책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명박 정부 시기의 분위기와도 연결됩니다. 힘을 숭상하고 개인의 역량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똑똑한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라는 식의 논리가 이 시기에 힘을 얻었습니다. 디지털 사회가 시작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오늘날에 와서 그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국가 간 갈등과 경쟁이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과 이란의 갈등을 넘어 중국과 대만의 문제도 계속 긴장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점점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의 과거 역사에서 보면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거나 세상이 폐허가 된 것은 아니었어요. 철기 문명이 등장하면서 생산량은 계속 늘어났거든요. 그러니까 전쟁은 벌어지는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성장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민주화 운동 시절을 돌아보면 사회가 늘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시위도 많고 갈등도 심했지만, 경제는 계속 성장했잖아요.
근데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더 잘 되기 위한 갈등이라기보다 내리막으로 가는 갈등의 성격이 있어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충돌이라기보다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라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앞으로 세계적 갈등은 더 심해질 수 있고, 우리도 거기에 휘말릴 위험이 매우 큽니다. 남북한 문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와 북한이 연결돼 있고, 대만을 둘러싸고 긴장이 높아지는 중국과도 북한은 연결돼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미국과 연결되어 있어요. 만약 대만에서 분쟁이 생기면 거기에 대응하는 미국과 우리도 연결돼 있고, 또 남북한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니 작은 불씨 하나만 생겨도 우리도 금방 휘말릴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전쟁 없는 평화를 지켜낼 것이냐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시대의 변화가 때로는 우리의 노력을 훨씬 뛰어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에요.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전쟁을 막으려고 애를 써도 전쟁은 더 확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려고 아껴 쓰고 소비를 줄여도 기후 위기는 더 심화되는 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적 갈등을 줄이려고 국민 통합을 말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갈등이 심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큰 흐름이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 내려는 힘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마치 백 년 만에 오는 홍수를 막으려고 아무리 열심히 둑을 쌓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과 같아요.
지금은 크게 보면 '하나 안 하나 똑같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시점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지금 시대의 흐름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든, 빈부격차가 심해지든, 갈등이 커지든 충분히 고통을 겪고 사람들이 반성하면 그때 가서 해결하자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더라도 계속 노력하는 길입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더라도 평화를 위해, 사회 통합을 위해,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비록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파국으로 가는 속도를 조금은 늦췄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크게 보면 '속도를 늦추나 안 늦추나 무슨 의미가 있나', '오늘 망하나 내일 망하나 무슨 차이가 있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관점에서 보면 내 마음의 평정만을 구하는 것(소승)은 전자의 선택에 가깝고, 세상의 고통에 뛰어들어 함께 행동하는 것(대승)은 후자의 선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약 통일이 이루어지고 국민 통합이 이루어지고, 행복학교를 통해 국민 행복도가 높아진다면 참여한 사람들은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아무리 고생했더라도 만족도는 매우 높을 거예요. 심지어 죽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죽는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흐름을 보면 결과가 그렇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왜 그 고생을 했지?', '쓸데없는 짓을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확률이 더 높다는 거예요.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가 하는 일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전쟁은 승리할 가능성보다 패배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른길이라면 이기고 지는 것, 성취되고 안 되는 것과 관계없이 그 길을 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수행자에게는 희생이 없다고 말합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 희생이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집착하면 누구나 희생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세상을 위해 일하든, 정토회를 위해 일하든, 결국 '내 삶을 바쳤는데 돌아오는 게 없다'며 억울해지기 쉽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일을 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자기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미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얻었다면,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마치 흙으로 조각상을 빚었는데 홍수가 나서 다 녹아버렸다고 생각해 봐요. 그러면 '내 청춘을 바쳐 만든 게 다 사라졌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만드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면 그 조각상이 물에 쓸려가든 누가 가져가든 그대로 남아 있든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은 글자를 한 자 한 자 해석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관점을 삶 속에서 체득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지만 아직 완벽히 체득된 상태가 아닙니다. 수행의 관점에서는 사실 죽은 뒤의 일이나 병드는 현실조차 초월해야 하고 부처님 당시에는 모두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안 그러면 마음속에 원망이 생길 수 있어요. 따라서 수행이 아직 안 된 현실을 인정하고, 공동체가 서로를 돌봐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완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지 개념과는 조금 다르지만, 적어도 늙어서 죽을 때나 병들었을 때는 치료받고 보호받으며 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천도재를 지내고 위패를 모시는 이유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언젠가 죽더라도 공동체가 나를 기억해 주겠구나' 하는 마음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토회 안에서 수행이 부족하더라도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은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런 것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수행으로 해결하도록 했어요. 그것은 죽든지 말든지 하는 식의 냉정함이 아니라 수행 중심의 관점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부처님 당시와 비교하면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승패를 떠나 바른길이라면 꾸준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어쩌면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세상이 요구하는 일이라면 계속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참여한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적으로 완성도를 높여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병들고 늙었을 때를 대비한 최소한의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도 일정한 보장이 필요하듯이 어려운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목표를 이루면 이런 보완책이 다 필요 없어집니다. 보람이 절로 생기지요. 산꼭대기 올라가서 '정상이다!' 하고 외칠 때는 올라오는 동안의 고생이 한순간에 잊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오더라도 만족할 수 있으려면 다른 차원의 보람, 즉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법사뿐 아니라 모든 정토회원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중에게는 한편으로 자원봉사를 독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보완책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활동하는 분들이 대부분 젊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라도 늦은 감은 있지만 준비해야 할 시기가 되었어요. 실제로 오래 활동한 80대 활동가가 '30년 전에 스님이 늙으면 같이 살자고 하셔서 정말 열심히 활동했는데, 지금 연로한 정토행자들이 같이 모여 살 곳이 있나요?' 하며 하소연하는 분들도 있어요.

앞으로 온라인 중심의 활동을 보완할 수 있는 오프라인 기반을 정토회 전체 차원에서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습니다. 오프라인 보완이 왜 필요한지, 또 어떻게 준비해 나갈 것인지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 충분히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시설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필요한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가자는 뜻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시고 건강도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파 보니까 안 아픈 게 제일입니다. 아프다고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썩 좋은 일은 아니에요. 그러니 건강에 유의하시고, 너무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우리는 오래가야 합니다.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오래갈 수 있는 관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후 사홍서원으로 3박 4일간의 공동체 법사단 수련을 마무리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수련에 참여했던 법사님들도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법사님들은 대청소를 하고, 각자 처소로 이동할 짐을 미리 다 쌌습니다. 아침 울력 때 미처 다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있어서 오후에 다시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텃밭 팀은 상추씨를 뿌렸고, 논둑 팀은 오전에 봉사자가 베어 놓은 대나무들을 트럭에 싣는 울력을 했습니다.

스님도 울력복으로 갈아입고, 사다리를 이용해서 키보다 높은 위치의 대나무들을 자동 전지가위로 잘랐습니다. 어제 스님이 처음 작업한 이후로 훨씬 많은 대나무가 정리되었고, 논으로 기울어진 그늘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무변심 법사님이 사다리를 잡아드리면, 스님은 사다리에 올라가서 팔을 높이 뻗어 대나무를 잘랐고, 자른 대나무가 쓰러지면 묘덕 법사님이 대나무를 받아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법사님들도 쓰러진 대나무들을 모아서 논둑길에서 빼낸 뒤 트럭에 싣는 작업을 함께했습니다.

스님은 어제 대나무를 베어낸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쪼그려 앉아서 자동 전지가위로 정리가 필요한 곳의 대나무를 잘랐습니다.

오후 작업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었습니다. 옆 논에서는 농사팀이 이앙기로 모내기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갑자기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에 땀을 흘렸습니다. 대나무 정리는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많은 양을 해냈습니다. 베어낸 대나무를 트럭으로 두 번씩 실어 나르며 두북수련원으로 모두 이동시켰습니다.

오후 3시 30분이 되었습니다. 법사님들은 이제 각자 처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스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수련원으로 가서 짐을 싣고 간단히 정비를 마친 다음, 승합차를 타고 각자의 처소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땀에 젖은 울력복을 갈아입고 오후 4시 30분쯤 두북 수련원에서 여러 업무를 보았습니다. 이후 저녁에는 식사 후 휴식을 취하며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 오전에는 사전 투표를 하고, 이어서 병원 진료와 문상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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