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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도 성지순례 여섯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라즈기르(Rajgir)를 순례하는 날입니다.

라즈기르는 고대 마가다국의 수도로, 당시에는 ‘라자그라하(Rājagṛha)’라 불렸으며 한문으로는 왕사성(王舍城)이라고 표기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성도하신 뒤 사르나트로 이동하여 첫 설법을 하시고, 이후 다시 라즈기르로 오셨습니다. 이곳에서 그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라즈기르는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성지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라즈기르를 찾았을 때 빔비사라 왕이 마중 나왔던 장소인 제띠안(Jethian),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 등 수많은 대승 경전을 설하셨던 영축산,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 부처님 입멸 후 그 가르침을 결집한 장소인 칠엽굴을 방문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새벽 3시 40분에 기상하여 4시 10분부터 짐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탑승을 마친 버스부터 차례로 라즈기르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새벽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버스는 약 1시간 30분을 달려 6시 20분, 왕사성에서 서쪽으로 약 14km 떨어진 제띠안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넓은 공터에 버스를 세우고, 스님과 순례단은 어두운 마을 길을 걸어 제띠안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직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순례단은 조용히 이동했습니다.


제띠안에 도착할 즈음, 마침내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순례단은 지팡이 손잡이처럼 크게 휘어진 길 위에 자리 잡았고, 스님은 제띠안 탑 터가 있는 언덕 위에 올라섰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스님은 제띠안에서 있었던 빔비사라왕과 부처님의 역사적인 만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성 서쪽 문에서 약 14km 떨어진 이곳, 제띠안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기다렸다고 전해집니다. 경전에는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부처님께서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국사(國師)에 가까운 존재였던 우루벨라가섭을 맞이하기 위해 나왔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당시 우루벨라가섭은 1,000명의 수행자를 이끄는 지도자로, 마가다국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우루벨라가섭이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으로 오자, 빔비사라왕 역시 1,00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예법에 따라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두 무리가 이곳에서 만나 자리를 잡자, 왕과 대신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생겼습니다.
‘젊은 수행자 고타마가 팔십이 넘은 노승 우루벨라가섭의 스승이라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의구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자, 빔비사라왕은 우루벨라가섭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대사문이시여, 소문에 따르면 대사문께서 젊은 수행자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더군요. 사실입니까? 이는 마치 세 살 된 아이가 팔십 노인을 두고 “이는 내 손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선뜻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우루벨라가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세 바퀴 돌며 예를 올린 뒤,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며 말했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시며,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으나, 이분을 만난 뒤 그 씨앗을 버리고 해탈을 얻었습니다.’
이 고백을 듣는 순간, 대중의 의심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이분이 우루벨라가섭의 스승이구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법을 청해 설법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지혜의 눈을 떴습니다. 왕의 마음은 맑아지고 가벼워졌습니다. 이어 왕은 자신의 소원을 고백했습니다.
‘제가 왕자 시절 다섯 가지 소원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왕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제가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었고,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는 그 설법을 듣고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다섯 가지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부디 왕궁에 드셔서 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왕의 청을 조용히 거절하셨습니다. 왕은 부처님과 대중이 머물 수 있는 적절한 곳을 고민하다가, 자신이 아끼던 성밖에 있는 대나무 숲을 떠올렸습니다. 도성과 너무 가깝지 않아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탁발을 하기에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왕은 다시 부처님께 청했습니다.
‘북문 밖에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머무르시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후 부처님과 대중은 왕사성 북문 밖 대나무 숲, 베누반 비하르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오늘날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죽림정사가 바로 이곳입니다.”

법문이 끝난 뒤 스님과 순례단은 잠시 명상을 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제띠안에서 내려와 주차장에 이르니 어느새 어둠은 완전히 걷히고 하늘이 환하게 밝아 있었습니다. 7시 30분에 제띠안을 떠나 영축산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에 계실 때 주로 영축산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래서 영축산은 중요한 법문이 다수 설해진 곳이자, 대승 불교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장소입니다.

순례단은 버스를 타고 왕사성 남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터와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바카의 망고 동산을 지나 아침 8시 30분 영축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순례단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아난존자의 굴, 사리불 존자의 굴이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이윽고 영축산 정상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늘 순례객들로 가득하지만, 오늘은 이른 시간이라 조금 한적한 편이었습니다. 스님은 영축산 정상을 참배하기 전에 순례단에게 안내했습니다.

“영축산은 세계 여러 불자가 많이 찾는 성지입니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장소는 저 위에 있는 공간인데 매우 좁습니다. 우리는 한 번 자리 잡으면 오래 머무르는 편이잖아요(웃음). 오백 명이 한꺼번에 올라가면 다른 순례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질서를 지켜 한 줄로 올라갔다가 삼배만 드리고 바로 내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순례단은 질서 있게 정상을 참배하고 내려와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던 곳 아래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은 부처님 당시에 이곳 영축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1년을 하루하루 기록한 경전입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이르는 여정의 출발지가 바로 이곳 영축산입니다.
부처님이 영축산에 머무르실 무렵, 마가다국에서는 빔비사라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아자타사투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자타사투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인물입니다. 빔비사라왕을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인 뒤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부처님을 좋게 여기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의 행위를 깊이 참회하고 부처님을 열렬히 지지하게 됩니다.

어느 날 아자타사투왕은 바이샬리의 밧지족을 침공하려 하면서, 전쟁에 승산이 있는지를 부처님께 여쭙고자 대신을 보냅니다. 부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니, 그 판단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신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왕의 안부를 전한 뒤, 침공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대신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시고, 아난다를 불러 물으셨습니다.
‘아난다야, 내가 예전에 밧지족의 영지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자주 모여 의논한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그러한가?’
아난다가 대답했습니다.
‘지금도 자주 모여 의논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밧지족은 의논을 거쳐 결론이 나면 모두 의기투합한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그러한가?’
아난다가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합니다.’

밧지족은 독선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함께 논의해 결론을 냈습니다. 민주적인 방식의 약점은 의견이 갈릴 경우 분열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인데, 밧지족은 결론이 나면 모두 힘을 모아 실행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아난다에게 일곱 가지를 물으셨고, 밧지족은 그 일곱 가지를 모두 잘 지키고 있다는 답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잘 지키는 한, 번영이 있을 뿐 쇠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대신은 판단하게 됩니다. 한 가지만 지켜도 쉽지 않은데, 일곱 가지를 모두 지키고 있다면, 비록 나라가 작더라도 무력으로 침공해 이기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대신은 부처님께 밧지족을 힘으로 제압하기는 어렵겠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한 뒤 돌아갑니다.

이 일화에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인 갈등에 대해서 직접 해결하기보다는 갈등이 무익함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 설법을 듣고 아자타사투왕이 전쟁을 일으키려던 계획을 접었다는 점에서, 평화를 지켜내는 힘을 지닌 가르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을 보면, 이후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아난다여, 대중을 죽림정사로 모아라.’
부처님께서는 죽림정사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상가가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을 설하십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조건을 설한 데 이어, 수행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원칙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영축산에서 출발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법을 설하셨습니다. 열반경의 여정이 시작되는 첫 장소가 바로 이곳 그리드라쿠타, 즉 영축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불자들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성지 설명을 마친 후 순례단은 경전 독송, 예불,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축원을 올렸습니다.


축원을 마친 후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영축산 참배를 마치고 순례단은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죽림정사는 부처님 당시 승가 공동체가 머물렀던 최초의 사원입니다. 오전 11시 30분,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이어진 일정에 모두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먼저 도시락으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은 부처님 당시에 이곳 죽림정사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대중 1,000여 명과 함께 이곳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대중이 많다 보니 아침마다 성 안으로 들어가 탁발을 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 육사외도 가운데 산자야를 중심으로 한 회의론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질문에도 확정적인 답을 내리지 않고, ‘알 수 없다’, ‘단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며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한계 또한 지니고 있었습니다.
산자야에게는 두 명의 뛰어난 상수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나란다 지역 출신으로, 모두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산자야의 제자가 되어 오랫동안 수행한 끝에, 각각 100명에 이르는 제자를 거느린 큰 스승이 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친구로, 좋은 깨달음의 소식이 있으면 혼자만 알지 않고 반드시 서로 나누자고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어느 날 사리푸트라가 길을 가다가 발우를 들고 조용히 걸어오는 앗사지 비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한눈을 팔지도 않은 채 오직 전방의 땅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 여법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리푸트라는 앗사지 비구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며,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앗사지 비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고타마 붓다의 제자입니다.’

사리푸트라는 그를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 물었는데, 앗사지 비구는 자신이 붓다의 제자임을 밝히며 겸손하게 답한 것입니다. 사리푸트라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스승인 붓다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앗사지 비구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저보다 붓다께 직접 가서 여쭙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자 사리푸트라가 간청했습니다.
‘그렇다면 스승에게서 들은 말씀 가운데 단 한 가지만이라도 들려주십시오.’
그때 앗사지 비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스승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집니다. 마치 볏단 두 개가 서로 의지해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앗사지 비구는 이렇게 연기법을 전해 주었습니다. 연기법은 인도의 기존 사상에는 없던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리푸트라는 그동안 어떤 철학이든 모두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단정하지 않는 대신, 마음에 분명히 잡히는 것이 없다는 아쉬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기법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리푸트라는 부처님께서 북문 밖 죽림정사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곧바로 혼자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좋은 소식은 반드시 친구인 목갈리나와 나누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수행 도량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리푸트라가 돌아오자, 목갈리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구나. 네 얼굴이 아주 환하다.’
사리푸트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는 길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참으로 위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우리 함께 가 보자.’
사리푸트라에게서 가르침의 내용을 듣는 순간, 목갈리나의 마음도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들을 이끌고 길을 나서며, 스승인 산자야도 함께 모시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산자야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위대한 스승이 나타났으니 함께 가서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러나 산자야는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말일 뿐이다.’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두 제자는 작별 인사를 하고 스승 곁을 떠났습니다. 이후 산자야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자신의 수제자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데서 받은 심리적 충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각각 100명의 제자를 이끌고 부처님께 나아가 법을 청했습니다. 법을 듣고 법의 눈이 열려 출가하였고, 마침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대중 1,000여 명에 이들이 더해져 출가 대중은 모두 1,250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이 붓다의 초기 핵심 제자들이며 훗날 ‘대비구’라 불리게 되는 대장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설명을 마친 후 경전을 독송하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위대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목갈리나 존자는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부터 이미 신통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 종교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통력을 지닌 수행자로 손꼽혔고, 불교 교단을 해치려던 사람들조차도 목갈리나를 두려워해 감히 해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그의 신통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극심한 가뭄이 들어 대중이 모두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비구들이 걸식을 나가도 음식을 얻지 못해 수행 공동체 전체가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목갈리나가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신통력으로 북쪽에 있는 야생 쌀이 나는 곳으로 날아가 먹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갈리나여, 네가 지금 그렇게 하면 당장은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비구들이 굶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목갈리나는 수행이 뛰어나 신통으로 다 해결했는데, 저 비구들은 수행이 부족해 굶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행이 신통으로 오해받게 된다. 다른 비구들을 생각해라.’
목갈리나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비구들을 데리고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 미래의 비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신통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신통은 오히려 사람들을 현혹시켜 더 어리석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통에 의지하는 것은 불법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 일화는 목갈리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세월이 흐르자 이교도들은 목갈리나가 더 이상 신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를 해쳤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테러를 당한 셈입니다. 그러나 목갈리나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끝내 신통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얼마나 철저히 지켰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후대에 이르러 목갈리나 존자의 이름을 빌린 ‘목련존자’가 대승 불교 경전에 등장합니다. 이 인물은 온갖 신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존재로 재해석되어, 대승 불교 경전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는 이야기 또한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로서의 목갈리나, 곧 목련존자는 신통을 사용하지 않았던 수행자였습니다.

마하가섭 존자는 가장 고귀한 계급 출신으로, 왕보다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게다가 늦게 얻은 외동아들이었으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겠습니까. 그런 그가 출가했다고 해서, 출가 이전에 몸에 밴 습관들이 단번에 사라졌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집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걸식을 마치고 돌아와 식사를 하시다가, 마하가섭 존자를 보시고 그의 옷자락을 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존자여, 옷이 참 좋구려.’

그 말을 듣고 마하가섭 존자가 자신의 옷을 살펴보니, 무려 천금의 값이 나가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수행자의 옷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출가하여 고행림에서 수행하던 이들은 분소의를 걸쳤지만, 마하가섭처럼 집에서 곧바로 출가한 사람들은 출가할 때 입고 나온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하가섭 존자는 나름대로는 허름하다고 여긴 옷을 입고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유한 집안에서 마련한 옷이었기에, 결과적으로는 매우 값비싼 옷이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마하가섭 존자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옷을 벗어 부처님께 올리고, 대신 부처님께서 입고 계시던 누더기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마하가섭 존자의 생활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가장 거친 음식을 조금만 먹었고, 옷은 오직 분소의만 입었으며, 잠도 나무 아래나 동굴 속에서 자는 고행자의 생활 원칙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 결과 수행자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지저분해 보일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마하가섭 존자는 ‘두타(頭陀)’, 즉 가장 검소하고 고행적으로 사는 수행자의 전형으로 불리게 되었고,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단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카르마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여기서 ‘옷’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의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귀한 집안에서 자라며 몸에 밴 삶의 태도와 생활 습관을 뜻합니다. 생각으로는 이미 수행자가 되었지만, 몸에 배어 있는 삶의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옷’을 통해 일깨워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제자가 또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아니룻다 존자입니다. 한문으로는 아나율(阿那律)이라 부르며, 석가족 출신으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니룻다 존자가 법문을 듣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잠이 부족하구나.’
이 말씀을 들은 아니룻다 존자는 크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날 이후 잠을 자지 않고 용맹 정진을 하다가 결국 눈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의사 지바카가 진찰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병은 어떤 약으로도 낫지 않습니다. 반드시 잠을 자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아니룻다를 불러 타이르셨습니다.
‘졸지 말라는 것이지,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아니룻다 존자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대신 하늘의 눈을 얻었다 하여, 아니룻다 존자는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 일화를 보면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받았을 때, 그 말을 흘려듣지 않고 삶 전체를 바꾸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 가르침을 평생의 수행 지침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법문을 마친 뒤, 스님은 대중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예불문의 뜻은 잘 모르면서 예불을 하면 몸만 땅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요.”
스님은 이어서 예불문의 뜻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오후 2시 50분에 칠엽굴로 출발했습니다.

3시 30분, 순례단은 칠엽굴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막 올라가려는 순간, 입구를 지키던 경찰이 길을 막았습니다.
“지금 올라가시면 늦습니다. 칠엽굴은 오후 3시 이후에는 입장이 안 되며 5시까지는 모두 내려와야 합니다.”
“순례객들과 함께 왔습니다. 지금 올라갔다가 5시 전에는 반드시 내려오겠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안내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내려오겠습니다.”
경찰은 잠시 고민하더니, 5시 전에 칠엽굴 아래까지 도착하는 것을 조건으로 출입을 허락했습니다.
칠엽굴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습니다. 스님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점점 가빠졌습니다. 스님은 일곱 번이나 멈춰 서서 쉬어야 했습니다.


스님이 순례단보다 먼저 출발했지만, 이내 하나둘 스님을 앞질러 올라갔습니다. 먼저 도착한 이들부터 정상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순례객들이 오갈 수 있도록 통로를 남겨 두고, 500명의 순례단은 차례로 도착해 칠엽굴 앞에 빼곡하게 앉았습니다.

스님도 칠엽굴에 도착해 숨을 고른 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 제1차 결집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부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결집했다고 전해지는 칠엽굴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순례단 500명이 모여 있는데, 당시 걸식을 하던 비구들의 체구는 우리보다 훨씬 작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500명이 앉고도 남을 만한 곳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대중은 모두 큰 스승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일부 젊은 승려들 사이에서 ‘늙은 영감이 없으니 이제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겠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하가섭 존자는 크게 우려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이 나온다면,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는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들은 제자들을 모아,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결집입니다.

문제는 ‘누가 결집에 참여할 것인가’였습니다.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은 수만 명에 이르렀지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인원은 많아야 50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1결집에는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인정되는 이들만 참여하도록 기준을 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인원이 5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다 존자는 그때까지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해 처음에는 결집에 참여 자격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7일 동안 용맹 정진한 끝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결집을 시작하기 전 날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제1결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인 경(經)의 초안은,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가까이에서 많이 들었던 아난다 존자가 맡기로 했습니다. 또 승가가 지켜야 할 규범인 율(律)의 초안은 우팔리가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되었습니다. 결집 전체를 이끄는 사회는 마하가섭 존자가 맡았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읊은 경의 초안은 한문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법문을 들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단정하기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육하원칙에 따라 하나하나 분명히 밝히며 전했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금강경을 보아도,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그때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드렸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라는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당시 아난다가 읊은 법문은 목소리와 리듬, 내용이 부처님의 실제 설법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를 들은 대중은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난다가 성불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다시 살아오신 것인가?’, ‘다른 곳에 계신 부처님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인가?’라고 느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대중 500명이 아난다의 설법을 모두 함께 듣고, 그 내용에 이의가 없으면 그 내용은 경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만약 빠진 부분이 있거나, 다른 자리에서 들은 내용이 섞였다고 판단되면 대중은 이의를 제기했고,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나의 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집 방식은 다른 종교의 경전 형성과 비교해 보아도 매우 엄밀한 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약 100년이 지난 후, 각 복음서 저자들이 전해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불교 경전은 부처님의 열반 직후, 직접 법문을 들은 500명이 한자리에 모여 전원 합의로 내용을 확정했습니다. 당시에는 글로 기록하지 않고, 대중이 함께 암송하는 방식으로 경을 만들었습니다.
결집은 석 달 동안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승려들은 탁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자타사투왕이 공양을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경장(수트라)과 율장(비나야)이 정리되었습니다. 논장은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뒤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의 열반 이후 불교가 본격적으로 출발한 곳이 바로 이 칠엽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성지 설명을 마치고 순례단에게 안내했습니다.

“칠엽굴은 여기까지 설명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산 아래에서 입구를 경비하는 경찰에게 오후 5시 전까지는 모두 데리고 내려가겠다고 약속을 했어요.(웃음) 자리를 정돈해서 내려갈 준비를 합시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동굴 내부와 외부를 다니며 남은 인원이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자,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 어서 나오세요.”
동굴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왔습니다.
“이제 내려갑시다. 모두 저보다 앞장서서 이동하세요.”


순례단은 빠르게 칠엽굴을 내려왔습니다. 약속대로 5시 전에 산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약속 지켰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웃음)."

스님은 경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 나란다 지역에 있는 태국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도착하자마자 법당을 참배하고,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오늘은 저녁 프로그램 없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최초의 여성 출가지인 바이샬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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