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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도 성지순례 일곱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순례단은 최초의 여성 출가가 이루어졌고,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일화로 유명한 바이샬리(Vaishali)로 향했습니다.

바이샬리는 전제 왕권 체제가 확립된 마가다국과는 달리, 귀족들의 민주적 정치체제가 형성된 도시입니다. 이곳은 평등과 개방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부처님께서 라즈기르에서 교단의 기반을 다지셨다면, 바이샬리에서는 성별과 신분, 직업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전법을 행하셨습니다.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시고 유녀 암나팔리를 제자로 받아들이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새벽 5시,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라즈기르를 떠나 바이샬리로 출발했습니다. 어둠을 가르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새벽 수행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매년 인도 성지순례를 올 때마다 도로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만큼 차량도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새벽 6시 30분쯤부터는 도로가 점점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약 4시간을 달려 오전 9시, 바이샬리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미리 준비한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하고, 오전 10시에 진신사리탑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은 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8등분하여 최초로 탑을 쌓을 때 릿챠비족이 나눠 받은 사리를 모신 곳입니다. 스님은 먼저 탑을 돌며 참배를 하고, 행사팀과 준비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순례단이 모두 도착해 탑 앞에 자리를 잡고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이 끝나자 스님은 바이샬리에서 암나팔리가 부처님을 초대하고 그 약속을 지켜낸 이야기를 통해 깨달음이 사람의 삶과 태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인도 역사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도시, 바이샬리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기생을 꼽자면 황진이를 이야기하듯이, 인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은 암나팔리입니다. '암나'는 망고라는 뜻이고 '팔리'는 밑이라는 뜻인데, 망고나무 밑에 버려진 아이여서 암나팔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여인은 천하제일의 미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여러 나라의 왕자들과 장자의 아들들이 암나팔리를 만나는 것을 꿈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해요. 그만큼 유명했고 재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암나팔리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부처님과 그 일행에게 공양을 올리고자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권을 두고 그 지역의 지배계층이었던 릿챠비족 왕자들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왕자들은 암나팔리에게 금 십만 냥을 줄 테니 초대권을 넘기라고 제안했지만, 암나팔리는 '바이샬리 전체를 다 준다 해도 넘기지 않겠다'며 단호히 거절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몸을 팔던 기생이었지만, 깨달음의 눈이 열리자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왕자들은 직접 부처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식사 초대를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암나팔리와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보면 초대권을 끝내 넘기지 않은 암나팔리도 대단하지만, 유녀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족의 초대를 거절한 부처님 역시 참 대단합니다. 이후 암나팔리는 자신의 망고동산과 상당한 재산을 부처님과 상가에 기증해 절을 세웠는데, 그것이 훗날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절로 알려진 중각강당(重閣講堂)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한 후 진신사리탑을 향해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친 뒤, 순례단은 탑돌이에 나섰습니다. 스님은 인원이 많아 모두가 동시에 돌기는 어렵다며, 한 줄로 탑을 돌고, 나머지 사람들은 탑을 바라보며 108배를 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스님의 발걸음을 따라 오백여 명의 순례단이 차례로 탑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사람들은 108배 절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탑돌이를 마친 뒤, 스님은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 무엇이 부처님의 진짜 법인지를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0년, 50년, 100년, 200년이 지난 뒤 누군가가 나타나 ‘이것이 부처님의 진짜 법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할까요?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듣고, 이미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내용이 일치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배격해야 합니다.
이미 전해진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핵심은 연기법과 중도입니다. 그리고 또 그 가르침이 사성제와 팔정도에 합치하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연기법과 중도의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연기법과 중도의 관점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스님의 법문이든, 어떤 학자의 주장이든 쉽게 헷갈리지 않게 됩니다. 그 말과 사상이 중도의 입장에 서 있는지, 연기법에 부합하는지를 살피는 관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대중에게 한가지 안내 사항을 전했습니다.

“지금 성지순례에 함께하고 계신 분들 중에 한 부부가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그 분의 어머니께서 임종하셨습니다. 두 분은 오늘 일정까지만 함께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입니다. 마침 우리가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탑 앞에 와 있으니, 다 함께 영가를 천도하는 천도재를 봉행하겠습니다.”
대중은 합장하고 마음을 모아 함께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천도재를 마친 뒤, 두 분은 순례단을 향해 삼배로 깊은 감사를 전했습니다.


12시 30분, 순례단은 진신사리탑을 떠나 원후봉밀터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1시, 성지에 도착하자 붉은 벽돌로 봉긋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탑과 하늘 높이 솟은 사자석주가 어우러진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탑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이 끝나고 스님은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이 어떻게 독립된 수행자로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비구니 승가의 탄생이 지닌 역사적·사상적 의미를 차분히 짚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바로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렸다고 전해지는 기념탑이 있는 원후봉밀터입니다. 이곳은 비구니가 처음으로 계를 받고 수행자가 된 장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 여섯 해가 지나 카필라성을 방문해 설법을 하셨을 때, 많은 석가족 젊은이들이 출가했습니다. 그때 아난다 존자, 데바닷타 존자, 아니룻다 존자, 우팔리 존자도 함께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여성 출가자가 없었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존재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노비가 출가하려면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종이나 노예 신분이었던 천민도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독립된 인격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천민 가운데서도 출가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주인과 분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나 딸로 불렸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주인이었고, 결혼하면 남편이,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삼종지도라 부릅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까지 호주제도가 있었고, 호적에 아비부·남편부·아들자라고 적었습니다. 이 제도는 김대중 대통령 때 폐지되었습니다.

부처님 성도 후 약 스무 해쯤 지나 아버지 정반왕이 돌아가셨습니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부처님의 어머니와 아내는 직계 남성 보호자가 없는, 이른바 주인 없는 여성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주인 없는 여성은 마치 야생동물을 잡듯이 붙잡혀 갔습니다. 이런 여성들이 석가족 가운데 약 오백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정반왕의 장례를 마친 뒤, 부처님의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부처님께 ‘여성도 출가해 수행하며 살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승낙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도에서는 세 번 청하면 받아들이는 관습이 있었지만, 부처님은 세 번의 청을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그 뒤 부처님께서 이곳 바이샬리로 오셨는데, 여성들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맨발로 흙투성이가 된 채 오백 명이 따라왔습니다. 이처럼 여성들이 강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이 속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바이샬리에서 다시 청했지만, 부처님은 여전히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완전히 낙담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처님을 길러온 마하파자파티의 공덕을 말씀드리며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 세상 어떤 공덕보다도 마하파자파티가 나에게 지은 공덕보다 큰 공덕은 없다'는 점을 헤아리시어 마침내 여성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여덟 가지 조건을 내거셨는데, 이것이 이른바 팔경법입니다. 아무리 연륜이 깊은 비구니라도 막 출가한 비구에게 예를 올려야 한다거나, 비구를 헐뜯지 말라는 내용들입니다. 여성들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이 여덟 가지는 분명히 여성 차별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보면, 조건의 내용보다도 여성 출가 자체가 허용되었다는 점이 훨씬 중요합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차별이지만, 역사 속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부처님께서 이런 조건을 직접 붙이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경전 어디에도 조건부 허용이라는 형식은 나오지 않습니다. 후대에 형성된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건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는 점입니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세 번 거절하셨는데, 이는 본래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아난다 존자가 나서서 간곡히 청해서 부처님이 허용하셨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좌부 전통에서 훗날 비구니 제도를 폐지할 때, ‘본래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난다의 간청으로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그러므로 폐지하는 게 맞다’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이런 서술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담마의 원리로 보면, 부처님께서 허용하신 이상 비구니 제도는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태국과 미얀마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구니 제도가 사라진 뒤에 이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불교사 안에는 비구니 전통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에서는 스스로 비구니가 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수용되고 있습니다. 태국은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지만 일부는 비구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법적·사회적으로 모두 인정되지 않으며, 비구니가 가사를 걸치면 강제로 벗기거나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현재는 사실상 비구니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여성 출가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출가하여 독립된 존재로 서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장로 비구니가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깨달음의 노래를 읽어보면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명이 끝나고 잠시 명상을 한 후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경전 독송 후에는 모두 함께 ‘행복을 주는 사람’, ‘행복의 나라’ 두 곡을 합창했습니다.

이어서 꿀공양을 겸한 탑돌이가 진행되었습니다. 꿀공양은 옛날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인연을 재현한 의식입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순례단은 너른 공터로 나아가 식빵 두 조각과 꿀을 발우에 받아 들고, 천천히 탑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노란 가사 물결이 원후봉밀터의 붉은 벽돌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습니다.




탑돌이를 마친 순례단은 자리로 돌아와 발우를 앞에 두고 앉았습니다. 모든 인원이 탑돌이를 마치자 스님이 안내했습니다.
“발우는 중앙에 가지런히 놓으시기 바랍니다. 탑을 바라보며 예참을 드리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겠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탑을 향해 예참을 올리고 반야심경을 함께 봉독했습니다.


이어서 함께 공양게송을 독송했습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 짜는 이의 피땀이 서려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일체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식빵 두 조각에 꿀 한 숟가락이었지만,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옛 이야기를 떠올리며 먹으니 한층 더 뜻깊게 느껴졌습니다.

공양을 마친 뒤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법문을 마친 뒤, 스님은 원후봉밀터를 배경으로 조별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500명을 나누다 보니 약 80개 조가 되었습니다.

오후 4시에는 즉문즉설 생방송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방송 30분 전까지 모든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가까스로 방송 시작 5분 전에 바이샬리에 있는 작은 호텔 방에 도착했습니다.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려면 인터넷이 잘 되는 공간으로 가야 해서 ‘바이샬리 레지던시’라는 작은 호텔에 방을 하나 빌렸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4시, 한국 시각으로 저녁 7시 30분이 되자 3200여 명이 유튜브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인도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근황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희 500여 대중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 중입니다. 침낭 하나 메고, 밥통 하나 들고서 각자 밥을 해 먹으며 순례자 숙소에서 잠을 자고 다닙니다. 호텔이나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검소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이 스님에게 차례대로 질문을 했습니다. 40분 동안 세 명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말기 암 환자인 남편을 곁에서 돌보며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과 죄책감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편이 심각한 말기 암 환자입니다. 저는 이 상황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 뜨는 게 무섭고 힘이 듭니다. 의사를 잘못 만난 것도 속상하고, 제가 다 잘못해서 남편이 아픈 것 같은 자책감도 듭니다. 요리에 소질이 없어서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못 해주는 것도 스트레스입니다. 저는 불안과 초조함이 많고 성격이 급하고 쉽게 놀라는 성격인데, 그래서 남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파하는 남편이 너무 가엾고, 남편과 제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 일을 겪는가 싶기도 합니다. 법륜스님의 말씀대로 부처님께 감사 기도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남편을 살려주세요. 10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이렇게 빌게 됩니다.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암담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너무 무기력하고 힘이 안 납니다. 자녀가 셋이라서 앞으로 10년은 더 일해야 하는데, 이 불안한 정신으로 잘 버틸 수 있을지도 걱정됩니다.”
“네, 어려움에 처해 있군요. 질문자는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남편만 돌보고 있습니까?”
“생활을 해야 해서 좋은 직장은 아니지만 다니고 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질문자 본인 건강도 썩 좋아 보이지 않네요. 남편도 아프고 자녀가 셋이나 있어서 걱정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말기 암 환자인데 병원에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 하던가요?”
“병원에서 말은 안 해주지만 제가 봐서는 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척추에 철심을 네 개나 박았고, 오늘부터 재활을 한다고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몸에 마비가 오고 골반 쪽에도 암이 있어서 잘 걷지도 못하고, 통증이 심해 앉거나 누워만 있는 상태입니다. 딸이 옆에서 간호하고 있고, 제가 쉬는 날에는 제가 가서 돌보고 있습니다. 상황을 봐서 방사선 치료를 하거나 다른 약으로 바꿔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아픈 남편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할 것이고, 가족들 역시 가능한 모든 치료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마음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럴 때일수록 한 번은 조금 차분하게,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암이 전신으로 퍼진 말기 상태라면, 의사들 역시 생존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이 무책임한 것도 아니고, 치료를 권하는 것이 돈 때문도 아닙니다. 의사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끝까지 치료를 시도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호흡기를 달거나 심장에 전기 충격을 주는 것도, 환자가 잠시라도 더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에는, 이러한 의료 행위가 생명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기보다는 하루나 한 달 정도를 연장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을 ‘연명치료’라고 합니다. 이때 의사는 보호자에게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본인이 건강할 때, 의식이 없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경우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미리 등록해 두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회복 가능성이 낮은 수술을 억지로 진행하는 경우를 보면, 마음은 아프지만 저는 그런 치료는 받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회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조금 더 편안하게 지내시도록 돕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방사선 치료나 항암 치료는 환자에게 상당한 고통을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사와 충분히 상의해 회복 가능성이 있다면 비용이 들더라도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겠지만, 회복 가능성 없이 단지 연명을 위한 치료라면 환자도 괴롭고 가족들도 지치게 됩니다. 질문자의 남편이 말기 암 환자라고 하기에, 이런 점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에만 끌려 결정하기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회복 가능성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보고, 그렇지 않다면 가족끼리 차분히 의논해 보기를 권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환자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온 가족이 모두 매달리다 보면, 결국 가족 전체가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환자도 물론 중요하지만,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 역시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질문자 역시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태로 보입니다. 남편 문제에만 모든 마음을 쏟기보다는, 질문자 자신을 위해 정신과 상담이나 치료를 받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마음이 매우 예민해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먼저 무너지지 않도록 내 건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남편을 돕는 길이기도 합니다.”
“혹시 기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도는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어떻게든 꼭 살려야 합니다’라는 기도보다는, ‘당신을 만나 아이도 낳고 함께 살아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남편을 바라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너를 만나서 내가 죽을 고생을 했다. 거기다 몸까지 아파서 나를 힘들게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남편만 괴로운 게 아니라 나 자신까지 불행해집니다. 그보다는 ‘그동안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내는 쪽이 낫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늘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나는 지금 편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런저런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살아 있지 않습니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괜찮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오늘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편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향해서도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 사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여보,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성격이 급하고 걱정이 많은 편인데, 스님 말씀처럼 ‘나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남편에게도 감사 기도를 하겠습니다.”
“사람 마음이 살아 있을 때는 나쁜 것만 자꾸 떠올리다가, 헤어지거나 돌아가시고 나면 고마웠던 일만 남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살아 있을 때 좋은 마음을 내는 겁니다. 살아 계실 때부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내야, 돌아가신 뒤에 미련이 남지 않습니다. 만약 미련이 남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살아 계실 때 하루를 함께 보내더라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게 좋습니다. 나도 살기 힘든데 억지로 뭘 더 잘해 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려 들지 말고,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남는 인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남편뿐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해서도 이렇게 마음을 내보세요.‘이렇게 살면 됐다. 특별한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산에 토끼도 잘 살고, 다람쥐도 잘 살고, 모두 제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밥 먹고 살면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덜 긴장되고 훨씬 편안해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야 그다음 일들도 풀려 나갑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는 ‘저는 잘살고 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자기 긍정을 해주고, 남편을 향해서는 ‘저를 만나 함께 살아줘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를 하면, 질문자의 마음이 한결 안정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오후 5시가 되어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이샬리에서 이틀 동안 스님을 호위해준 경찰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스님, 내일 쿠시나가르로 이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비하르주 소속 바이샬리 경찰이라, 내일 오전까지 주 경계까지만 호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틀 동안 감사했습니다.”
“천만에요. 스님을 모실 수 있어 대단히 영광이었습니다. 남은 순례 일정도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스님은 숙소에 도착해 저녁 공양을 하고 저녁 7시에 순례단과 함께 바이샬리 왕궁터로 향했습니다.

왕궁터에 도착한 순례단은 개인 조명을 모두 껐습니다. 은은한 달빛에 의지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리가 만들어지자 호차별 장기자랑이 이어졌습니다.

한 참가자는 '나는 괜찮아'라는 노래를 개사해 불렀습니다. '내가 나이 들어 보여도 괜찮고, 며칠 있다 돌아갈 거니 괜찮다'는 메시지를 담아 집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노래였습니다. 왕궁터는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다함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습니다. 국제국 회원들은 각 나라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서투른 솜씨로 전라도 전통요를 불러 웃음을 선사한 이도 있었습니다.

오랜 침묵에 잠겨 있던 왕궁터가 정토행자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으로 채워졌습니다. 밤 9시,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 도시락을 싸두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를 순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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