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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김장 울력을 마친 공동체지부 대중과 가을 나들이를 한 후 부산에서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7시 30분부터 공동체 대중과 함께 울력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고인돌 옆 200평 밭으로 향했습니다. 엊그제 김장에 사용할 배추를 모두 수확한 후 서울로 가져갈 배추를 쌓아 두었습니다. 이 배추는 서울 공동체 대중이 먹을 수 있게 서울로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먼저 서울에 가져갈 330개의 배추를 트럭에 실었습니다. 톤백에 배추를 차곡차곡 담고, 빈 공간에 남은 무와 이번에 담은 김치도 빈틈없이 실었습니다.


트럭을 출발시키고 이어서 두북수련원에서 사용할 배추 30포기를 수확해서 봉고차에 실었습니다.


밭에는 크기가 작거나 속이 차지 않은 배추들만 남겨 두었습니다.
“이 배추들은 그냥 두세요. 겨울에 쌈 싸 먹으면 돼요.”

밭을 나온 스님은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텃밭에 심은 배추가 50포기 정도 되는데 아주 싱싱하게 잘 자라 있었습니다. 봉고차에 실어 온 배추 30포기를 옮기고, 텃밭 배추 중 20포기도 더 수확했습니다.


총 50포기는 오늘 김장을 하고 남은 양념으로 김치를 더 담기로 하고 울력을 모두 마쳤습니다.


한편 일부 행자들은 비닐하우스로 가서 고추를 수확했습니다. 곧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고추가 모두 상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고추를 수확해야 한다며 농사팀에서 급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10여 명이 비닐하우스로 가서 고추 수확을 도왔습니다.

김장을 했던 창고를 뒷정리하는 일까지 마무리한 후 오전 9시 30분에 울력을 모두 마쳤습니다.

간단하게 세면을 한 후 오전 10시에는 스님과 함께 경주 남산으로 공동체 가을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백일법문을 하느라 공동체 나들이를 못 갔습니다. 하반기에도 스님의 해외 일정이 계속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다가 김장 울력을 끝내고 하루 더 시간을 내어서 공동체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경애왕릉 앞에 내려서 경주 남산 둘레길을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대중이 송수신기를 착용하자 스님이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저처럼 다리가 아파서 산에 못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평지로 이어지는 경주 남산의 둘레길을 걸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출발하면 삼불사, 포석정을 지나 경주 남산의 동편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어요. 고개를 오르면 산속에 완만한 경사의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천천히 걸어가 봅시다.”
소나무 숲에 들어서자 경애왕릉이 나타났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경애왕은 신라 말에 견훤한테 죽임을 당했습니다.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견훤한테 습격을 당해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곳은 경주 남산에서 대중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어 야외 법회를 열기에 적합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울타리를 치기 전까지는 1000명까지 앉아서 모임을 가질 수가 있었던 곳이에요. 지금은 울타리를 쳐서 500명 정도 앉을 수 있을 겁니다. 공간이 아주 넓죠.”
소나무 숲 안으로 더 들어가자 삼릉이 나왔습니다. 이 세 왕릉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3명의 박 씨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초기 아달라왕과 나머지 왕의 연대 차이가 800년이 넘어서 왕릉의 진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삼릉에서 시작하는 이 골짜기의 원래 이름은 냉골입니다. 지금은 ‘삼릉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에서 유적이 제일 많이 있는 골짜기입니다. 정토회의 창립 정신이 담긴 목 없는 불상, 관세음보살, 선각육존불, 입술이 예쁜 마애불 등 산을 올라가면서 많은 유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남산은 금오봉을 중심으로 한 북남산과, 고위봉을 중심으로 한 남남산, 이렇게 두 개의 축이 있고, 그 사이에 용장 계곡이 흐르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골짜기가 60여 개가 있고, 사찰 터, 불상, 탑 터, 탑, 왕릉, 상사바위, 부엉이바위 등 민속 유물까지 합하면 유물이 700여 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천 박물관이라고도 불립니다. 남남산의 남쪽에 자리한 천룡사지는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곳으로, 용성조사의 유훈을 실천하기 위해 정토회가 복원 불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삼릉과 어우러진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이 일품이었습니다.


경주 남산의 서편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계속 걷자 망월사가 나왔습니다. 일주문 앞에서 삼배를 한 후 스님이 망월사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영남 불교 학생회를 지도하면서 청소년 포교 활동을 왕성하게 할 때 이 절에서 머무르며 영남 불교 교육원을 운영했습니다. 이 절은 원효종의 총본원입니다.”
망월사를 지나자 삼불사가 나왔습니다. 삼불사 옆에는 석불 세 개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습니다. 삼존불을 보러 가는 길 옆으로 짙게 물든 단풍이 수를 놓았습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보자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삼존불 앞에 서서 합장하고 선 채로 삼배를 했습니다. 삼존이 모두 명랑하고 천진스러운 아기들처럼 보였습니다.


삼존불을 한 바퀴 돌며 참배를 한 후 단풍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읍시다.”
스님의 제안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삼불사를 지나자 작은 연못인 ‘태진지’가 나왔습니다. 다양한 수생 식물들이 계절마다 제 멋을 뽐내는 생태 공원입니다. 하늘과 산, 나무가 연못과 어우러져 그윽한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마왕릉(祗摩王陵))을 지나 포석정에 도착했습니다. 울창한 은행나무로 둘러싸인 포석정을 지나자 골목길에 접어들었습니다. 담벼락마다 재미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골목길을 벗어나니 저 멀리 창림사지 삼층 석탑이 보였습니다. 남산에 있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석탑입니다. 스님이 지팡이로 석탑을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저기 석탑이 보이는 곳이 창림사지입니다. 창림사지는 신라 최초의 궁궐이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인 ‘나정’이 나옵니다. 저 멀리 숲이 보이는데 거기가 나정입니다.”
다시 가던 길을 걸었습니다. 주위에는 추수를 마친 들판이 펼쳐졌습니다.

잠시 후 남간사지 당간 지주에 도착했습니다.

“당간 지주는 절을 상징하는 큰 깃발을 걸기 위해 세운 지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사찰에서는 당간 지주가 한 쌍으로 남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찰의 큰 행사 때 괘불(掛佛)을 거는 장치로 활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당간을 지탱하는 양쪽 돌기둥을 보면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당간을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만든 장치입니다. 큰 의식이나 법회가 있을 때는 이곳에 거대한 괘불을 걸어 올렸던 것입니다."
당간 지주 앞에 서서 주위를 바라보니 그 옛날 이 절이 얼마나 큰 절이었을지 조금 실감이 났습니다.

당간 지주를 지나자 남간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남간 마을 안에는 남간사 옛 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돌우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쌓아 올린 후 그 위에 다시 돌로 틀을 얹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석정(石井)은 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여기는 우물 모양이 전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분황사에 있는 석정은 이것과는 모양이 많이 다릅니다. 우물 틀의 외부는 팔각형, 내부는 원형, 우물 안은 사각형입니다. 각각 팔정도, 일원사상, 사성제를 상징합니다.”
조각이 정교하게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들 감탄을 했습니다.
남간 마을을 벗어날 즈음 김호 장군 고택이 나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김호 장군이라고 하니 고택의 역사가 400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 중 하나라고 합니다.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하여 외부 모습만 보고 다시 가던 길을 걸었습니다. 고택을 지나자 경주 남산의 가장 북쪽에서 시작되는 등산로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산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늘입니다.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물을 마시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산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등산로인데 거의 평지 수준의 완만한 길입니다. 걷기에 아주 좋아요. 가을을 만끽하며 걸읍시다.”
여기서부터는 스님도 설명을 멈추고, 조용히 가을 기운을 음미하며 산길을 걸었습니다. 햇살을 머금은 나뭇잎들은 마치 형광등처럼 반짝이며 빛을 뿜어냈습니다.


산길을 한참 걷다가 오르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에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산길을 조금 내려가자, 따뜻한 햇살이 스며드는 바위 속에서 숨은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조그마한 감실 안, 망치를 제대로 휘두르기도 어려운 좁은 공간에서 단단한 화강암을 정성스레 다듬어 만든 부처님은 참으로 친근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함께 불상을 바라보고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불상을 바라보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불상을 보시면, 바위에 굴을 파고 감실을 만들어서 불상을 모셨습니다. 머리에는 관을 쓴 형상인데, 앞에 손을 모으고 있는 부처님의 얼굴 모양이 꼭 삼신할머니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이 ‘할매 부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주 친근감이 있고, 정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온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공동체 화이팅!”

하산해서 보니 산책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13,000보를 걸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매일 이렇게 걸으면 몸이 건강해질 텐데요. 여러분도 좋았습니까?”
“네!”
“그러면 다들 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올라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맛있는 것도 드세요. 3박 4일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스님은 공동체 대중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남은 배추 50포기의 김장을 돕다가 오후 4시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아홉 번째 강연이 부산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오후 5시 30분에 강연장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부산시 남구에 위치한 부경대학교 대학 극장입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강연 2시간 전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많이들 오셨네요.”
스님은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대학 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전에 차담을 요청한 지역 인사 분이 있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강연장을 대관하는 데에 힘써 주신 부산대학교 신보성 교수, 부경대학교 박영환 교수 등 몇몇 분들이 찾아와서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교수님들은 한결 같이 스님의 건강을 염려했습니다.

“스님 일정을 보니까 해외 일정도 많고 너무 빡빡해서 정말 피곤하시겠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스님은 해외를 다니면서 느끼는 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피곤하긴 해도 배우는 게 많습니다. 제가 해외를 다녀보며 느낀 점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분단으로 인한 전쟁의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국가의 기축 산업을 떠받칠 기술 인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60대에는 아직도 숙련된 기술자들이 남아 있지만, 40대 이하로 내려오면 기술 인력이 거의 소멸 단계에 가깝습니다. 미국에 조선소에서 일할 기술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10년만 지나면 일할 사람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디를 가봐도 노동 현장에서 젊은 세대가 함께 있어야 하는데, 머리가 희끗한 중장년층만 가득합니다. 예전에는 대우 조선소에 강연을 하러 가면 젊은 기술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머리가 하얀 분 들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는 하려고 해도, 땀 흘려 일하는 기술직 노동은 기피합니다. 젊은이들은 취업이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반대로 중소기업 대표들은 사람을 구할 수 없어 힘들다고 아우성인 상황입니다. 이러다 보니 고급 기술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점점 넘어가고 있습니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기술직 노동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술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2년제 기술 대학이나 기술 교육 플랫폼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운영해, 세계적인 기술 인력 공급국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또 국가 기간 산업을 지탱하는 핵심 기술 노동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 긴급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미국이 겪는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미국은 공장을 지어도 고급 기술을 가지고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교수님들도 스님의 생각에 적극 공감했습니다.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들도 부산에서 학생들을 졸업시켜 보면, 중소기업에서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모집 공고를 많이 내는데, 학생들이 취업 원서를 내지 않습니다. 전부 대기업, 공사, 공단,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니까요. 기술 인력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도 원인인 것 같습니다.”
스님은 국가가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이런 사회적 빈틈을 메우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기술 인력을 국가에 등록하면 신분을 보장해 준다든지, 임금의 일정 부분을 정부가 지원해 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기술 인력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중소기업 기술 인력 양성과 유지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부산 BTN의 김지원 아나운서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사전 공연으로 부산 지역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는 에코사운드 그룹이 신나는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이제 나만 믿어요’, ‘여행을 떠나요’ 두 곡을 열창하자 모두 큰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부산 사나이 셋이 함께 만든 멋진 무대였습니다. 스님은 재능 기부로 출연해 준 에코사운드 그룹에게 악수를 건넨 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큰 박수를 받으며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강연장에는 7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유튜브 생방송에는 50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오랜만에 만난 부산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부산에는 오랜만에 와서 인사드립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겨울이 왔나 싶었는데, 다시 조금 풀렸습니다. 저는 지난 금, 토, 일 사흘 동안 김장을 했습니다. 저희들은 공동체 구성원 100여 명이 절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1년간 먹을 김장을 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배추를 1000포기를 수확해서 김장을 하느라 사흘 동안 법석을 떨었습니다. 배추를 뽑아 숨을 죽이고, 그다음에 속을 넣어 버무리고 포장했습니다. 몇몇 분들에게 선물도 해드렸어요. 그리고 김장에 참여한 대중의 수고에 보답하고자 오늘은 경주 남산 둘레길을 두 시간 정도 걸으며 늦가을이지만 가을을 만끽했습니다. 여러분도 주말에 교외에 나가 보셨습니까? 도시 사람들은 요즘 전부 아파트에 갇혀서 살죠? 감옥살이한다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웃음)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먼저 강연장 입구에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다섯 명이 질문을 하고, 현장 질문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일곱 명이 자신의 고민을 말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본인은 초혼이고 상대는 재혼이며 사춘기 딸이 두 명 있는데, 새엄마가 되면 아이들과 부딪히게 될 것을 걱정하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저는 초혼이고, 제가 만나는 사람은 재혼이에요. 저희 사이는 좋은데, 그 사람에게 사춘기 딸아이가 둘 있습니다. 아이들 엄마는 가까이 살면서 연락은 하지만 양육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양육은 저희가 하는데, 제가 경험이 없어서인지 새엄마 역할을 하면서 아이들과 부드럽게 지내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저도 상처를 받고 아이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포기하고 헤어져서 아이들이 아빠와 사는 게 좋을지, 아니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같이 지내야 할지 고민됩니다. 같이 지낸다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질문자가 생각하기에는 본인의 상황이 특수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미국 같은 데서는 일반적인 가정의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아이가 있고 다른 쪽은 없는 것은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 특별한 것은 아니에요. 결혼이란 초혼인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보면 질문자 같은 상황도 그저 일상적인 관계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특별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저희가 만나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상처가 가는 것 같아 그 점이 우려됩니다.”
“두 사람은 좋겠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상처가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싸우고 헤어지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혼은 아이에게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일인데, 상처를 안 주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예요. 상처를 적게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지요. 아이 입장에서는 친엄마가 있는데 다른 여성이 와서 또 엄마라고 하니 상처가 되는 겁니다. 질문자가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이 상처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문제가 덜한데, 어떻게든 상처를 안 주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러면 저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내야 할까요?”

“그런 이유 때문에 결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이 결혼하고 싶으면 아이에게 조금 상처가 되더라도 결혼하면 됩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친엄마가 죽어도 새엄마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마가 죽은 경우에는 그래도 받아들이기가 쉬워요.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고, 엄마 역할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새엄마를 거부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혼을 했을 경우 엄마 아빠가 따로 살아도 아이들은 자신의 엄마와 아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싶지, 거기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아이들 입장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을 할 때는 반드시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안 좋고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어서 너희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싸우고 사는 게 좋겠니? 아니면 헤어져서 사는 게 좋겠니? 너는 엄마와 아빠 사이를 마음대로 다녀도 되지만, 엄마와 아빠는 도저히 한집에 사는 게 어려운데 어떠니?’

이렇게 아이들의 양해를 구해야 해요. 그러나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의견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부 당사자 둘이 결정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는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별거를 하든지, 한집에 있어도 관계를 조금 조절하여 아이들을 위해서 같이 살자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혼을 했다는 것은 아이를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부 갈등을 중심에 두었지, 아이를 덜 고려한 거예요. 아이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 여기에 새엄마가 오면 상처를 더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새엄마의 행동과는 관계가 없어요. 아이에게 조금 상처를 주더라도 우리는 같이 살아야겠다는 관점을 갖든지, 아이에게 상처를 안 주어야겠다 싶으면 결혼을 안 해야 합니다.
서로 친구 사이로 지내도 되잖아요. 꼭 결혼을 해야 하나요? 요즘은 둘만 좋으면 결혼을 안 하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서양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는 사람이 50%가 넘지 않습니까? 각자 자기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이 부부가 되어 같이 살다 보면, 재혼한 남편이나 아내가 자기 아이한테 좀 섭섭하게 하는 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서양 사람은 이층집을 구해서 아내는 위층에서 자기 아이들이랑 살고, 남편은 아래층에서 자기 아이들과 삽니다. 자기 가족끼리 살면서도 둘은 한집에 사는 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며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아빠가 아이들과 한번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좋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이혼했고, 아빠는 이 여성과 같이 지내야 하는데, 우리는 너희가 상처를 입을까 우려된다. 어쩌면 좋겠니? 너희들이 불편하더라도 같이 조화를 이루고 살래? 아니면 너무 불편하니 엄마한테 갈래?’
이렇게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결정을 아이들에게 맡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면 결혼하면 돼요. 다만 결혼이나 연애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할 때 아이도 좀 고려하라는 의미입니다. 결혼하더라도 다른 집에 살면서 아이는 아빠와 살고 질문자는 왔다 갔다 해도 되고, 한집에 살면서 아이들을 돌봐 주어도 됩니다. 아이들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고, 아이들이 완강하게 거부하면 좀 어렵겠지요. 아이들의 거부가 너무 심하면 ‘싫으면 엄마한테 가서 살아라. 우리는 같이 살 거야.’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결혼과 연애는 다릅니다. 연애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감정만 있어도 됩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괜찮고, 외국인이라도 괜찮고, 아이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달라요. 결혼은 가족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둘은 결혼을 하는 것이지만, 아이로서는 엄마가 한 명 더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는 가족 구성원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할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예요. 아들이 결혼하겠다는데 여성이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며느리는 집안의 일원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니, 가족 구성원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 결혼을 반대하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에서 탈퇴하고 집을 나와서 결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원래 가족 구성원과는 관계가 멀어집니다. 내가 가족 구성원에 속해 있으면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데려오려면 나 혼자 결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분이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다른 구성원의 의견을 물어봐야죠. 반대가 좀 있더라도 일단 구성원으로 같이 지내보자고 하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둘은 꼭 결혼을 해야겠는데 다른 구성원이 반대하면 원망할 필요는 없어요. ‘알았습니다. 그럼, 저희는 결혼하겠습니다.’ 하고 가족 구성원에서 탈퇴하면 되는 거예요. 성인이므로 이렇게 결정하면 됩니다. 모든 동물은 성년이 되면 다 원래 가족에서 독립하여 다른 가족 구성원을 만듭니다. 사람만 이렇게 좀 복잡하게 사는 거예요.
가족 구성원으로서 같이 살고자 하면 다른 구성원의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질문자보다 먼저 가족 구성원으로 살고 있었잖아요. 그러니 그들에게 ‘같이 살아도 괜찮겠니? 내가 같이 살게 되면 이런 이점이 있고, 이런 불편함이 있는데 어떠니?’ 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아이들이 반대하면 ‘너희 엄마에게 가거라. 대신 일정하게 재정 지원은 해줄게.’ 하고 구성원을 재구성해야죠. 윤리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만들 건지는 두 사람이 합의해서 남편 될 사람이 전 부인과 이야기해서 정하면 됩니다. ‘아이들이 재혼을 반대하는데, 아이들을 당신이 키우면 어떨까? 양육비는 일정하게 지원할게.’ 이렇게 정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남편이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지만, 나에게는 아내가 필요하다. 그러니 너희들이 양해해라.’ 하고 아이들을 설득해 봐야 합니다. 이럴 때는 ‘나는 아내가 필요하다.’라고 말해야지 ‘너희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꾸 남 핑계를 대면 안 돼요.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면 질문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는 친엄마가 있는데 질문자가 엄마 역할을 하겠다고 하면 아이들은 헷갈립니다. 가족 구성원이니까 내 자식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집안일에 도움은 주되,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생활이나 학업에는 가능하면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요즘 공부를 안 하니까 당신이 얘기를 좀 해.’ 하고 질문자는 의견만 내고, 아빠가 직접 아이와 이야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질문자가 나서서 간섭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려고 하느냐?’ 하면서 싸움이 생겨요. ‘도움은 주되 간섭은 안 한다.’ 하는 관점을 가지면 같이 사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항상 간섭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역할이 필요 없다는데, 질문자가 오지랖 넓게 엄마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면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엄마 역할을 해달라고 하더라도 ‘일단 생각 좀 해 볼게.’ 하는 자세를 취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도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치열하게 살아오며 성취 중심의 삶을 살았지만, 최근 마음을 돌보며 불안과 상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조급함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데,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외부 상황으로 번번이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또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럽에서의 결혼과 이혼, 두 번째 아이와의 인연 속에서 큰 상처와 후회를 겪었습니다. 이제는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놓으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흔들립니다. 어떻게 해야 평온해질까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아들에게 화를 내고 심하게 혼낸 일이 평생 후회로 남아 괴롭습니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조현병을 앓는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과 놓아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동생을 향한 애착과 죄책감, 이 마음까지 비워야 할까요?
나이 육십이 다 되어가는데 지난 삶이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저는 왜 이렇게 박복한 걸까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약속한 두 시간이 벌써 다 되었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곧바로 무대 위에서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줄을 서서 스님에게 사인을 받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시민들이 모두 강연장을 빠져나가자 스님은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법륜스님 고맙습니다. 방긋 웃으며 잘했습니다. 행복학교 가자!”
봉사자들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스님은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강연을 준비한 부산 행복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강연장을 나왔습니다.


밤 9시 40분에 부산을 출발하여 차로 1시간을 달려 10시 40분에 두북수련원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한 후 오전에는 일본에 가기 위한 짐을 싸고, 오후에는 김포공항으로 이동하여 비행기를 타고 일본 오사카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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