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1.17 요양병원 농산물 전달,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 수행법회
“아이가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해요,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농산물을 트럭에 실었습니다. 어제는 거제도애광원에 농산물을 전달했고, 오늘은 자재요양병원에 농산물을 전달하는 날입니다.

스님이 직접 농사지은 감자, 무, 김치, 햅쌀을 트럭에 가득 싣고 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해가 떴습니다. 오전 8시에 자재요양병원에 도착해 농산물을 식당 앞에 내렸습니다.

스님이 트럭 위에서 콘티 박스를 내려주면 요양병원 직원들이 콘티 박스를 한쪽에 쌓았습니다.

스님이 박스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병원 책임자인 능행 스님이 뛰어나왔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직접 오셔서 나눠 주시네요.”

“배추는 무름병이 와서 수확을 많이 못했어요. 그래서 배추는 못 가져왔습니다. 대신에 무와 감자를 많이 가져왔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올해 김장은 배추를 사서 해야겠네요.”

순식간에 콘티 박스를 모두 트럭에서 내리고, 지난 7월에 농산물을 가져다줄 때 두고 온 콘티 박스를 다시 돌려받아서 트럭에 실었습니다.

“작은 감자도 알뜰히 모아서 가져왔어요. 요즘은 사람들이 작은 감자는 밭에 다 버리는데, 옛날에 우리들이 어릴 때는 작은 감자를 조림해서 먹었잖아요. 그래서 작은 감자도 밭에서 다 주워 왔어요. 이번에 감자를 드리면 내년 6월에 새로 햇감자를 수확할 때까지는 이제 감자가 없어요.” (웃음)

“감사합니다.”

서둘러 자재요양병원을 출발해 언양으로 향했습니다. 인연 있는 몇몇 분들에게 농산물을 전달한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정토대전 사상팀 법사님들과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사회사상팀에서 ‘육화합’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해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섯 가지 화합의 방법(육화합)을 기록한 여러 가지 경전 내용을 비교하고 분석한 후 스님에게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특히 육화합에 대해 시대마다 경전마다 왜 조금씩 다르게 기록이 되었는지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왜 인도와 중국이 조금씩 다를까요?

“계율이든 경전이든 부처님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증명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후대로 내려오면서 시대상을 반영하여 정립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시대에 승가 안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겠죠. 물론 터무니없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부처님 당시에 어떤 사건을 근거로 다시 정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도 안에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가 변하니까 그 변화가 반영돼서 경전과 사상이 정립되었고, 그것이 중국에 와서 문화와 환경이 또 달라지니까 다시 중국에 맞게 정립이 된 겁니다. 인도에서는 출가 수행자들이 걸식을 하고, 숲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날씨가 추우니까 집을 짓고 한 방에서 생활을 해야 하니까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야 했고,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수행자는 스스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육화합이 기록된 것이고, 중국에서는 공동생활을 하니까 ‘수행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육화합이 기록된 겁니다.

그래서 사회 정의라는 측면에서 재해석을 하기에는 인도보다는 중국에서 정립된 육화합의 내용이 훨씬 더 그 의미를 현실에 적용하기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수행자들이 했던 공동생활이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사회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도와 중국이 육화합에 대한 내용이 서로 조금 다르다는 것을 두고 논쟁을 할 필요는 없어요. 학자들은 그런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 사회의 윤리와 도덕

현재 한국 사회는 중국에서 정립된 육화합의 개념이 더 맞을 수가 있는데 이것도 또 바뀔 수 있습니다. 가령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온라인 시대가 되면, 사회 실천도 같이 모여서 캠페인을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동네에서 휴지를 줍거나 캠페인을 하고 각자 그 소감을 인터넷에 올리는 방식으로 변하게 돼요. 그래서 지금 어떠해야 한다고 정립해 놓으면 미래사회에서는 또 안 맞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나오고 로봇이 나와서 모든 일을 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한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일을 성실하게 꾸준히 한다’라는 개념 자체도 달라질 거예요.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것은 로봇이 제일 잘하잖아요. 로봇은 24시간 쉬지 않으니까 사람이 로봇하고 경쟁해서 이길 수가 없죠. 우리는 밥 먹어야 하고 쉬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지만, 로봇은 자지도 않잖아요. 기름 넣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밖에는 쉬지 않고 일하고, 위험한 곳도 겁 없이 들어가고, 작업도 인간보다 더 정교하게 합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느냐’, ‘얼마나 일찍 일어나서 일하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시간 내내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탁 내어서 뭔가 개선하는 게 사람의 몫이 될 겁니다. 일은 로봇이 다 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래로 갈수록 윤리와 도덕의 개념이 점점 바뀌게 되고, 앞으로는 더 빠르게 바뀔 거예요. 옛날에는 부지런하면 복 받는다고 했지만, 벌써 요즘 사회만 해도 부지런하다고 복 받는 건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 권리에 대한 주장도 옛날에는 가능하면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권리에 대한 주장을 악착같이 하는 게 오히려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잖아요.

괴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쩌면 현대 사회는 욕망의 사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토대전에서는 이런 사회 문제를 세부적으로까지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부처님은 ‘왜 괴로운가?’, ‘괴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항상 법을 설하셨습니다.

인간의 괴로움과 스트레스는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도 늘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회 문제의 경우에는 너무 구체적으로 적시하게 되면, 30년도 못 가서 다 뜯어고쳐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회 변화가 워낙 빠르니까요. 부처님 당시에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들도 불멸 후 300년밖에 못 갔는데, 지금은 사회의 변화 속도가 10배는 더 빠릅니다. 그래서 300년은커녕 30년도 못 갑니다.”

사회사상에 대한 토론을 마친 후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불교사상팀에서 ‘인간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해 온 내용을 발표하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현대 뇌과학에서 연구한 결과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대전 회의를 마치고 오후 4시부터는 공동체 법사단회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새해맞이 실무자 수련, 디지털 불전함 사용, 병가 요청에 대한 승인 절차 등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논의한 후 마지막으로 내년에 만일결사 회향 기념으로 진행되는 정토불교대학 강의와 관련하여 집중 논의를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정토대전 회의는 이번 주까지만 진행하고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주부터는 만일결사 회향 대법회의 내용을 기획하는 일에 공동체 법사단 전체가 집중을 좀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 회의 때는 각자가 정토회의 미래 30년을 생각했을 때 불교대학, 경전대학, 사회대학의 교과과정을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지 초안을 마련해 와서 발표해 주세요.”

스님은 법사단에 다음 주까지 준비해 와야 할 과제를 던져준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400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고, 2000여 명에게 유튜브 생중계가 진행되는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저희 두북 수련원에서는 농사를 지으면 그 수확물을 장애인 거주 시설과 요양병원에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배추를 500포기씩 가져다주려고 모종을 많이 심었는데, 배추 농사를 망쳐서 공동체 사람들이 먹을 것만 겨우 수확했어요. 그래서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서 무와 감자만 나눠주고 배추는 지원을 못 했습니다. 김장하는 모습과 농산물을 배달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겠습니다.”

▲ 영상 보기

지난 일주일 동안 두북 수련원의 일과를 영상으로 함께 본 후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세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이들이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해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해요, 어떡하죠?

“저는 열 살, 일곱 살인 두 아들의 엄마입니다. 큰아이가 말하기를, 자신을 향한 엄마의 눈빛과 말투가 동생에게 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큰아이 자신은 동생을 낳기 위한 사전 연습 단계에서 태어났다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스스로 느끼고 있기에 자기는 빨리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게 좋겠대요. 더불어 작은아이도 ‘우리 엄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장난 식으로 ‘네, 장 사장님!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요. 정토회를 만나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내 업식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어떤 마음을 갖고 수행을 해나가야 할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자는 어른이에요, 어린아이예요?”

“어른입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하는 내용은 어린아이가 할 법한 질문이에요. 본인은 아이 같이 질문하면서 정작 아이가 하는 말은 또 어른이 하는 말처럼 각색을 해서 얘기하네요. (웃음)

제가 왜 어른인지, 어린아이인지 물었을까요? 일곱 살짜리, 열 살짜리 애들이 하는 말을 갖고 시비한다는 것 자체가 질문자가 애라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아이들이 할 법한 질문이잖아요. 아이들이 하는 얘기에 대해 어른이 짜증내고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그런 얘기들은 ‘그래, 그렇게 느꼈니? 아이고, 그렇구나’ 이렇게 받아주고 그냥 흘려서 들어야죠. 왜 일곱 살짜리 아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시비해서 스님한테까지 와서 이런 질문을 해요? (웃음)

질문자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의 친구처럼 아이가 하는 말을 갖고 시비하는 수준입니다. 질문자가 좀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아이들의 그런 말에 별로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하면 엄마는 이렇게 대답을 해야죠.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그렇게 느끼는 건 자유야. 그런데 엄마는 안 그래. 동생이 너보다 더 어려서 엄마가 아무래도 더 어린애를 보살피는 마음을 내다보니 그렇게 보인 거야. 너는 동생보다 더 크니까 네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야. 인생이란 게 그렇단다. 추운 겨울에는 장작을 많이 가져와서 방에 불을 때야 하지만, 더운 여름에는 불을 안 때잖니. 그런 것처럼 아이가 어릴 때는 극진히 보살피고, 좀 크면 조금 보살피고, 좀 더 크면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게 자연의 법칙이야. 너는 이제 좀 컸으니까 엄마의 손길이 덜 갈 뿐이지 엄마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단다.’

엄마가 아이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것은 수준 이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웃음)

“제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게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이것을 무작정 덮을 수만은 없겠다 싶었어요. 본질을 좀 제대로 알아서 놓을 건 놓고 개선할 건 개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는 게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긴 병이에요. 본인에게 상처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말에 자극받고 시비를 하게 되는 겁니다. 본인의 상처가 아이들에게 투영돼 있는 거예요. 아이들 상태가 심각한 게 아니라 질문자가 아이들을 심각하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아이를 통해서 내 병을 보는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릴 때 해결하지 못한 내 상처를 아이 핑계 대고 지금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질문자가 마음에 상처가 없다면 아이들이 그렇게 얘기했을 때 가볍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엄마는 그렇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네게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미안해. 앞으로 잘 봐줄게.’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가볍게 지나갈 수 없다면 그건 본인에게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자 본인의 문제입니다. 본인의 문제를 아이들의 문제라고 착각해서 자꾸 아이들을 나무라게 되면, 아이들도 그런 상처를 갖게 돼요.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저렇게 느끼는구나’ 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는 말라는 겁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가볍게 넘기는 게 좋아요.

‘그래, 너희가 그렇게 느낀다고? 그랬구나. 그런데 엄마는 그렇지 않아. 엄마는 똑같이 대하는 거야. 다만 어린애를 좀 더 보살피고, 좀 크면 덜 보살피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따뜻할 때도 사랑이고, 냉정한 것도 사랑이란다. 엄마의 사랑은 똑같지만, 사랑에는 조금 차가운 사랑도 있고, 따뜻한 사랑도 있는 것뿐이야. 네가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일단 네 마음은 알았다. 엄마가 조금 더 따뜻한 눈빛으로 볼게. 엄마는 따뜻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엄마가 조금 더 노력해 볼게.’

아이들의 말을 안 듣고 무시하거나 야단치라는 뜻이 아니에요. 아이들의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거기에 흔들리는 것은 질문자가 자기 인생의 중심이 안 잡혔다는 뜻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누구나 이렇게 형제간에 질투가 생깁니다. 질투는 아이만 하는 게 아니에요. 결혼해서 부부가 잘 지내다가 아기를 낳아서 아내가 애한테만 신경을 쓰면 첫 번째로 남편이 질투해요. 그런데 남편은 이 질투를 말로 표현을 못 합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창피하거든요.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섭섭해합니다. 자기는 뒷전이고 아내가 그저 애한테만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끼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아기를 키우느라 힘들어도 ‘큰아들’, 즉 남편도 가끔 돌봐줘야 합니다. 남편도 속으로는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웃음)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아기 돌보기에 정신이 없어서 ‘우리 남편이 상처 입겠구나’ 이런 생각을 꿈에도 못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니 아이를 돌보더라도 큰아들인 남편 역시 가끔 신경 써주세요.

‘여보, 요즘 신경 못 써서 미안해. 애가 너무 어리다 보니 당신한테 좀 소홀했네. 미안해.’

이렇게 말로라도 남편을 조금 달래주면서 생활해야 해요. 그런 것처럼 큰애가 조금 컸을 때 동생을 낳으면 엄마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더 어린애한테 신경을 쓰게 되잖아요. 사람의 마음이란 상대적 평가를 하게 마련입니다. 예전에는 엄마가 전적으로 자기한테만 관심을 가져주었는데 이제 그 관심이 나눠지는 거예요. 그러면 큰애는 ‘나는 버려두고 동생만 사랑한다’ 이렇게 느끼게 돼요. 그런 서러움을 심하게 느끼는 아이들은 엄마가 없을 때 동생을 꼬집기도 합니다. 그러니 항상 아이를 좀 다독여주세요.

‘동생을 돌보느라 엄마가 너한테 손길을 조금 덜 쏟았구나. 미안해.’

이렇게 다독여주면서 생활해야죠. 이런 서운함이 일어나는 것은 애든 어른이든 다 같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상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가 30이 생기면 만족을 하고, 50이 있다가 20을 잃어서 30이 되면 그 상실감이 엄청나요. 인간의 뇌가 그렇게 작용하도록 되어 있어요. 사람이 쫀쫀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며 울고불고한다면 쫀쫀한 사람이겠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 현상입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그런 면을 좀 살펴주세요. 겉으로 표현을 하든 안 하든, 아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애들이 그렇게 표현해 주면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알아주세요. 야단은 치지 말되 ‘그럴 수도 있다’ 하고 이해해주라는 거예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이한테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마가 어린아이를 돌보는 데 신경을 쓰느라 너를 조금 덜 바라봐줘서 미안하다. 그러나 엄마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단다.’

이렇게 얘기하고 다독여주면 됩니다. 요즘은 몸뚱이만 컸지, 애가 애를 낳아 키우니까 부모라는 큰애와 자식이라는 작은애가 서로 싸우는 형국이 됐어요.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엄마가 애 말을 가지고 시비하고 싸우면 어떡해요?

‘아직 어려서 그렇구나. 알았다. 섭섭했니? 앞으로는 엄마가 신경 좀 더 쓸게’

그냥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야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시비하는 것 자체가 다 자기 상처의 표현입니다.”

“제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른이라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중심을 바르게 잡고 계속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애들한테는 절대 화내고 짜증내고 성질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의 심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애들이 뭘 사달라고 할 때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사주는 것은 애들의 버릇을 나쁘게 만들어요. 고마워하는 것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100원을 달라고 했을 때 150원을 받으면 고마워하지만, 100만 원을 달라고 했을 때 90만 원을 받으면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위가 자꾸 커지면 주고도 욕을 얻어먹는 일이 발생해요.

질문자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그러면 나중에 질문자가 억울해집니다. ‘내 나름대로 머리 굴려서 잘한다고 했는데 왜 나는 열심히 한 결과가 늘 의도와 반대로 돌아오나!’ 이렇게 억울한 마음이 들 수 있어요. 그러니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는 너무 아이들과 머리로 경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그래, 알았다, 엄마가 잘못했다’ 이렇게 얘기하고 넘어가야지 애들이 뭐라고 한다고 그걸 갖고 일일이 따지고 시비할 필요가 없어요. 관점을 조금 더 유연하게 가져보세요. 불교 공부도 너무 따지면서 공부하면 안 됩니다. 쉬어버리고 놓아버린다는 관점에서 공부하는 게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회사에서 다른 사람을 평가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업무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낮은 평가를 주어 서운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게 불편합니다.
  • 알고 지내던 60대 강사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이상한 낌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 의지를 하고 싶어서 계속 조언을 구했습니다. 혼자 자립을 못하니 이런 일을 겪었구나 싶어 자괴감이 듭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부터는 이제 겨울 준비에 들어갑니다. 정원에 국화가 시들고 있어서 베어내고, 감따개를 이용하여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을 딸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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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불교 공부 마저도 너무 따지지 말고 쉬어버리고 놓아버린다는 관점으로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씀 감사합니다.

2021-11-24 06:56:19

휘릭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저도 늘 경계에 끄달리는 편이라서,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음을 늘 평온히 유지하겠습니다.오늘 가름침 감사합니다.

2021-11-22 20:57:26

무진

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2021-11-22 10: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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