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5.12. 종교인 모임, BTN과 BBS 방문, 수행법회
“사람들이 저보고 ‘세다’ 하는데, 무엇을 고쳐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어제부터 스님은 서울에서 일정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한 후 BTN과 BBS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수행법회를 생방송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오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새벽 기도와 명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자마자 서울 공동체 대중은 스승의 날을 앞두고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스승의 날에는 스님이 두북 수련원에 머물 예정이어서 미리 스승의 날 행사를 조촐하게 가졌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젊은 행자님이 ‘스승의 은혜’ 노래를 아주 멋지게 불렀습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님은 아주 큰 웃음을 보이며 제자들의 마음을 받았습니다. 공동체 대중은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먼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스님은 공동체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행자들에게 수행의 바른 관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보면서 좀 안타깝고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있어요. 큰 것은 다 버리고 들어와서 여기 살고 있는데, 조그마한 것에 집착하다 보니 정작 큰 것을 버린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늘 볼 때마다 좀 안타깝습니다.

괴로워지는 이유 세 가지

인간이 살아가면서 ‘괴롭다’라고 하는 이유는 결국 세 가지예요. 첫 번째는 욕망입니다. 먹고 싶다, 입고 싶다, 이런 욕망에 대한 절제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예요. 그 순간에는 늘 욕망대로 하는 게 좋지만, 지나 놓고 보면 그것이 화근이 됩니다. 그리고 욕구불만에 늘 껄떡거리게 돼요. 절제를 못하고 숨어서 몰래 하다 보면 마음이 떳떳하지가 못하고 늘 찜찜함이 남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조금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두 번째는 성질입니다. 화내고 짜증 내는 것도 성질이지만, 잘 운다든지 잘 삐친다든지 이런 것도 다 성질에 들어갑니다. 성질이 탁 올라올 때 그대로 행하게 되면 지나고 나서 부끄럽고 후회됩니다. 그래서 성질을 조금 자제하는 게 필요해요.

세 번째는 시비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성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에이, 저건 아니다’ 라거나 ‘저건 옳다’, ‘그르다’라고 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도 마찬가지예요. 일에 대한 어떤 분별과 시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주요한 원인인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욕망대로 안 되면 성질이 확 나는 게 그런 경우예요. 불교에서는 세 가지를 탐진치貪瞋痴) 삼독이라고 부릅니다. 욕망이 탐욕(貪慾)이고, 성질이 진애(嗔恚)이고, 시비가 어리석음, 즉 우치(愚癡)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좀 조절해 낼 수 있다면 삶이 굉장히 자유로워집니다. 또한 가끔 그런 욕망과 성질이 일어나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더라도 넘어질 때 벌떡 일어나듯이 그 순간에 그걸 알아차리고 내려놓게 되면 사는 게 한결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늘 그중 한 가지를 순간순간 붙잡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며칠씩 몇 달씩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에 진척이 없습니다.

수행문을 건성으로 읽고 있죠?

이것을 조금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자기 발견을 할 수 있는데, 법문을 듣든, 명심문을 읽든, 수행문을 읽든, 그냥 건성으로 읽는 것 같아요. 건성으로 받아들이니까 어느 순간에 탁 알아차리거나, 가슴속에 깊이 다가오는 것이 없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닦지 않는 장판에 알게 모르게 때가 끼는 것과 같아요. 공동체 생활을 오래 해서 생활하는 것 자체에는 지장이 없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경험들이 쌓여가는 것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계기를 마련한다는 자세로 한 번 살아보면 좋겠다 싶어요.”

스승의 날을 맞이해 제자들이 오히려 감로의 법문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스승에게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을 각자가 더욱더 수행 정진하는 것임을 명심하며 스승의날 행사를 조촐하게 마쳤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부터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령님, 교무님이 차례대로 평화재단에 도착했습니다.

목사님의 식사 기도를 시작으로 조찬을 함께 한 후 회의실로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회의실에는 평화재단 실무자들이 케이크와 촛불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종교인 분들이 모두 자리하자 ‘스승의 은혜’ 노래를 크게 불렀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이 촛불을 ‘후’ 하고 불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벌써 23년이 되었나요?” (웃음)


서로 종교가 다르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작게라도 기여를 하고자 23년째 모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스님과 평화재단 실무자들에게는 종교인 분들이 바로 스승입니다.

박남수 교령님도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보기 드문 스승의 날인 것 같아요. 6개 종교의 스승들을 모셔놓고 스승의 날 행사를 한 것은 9시 뉴스에 나올 이야기입니다.” (웃음)

이어서 본격적으로 종교인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남북 관계에 대한 특별한 소식이 있는지 대화를 주고받은 후 종교인 모임의 좌장인 김명혁 목사님이 오늘 함께 이야기할 주제를 제안했습니다.

“며칠 전이 어버이날이었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각자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모두 잠시 당황스러워하다가 목사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았습니다. 먼저 김명혁 목사님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를 만들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지만, 또한 어버이도 저를 만들어주셨어요. 아버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목사님을 하셨는데, 평생 감옥에서 사셨어요. 일제시대 때는 신사 참배를 안 한다고 감옥이었고, 공산당에게 협조를 안 한다고 감옥이었고, 결국 45세에 순교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목사가 되었어요...”

이어서 천도교 박남수 교령님, 성공회교 박경조 주교님, 개신교 박종화 목사님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저희 아버님과 어머님은 신학대학을 나오셔서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어요. 아버님이 ‘나는 애를 낳으면 무조건 목사를 시키겠다’ 하셔서 저는 뱃속에서부터 목사였습니다. (웃음) 저의 아들도 목사가 되었어요. 최근에 손자한테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하니까 ‘할아버지처럼 목사가 될까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톨릭 김홍진 신부님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박 목사님처럼 저도 뱃속에서부터 신부였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신앙심이 깊으셔서 신부님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님을 좋아했어요...”

원불교 김대선 교무님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도 할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저까지 3대로 이어지는 원불교 집안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이 청수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자랐어요...”

마지막으로 스님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무학이셨어요. 그래도 아버님은 한문을 조금 배우셔서 명심보감을 일하면서 늘 외우셨고, 어머님은 형님들이 군대에 가니까 편지를 읽고 싶으셔서 한글만 겨우 익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랄 때 부모가 인도해주는 것도 없었지만 대신에 간섭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공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셨어요. 중학교 가는 것도 제가 선택해서 가고, 고등학교 가는 것도 제가 선택해서 갔습니다.

내가 선택한 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님

그래서 저는 자랄 때 부모님이 ‘무엇이 되어라’, ‘공부를 해라’ 이런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형님들 따라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를 했어요. 원래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놀라서 절에 찾아왔어요. 그때 저의 은사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모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사람이 지도해야겠어요? 모르는 사람이 지도해야겠어요?’

‘아는 사람이 지도해야죠. 그런데 우리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데요?’

‘단명합니다.’

그러자 저희 어머님이 깜짝 놀라서 ‘스님 아들 하십시오’ 하고 저를 절에 맞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일로 저는 집안 문제가 한 쾌에 정리가 된 셈이에요. (웃음)

아버님은 제가 새벽에 눈만 뜨면 늘 소죽을 끓이고 새끼줄을 꼬고 계셨습니다. 생활하는 것을 보면 늘 근검절약하는 모습이셨습니다. 아마 요즘처럼 학식이 많은 부모 밑에서 제가 태어났다면 출가를 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저희 부모님은 일절 간섭할 형편이 못되다 보니까 저는 비교적 저항 없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늘 제가 선택한 대로 인생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모님을 둔 것에 대해 늘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오늘 종교인 모임은 어버이날 특집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아주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종교인 모임을 마쳤습니다.

다 함께 스튜디오로 이동해서 부처님오신날에 정토회 회원들에게 방송으로 내보낼 축사를 촬영했습니다. 이번 부처님오신날도 작년에 이어서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종교인 분들 한 명씩 영상으로 축사를 해주었습니다.


종교인 분들을 주차장까지 배웅한 후 스님은 곧바로 불교 방송국을 방문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BTN과 BBS에서는 용성 조사님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나 방송, 보도를 여러 차례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초파일을 앞두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조한범 박사님의 초대로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전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윤여준 전 장관님 내외분, 최상용 전 교수님 내외분, 김홍신 작가님, 조민 박사님 내외분 등 평소 평화재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여러분들도 스님과 함께 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스님은 시골에서 손수 뜯어서 깨끗이 씻어 온 상추를 한 봉지씩 선물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은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웃음)


해가 지고 서울 정토회관 앞마당에는 오색의 연등불이 켜졌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서울 정토회관에서 수행법회 온라인 생방송을 했습니다. 정토회 회원 2천 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간단히 인사말을 하고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200여 명이 화상회의 방에 방청객으로 입장한 가운데 다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첫 번째 질문자는 주위로부터 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며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세다’ 하는데, 무엇을 고쳐야 할까요?

“저는 평소에 주위 사람들한테 ‘세다’는 얘기를 좀 듣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것이 ‘세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집이 세다는 건지, 말투가 세다는 건지, 표현 방법이 세다는 건지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네, 세 가지 다 셉니다.” (웃음)

첫마디에 질문자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니 말을 좀 부드럽게 하고, 고집도 너무 부리지 말고, 목소리도 좀 톤을 낮춰보세요. 지금 말하는 모습을 보니 목소리도 크고, 말도 인상을 써가면서 세게 말하고, 고집도 있어 보여요. 그래서 사람들이 ‘세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뭐가 센지 모르겠다’ 그러지 말고 당사자에게 물어서 조금 바꿔보세요.

저는 질문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저한테 물으면 뭐가 센지 제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어요? 누군가가 질문자더러 ‘세다’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 ‘그래요? 뭐가 세다는 말이죠?’ 이렇게 한번 물어보세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투가 세다’, 어떤 사람은 ‘고집이 세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너무 크다’, 어떤 사람은 ‘싸우듯이 말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할 거예요. 그걸 취합하면 ‘아, 이런 것이 종합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게 느껴졌겠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소리를 좀 낮추고, 말을 좀 부드럽게 하고, 내 말을 하기보다는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면 돼요. 남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경청해준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내가 한 번 어떤 의견을 냈을 때 상대가 안 받아들이면 그것을 두세 번씩 주장하는 대신에 ‘알았어요’ 이러고 약간 물러나 보세요, 이렇게 자꾸 연습을 해보면 돼요.

질문자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고집이 센지, 목소리가 강한지, 말투가 센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내가 그걸 어떡하겠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무엇이 세다는 것인지 물어보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조절을 해가는 거예요.

‘너무 그 사람한테 비위를 맞추니까 내 가슴이 답답하다’

만약 이렇게 느낀다면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나부터 살아야 해요. 어떻게 내가 남의 비위를 다 맞추고 살겠어요? 너무 상대의 비위를 맞추면 내가 답답해서 못 살아요.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고 하면 상대가 못 견뎌서 도망갑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숙여도 봤다가, 조용히도 해봤다가, 세게도 해봤다가, 이렇게 조절하면서 맞춰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중도(中道)라는 것은 정해진 길이 아닙니다. 이렇게 조절해가면서 맞춰가는 거예요. 정해진 길이 아니기 때문에 똑같지가 않고 사람마다 다 달라요. 질문자의 목소리가 큰 것만 갖고도 깜짝 놀라서 피하는 사람이 있고, 목소리가 큰 건 별로 문제가 안 되지만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말투가 너무 투박해서 세다고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고, 이처럼 사람마다 다 느끼는 게 달라요.

‘이 사람은 이런 문제를 느낀다니까 거기에 맞춰주는 게 좋겠구나.’

‘저 사람은 저러니까 거기에 조금 주의를 해야겠구나.’

이렇게 당사자와 대화를 해보면서 조금씩 맞춰가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맞춰 주려고만 하면 내가 답답해져요. 남을 위해서 내가 괴로움을 겪을 수는 없잖아요. 수행이란 나 때문에 남이 괴로워도 안 되지만, 남 때문에 내가 괴로워도 안 돼요. 그 사이에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조절해 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알겠습니다. 스님.”

“정말 알아서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이에요?” (웃음)

“사실은 저도 세 가지 다 세다는 것을 인정해요. 그런데 우리가 통상적으로 세다고 표현할 때는 그 속에 ‘그 사람하고 함께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하고 있으면 좀 불편하다’ 이런 뜻을 담아서 말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굉장히 외로움을 많이 탑니다. 세다는 말을 들으면 외면당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자꾸 상처가 남습니다. 어렸을 때도 엄마가 저보고 드세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너 좀 세다’ 이런 말을 들으면 ‘너희가 날 알면 얼마나 알아!’ 이런 생각도 들어요. ‘사실은 그렇게 세지 않은데’ 이렇게 저항하는 마음도 들고요. 그렇다고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투도 세고, 표현방법도 세고, 고집도 세다는 것을 인정해요.”

질문자는 마침내 눈물을 보이며 울먹였습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마음은 약하네요. 고집이 세다는 말에 상처를 입고 눈물이 글썽글썽하다는 건 마음이 약하다는 얘기거든요. 마음은 단단해야 해요. 누가 뭐라고 해도 끄떡없어야 합니다. 대신에 표현은 좀 부드러워야 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짜 센지 안 센지 정해진 게 없다는 것입니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고, 센 것도 없고, 약한 것도 없어요. 다만 비교해서 세다, 약하다고 할 뿐이에요. 질문자보다 더 말투가 센 사람하고 있으면 질문자는 부드러운 사람에 들어가고, 질문자보다 목소리가 더 큰 사람하고 있으면 질문자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에 들어갑니다. 다만 가족들이나 주변 친구들과 비교해서 질문자가 조금 목소리가 크고 말투가 투박하고 주장이 강하다고는 말할 수 있겠죠. 그걸 갖고 나쁘다 좋다고 평가해서는 안 돼요. 그러니 그런 말에 너무 상처 입을 필요는 없어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지 말고, 다만 ‘저 사람은 이런 말투를 불편해하는구나’ 하고 내가 알면 됩니다.

‘저 사람은 이런 말투를 불편해하는구나. 그러면 저 사람하고 얘기할 때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야겠다.’

‘저 사람은 주장이 강한 걸 불편해하는구나. 저 사람하고 얘기할 때는 주장을 조금 덜 해야겠다.’

이렇게 조정하면 돼요. 엄마가 주로 그런 말을 한다면, 엄마하고 얘기할 때 목소리를 조금 낮추는 식으로 연습을 하면 금방 좋아져요.

너무 약해도 좋은 게 아닙니다. 자기 의사가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있고 당당한 것은 나쁜 게 아니에요. 굳이 표현하자면 오히려 좋은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당당하지 못하고 그런 말에 상처를 입으면서 목소리만 크니까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자기도 상처를 입는 거예요. 남한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자기도 상처를 입지 않는 게 진정한 수행입니다. 그러니 조금씩 맞춰보는 연습을 해나가 보세요.

모든 사람이 질문자를 세다고 느끼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안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내가 뭐가 세다고 그래?’ 이렇게 항의를 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그걸 내가 어떡하겠어요?

법륜 스님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 달라요. 이렇게 멀리서 법문만 듣는 사람은 마냥 부드럽고 좋아 보이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저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겠죠. 이처럼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느끼는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좀 냉정하게 하면 스님으로서는 아주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겠지만, 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냉정하다’라고 평가를 하겠죠. 이렇게 평가가 서로 다르다는 거예요.

질문자의 특성 자체는 좋고 나쁜 게 아니에요. 다만 상대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질 뿐입니다. 상대가 불편해하면 거기에 맞춰서 조금 조정해주면 돼요. 알았죠?”

“네. 저도 ‘뭐가 세다는 거야?’ 이렇게 대놓고 따지지는 않았어요. 세다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까 ‘아, 이런 것을 세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추측은 했죠.”

“방금 말한 대로 ‘뭐가 세다는 거야?’ 이렇게 되묻는 것 자체가 저항이에요. 정말로 고치려고 진지하게 묻는 태도가 아니라 반항조의 목소리입니다. ‘그래? 내가 뭐가 세? 너는 안 세나?’ 이런 속마음이 숨어있어요.

누군가가 질문자더러 세다고 하면 ‘아, 그래요?’ 이러면서 가볍게 물어보면 돼요. ‘내가 뭐가 세냐!’ 이렇게 따지듯이 묻지 말고, ‘그래요? 어떤 게 그렇게 느껴집니까?’ 하고 부드럽게 물어보세요. 질문자의 말버릇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어떤 게 그렇게 느껴집니까?’ 이렇게 물어보고, ‘아, 목소리 때문에 저 사람은 그렇게 느끼는구나,’ ‘저 사람은 내 주장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구나’ 이렇게 알아가면서 조절하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환해진 질문자의 표정을 뒤로하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네 명의 질문을 더 받은 후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세다는 말을 듣고 외면당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 중에 왈칵 눈물이 났어요. 타고난 건 어쩔 수 없지만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저보고 세다고 얘기했을 때 ‘어떤 면이 그러냐’ 하면서 가볍게 물어보고 조절하는 연습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질문자를 위해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말하는 연습을 자꾸 해봐요. 질문자는 말할 때 인상이 약간 굳고,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지는 버릇이 있어요. 조금 웃는 인상으로 말을 해보면 어떨까요? 질문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할 때 인상을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자꾸 연습을 좀 해야 해요. 알았죠?”

“네.”

“그게 나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금도 괜찮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굳이 불편하다고 하니까요. 머리가 하얗다고 남들이 자꾸 뭐라고 하면 염색을 하면 되고, 얼굴이 검게 탔다고 남들이 자꾸 뭐라고 하면 화장을 하면 되는 것처럼, 너무 거기에 끌려다녀도 안 되지만, 그래도 세상 사람의 비위를 약간은 맞춰야 합니다.

스님도 바쁘다는 이유로 머리도 안 깎고 수염이 덥수룩한 채 법상 위에 앉으면 사람들이 ‘머리 좀 제대로 깎으세요’라고 할 겁니다.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서 혼자 살고 있는 저도 여러분의 비위를 조금은 맞춰야 하잖아요. 법문을 하기 전에는 세수라도 하고, 머리도 깎고, 수염도 깎고, 승복도 차려입어야 합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채 일하던 작업복 차림 그대로 앉아서 법문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다른 사람의 비위를 약간 맞춰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다른 사람이 ‘좀 세다’라고 하면 그 사람을 고려해서 조금 맞춰주세요. 그렇다고 너무 맞추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종이 됩니다. 하지만 남에게 맞춰주는 태도가 조금은 필요해요. 인간이 함께 모여서 살기 위해서는 그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날도 온라인으로 초파일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문경 수련원이 정토회의 본부이기 때문에 초파일 행사를 문경에서 방송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법회를 마친 뒤 오후에는 가까운 으뜸절이나 실천 장소에 가셔서 휴일을 보내시면 좋겠다 싶습니다. 으뜸절과 실천 장소가 도별로 마련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은 안 걸릴 거예요. 그냥 집에서 휴일을 보내도 되지만, 바람도 쐴 겸 가셔서 연등놀이도 하면서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수요일인 초파일에 뵙겠습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사회 인사와 조찬을 한 후 오전에는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 활동가들과 간담회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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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화

저보고도 세다고 하네요 진짜 억울해요~~^^;;

2021-06-01 23:51:38

수정

저를 돌아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2021-05-26 17:01:57

박범숙

세다는분 공감이 많이가네요
저도 쎄요 ㅎ ㅎ
수행하면서 고쳣어요
그래도. . . ㅎㅎ

2021-05-25 15: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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