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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 남편을 거쳐 서편으로 가는 일정입니다. 전날의 고된 일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백두산에 가까워진다는 설렘과 기대에 스님과 함께 121명의 청년들은 가볍게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집안에서 통화와 백산을 거쳐 림강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향했습니다.
통화로 가는 길에 관마산성과 고구려 장군총을 쌓는데 사용한 돌을 가져온 채석장을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는 곳마다 우리 선조들의 혼이 머물러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벅찬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걷히고 해가 떴습니다. 맑고 신나는 날씨처럼 내일 백두산에 오른다는 신나는 마음으로 버스에서 다 함께 ‘백두산’을 불렀습니다. ‘백두산’ 노래의 힘찬 기상이 노래 가사처럼 겨레의 숨소리로 동북아 대장정에 힘을 실어 줍니다.
긴 이동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는 청년들을 위해 스님께서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욕망과 욕구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청년의 질문에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는 선악이 없지만 그 욕구를 넘어선 탐욕은 제어를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욕구로 옛날과 요즘 결혼 문화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버스가 림강에 이르러 압록강을 만났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물빛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압록강으로 불리우며, 현재는 우리나라와 중국간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입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계곡의 물을 림강부터 시작해서 24개로 구분하여 1도구부터 24도구라 이름 붙였고, 버스가 지나갈 때 마다 각 도구의 위치와 함께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의 모습과 자연경관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장백이 있는 19도구까지 굽이굽이 이루어진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강 건너 북한 동포들과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낯익으면서 어색한 광경에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 하나 지나면 북한이라는 생각에 지난 긴 세월 가보지 못했던 지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강 건너 북한의 산천은 버스가 달리는 중국에 비교해 황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원래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반면에 농업으로 자급자족이 어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8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와 중단된 무역 거래로 경제가 몰락하면서 식량부족이 시작됐고 결국 90년대에 들어서서는 대량 아사가 발생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협동 농장 이외의 개인 수확을 위해 뙈기밭을 만들려고 많은 산들이 개간되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90년대 북한의 대량 아사 때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하신 스님께서 그 당시 어려운 북한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 20년간 같은 길을 다녀보니 외적인 변화도 있지만 사실상 주민의 식량난은 10년간 변하지 않고 그 고통이 같다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줌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피눈물 날 정도의 고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맑은 날 압록강에 나와 빨래와 목욕을 하는 북한 주민들과 물놀이를 하러 나온 아이들, 나무를 태워 움직이는 낯선 목탄차를 보며 장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에 우리가 휴전중인 상태라는 사실이 새삼 어색해 집니다.
장백에 이르니 한글로 표시된 간판이 자주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장백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여 조선족 자치현이 되었으나, 최근에는 조선족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족 양로원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는데 아직 보식 중이신 스님께서는 계속해서 된장국과 두부만으로 식사를 하셔서 한편으론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영광탑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영광탑은 신령스럽고 빛나는 탑을 의미하며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해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영광탑에 다다르니 압록강과 북한의 혜산시를 굽어보는 광경이 장관이었습니다.
영광탑은 무덤 위에 세워진 탑으로 남동쪽으로 약간 기울었지만 완전하게 남아있는 모습이 그 이름처럼 신령스러워 당시 웅장한 발해 문화의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고구려 무덤양식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해만이 갖는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어 국보급 유물이지만 남한에는 80년대 이후 늦게 알려져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발해의 후손으로서 탑 앞에서 참가자들이 함께 예불을 드렸습니다. 스님께서는 예불 중 굶주린 북한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마음이 모아져서인지 탑 끝에 풍경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번 동북아 대장정에 참가한 청년들과 스님의 마음이 풍경소리가 되어 강 건너 북한 동포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광탑 옆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이곳 주인이 불자라서 매년 스님이 영광탑을 방문하실 때면 친절하게 잘 대해주고 지난 번에는 선물까지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님께서 중국어판으로 나온 스님의 주례사 등의 책을 선물하시니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3가지로 서편과 남편, 북편이 있는데 서편으로 가는 길은 송강하에서 출발하고 북편은 이도백하, 남편은 장백에서 시작합니다. 백두산의 남편 산문은 산사태로 폐쇄된 상태라 잠깐 들러 단체 사진을 찍고, 오전에 스님이 직접 밭에서 사오신 수박을 나눠 먹고 난 뒤 서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북한사회와 북한 주민에 대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오늘의 일정 정리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백두산 남편에서 서편으로 오는 길에 만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백두산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물이 이 곳에서는 천천히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많은 난민들이 이 만강검문소에서 많이 붙잡혀 피의 만강이라 불리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정인 백두산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백두산과 천지의 장엄한 크기와 형성과정은 청년들의 기대감을 더욱 더 증폭시켜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다음은 오늘 주제에 따라 분단시기와 그 후 북한의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해방이 되었을 때, 연합국 핵심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습니다. 그 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을 해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게 됩니다. 남한은 미국 유학생 출신인 이승만을 내세워 정부수립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다보니 일제시대 때 일했던 사람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한정부 수립은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국민의 지지가 매우 약했습니다. 그에 반해 북한은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정부를 수립하고 친일파를 제거하여 국민의 지지를 많이 받게 됩니다. 남북이 따로 단독정부로 가는 것에 대해 김구, 조만식 등이 반대해 남북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단독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당시의 기반은 월북자들이 많을 정도로 남한보다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의 경제가 쇠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도에 서울 올림픽의 성공 개최로 북한은 1989년에 세계청소년축전에 과도하게 재정을 투자하게 됩니다. 북한의 경제는 점차 피폐해지고 특히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니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비료가 생산이 안 되니 농사 또한 잘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경제 봉쇄정책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95년 ~ 98년 대량 아사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스님께서는 그 당시 연길에서 만난 한 탈북자와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노동당원으로 스님을 뵙자마자 “항복합니다”라며 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부모님이 아사로 돌아가셨을 때 노동당원으로서의 회의가 들었지만 충성심으로 버텼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아사하자 충격을 받고 큰 회의가 들어 결국 자신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탈북자들이 탈북을 결심하기까지 마음의 장벽을 극복하는 게 가장 어려웠겠구나’ 하고 느끼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탈북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보면 북한의 간부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민족을 배신한 인간들을 왜 돕습니까?” 며 탈북자들을 민족 배신자 취급을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말씀입니다.
“탈북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탈북을 하면 경제적 난민이지만, 북한으로 붙잡혀 돌아가면 민족 배신자로 처벌을 받게 되니 정치적 난민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로 유엔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어요. 그 때는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울고 다녔으니까. 백두산 눈 속에 아이들이 떠돌고 강에서 시체가 떠다니는 것을 보니 눈에 뵈는 게 있었겠어요? 인간의 생존 앞에서는 종교, 사상 모두 다 허물어집니다. 사람이 굶어죽는 데에 이유는 없습니다.
‘국가’로서의 북한은 자주권을 인정해줘야 하고, ‘정부’로서의 북한은 확실히 독재정권으로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주민’으로서의 북한은 지원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로서의 북한을 확실히 구별해주어야 합니다.”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북한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 권리를 유보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시민의 입장으로 보면 핵개발은 좋지가 않습니다. 미래문명에서의 대량학살 무기는 폐기를 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북한은 돌파구를 못 찾고 있습니다. 안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개방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 정부가 붕괴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붕괴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안보적 결합을 하고 개혁개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현재 자주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자주적 입장으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스님께서는 새로운 문명의 인도주의는 사상,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부가 잘못했는데 주민이 고통이 받는 것은 인과관계에 맞지 않습니다. 주민들을 위해서는 생존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21세기 새로운 문명 인도주의는 사상,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상을 넘어서서 인도적으로 생존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침해는 정말 지나칩니다. 인권개선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만, 정치적인 접근은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며 아쉬워 하셨습니다.
현실을 보면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문제이며 살아있는 사람의 인권, 행복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청년들이 북한 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무리 말씀으로 강연을 마치셨습니다.
백두산의 기상을 닮으라는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서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이른 새벽 3시 40분에 북편으로 이동해 백두산을 오를 예정입니다.
오늘 낮 기행부분은 김은지님이, 강의 속기는 김하정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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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14. 동북아 역사 대장정 다섯째 날 - 백두산, 동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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