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8.9. 동북아 역사기행 일곱째 날 -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

아침 320분 모닝콜을 시작으로 동북아 역사기행 마지막 날의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젯밤 숙소가 있었던 연길에서 정각 4시에 출발하여 화룡에 52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화룡에 있는 새벽시장에 들려 오늘 아침 식사거리를 구입하였습니다. 오늘 일정이 바빠서 시장 보는 시간을 20분 주었는데 역사기행 팀들은 능숙하게 먹을 것을 구입하여 버스에 올랐습니다. 며칠 전에 림강에서 새벽시장을 다닌 경험으로 오늘은 맛있는 음식을 과하지 않게 샀습니다. 역시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간접 경험인 것 같습니다.

 

오늘 첫 답사지는 청산리 유적지입니다. 화룡에서 청산리 유적지에 오르는 길옆 옥수수 밭 가운데로 멀리 발해의 옛 산성도 보이고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아스라이 느끼다보니 어느덧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이 나타났습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던 청산리전투가 있었던 직소택에 오르려면 왕복 12키로 미터를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온지 오래되어서 비포장도로가 비교적 단단하고 유실된 곳이 없어 버스로 백운평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왕복 4키로미터를 걸었습니다.

     

  저 해란강 상류의 산언덕을 넘으면 백두산의 고원지대로 연결됩니다는 말씀으로 스님께서는 이곳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을 피하여 백두산으로 가고자 했던 당시의 독립군들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밀림이 무성한 산길을 굶주림과 추위로 떨면서 그 길을 올랐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들의 기상보다는 굶주림에 떠는 나이어린 아들 또래의 남자 아이들의 모습이 더 먼저 떠올랐습니다. 산길을 차를 타고 달리다보니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조선족 마을은 인원이 점차 줄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나가는 조선족들이 많아져서 이곳에 있던 조선족 초등학교가 지금은 빈 건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점차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산기슭에 아늑한 분위기로 자리 잡은 옛 마을 터에 정토법당과 정토수련원을 짓고 아울러 숙박시설을 지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곳에 수학여행을 오도록 하려고 계획하기도 했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청소년에게 되찾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도 하였습니다.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은 백운평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진 일본군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던 터였습니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은 없고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쑥대밭을 눈으로 직접 보니 가슴이 아련해져 왔습니다. 잠자다가 총칼 앞에 목숨을 잃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생각하니 순간 일본군이 미운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을 출발하여 스님과 함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이슬로 바짓가랭이가 젖어오는 가운데도 역사기행 팀들은 서둘러 산을 올랐습니다. 어떤 분은 그 바쁜 걸음 가운데서도 길섶에 핀 들꽃을 한 송이씩 꺾으며 산길을 올랐습니다. 아마도 청산리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에게 재를 올릴 때 재단에 올리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손길에 들린 들꽃처럼 예쁜 그 분의 정성어린 마음이 느껴지니 올라가는 발걸음이 더 숙연해졌습니다.

예전에 독립군들이 올랐던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다리는 지난 7월에 통일의병 역사기행에 참여하였던 어느 거사님이 남아서 이곳에 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그 분의 수고로움으로 놓인 다리로 건너면서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물길을 건너고 산길을 돌아 올라가는데 뒤에 중국 공안이 같이 산에 오른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하여 직소택에 하나 둘 모여서 독립군들에게 올릴 재준비를 하였으나 대표만 절을 올리고 해탈주를 급하게 낭송하고 마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아니나 중국에서는 재를 지내지 못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묵념을 올렸습니다. 묵념을 하기 전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묵념을 할 때 독립군의 죽음만 애도하지 말고 역사의 기록에 없는 민간인의 죽음도 함께 애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의도 없이 이곳에서 죽어간 일본군의 죽음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다시는 이웃 간에 전쟁이 없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을 내면서 그들의 영혼까지도 천도하며 묵념하겠습니다.”

비록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스님의 안내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심을 모아 묵념을 올렸습니다.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까 올라오는 길에 한 보살님이 꺽은 한 웅큼의 꽃다발이 나뭇가지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그 꽃다발이 준비한 재를 올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더 색색으로 예쁘게 보였습니다.

 

  다시 2.5 키로미터를 내려와 버스를 타고 청산리 전투 기념탑 앞에서 내려 간단히 단체사진을 찍고 무산의 철광산을 보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있는 양로원과 고아원을 지원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하시기 위하여 이곳에서 도움을 주실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따로 가셨습니다.

     

  평화재단의 이승룡 국장님의 안내로 철광석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이는 화룡시의 남평진에 도착하니 두만강 상류 물줄기를 앞에 두고 북한의 무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산시내 바로 뒤쪽에 회색빛의 철광산이 높다랗게 솟아있고 그곳으로 거대한 트럭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트럭이 이곳에 다 모인 것처럼 커다란 트럭들이 가득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며칠전 압록강변을 하루 종일 달리면서도 차를 보지 못했는데 이곳 무산광산에는 수많은 트럭이 철광석을 실어 중국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곳 무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은 무산-화룡-백두산-이도백하-백산-통화로 연결되는 기차로 통화에 있는 제철소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북한이 중국에게 앞으로 50년 동안 철광석을 가져가는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백두산을 지나는 기차길을 새로 놓아서 이렇게 철광석을 가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땅의 저 철광석이 싼 가격으로 중국으로 권리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차라리 우리가 가져왔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더 생기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좀 더 북한에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고 바램을 가져보게 되었습니다.

     

남평진을 출발하여 오면서 북한주민이 이곳에서 탈북하여 얼마나 인권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는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탈북 남성들의 귀환조치, 여성들의 인신매매, 어린아이들의 꽃제비 생활을 들으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 사람이 겪는 고통에 나의 작은 힘이나마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합니다.

 

  다시 화룡으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마친 역사 기행 팀은 12시에 대종교 3인묘로 출발하였습니다.

다른 때는 이곳에 올 때 낫을 가져와 벌초를 하였다고 하는데 오늘은 와서 보니 벌초가 깨끗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꾸준히 역사 기행을 다닌 성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은 항일운동의 중심에 계셨던 분들이라 하는데 그분들의 유해가 아직도 이곳 중국 화룡시에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분들의 이름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런 분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업적을 높이 새기는 것이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라 생각 하였습니다.

     

  다음은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일송정으로 가는 도로를 공사하고 있어서 도로공사를 하는 지점에서 멀리 정자를 보고 선구자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일송정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이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의 마음이 가슴시리도록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족, 고향을 떠나와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선구자는 그렇게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을 보고 우리 일행은 옛 대성중학교로 갔습니다. 대성중학교는 그동안 용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활동하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 후학을 바르게 육성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곳에 학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육받은 이들 중 후에 나라를 위하여 평생을 바치신 분들이 많음을 새삼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새로운 문명의 주인 되는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는 바르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일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 동안 두발로 걸으면서 알게 된 배달문명, 환인, 환웅을 거쳐 단군조선, 그리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새로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깨우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슴 가득히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리의 길임을 다시금 각오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지막 기행까지 마치고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침에 청산리에서 일행과 떨어져서 예전에 스님께서 도와줬던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이 그 인연으로 북한 난민을 적극 도와주셨는데 그분들께 점심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연길로 가셨습니다. 만나기로 한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모여 계신 분들이 스님을 너무나 반가이 맞아 주셨습니다. 벌써 20여 년 전 인연이라서 벌써 팔순이 넘으신 분도 있고 제일 젊은 분이 예순이 넘으신 분들이었는데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만은 청년보다도 열성적이셨습니다. 이 분들은 아리랑상조협회 소속으로 지금도 나진선봉 지역을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셨습니다. 회원 중 한 분은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면서 자신은 지난 6개월간 이상 출혈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북한의 일명 꽃제비 아이들을 위해 샤워 시설을 만들어 주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셨다는데 다음 주에 병원에 입원을 하신다는 말을 들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을 알뜰하게 보살펴주는 조선족 동포들이 계셔서 지금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교량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인생수업 책을 한분 한분에게 성명을 적어주시며 선물해 주셨고 이 분들도 각자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스님께 선물하셨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행에게 강의를 해주시기 위해 서둘러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기행을 마친 참가자들과 만나서 역사기행의 의의에 대한 스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이런 역사순례를 왜 하느냐? 뭣 때문에 9천년 전, 6천년 전, 천년 전의 이야기를 하느냐? 핵심은 첫째, 지금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길을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그 길을 찾으려면 과거 역사 속에서 어떤 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반성할 건가,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좀 더 좋게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지만 그때 그랬으면 하는 후회없이 미래를 맞으려면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자존에 대한 회복도 있어야겠습니다.”

 

  인간 존재는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제는 그제, 올해는 작년, 이렇게 과거의 인연과보로 현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과거를 바로 알면 내일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과거와 달리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해 나갈 수가 있다, 미래는 우리의 주체성, 자주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자는 미래를 살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역사의식이 없는 자가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좋은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밭에 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려면 현재의 조건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미래에 꽃이 잘 피고 자라기 위해서는 현재의 밭갈이와 씨앗 심는 실천을 어떻게 할 거냐가 중요합니다.”

     

  현재의 실천을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사관 정립, 현재에 대한 분석과 판단(남과 북의 조건, 국제정세, 역학구도, 동아시아의 판도 등),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과 전술, 이를 실천할 주체세력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갖춰질 때 역사는 타성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개선, 개혁, 혁명)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체역량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은 인민의 시대, 민중의 시대이므로 인민이 깨어야 합니다. 민중이 깨지 않으면 특별한 영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메시아, 성군, 전륜성왕 등 누군가가 나타나 천하를 구제하기를 꿈꿉니다. 이제는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사람이, 혼자가 아닌 다수가 그런 역할을 하는 모자이크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 한 사람의 깨달은 붓다가 아닌 모자이크 붓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사회의 방향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개인의 수행에 달려있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며, 사회적 조건을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빈부격차가 큰 사회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경쟁의 공정성과 분배의 공평함을 구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경쟁의 공정성이란 출발선에서의 기회 균등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라고 혹은 장애인이라고, 소수자라고 차별받지 않는 것, 기초교육을 모두 균등하게 받게 하는 것, 경쟁 관점에서의 룰의 공정성과 공정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조건을 중소기업이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게임이 끝났을 때 결과에 대해 평가가 공평해야 한다며 운동회의 달리기를 예로 드셨습니다.

 

  옛날에는 운동회 때 8명이 뛰면 3등까지만 상을 줬어요. 공책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요즘은 공책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옛날처럼 3등한테까지만 다 몰아주면 불만이 생기겠지요. 그러니까 모두에게 참가상 1권씩을 주고 나머지 가지고 1,2,3등한테 나눠줘야 해요. 이게 최저생계비 보장이고 사회 안전망 구축이에요. 이렇게 게임의 공정성과 분배의 공평함이 구현되어야 복지사회예요. 이건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좌니 우니 하는 것과 상관없어요. 변화한 사회에서 조금만 지혜로우면 알 수 있는 상식이에요.”

     

  이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문명사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문명에서 교훈을 얻어서 이 문명의 근본적 모순을 진단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래야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살피면 우리가 이전 1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분단이 되고 전쟁을 겪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건 그 전 100년이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100년이 다음 100년을 규정합니다. 아무 손도 안대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결과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못하면 영구분단, 강대국의 하위변수로 전락하겠지만 잘 하면 이 변화의 시점에서 통일한국을 이룩하여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를 통해서는 잘못된 것을 파괴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제는 분노를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며, 그렇기에 남과 북, 남한 안의 성장주도세력과 민주화 주도세력 간의 적대관계를 서로의 공과 과를 인정하는 관계로 전환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단순히 1+1=2가 아닌 3,4,5가 되는 비전을 향해 가려면 독립이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닌 대한민국의 수립이었듯이 통일도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면서 이런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라 하시면서, 배달문명이 수많은 소수민족을 아울렀듯이 동아시아 문명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명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세계인, 지구인의 개방성을 가지면서 민족 정체성이 있어야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간곡한 말씀을 끝으로 강의는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역사기행의 끝이 우리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발원합니다.

     

25일간 단식을 하시고 유동식으로만 복식 중인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안내해 주시고 강의를 해주신 법륜스님께 참가자들이 큰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음은 참가자들이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한 명씩 대표로 소감문을 발표했는데 각자 받은 감동의 크기가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기행 내내 운전 안전으로 고생하신 기사 3분과 가이드 조춘호 선생님과 따님인 조신 님에게 선물을 증정한 후 스탭과 스님의 하루와 강의 속기 적어주신 분, 사진을 찍어주신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몇 년 전까지 역사기행을 함께 하셨던 방학봉 교수님이 오셔서 참가자들에게 소개를 하고 간단히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전체 일정을 마치고 내일 오전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심양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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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

과거를 알면 미래를 어느정도 예측할수 있고 역사를 모르는민족이 창조적 문명을 만든적이 없다,우리모두가 모자이크 부처가되어 세상을 밝히자, 오늘도 스님의 멈추지 않는 지헤와 자비에 감사드리며 하루를 경건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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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05:13:33

봄선

좋은 가르침과 기행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면서 이런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라시면서, 배달문명이 수많은 소수민족을 아울렀듯이 동아시아 문명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명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세계인, 지구인의 개방성을 가지면서 민족 정체성이 있어야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_()_...

2014-08-11 12: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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