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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역사기행 여섯째 날이 밝았습니다. 모두 버스에 오르고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로 시작하는 새벽 4시. 오늘도 하루의 여행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스님. 오늘 지나갈 돈화평야와 목단강에 대해서도 알려주십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의 드넓은 벌과 긴 물줄기를 잠시 바라봅니다.
1시간을 달려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는 ‘요전자 24개석’을 찾아갔습니다. 분꽃, 접시꽃 등이 예쁘게 핀 깔끔한 시골마을 옆길을 지나 옥수수밭 옆길을 한 줄로 들어가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
다시 길을 달려 길림성에서 흑룡강성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고속도로를 지나면 길가를 따라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호수 ‘경박호’를 만납니다. 멀리 북만주 평야가 보입니다. 오래 보고 있어도 참 좋고 부럽습니다. 천혜의 자연이 이렇게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니! 또, 여기에서 우리가 한국에서는 잃어버린 고향의 정겨운 풍경을 만나다니! 저 벌판을 뛰어다녔을 유전자에 각인된 무의식이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남한에서는 1년에 식량이 총 500만 톤 생산되는데 여기 동북3성중 길림성에서만 1800만 톤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북한은 최소 400만 톤만 있어도 식량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이곳은 석탄, 철광의 산지로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리 한민족에겐 피눈물의 사연을 가진 간도의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발해진 쌀은 청 황제가 먹던 쌀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 위에 흙이 2~30cm 덮여있는데, 수원이 보장되고 물이 따뜻해서 위도가 높음에도 쌀농사가 가능한 곳입니다. 접근이 금지된 이 지역에서, 청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틈새에 쌀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조선인입니다. 1860년대의 관리들의 조세징수의 횡포를 피해서 두만강을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두만강 안에 있는 섬’이라는 뜻의 ‘간도’로 불리게 됐습니다. 청나라 건국 후 중국 전역으로 만주족의 지배층이 옮겨가면서 이 지역은 신성한 땅으로 봉금지역이었습니다. 발해의 땅이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지명도 용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진어를 음차한 것입니다. 조∙청 간의 협약으로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지만, 남북통일 이후 이 지역은 국경분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동북아의 2~30년 후를 내다보고 지금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이 중국과 협의해 북한을 압박하면 이후 국경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멀리 내다보며 통일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달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당시 발해의 수도 주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성터. 외성은 토석혼축성으로 한 변이 4km, 전체 16km에 달합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나무가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터 정문 앞길인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있는 흥륭사로 갔습니다. 흥륭사는 당시 상경용천부에 있던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흥륭사의 석등을 먼저 보고, 얼굴과 손가락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지금은 수리되어 깨끗해지신 부처님의 석상 앞에서 예불을 올렸습니다.
스님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생겨나지 않기를, 기아로 생존을 위협 받는 북한주민에게 생존권이 보장되기를, 우리의 여행이 원만하기를, 한인하느님, 환웅천황, 단군, 해모수, 고주몽, 대조영, 호국영령, 민주열사, 혁명열사, 사고와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영가, 조상 영가의 이름으로” 기원하셨고, 우리도 간절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천 년 전의 역사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박물관에서 발해의 영역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고 내성 길을 걸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장안성 못지 않게 큰 규모였습니다. 동궁 앞의 사람 얼굴 모양의 연못을 한 바퀴 돈 뒤, 내성의 궁성으로 들어서 제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갔습니다. 뒤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앞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뒤쪽의 궁터가 들어옵니다.
다음은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생긴 현무호 호수를 보고, 목단강으로 걸어가 7공교를 찾아봅니다. 7공교는 발해시대 북쪽 거란지역으로 통하는 길에 있던 교각의 흔적입니다만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리만 확인하고 다음 장소로 옮겼습니다.
다음은 항일유적지인 봉오동 전투 기념비로 이동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실패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독립운동 중 성공적인 전투의 하나였습니다. 버스에서 이 전투를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감격 어리게 기념비 앞에 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조선 내에 반일투지를 높이는 데 기여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무장독립투쟁입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면서 접경 지역의 중국, 러시아 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중국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계열이든 민족주의 계열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소중한 독립운동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가서 우리나라의 최북단 함북 온성군 풍서리를 건너다 봅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는 동안 이쪽의 풍요로운 자연과 저쪽의 가난한 자연이 대비되어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만강 가에서는 97년부터 몇 년간 봄에 얼음이 풀리면 도강하던 탈북민들의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돕는 ‘좋은벗들’의 활동은 그 동포들의 참혹한 모습이 계기가 되었고, 언젠가 이런 민족의 비극이 세상에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북한돕기를 할 때 누군가는 “북한 주민을 다 살릴 수 있나?”하고 물었는데, 스님은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티끌 보아 태산이라고, 살려야 한다. 현실의 일이 한계가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준비된 상황이 역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서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조∙중우호다리가 두만강 압록강의 교각 중 가장 큰 규모랍니다. 기근이 심하던 시기에 이 지역 사람을 통해 옥수수를 트럭에 싣고 갖다 주었다고 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수백 명이 기다리기도 했답니다. 이 옥수수는 온성 근처의 탄광과 공장 노동자에게 지원되었고, 그곳에는 국군포로 가족도 있었는데 ‘좋은벗들’이 난민지원 활동을 하던 중, 중국 공안에게 간첩협의로 잡혀 모든 장비를 압수당하고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이때 탈북민을 인터뷰한 자료가 당시 가장 북한난민에 대한 정확한 자료였답니다.
지금도 북한의 식량난을 여전하다고 합니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주민에 대한 지원은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이 만주를 활보했던 발해의 역사를 안고,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의 현실을 아픈 마음으로 보듬어야 할 것입니다.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이번 기행 중 다녀본 연회장 중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곳이라서 모두들 신기해했습니다. 원래 비싼 곳인데 공무원이었다가 퇴직하신 분의 도움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합니다. 식사 전에 참가자들은 그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그 분은 법륜스님이 하시는 일에 존경을 나타내며 맛있게 식사하라고 겸손의 미소를 보이셨습니다.
이제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다며 참가자들의 얼굴이 마치 아이들처럼 환해졌습니다. 식사 후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조선조 500년과 구한말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정리 말씀으로 강의를 여셨습니다. 조선이 개국하여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평화로웠으나 국란을 겪으면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전쟁의 피해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배세력이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주변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정조 때 개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순조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강화되며 가렴주구와 매관매직 등으로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였고 세금을 견디지 못하여 유민이 되었고 홍경래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고, 삼도민란이 일어났지만 이념과 조직이 없는 자발적, 산발적 봉기로 대부분 진압이 되고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혼란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최제우 선생의 동학이 일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가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지배세력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개혁을, 국외적으로는 개방을 했어야 했는데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은 수구세력으로 그치고 만 것입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하여 경복궁을 재건한다는 등 백성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했어요”
“외국에 가보고 온 젊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도움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어요.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은 이들이 아직 국가 경영을 할 준비도 안되어 있었고 역사의식의 부재로 외세를 등에 업고 한 요인이 컸고 그래서 나중에 이들이 친일세력이 된 것이에요”
이때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서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지배세력은 청나라 군대를 끌여들였고 일본과 청의 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땅에 들어와 우리 동학혁명군 약 30만 이상을 학살한 과정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 외세에 의한 개혁인 갑오경장, 그리고 이어지는 아관파천, 을사보호조약, 군대해산, 마침내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이르는 안타까운 역사의 과정에 대한 말씀에 이어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3.1운동의 실패로 현장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이곳 만주에 유격부대를 만들어 국내의 일본 초소를 침공하는 전략을 펼치자 일본이 국경을 넘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한 것이 봉오동 전투, 여기서 실패한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중국영토에 정규군을 보내 독립군을 소탕하려고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인데, 이 전투들에서 일본의 주력부대가 수천명이 사상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격부대의 승리는 전투에서의 승리이지 전쟁에서의 승리는 아니지만 일본제국주의의 강력한 부대가 이렇게 크게 패한 것은 엄청난 일이고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독립운동이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으로 갈라져 노선갈등이 생기고, 이를 통합하려는 신간회 등의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가고, 분단을 통해 이러한 분열이 심화되어 오늘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시면서 이제는 편가르기를 하며 서로 상대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기생이든 승려든, 양반이든 평민이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직업이 뭐든 중요하지 않아요. 독립운동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해요. 그가 나라를 위해 정말 노력을 했느냐를 보아야 해요. 그리고 젊을 때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변절한 사람을 모두 빼버리면 독립운동한 사람은 얼마 남지 않게 돼요. 역사에 대해서는 포용적으로 바라보아야 해요. 통합을 해야 하잖아요. 과거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되 화해를 하고 앞으로는 우리의 힘을 통일을 위해서 쏟아야 해요”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다만 식민지시대에 친일로 일관하고 해방 후에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분단과 독재와 반민주에 일조한 사람들은 반드시 진상을 밝혀 문책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습니다. 그리고 일견 실패한 것 같은 역사에 대한 의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3.1운동이 실패했지만, 없었다면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4.19도 마찬가지고.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는 성공한 것이에요. 통일도, 우리가 노력해서 통일을 이루면 좋고, 설령 실패해도 우리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후손들에게 자랑이 되고 성공의 단초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이 열등의식과 상처를 치유하고 인류문명의 주인공이 되는 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독립운동사가 정리가 안되면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통일을 한다면 우리의 민족적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고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상고사에 대해 정리한다면 중국에 대한 변방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현대문명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개인 수행이나 환경 문제 같은-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겪은 고통을 경험삼아 가난한 나라를 도울 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돕는다면 서양 사람들보다 더욱 인도적으로 하게 될 겁니다. 자신이 입었던 상처를 치유하게 되면 다른 이들을 이해하게 되고 해결책을 찾게도 됩니다.”
그래서 이 역사기행은 ‘민족사 전체에 대한 치유’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까마득한 우리 역사의 시원과, 선조들의 진취적 기상과 훌륭한 문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을 현장에서 보고 느낀 자긍심과 감동으로, 민족의 사명인 통일은 물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한발짝 나아가는 힘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역사기행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밤이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입니다. 내일은 저녁식사 후 밤새도록 심양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에서 자게 됩니다. 참가자들은 남은 무박 2일의 일정을 잘 보내기 위해 짐을 정비하고 역시 새벽 4시에 출발하기 위해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를 시작으로∙ 항일항쟁지를 둘러보고 용정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바로 심양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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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9. 동북아 역사기행 일곱째 날 -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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