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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 날로서 백두산(북편산문)과 발해 유적지 일부를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어제 날씨는 좋았으나 남편 산문이 폐쇄되어 오르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인지 4시 50분부터 버스에 오른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천지를 보고싶어 하는 열망과 설레임이 느껴졌습니다. 백두산 아래 마을 이도백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아침 공기가 싸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고 맑아서 상쾌했습니다. 여름 휴가철이 겹친 시기이고 최근 들어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으면 고생한다고 아침밥은 옥수수 두 개씩으로 해결하고 서둘러서 출발하였습니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가는 40여분 동안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보며 마음까지 시원해짐을 느꼈습니다. 북쪽산문 매표소 입구에 버스가 다다를 무렵 원시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입장 시각이 한참 남았고 참가자들이 추울까봐 스님께서는 걱정하시며 미리 나가지 말고 버스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6시쯤 버스에서 내려보니 우리 일행이 1등일 줄 알았건만 먼저 와 있는 중국 관광객들이 꽤 되어 다들 놀라워했고, 스님께서는 청년대학생 일정에서는 30분정도 더 앞당겨봐야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6시 30분 매표시간이 되자 표를 사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매표소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라워했고 우리나라에 비해 공중도덕이나 줄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두들 한마디씩 하며 표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첫 번째 일정인 천지를 보기 위해 셔틀버스와 승합차로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멀리 보이는 백두산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아래에서는 잘 보여도 또 올라가면 못 볼 때도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승합차에 오르니 운전기사가 우리나라 가수가 부르는 신나는 가요를 틀어주고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 같은 느낌이 나도록 달리는 바람에 모두들 짜릿한 즐거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며 15분 정도를 달려서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듬성듬성한 구름 사이로 활짝 열린 파란 하늘 아래 그 보다 더 짙푸른 천지 물과 웅장한 바위산들의 위용에 흥분한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백두산 정상을 좀 더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하시기 위해 여러 번 왔다갔다 하시며 챙기셨습니다.
조금 춥기는 했지만 모두들 개인사진과 스님과 함께 하는 조별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라갈 때와 같은 승합차를 타고 다음 순례 장소인 비룡폭포로 향했습니다. 비룡폭포로 갈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주차장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당황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중국관광객이 주워서 경찰에게 가져다 준 것을 우리 스탭에게 알려주어 찾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 일행과 스님까지 모두 박수를 치고 그 분들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20인승 셔틀버스를 잠시 타고 내린 후 1.2Km쯤 걸어가니 군데군데 누런색 유황 노천온천이 보이고 길게 내려오는 새하얀 물줄기를 따라 눈을 돌리니 멀리 회색의 화산 지형 사이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폭포가 보였다. 따가운 햇살이지만 스님께서는 한 명 한 명 비룡폭포를 배경으로 개인 사진을 찍어 주시고 비룡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원리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호의 안은 평탄해 보였습니다. 주변에 사스레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있어서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함께 잔잔한 물에 비춰진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스님을 따라 돌로 포장된 사스레나무 사잇길로 산책을 하니 고요하여 저절로 명상이 되었습니다.
소천지를 나와 스님을 따라 800여 미터를 걸으니 건너편에 위치한 녹연담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보았던 소천지는 맑은 물인데 비해 녹연담에 고인 물은 신비하게도 옥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은 폭포가 세 줄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몇 마리의 노란 잉어를 보고 함께 간 일행들은 “이렇게 넓고 깨끗한 연못에서 살고 있는 너희들은 참 행복하겠다.”하여서 함께 웃었습니다.
지하삼림을 가기 위해 셔틀버스 주차장에 줄을 서려고 하니 수많은 인파로 인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6년 전 쯤에 비하면 한국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고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보니 백두산이 중국인들에게도 의미가 있고 인기가 있는 곳임이 실감이 났습니다.
지하삼림은 말처럼 땅속에 숲이 있는 것은 아니고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곳을 말하며 주변을 삥 둘러서 절벽이 있으므로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이 갈라진 틈 사이로 깊고 좁은 계곡을 이루어 물이 흐르거나 지하로 흘러가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삼림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활엽수들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쭉쭉 뻗은 나무, 오래된 이끼 위에 다시 자라는 어린 나무, 쓰러진 나무, 연리지나무 등 온갖 나무들뿐만 아니라 풀향기와 꽃향기 등이 어우러져서 스님께서는 “지하삼림은 가는 길 자체가 볼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홍신작가께서 ‘대발해’ 글을 쓰실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그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1시간여의 지하삼림 순례를 마치고 버스 승차를 위해 또다시 줄을 서서 기다린 후 버스에 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 먹으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백두산 천지 잘 봤느냐며 물으시고 “백두산은 산을 넘어 민족의 혼입니다. 백두산을 본 공덕으로 맑은 기상을 갖고 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의 소금과 빛이 되고 천지를 본 힘으로 통일의 힘이 되세요.”라고 말씀하셔서 뭉클한 감동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힘들게 다니느라 몸이 피곤한데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밥을 빨리 먹으면 체하니 조심하라고 당부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어제 저녁에 맛있었지만 아쉽게도 넉넉한 시간으로 즐기지 못한 식당에 다시 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하고 2시 50분쯤 발해의 첫 수도인 돈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차에 타자마자 새벽부터 서두르느라 힘들테니 돈화가는 길에 2시간쯤 쉬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모두들 달콤한 낮잠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5시쯤 돈화의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동모산성은 대조영이 영주에서 탈출해 와서 이 곳 돈화에 자리잡은 후 세운 산성입니다. 주위는 평지이고 얕은 야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라 주변에서 오는 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대석하가 흐르고 있고, 우물도 있고, 병영자리, 거주지도 있다고 합니다. 평지성은 영승유지로 추정되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육정산에 발해 왕실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해인의 기록물이 나왔는데,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해인 스스로가 기록한 기록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아직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이 공개될 때 발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으로 돈화 시내에 있는 강동 24개석을 보러 갔습니다. 녹슬고 덜컹거리는 철조망 속에서 함부로 방치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강동 24석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아직 정확하게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
시내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어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일정을 돌아보시고 음식 먹고 체한 분들을 통해 욕구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작은 실수를 통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오늘 백두산 잘 다녀오셨지요? 피곤하지요? 구경하는데 6시간이나 걸려 점심이 늦었습니다. 일반 관광객은 우리처럼 자세하게 안 봐요. 천지 호수가 제일 크게 보이는 것은 북편이에요. 서편에서는 작게 보여요. 남편에서는 북한쪽 계단 내려가는 것이 안 보여요. 그런데 북편은 혼잡한 것이 문제에요. 하지만 오늘은 아주 한가한 편이었어요. 오늘 구경을 아주 잘하셨습니다.“
스님이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도 10명 이상이 체해서 강의를 못 듣고 있는 걸 예를 드시면서
“허기질수록 음식을 조금 먹어야 합니다. 25일 단식했으면 25일 넘게 음식을 거의 안 먹어야 해요. 폭식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피곤한데다 과식하고 버스를 계속 타서 체할 조건이 됐어요. 음식 먹는 까르마를 자기가 조절해야 합니다. 몸을 통제 못하면 성질도 통제하지 못해요. 자기 몸을 갖고 실험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해요. 이 세상에 공부거리가 아닌 게 없어요. 한 순간 놓치면 몸이 고생이에요. 하지만 작은 실수를 통해 배우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어요.”
“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걸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것이에요. 상황은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내게 유리하도록 바꿀 수 있어요. 이것이 수행이에요. 우리는 욕구대로 되어야 기분 좋아하는데 미래를 위해 몸을 위해 결국 나를 위해 욕구를 조절해야 합니다.“
이어서 오늘 주제인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계속하셨습니다.
발해는 처음 당나라에서 멀리 옛 고구려 북쪽 국경인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위쪽 흑수말갈을 흡수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통치했고 5경 중 3개 경인 중경, 상경, 동경을 이 지역에 두어 발해 중심지로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토가 큰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오늘날 발해 역사가 논쟁거리가 되니까 중국이 발해 유물을 공개하지 않고 현재 흑룡강성의 상경용천부만 공개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학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상경용천부를 보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발해 석등사진 정도만 다루죠? 발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없어요. 특히 신라와 발해가 싸워서 발해를 계승하는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실학이 들어오면서 발해 역사 연구가 비로소 시작되었어요.
발해는 잃어버린 역사입니다. 되찾아야 해요. 역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잊는 거예요.“
유대인은 자기 말은 지키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탈무드를 통해 민족의 역사, 신앙, 문화를 학교와 가정에서 철저히 가르쳐서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반면, 연변 조선족은 말은 지켰지만 조선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비교하시면서 역사기행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중국내 고구려, 발해 유적지 안내 책과 우리 말로 된 우리 역사책과 중국안 독립운동가 이야기책을 보급하는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교육은 왜곡되어 있어요. 국수주의적 역사를 가르치라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를 이해하려면 나의 뿌리와 사회적 관계를 알아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요. 교사는 너무 디테일한 지식에 매달리지 말아야 해요. 줄거리를 잡아 핵심을 가르치고, 의미를 부여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은 발해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의 한 무리라고 나와요. 고구려 지배계층이 권력 투쟁으로 분열할 때 중간층은 내 나라를 지켜야할 이유가 없어져요. 이럴 때 지도자는 백성들의 삶과 가까이 있고 지도부부터 힘을 합해야 합니다. 세월호 문제가 났을 때 여야가 분열하여 싸우면 국민은 양쪽이 똑같게 느껴지고 피곤해요. 고구려도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외부 공격에 지배 계층이 항복하고 고구려 유민들이 왕족을 내세워 저항하지만 실패하고 말아요. 고구려가 멸망한 후 696년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난 틈을 이용해 고구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영주를 탈출하여 추격하는 당군을 격파하고 진국을 세웠어요. 진국이란 큰 나라라는 뜻이에요.“
다음은 발해의 흥망성쇠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 당은 발해가 변방 국가라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당나라 측천무후도 가능한 전쟁을 안 하려고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셨습니다. 대조영이 죽자 큰아들 무왕(대무예)는 당나라에 강경 입장이라서 당나라와 연합하는 흑수말갈을 치려고 했는데 대문예가 전쟁을 반대하고 당나라로 도망을 갔지만 결국 흑수말갈지역을 흡수하여 발해 영토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왕이 죽고 문왕의 문예부흥 시대를 설명하셨습니다.
“문왕은 정벌 중심이 아닌 문치를 하고 당나라와 친하게 지냈어요.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그리고 동경용원부로 옮겼어요. 정혜공주는 문왕의 셋째 딸이고 정효공주는 다섯째 딸이에요. 왕위에 48년이나 있어서 치적이 깁니다. 산둥반도 절도사로 고구려 사람인 이정기가 임명되어 제나라를 세웠는데 제나라와 발해는 아주 사이가 좋았어요. 문왕은 당나라와 직접 부딪치지 않고 거란이나 일본과도 사이가 좋았어요. 다만 신라와는 전쟁은 안 했지만 관계가 소원했던 것 같아요. 남경남해부는 신라와 일본로는 왜와 연관이 있어요.
발해는 229년간 지속할 때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어요. 발해를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세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침공하여 부여성이 함락되고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자 왕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당나라가 먼저 멸망하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멸망합니다. 이들은 자체 붕괴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결국 중국 본토는 송나라가, 북쪽은 요나라가, 남쪽은 고려가 건국됩니다.”
발해는 고구려 역사의 전통성을 계승했고 발해사와 독립운동사 그리고 상고사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대발해가 왜 갑자기 멸망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입니다. 일본 학자는 백두산 폭발설(900년경)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폭발은 폼페이 화산보다 100배 이상 위력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주변국도 혼란기라서 갑자기 망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발해 유물로는 내일 가는 상경용천부와 발해석등, 대불상 그리고 영광탑, 강동24석 등 많지 않아요.“
강의가 끝나고 호텔로 이동하여 한 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짐 운반용으로만 사용하고 각자 걸어서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내일은 발해 유적지와 봉오동 전투터, 그리고 두만강 순례를 위해 4시에 출발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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