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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을 시작한 지 오늘은 셋째날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고구려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국동대혈과 국내성,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우는 장군총, 그리고 드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비와 릉에 갑니다. 그리고 이 곳 집안에서 점심을 먹고 북로를 따라 채석강, 관마산성, 서대묘, 천추묘를 차창으로 본 후 통화를 거쳐 백두산 관광지 거점인 백산을 향해 갈 예정입니다.
어제 공지했던 대로 국동대혈로 가는 버스는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하는 인사말이 떨어지자마자 새벽 4시에 바로 출발했습니다. 무릎관절이 아프신 한분의 보살님만 빼고 3대의 버스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끼고 달려갑니다. 출발할 때는 밖이 어두워 산을 어찌 올라가나 걱정스러웠는데 이내 환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맞이하는 이 새벽여명이 이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생기는 역사의식과 같게 느껴집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역사의식을 맛보는 기쁨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의 살인적인 일정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굴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30분가량 올라갑니다. 국동대혈이 있는 산은 개인이 관리하고 있는 산에 위치하고 있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올라가는 중에 오토바이를 탄 현지인이 쫓아와서 중국공안인줄 알고 살짝 긴장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산에 투자한 사람이 고용한 관리인이라고 하여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관음보살을 보시고 있는 관음굴에 도착하였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중국인들처럼 행복과 건강과 재물을 위해 빌어 봅니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長相愛)라고 쓰인 큰 바위벽이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긴 장(長)자를 쓴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제2대왕 유리왕에게 권력가의 딸과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둘이 싸우다가 집으로 돌아가버린 애첩을 데리러 갔다가 혼자 돌아오면서 이 곳에서 황조가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라고 스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가자 중 한 국어 선생님이 황조가를 멋들어지게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랑 바위를 보니 정말 애닯은 연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앞뒤로 시원하게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통한다고 하여 통천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정성스레 제단을 차리고 옥기 문명을 발달시킨 한나라 환인하느님, 청동기를 발달시킨 홍산문명을 기반으로 배달을 세운 환웅천왕님,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님,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님, 고구려의 동명성왕 이렇게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해가 뜨기 전 지내는 이 제사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스님께서 고구려의 후예로써 1400여 년만에야 찾아옴을 참회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공동체 출현을 천지신명께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제물로 올린 음식과 술로 다함께 음복하고 나서 둥글게 서서 남북한이 하나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며 ‘우리의 소원을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국동대혈에서 걸어내려오니 바로 앞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두고도 북녘 땅에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강물에 손발을 담그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습니다. 다시 숙소로 가기 위해 압록강변을 따라 내려가니 올 때 보이지 않았던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 멀리 자전거타고 가는 사람,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 물가에서 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반갑게 느껴집니다. 건너편은 자강도의 만포라는 곳인데 이곳과 집안사이에 하루 한번씩 기차가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이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되어 만포, 평양을 통과하여 집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봅니다.
아침 식사 후에는 고구려의 산성인 환도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시성인 국내성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9시도 안된 시간인데 햇볕이 벌써 따갑게 내리쬡니다. 북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지점에서 순례를 시작하면서 국내성에 대해 스님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국내성은 동쪽, 서쪽 길이가 짧고 남쪽, 북쪽 길이가 긴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가장 공격받기 쉬운 곳은 성문과 모서리입니다. 고구려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 공(工)자성을 쌓았으며, 모서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치성을 쌓거나 각지기 않게 둥글게 굴려서 쌓았습니다. 동쪽 성벽이 가장 파괴가 심한데 이유는 도시화가 되면서 사람들이 이 돌로 집을 짓거나 때론 성벽을 허물고 그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북쪽, 서쪽은 보존 상태가 그래도 조금 좋고 남쪽은 현재 복원중입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성벽 위에 나물을 말리거나 빨래가 널려진 모습을 보면서 425년 동안 강성했던 한 나라 수도의 유적지가 이렇게 남의 땅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모습 속에서 처량함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멀리 북쪽으로 어제 보았던 환도산성이 보입니다. 서쪽 벽에는 통구하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해자기능을 하고 있는데 백암산성, 환도산성, 오녀산성 그리고 오늘 국내성에서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는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기술과 지혜는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를 거쳐 이루어졌을 것인데 틀리면 묻고 잘못되면 고치고 안 되면 다시 하는 우리 정토행자들은 고구려의 후예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통구하는 남쪽 성벽 앞을 흐르는 압록강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따라 걸으면서 스님께서는 북한돕기를 시작한 계기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1995년도에 북한 압록강에 대홍수가 나고 나서 식량난이 심해졌다고 들으셨는데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가이드가 직접 배를 태워 비참한 실상을 보시고야 북한 돕기에 적극 뛰어드셨다고 합니다. 북한 아이들은 배고프지만 인도의 아이처럼 “박시시”하면서 구걸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시고 북한아이를 돕기를 발심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 비만으로 고생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는 이러한 불균형을 생각하면 어이없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18년 동안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한 북한을 돕고자 노력하신 스님과 이제는 JTS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통로가 있음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봅니다.
다음은 2000년 동안 그 웅장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군총으로 향합니다. 장군총에서 스님과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사료가 아쉽게도 없습니다. 중원을 차지했던 중국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변방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무덤은 왕의 무덤이 아니라 장군의 무덤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 같습니다. 장군총은 7층 22계단으로 되어 있고 전체 돌이 110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돌에 홈을 새겨서 돌이 밀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돌이 밀리지 않도록 주위에 호석이라 불리는 받침대를 3개씩 두었는데 12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가 없어진 곳은 찌그러져있습니다. 그리고 관을 두는 석실의 뚜껑을 덮는 돌이 무게가 50톤이나 됩니다. 또한 지반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땅속에 진흙과 강에서 나온 돌을 넣었습니다. 진흙은 지진이 발생할 시 탄력성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5층에 석실이 있었고 꼭대기위에는 누각이 있었습니다. ”
장군총 뒤쪽엔 제단과 함께 장수왕의 후비무덤으로 보이는 배묘가 있는데 그 모양이 고인돌과 거의 같습니다. 이곳 집안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구려의 돌무더기 무덤양식에서 청동기시대 유행했던 고인돌묘가 조금씩 변화되어 옴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줄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 한민족의 자손으로써 긍지가 느껴집니다. 이곳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 육로로 통해 이 곳 집안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다음은 광개토대왕비로 이동을 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 높이 6.39m, 너비는 1.34m에서 2m입니다. 장수왕은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고 건국부터 호태왕(광개토대왕의 다른 이름)까지의 역사도 기록했습니다. 중심은 호태왕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비석은 어마어마한 큰 돌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글자를 새긴 것인데, 웅대한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습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로 죽음을 맞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묘입니다. 그 업적에 걸맞게 묘의 크기는 장군총의 크기보다 훨씬 큽니다. 장군총은 한변의 길이가 32.6m이지만 광개토왕릉은 65m나 되고 호석도 한 변에 5개나 둘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쌓다보니 강돌이 아닌 산돌까지 넣고 쌓아서 많이 무너져 상당 부분이 돌무지처럼 변했습니다. 제대로 된 발굴과 보존작업이 시급해 보이는데 남의 나라에 있어 손쉽게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집니다.
집안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큰 돌무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갔습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크기가 큰 묘는 천추묘라고 합니다. 서대묘도 보고 내일 만나게 될 백두산에 가기 위해 백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계곡에서 아침에 산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통화를 가는 길은 집안으로 가는 길 중 북로인데 가는 길에는 관마산성 성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산과 산이 조금씩 좁혀들면서 마주 보는 곳에 병목현상이 생기는데 이곳에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산성을 쌓은 곳입니다.
백산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전처럼 로비에 짐을 가지런히 놓은 채 바로 강의장으로 모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답사의 부족한 부분을 정리해 주시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서는 띄어쓰기 오류, 지워진 글자로 인해 생긴 임나일본설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표와 지도를 보고 우리 민족의 시대적 흐름을 알기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지도를 보면 만주벌판, 북경, 산동반도, 내몽골이 다 배달나라의 영역에 있는데 점점 축소되어 현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요하문명은 배달 문명의 중심지역이며 그 일파가 서남쪽으로 내려가 중원에 근접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일부 유민은 고조선지역으로 철수하고, 또 일파가 동쪽으로 이주해서 평양까지 내려오는데 이쪽까지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부여시대는 동북쪽은 부여가 차지했고, 반도 쪽으로 마한, 진한, 변한, 옥저, 동예. 동쪽은 여진족, 서북쪽은 거란족, 선비족 흉노족이 분포하고 있었어요.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만주벌판 국가들은 고구려로 통합되었습니다.”
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의 과정에서 당나라의 힘을 빌렸기에 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주성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나라는 백제 멸망후 부여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멸망후 평양에 안동도호부와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채고 당나라와 8년간 다시 싸워 당나라를 몰아낸 부분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고구려 옛땅을 차지할 생각을 안했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반도만 차지한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극진한 태도를 취했거든요”
또, 고구려의 패망과 발해의 재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시다가 창조성을 이끌어 내주셨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663년에 두 차례 침공을 했으나 실패했어요,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형이 당나라로 가서 군대를 빌려주면 당나라에 조공의 예를 갖추겠다고 하지요. 결국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구려는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인구의 5%인 20만명을 중국 전역에 분산 귀양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고구려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꼭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이 창조가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끊임없이 조정해 나가는 것도 창조라는 것을 이번 역사기행 일정을 현지 상황에 따라 조정해 가는 것과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고구려는 자주성은 있는데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데다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안주해 버리니까 결국 패한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배우고 실패하고 도전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답습하면 정체가 되므로 있는 것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공해도 조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중국의 변방국가, 일제침략, 서양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중국은 자기 대륙 안에 들어와서 이룬 몽골의 원나라, 선비의 연나라까지도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역사가 더 커졌어요. 반대로 우리는 배달 문명의 후예인 여진, 거란, 선비까지 중국 역사로 치부해 버려서 역사의 폭이 좁아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중원과 대등한 역사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배달민족 아래 조선족이 중심이 되었다가,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족이 한번 큰 세를 이루며 형제에게 밀렸고 지금 남은 것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남북통일은 물론 일본과 문명적 연대 그리고 중원까지 연대하면서 서양문명을 극복하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친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일 일정을 위해 아쉬움을 남긴채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했지만 참가자들이 한결 더 친밀해진 것 같습니다. 내일은 림강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이도백하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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