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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 둘째날입니다. 어제 첫날부터 강행군으로 시작되었지만 참가자들 모두 제 시간에 맞춰 버스에 탑승하여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홀본산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차창 밖에는 40여년 전의 시골 고향집에 보았던 백일홍, 과꽃, 맨드라미, 채송화, 봉숭아, 호박, 박꽃, 가지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보여 낯익고 정겨웠습니다. 벽과 간판에 쓰여진 한문만 없다면 영락없이 어린시절 살던 고향길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여행 길 같습니다. 홀본산성은 아래 마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괴물을 물리친 다섯 선녀의 설화가 생겨 오녀산성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어느덧 홀본산성 기념관에 도착하여 스님으로부터 홀본산성의 지형과 유물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습니다. 어제 본 백암산성에 이어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의 특유한 축성 기술에 관해 자세히 들은 설명을 듣고 나니 민족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드디어 산성으로 올라가는 셔틀버스에 타고 구비구비 산모롱이를 돌아서 도착하니 입구에 오녀산성비가 보였습니다. 비문이 잘 보이도록 서서 도착하는 대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좁고도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 역사기행동안 스님을 따라 이 땅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면서 민족의 숨결을 느끼고 오리라 발원했었는데 스님 바로 뒤에서 한 걸음의 발치로 따라 가게 되어 산성 올라가는 길이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돌계단을 오르시면서 이 홀본산성을 처음 답사하실 때의 재밌는 사연을 들려 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모두 하나가 된 듯 신기해하고 재밌게 들었는데 이 경험을 사례로써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과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지혜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 7월 명상부터 단식을 하시다가 역사기행 출발 직전부터 보식을 시작하신 스님은 기운이 좀 없으신지 평소와 달리 걸음을 자주 멈추시고 숨을 고르시곤 하셨습니다. 스님의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며 계단을 오르다보니 별 힘든지도 모르게 어느 덧 정상 가까이에 도착했습니다. 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평평한 곳에 오밀조밀 앉게 하시고 스님께서는 서신 채로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임을 일깨워 주시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분으로부터도 들어본 적 없는 가슴 벅찬 우리들의 역사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서문 자리에 가서 어제 백암산성에서 봤던 모습과 꼭 같은 성벽의 모습과 성문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평평한 가운데 천지가 나타났는데 왼쪽은 사람의 식수로 사용한 우물과 오른쪽에는 동물들의 우물로 사용했다는 산 중의 우물이 지금도 맑았습니다. 다시 좀 더 길을 따라 가니 곡식창고가 보이고 세계에서 세 민족에게만 있는 온돌 문화를 그 옛날 고구려 조상의 유적에서 가장 우수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집터도 보입니다. 이렇게 이곳은 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물, 곡식, 잠자리의 세 박자를 다 갖춘 곳이라고 하니 고구려의 후예됨이 자랑스러웠습니다
.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은 안개가 낀 신비로움을 안고 유유히 흐르고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운 이 곳에 정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우리의 소중한 유적의 돌길을 쓸고 있는 중국의 아주머니까지도 정답고 고맙게 다가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섶에 보이는 풀들과 야생화도 대부분 낯익은 것이었습니다. 싸리꽃, 애기똥풀, 쑥, 둥글레, 질경이, 비단초, 이름 모르는 익숙한 풀과 나무 그리고 땅내음 그 곳은 내가 이미 살았던 곳처럼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면면히 이어져 온 그 생명들에게 경배하게 됩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밟았던 고구려 옛 수도 홀본산성의 3시간 30분간의 도보기행을 마치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지만 돌아 보이는 이 마음은 그 곳에 둔 것만 같았습니다.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오후에는 원래 국내성을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내일 보게 될 5회분 5호묘 벽화 설명에 시간이 많이 걸려 다른 관광객이 별로 없는 오후 시간에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정을 변경하여 5회분 5호묘로 향했습니다. 4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박물관에서 스님께 벽화에 대한 사전 안내를 받거나 시원한 지하 고분에 들어가 조춘호 선생님에게 벽화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여행 내내 항상 후발이었던 3호차 교사팀이 이번에서 선발팀이 되어 출발하도록 스님께서 배려주시니 3호차 탑승자들은 함성으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3호차에 해당하는 조가 먼저 고분 속으로 들어가 조춘호 가이드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1500년 전의 오색의 색채가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는 신비로움과 벽화 속에 담긴 민족의 생각과 기술은 놀라움 그대로였습니다. 고분에서 나와 전시실로 들어서니 여러 고분에서 나온 벽화 전시물을 가지고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벽화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고분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더 명확하게 정리 되었습니다. 이 무덤은 현재까지 집안에서 확인된 20기의 고구려 벽화 고분 중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일반의 내부 관람이 허용된 곳이라고 합니다. 해의 신과 달의 신, 수레바퀴 신, 농사의 신의 벽화를 통해 듣게 된 민족의 신앙, 당시의 시대상과 5부족에 대한 설명은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감동이었습니다.
5회분 5회묘 관람을 마친 호차는 다음 목적지인 환도산성으로 향했는데 산성의 규모는 매우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 중 하나는 평지성과 산성이 한조를 이루게 되는데 환도 산성과 국내성이 한조를 이루어 평상시에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시에는 환도산성으로 이동하여 항전하였다고 합니다.
환도산성 입구에는 산성하 무덤떼가 널리 자리잡고 있었고 마을의 주택 가운데도 무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산성하무덤떼란 산성 아래 무덤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기단을 쌓고 맨 위에는 큰 돌을 얹은 적석무덤입니다. 이런 무덤형식은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양식인데 계급이 높을수록 기단의 수가 많아지게 쌓았다고 합니다. 황혼이 내리는 고구려 환도산성아래 무덤길을 여유롭게 걷는 모습이 아름다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됩니다. 해질녘의 길을 걸어가는 행렬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환도산성에 가장 늦게 도착한 1호차는 중간에 공사 차량으로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걸어오다가 공사가 진행이 잘 안 된 덕분에 가까스로 다시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이번 기행은 순조로운듯 하면서도 가끔씩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참가자들은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평탄한 여행보다 우여곡절이 있는 여행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계속 전체 참가자들이 같이 움직이다가 호차별로 일정을 교대로 하다보니 각각 경험하는 것도 달라 한 여행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재밌고 환도산성 옆으로 흐르는 통구하 상류에서 여유롭게 발을 담그는 망중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일정대로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물 흐르듯이 여행을 즐기니 이 속에서도 무유정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근처 압록강변도 잠시 구경한 다음 호텔로 이동하여 간단히 짐을 풀고 샤워도 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 강의장에 모여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두 번째 강의를 들었습니다.
먼저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후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유리가 아들의 증표를 가지고 찾아와 주몽 사망 1년 전에 태자로 즉위했지만 세력 기반이 약해 결국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던 상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고구려가 고토회복을 외치며 요동으로 진출하다 보니 중국의 여러 나라와 부딪치게 되어 결국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25년 동안 3번이나 국내성이 함락됐던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고구려가 집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고토회복을 위해 요동으로 나아가다 보니 한나라와 부딪치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동태수 공손씨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지요. 고구려가 한나라의 4군들을 격파하게 되고 한나라를 이은 위나라와 부딪치니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략 당하게 되었어요. 결국 동천왕이 전쟁에 패하고 국내성, 환도산성까지 함락되었습니다.”
이어 연나라 모용왕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 때 연나라와 부딪치게 되고 모용왕이 쳐들어왔어요. 국내성으로 오는 길은 북로와 남로가 있어요. 북로가 쉬운 길이고 남로가 조금 어려웠어요, 고국원왕은 틀림없이 북로로 쳐들어 올 거라 생각해 주력군을 북로 쪽에 배치했는데 모용왕이 남로로 쳐들어와서 국내성은 물론 환도산성도 함락되었어요. 모용왕은 고구려의 주력군과 부딪치면 위험하므로 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황후와 왕의 어머니를 납치하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파가고 포로 오만명을 데려갔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예를 갖췄는데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만 1년 뒤에 받고, 어머니와 부인은 20년 뒤에나 돌려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난세에 이루어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이 훗날 고구려와 백제간 원한의 원인이 되었으니 보복의 역사는 항상 또 다른 보복을 부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쳐들어왔고 고국원왕이 전사했어요. 같은 부여족의 후예끼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 고구려는 백제에게 원한이 생겼어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은 대부분 백제를 공격해서 확보한 거예요. 원한에 사무쳐서 백제의 하남 위례성을 공격하고 백제는 조공의 예를 갖추었어요. 그런데 백제는 다시 고구려에 저항을 해서 장수왕때는 철저하게 위례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어요. 그때 백제는 공주로 내려갔고 그래서 고구려 영토가 충주 지역까지 확장된 겁니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도 굉장했어요.“
계속해서 오늘의 주제인 민족의 시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주셨습니다.
“고구려는 부여가 뿌리이고, 부여의 뿌리는 단군조선, 배달나라, 환인 한나라라고 했어요. 문명의 후진국인 토착 세력 중에 곰족은 이주민과 결혼하고, 호랑이족은 배타적이고 저항을 했기 때문에 호랑이족은 정벌을 당했어요. 이곳에 몽골, 거란, 여진, 선비, 갈족, 강족, 저족 등의 민족들이 살았는데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 속에 선진문명이 들어왔고 곰 토템 민족만 이주민과 결혼을 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배달나라에 있었던 일이고 계몽을 하면서 국가를 경영하는 능력을 키웠어요. 이중에서 흉노족, 선비족이 먼저 독립적으로 국가를 형성했어요. 고구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거란족, 여진족이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를 세우게 되지요. 몽골의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했지요. 이들 민족 전체가 배달문명의 후예들이고, 환단고기에는 민족이 9개가 나눠져 있었다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유행했던 실증주의의 관점으로만 봐서 환단고기를 무조건 위서라고 하지 말고 오류는 오류대로 인정하되, 전반적인 기록에 대해서는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누구의 역사냐가 아니라 문명의 진실을 찾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찬란한 배달(요하) 문명을 밝힐 수 있지 않겠나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역사의 지난 2천년은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면서 앞으로 어떤 자세로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역사의식은 동아시아 변화, 세계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와 아주 밀접해요. 북한까지 포함해서 이 문제를 푸느냐, 일본은 물론 중국과 협력해서 어떻게 할 건지를 생각하게 해요. 주인의식을 가지면 큰 틀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의식이 있으면 비굴함이 없이 당당할 수 있어요. 서양인을 만나도 영어를 못해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서로 인정하고 앞으로 발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특히 상고사는 조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확인하자는 것입이다.”
마지막으로 자랑스러운 상고사를 되찾음으로써 우리의 민족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역사관을 넓혀서 거란, 여진, 몽골 등의 배달의 후예들을 포용하고 그들을 지원하여 배달 문명의 역사를 발전시켜야 할 우리의 사명을 명확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야 민족의 상처가 치유되고 주변국에의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변방이 아닙니다. 동아시아의 문명의 큰 두 축, 즉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중 요하문명을 계승한 민족입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좀 더 역사관을 넓혀서 우리 민족과 함께 했던 거란, 여진, 몽골 등도 배달 민족과 고조선의 후예인 형제와 이웃으로 생각해야 우리의 역사가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만주어나 여진어의 회복, 몽골인들을 지원하여 소수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도와줘야 합니다. 요즘 세태처럼 몰민족적인 사고를 하거나 지나치게 배타적 민족주의적 사고를 하지 말고 역사의식을 키워 함께 발전시켜 우리나라의 역사가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 자주적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강의가 끝나니 역사기행 두 번째 날도 어느새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일은 국동대혈과 국내성,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둘러보고 백산으로 이동하는 일정으로 3시 20분 기상 예정입니다.
오늘 스님의 하루 기행 부분은 박영미님이, 강의 요약은 김정윤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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