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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기르에서 묵은 호텔은 정원도 룸도 인도 성지순례 코스가 아닌 듯 쾌적했습니다. 안개가 많아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라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한 사람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스님의 첫인사로 시작한 오늘 하루도 일정이 빼곡합니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둠을 뚫고 차량은 행렬을 지어 출발하였고, 육지의 강의 다리로는 가장 길다는 마하트마간디브릿지를 건너 5시간여를 달려서 8대 성지 중 하나인 바이샬리에 도착했습니다.
차 안에서 천일결사 기도를 올린 후 성지순례 기간 중 공부 삼을 명심문과 발원문을 합창했습니다.
명심문 : 온갖 분별심은 다 내 업식이 지어내는 상일 뿐입니다.
발원문 :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오늘 첫 순례지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탑이었습니다.
스님께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곳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유골인 사리를 8개 나라의 민족이 나눠 가지고 가서 기념탑을 쌓았는데, 8개 중에 현재 3개의 탑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찾은 탑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이 세운 탑이고, 진신사리는 파트나박물관에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처럼 관리가 철저하지 않아서 현재는 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밑둥치의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한다는 것은 몇 생애에 걸쳐 복된 일임을 알고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 아직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예불공양을 올리고 스님께서는, “이 진신사리탑을 친견한 인연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는 배불리 먹고, 병든 이는 속히 쾌차하며,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받는 일체중생의 갖가지 소원이 원만 성취되어지고, 분단된 지 68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적대관계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하루 속히 통일한국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그리고 북한 주민이 굶주림과 추위와 병듦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발원니다.”고 하셨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이후에 점점 쇠퇴하다가 아쇼크 왕 때 멸망하고 2300년 동안 나라의 중심지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부처님과의 큰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당시 인도에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절대왕국인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과는 달리 국정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공화정이었던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특별히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의 길을 떠날 때 “여래가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하시며 돌아보셨고,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던 도시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국회가 새로이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의 물을 가져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이샬리는 여성 최초의 출가지로서 여성 해방운동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풍속으로는 삼종지도로서 어려서는 아버지의 딸로, 결혼하면 남편의 아내로,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어머니로 남자에 예속되어 존재할 뿐, 여성 스스로는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을 못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여자가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의 소유가 아닌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불린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천민인 우파리도 출가를 허용하는 계급타파를 주장하신 부처님이시지만, 여성의 출가는 승낙하기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출가한 사람이 많았던 석가족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이 없는 여성이 500명이나 되었고, 불법에 귀의한 500명의 여성을 대표하여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하파제파티가 세 번이나 출가를 청하셨지만 승낙을 안 하시고 부처님은 이곳 바이샬리로 오셨다고 합니다.”
이에 500명 여성들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맨발로 부처님 뒤를 따라 가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왔다고 합니다. 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아난다 존자의 요청을 받은 부처님께서 8가지 조건을 걸어 어렵게 승낙을 하여 첫 500비구니가 탄생했다고 하시며, 초기 비구니 스님들의 결의에 찬 수행담도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하였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이들도 있었으나, 현재 인도 등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는 우리나라 불교와 스님이 안 계실 때는 재가신도도 당당하게 목탁을 치며 예불할 수 있는 정토회와 함께인 것이 새삼 뿌듯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행차 바이샬리로 오셨을 때 유녀 암라팔리의 망고원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에 암라팔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리고 기쁨에 넘쳐서 다음날 공양을 청하였고 수락을 받고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오던 바이샬리 왕족인 릿챠비족 사람들의 수레와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공양 초대권을 10만금과 바꾸자는 릿챠비족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 풍요로운 바이샬리 마을 전부를 준다 해도 양도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법에 귀의한 이들의 특별한 자부심이 넘치는 자세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곧이어 부처님을 친견한 릿챠비족이 부처님을 공양에 초대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암라팔리와의 선약이 있다고 왕족의 초대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에 대한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에 왕족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는데, 만약 스님이 부처님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튿날 공양 후 설법을 듣고 감동한 암라팔리는 자신의 망고원을 승단에 기증하게 되었고, 후대에 그곳에 큰 절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바이샬리는 세계여성운동의 성지로 가꾸어도 될 만큼 진보적 도시였으며, 스님께서는 바리샬리에 비구니의 첫 출가를 기념하는 비구니 사찰과 여학교를 세우고, 여성의 행복과 권리주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
부처님께서는 큰 가뭄이 들어서 걸식이 힘들어진 500 제자들에게 인연따라 흩어지라고 하고, 부처님은 아난존자와 함께 벨루바나(대나무숲)에서 우안거를 지냈는데, 연로하신 부처님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아난존자는 안거 중에 돌아가실까 염려하였으나, 한편으론 부처님이 열반 이후의 어떤 말씀도 안 하셔서 안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유수행(수명을 연장하는)으로 우안거를 넘기고 제자들을 불러서 유명한 ‘법등명 자등명’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잘 닦으라는 설법도 바이샬리에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8대 성지 중 아쇼카 석주가 가장 잘 보존된 원후봉밀터로 갔습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공양과 경전독송, 명상시간을 가졌습니다. 500개나 되는 수행자들의 발우 중 원숭이가 부처님의 발우를 알아보고 꿀을 공양 올린 곳이고, 수천마리의 원숭이들이 땅을 파헤쳐 연못을 만들어서 부처님을 목욕하게 한 것을 기념한 곳이라고 합니다. 햇볕에 눈이 부셔서 다들 찡그리는 것을 보시고 스님께서는, 재단 차릴 곳이 이 위치뿐이어서 대중들이 햇볕을 보게 되었다며 눈이 부셔도 이해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햇볕의 방향까지도 늘 대중을 먼저 배려하심에 감동하고 죄송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식사 때면 조별로 순회하시며 공양을 하십니다.
11시가 넘어서야 먹게 된 오늘 아침공양은 광주전라지역 식구들과 함께 하셨는데, 일일이 한 사람씩 이름과 소임을 물어주셨고, 지지부진한 광주불사도 챙겨주셨습니다.
8차년도부터 새로 시작하는 광주전라지부를 잘 꾸려보라는 격려 말씀도 주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식곤증 덕분인지, 8일째 빡세게 돌아가는 여독 때문인지, 다음 순례지로 떠나는 차안에선 거의 대부분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중 스님의 송수신기 안내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란 케사리아탑 앞에 모이니 320명 인원이 적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 바이샬리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와 전송하고서도, 떠나지 못함을 보시고, 강을 건너신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웠고 떠내려 온 발우를 기념하는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스님께서 처음 성지순례를 다니시던 때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탑이고, 15~6년 전 쯤 인도에 오셨을 때, 케사리아탑이 발견된 신문을 보았지만, 이처럼 큰 탑인 줄도 모르고 들르지 않았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한쪽은 발굴이 덜 되어 나무가 자라는 산의 형태인 탑에는 군데군데 반짝이는 금박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교신자 중 금박지를 붙이는 것은 태국문화이고, 흰 천을 걸어두는 것은 티벳문화, 꽃이나 향을 올리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버스에서 일행이 내리면 금새 장사진을 치는 아이들의 구걸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이는 듯합니다. 줄을 세우고 참배 때 올린 공양물을 나눠주면 풍경이 그들에게는 축제처럼 즐거운 일이지만 보는 내 마음은 측은하고 씁쓸합니다.
케사리아탑 참배를 마치고 쿠시나가라로 향하는 길은 울퉁불퉁 덜컹거리고, 먼지는 뿌옇고 차안은 한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인도에서라도 에어컨을 틀지 말자는 원칙이라 더위를 견뎌내야 했는데 그나마 간타키강을 건너는 다리 앞에서 공사를 하느라고 도로가 좁아지면서 차들이 막혀서 30분여를 다리 위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은 길도 내내 막혔습니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인도에서 예정대로 안 된 처음 사건이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라고들 했습니다. 덕생법사님께서는 어느 해인가 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가는 길이 막혀서, 버스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호텔에 도착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천천히 지나가는 반대 차선의 차안에서는 대형버스가 줄줄이 늘어선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또 그러는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줍니다.
어제 저녁 숙소에서 빨았다가 안 마른 수건이며 양말들을 커튼줄에 줄줄이 널어놓고, 쿨쿨 잠을 자고, 차가 멈추면 들에 나가 큰일도 작은 일도 척척 해결하는 풍경들이 어느새 인도인이 다돼 가는 듯 재미있습니다.
간타키 강가에서는 누군가의 화장이 진행되고 있었고, 차를 타고 지나는 인도의 들녘은 평화롭고 풍요로웠습니다.
스프링쿨러가 뿌리듯 촉촉한 이슬이 내리는 이곳은 건기라지만 작물들에겐 충분한 강수량일 듯합니다. 야자수 바나나 나무가 조화롭게 자라는 들녘에 밀, 유채, 땅콩, 감자, 브로컬리가 잘 자라고 사탕수수밭은 이제 막 수확철인 듯 보입니다.
어릴 적 고향집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동네를 지날 때면, 아이들은 좋아라 손을 흔들어대고, 갖가지 모양으로 소똥을 말리는 풍경이 구경할 만 합니다.
시간이 늦어져서 오늘 예정인 춘다의 공양터는 가지를 못하고, 제주 관음사가 본사인 대한사에 들러 우리 입맛에 꼭 맞는 정성스런 저녁공양을 먹고 호텔에 여정을 풀었습니다.
내일은 오늘 보지 못한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인 춘다의 공양터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다는 카쿳타 강과 열반당, 라마르총을 참배하고 룸비니를 찾아 네팔 국경을 넘습니다.
감기가 심한 듯한 스님께서 푹 주무시고 내일은 쾌차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