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1.9. 인도성지순례 일곱째날 - 라즈기르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 대학

성지순례 7일째입니다. 3일 동안 편히 풀어놓았던 짐을 싸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지난밤 수자타아카데미에 보시할 물건과 반찬들을 내어 놓았기에 가방의 무게는 좀 가벼워졌습니다.

순례단은 새벽 430분에 기상해서 아직도 깜깜한 새벽 5, 부처님의 성도 전과 성도 이후 이야기와 유적이 넘쳐나는 라즈기르로 출발합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예불을 하고 스님께서 오늘 일정을 안내합니다.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오늘 일정은 정말 기대됩니다.

라즈기르의 옛말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사성을 말합니다. 라자는 왕이라는 뜻이고, 그라하는 집을 뜻합니다. 그러니 라자그라하는 왕의 집이 있는 성이란 뜻입니다. 라자그라하는 부처님 당시 북인도의 강대국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스님께서 안내해주셨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부처님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합니다. 카필라 성을 떠나 출가하신 부처님은 이곳 왕사성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셨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첫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성도 후는 1천 명의 비구와 함께 돌아와 이곳에 자주 머물면서 교화 설법하여 빔비사라 왕은 물론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마하가섭 등 유능한 제자의 귀의를 받고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영축산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부처님께서 자주 머무시며 법을 설하시고 교화하신 왕사성에 대한 안내를 쉽고 재미있게 해주셨습니다.  

영축산 입구에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빔비사라 로드표지판이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던 길이 있고, 신하들도 뒤로 하고 왕 혼자 부처님을 만나러 걸어갔던 길을 만납니다. 강대국 최고 통치자인 빔비사라 왕의 고뇌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을 만나서 내어 놓았던 고민만큼 가벼워졌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우루벨라 가섭을 통해 부처님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왕자일 때 평생 소원이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이 내 나라에 출현하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그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부디 저의 왕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십니다. 부처님은 걸식만을 했고 궁성 출입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왕사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왕궁 밖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후에 가게 될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입니다.”  

당시 강대국 왕의 공양도 물리치는 부처님과 그런 부처님의 법문을 청해 듣기 위해 궁 밖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숲을 기증하는 빔비사라 왕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가 응급치료를 했던 곳이기도 하고, 선생경, 일명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육방예경>은 법륜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의 근거가 된 경전이기도 합니다.


스님과 함께 영축산으로 오릅니다. 스님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하시면서도 앞장서 가시면서 영축산에서의 부처님 교화모습을 설명하시는데,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심이 듣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스님의 성지에 대한 설명도 감동이지만 부처님을 대하는 스님의 모습 그 자체가 더 큰 법문으로 다가옵니다

영축산은 부처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이 바로 이곳이며, 또 염화시중의 미소와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반야심경, 열반경, 법화경 등 많은 경전이 설해진 곳입니다.” 이외에도 교훈이 되는 설화의 많은 부분이 영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축산 정상 바로 아래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을 참배하고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던 영축산 정상을 향해 공양단을 차립니다.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리고 당시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하신 경전을 독송합니다. 이곳에서 설하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마음이 색다릅니다.



부처님이 영축산에 계실 때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이 어떻게 하면 밧지족을 침공하여 승리할 수 있는지를 신하를 통해 부처님께 여쭙게 되는데, 이때 부처님은 묻는 말에 대한 답변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지 7가지 사례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모두 밧지족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나라가 번영하는 길, 평화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국론이 분열된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영축산에서 내려와 빔비사라 왕 감옥터로 갔습니다.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바카의 집과 망고 숲을 지나쳐 가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해주셨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삿투 왕자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이곳 감옥에 가두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 그리고 왕비인 위제희 부인, 그의 아들 아자타삿투는 경전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인 만큼 이들의 이야기를 현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보면 좀 더 지혜로운 길을 가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자타삿투왕은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못 먹게 엄명을 내리자 왕비 위제희 부인은 위장하여 온몸에 꿀반죽을 한 밀가루를 몸에 붙이고 감옥으로 가서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전 왕의 아내이자 현재 왕의 어머니인 위제희 부인은 이 상황이 괴로워 영축산에 있는 아난다 존자에게 법을 청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관무량수경을 설하여 그를 깨치게 합니다.  

빔비사라 왕 감옥 터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지어준 밥에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죽림정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죽림정사에서도 예불공양을 올리고 경전동송을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그리곤 스님께서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1천 명 제자와 함께 당시 가장 강대국인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 이때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위해 궁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의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인도의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수행하기엔 아주 접합한 곳으로 이것이 최초 사원 죽림정사입니다.”

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았으나 몇 년 전 대나무 꽃이 피어 모두 죽고 새로이 대나무 숲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 머무실 때, 당시 부처님의 5비구 중 가장 늦게 깨친 앗사지의 탁발 나온 모습을 보고 사리불이 감동하여 친구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곳입니다. 또한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귀의하게 되는 등 불교교단의 기반이 형성되어지는 본격적인 교화활동이 펼쳐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을 떠나시기 전 영축산을 내려와 이곳 죽림정사에서 승단이 망하지 않은 7가지 법을 설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죽림정사를 나와 바로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 가는 길엔 유난히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아이들, 천으로 둘둘 말아 가짜 아이를 만들어 구걸하는 아이, 장애인 노인이 길거리에 가득하였습니다.

칠엽굴은 부처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현재 전해오는 부처님 말씀을 결집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할 것을 우려한 가섭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 500명을 동굴에 모아놓고 부처님 말씀을 기록, 정리한 곳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신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라고 송을 하면 500아라한이 하나하나 부처님 말씀의 진위여부를 확인해서 첨삭해서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긴장감과 감사함이 가득합니다. 이 결집으로 인해 부처님의 법이 면면히 흘러 나에게까지 전해왔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제1결집이라고 합니다. 2결집은 바이샬리에서, 3결집은 파탈리푸트라에서 있었습니다. 캄캄한 굴 안을 들어갔다 나와서 칠엽굴 앞에 앉아 스님으로부터 경전 결집에 대한 안내를 듣는데 우리가 500아라한이라도 된 듯 착각을 하게 합니다.


칠엽굴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스님은 산 아래 라즈기르의 정경을 설명해 주시며 성지순례 초창기의 갖은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셨습니다
.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여정지 나란다대학입니다. 오기 전에 사진과 책에서 이미 봐왔는데도 한눈에 전체가 조망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규모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 열반 후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사상 최초 최대의 대학으로 7세기경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교사가 천오백 명, 학생 1만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의 침공으로 모두 불태워지고 남은 흔적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길이가 1km인데 전체 길이가 10km라고 하니 정말 세계 최대의 대학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거 같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부처님의 왕성한 교화활동 만큼이나 빡빡했던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여성이 최초로 출가한 곳,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했다는 바이샬리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인도 성지의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로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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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운

부처님의 말씀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신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인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군요.

2014-01-15 08:46:35

조병회

정토대학에서 현재 부처님 일생을 강의 받고 있는데 부처님의 수행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 좋은 인도순례길 수기에 감사드립니다. 남은 여정도 좋은 추억의 시간이 되시길 바라오며 좋은글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2014-01-15 06:13:04

실생행

생사

2014-01-13 23: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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