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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성지순례단들의 성스러운 새벽예불이 수자타아카데미 교정의 어둠을 불 밝히듯 열어젖힙니다. 예불 후 6시 10분, 전정각산을 오르기 위해 지바카병원 정문에 모였습니다.
동쪽 전정각산 능선 너머엔 벌써 붉은 기운이 퍼져 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는 오늘이 개교 20주년이라 곳곳이 분주함으로 들썩입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으로 한걸음 한걸음 따라갑니다. 산 입구에서 스님은 돌이 많으니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 오세요”라고 일러 주십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네모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스님께서 내려가시며 “이 산에 유일하게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사람도 동물도 함께 먹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는 웅덩이 위쪽 돌무덤 옆 작은 웅덩이를 가리키며 아마 이곳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시며 드시던 물인 것 같다며 이곳을 ‘부처님 샘터’라 불린다 하셨습니다. 이곳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옷에 걸리면 가시가 꼭 움켜쥐고 있어 억지로 떼어내면 옷이 망가지니 살살 달래줘야 한다며 세심하게 일러 주십니다. 바위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쉬었다 가자고 하셨습니다.
바람 한 점 없어 춥지 않아 아마 부처님께서 이러한 곳에서 명상을 하셨을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에 따라 모두 명상을 했습니다. 마치 3천년 전 부처님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명상하는 순례자들을 보시며 “마치 새들이 앉아 있는 것 같네요” 하십니다.
정상에 도착하자, 이곳이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고행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설명하시는데 어떤 것이 탑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흔히 탑은 흙으로 봉긋하게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는 건 돌무더기뿐입니다.
전정각산에는 6기의 탑이 세워졌는데 정부에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굴꾼에 의해 탑이 커다랗게 구멍이 파여 점점 훼손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하산 후 바로 아침밥을 먹고 설성봉거사님 부도탑 앞에서 12주기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설성봉거사는, 1998년 생업을 그만두시고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으로 정토회에 입문하여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해왔으며, 특히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의 정토법당 불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2002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기술학교를 운영하다 괴한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설거사님과 함께 활동한 이화승님이 ‘뭐든지 부탁만 하면 염소 눈처럼 작은 눈으로 빙긋이 웃으며 들어주던 거사님’을 떠올리며 추도문을 낭독할 때 참가자 모두 그분의 뜻이 꼭 이루어져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거사님의 희생이 지금은 이곳 수자타아카데미에 빛으로 돌아오셔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 것 같습니다.
수자타 20주년 개교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학교는 분주합니다.
스님께서는 행사 전,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신 위말라야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학교에 오시는 내외빈들을 일일이 맞으셨습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수자타아카데미는 이 마을을 이끌어 갈 건장한 청년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대 손님도 3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선 인도 중앙정부 국회의원인 MP 하리만지, 보드가야 대탑 주지스님과 사무국장, 설성봉거사님 사건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위말라야 스님, 방글라데시 템플 주지스님 외 14분, 미얀마 템플 주지스님, INEB 사무국장, 지역 국회의원, 지역 공무원, 석가족의 초기 활동가와 수자타아카데미 초창기 교사, 성지순례단 320명, 수자타아카데미 부지를 기증하신 동네 주민, 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 학생 1000여 명, 가까운 동네 주민들이 아침 9시부터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20주년 기념행사는 수자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굵직한 행사를 거침없이, 분주하지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뭉클해지고 한 사람의 원이 이렇게 이루어져 가니 커다란 감동이 물 밀리듯 밀려옵니다.
고등학생은 초등학생의 선배 겸 선생님이 되어, 중학생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당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떠들면 언니 오빠들이 조용하라 하니 금방 시끌시끌했던 행사장은 바로 조용해지곤 합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쁩니다.
수자타 교가와 환영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밝고 힘찹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빠지지 않는 색동 한복 입고 추는 꼭두각시 춤, 인도 전통무용과 코끼리 춤, 태권도 공연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인도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와 감동을 한꺼번에 받은 건 수자타아카데미 20년 퍼포먼스였습니다. 구걸로 하루를 살아가던 아이들이 <우리도 이제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하기까지 20년 역사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스님이 이곳 마을에 쏟아부었던 사랑과 노고, 부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공연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저마다 숨어있는 이이들의 끼를 이끌어 내어 아이들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굶주린 이들은 먹어야 하고 아픈 아이들은 치료를 해야 하고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고 구호처럼 외치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행사 막바지에 스님께서 무대에 오르시자 큰 박수가 쏟아집니다. 스님은 그동안 수자타아카데미가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오늘 초대된 분들을 한분 한분 무대로 부르시어 소개하시고 일일이 감사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20주년이 되기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후원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초등하교 7명으로 시작한 학교가 이제 마을마다 15개의 유치원이 들어섰고 1천 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은 학교를 안 가는 아이가 없습니다. 20년 전에는 학교는 가면 안 되는 곳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는 안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아이가 학교에 다닙니다. 이 아이들이 저의 보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 갔으나 이제 결핵으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배고프거나 약이 없어 죽거나 산모가 죽는 일 또한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해온 것처럼 계속 해갈 것입니다. 이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아이가 잘 자라 가정의 희망이 되고 지역의 희망이 되고 인디아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아이들에게 협력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개교 1주년 때 운동장 한쪽에 심은 보리수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수자타아카데미의 넓은 그늘이 되어주듯, 20년 전 한 수행자의 원은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나자 순례객도 학교에서 준비한 인도식 점심을 먹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에게서 공양받은 유미죽과 뿌리, 달, 야채샐러드와 오렌지를 맛있게 먹고 오후에는 각 차량별로 수자타아카데미 인근 둥게스와리 마을을 둘러보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인도 JTS에서 마을개발 사업을 하는 곳으로, 아자드비가, 스리람푸르, 안투비가, 두르가푸르, 소라즈비가, 만코시힐, 아마르푸르, 자그디스푸르 마을입니다.
스님께서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두루가푸르 마을로 갔습니다. 20년 전, 처음 스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둥게스와리에는 학교를 졸업한 단 2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분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집이 비교적 깨끗하였는데,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10년 정도 선생님으로 봉사를 하고, 지금은 정부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전에 사용했던 큰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초기에는 턱이 없어서 오염된 물이 바로 들어와서 콜레라와 전염병의 온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에 턱에 만들어 오염된 물이 우물 안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물을 개선하다가 차츰 핸드펌프를 설치하여 지금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핸드펌프로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JTS는 15개 마을에 68개의 핸드펌프를 설치, 지원하고 있습니다.
흙먼지가 펄펄 나는 길을 걸어가니 처음 이곳에서 학교를 지을 땅을 기증한 분이 스님께 오셔서 인사를 하셔서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이 분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처음으로 땅을 기증하신 분이라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저희들이 기쁘게 박수를 쳤습니다.
이어서 유일하게 이곳 출신이면서 학교 선생님을 하신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하자 스님께서는 이 집에서 처음 머무르셨다고 하시면서 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때의 집은 23년 전이라서 허물어지고 없고 그곳에 다시 새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스님께서 머물렀던 흙집을 사진으로 찍어서 흙담 벽에 스님 모습을 그려놓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래된 사진이었으나 수자타 아카데미와 인도 JTS의 역사를 보는 듯하여 감격스러웠습니다. 스님께서 깜깜한 방에 염소를 키우고 한쪽 옆에 볏집을 깔아서 주무시던 일화를 설명해주셨는데 사실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수자타 아카데미의 건물 1층 한 칸도 다 짓지 않은 상태에서 개원한 사진 등 오래된 사진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었는데 생생한 역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이어서 다음 집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비교적 잘 사는 듯하여 가보니 문만 같은 집이고 그 옆에 허물어가는 흙집의 한칸에 염소 한 마리 송아지 두 마리와 함께 할머니가 기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방이 스님께서 처음 머물렀던 집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기는 이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깜깜한 방에 송아지와 염소와 같이 사니 겨울에는 온기가 있어서 아마도 더 따뜻할 것 같다고 설명하십니다. 이곳에서 스님께서 선물을 드리고 또 다음집으로 이동을 해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한 할머니가 남편도 자식도 다 먼저 보내고 손녀딸과 그 손녀딸의 자녀들과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두르가푸르 마을의 극빈자 중의 극빈자인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5명인데 본인의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나이를 다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엄마가 정말 조그마하여 엄마의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는데 제일 큰 남자아이가 수자타아카데미 5학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 딸아이에게 오빠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몇 년차로 태어났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고 이름도 물어보고 하면서 아무래도 10살 같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10살이라고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동생들은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아이도 수자타 아카데미의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정부학교로 가도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차별이 심하여서 학교를 중단하였다고 스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불가촉천민마을 아이들이 정부학교에 가도 차별이 심하니 중도에서 학교를 포기하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는 이곳 여자아이 2명에게 다시 학교에 오라고 스님께서 당부를 하고, 또 이곳 실무자들에게 정부학교에 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을 조사하여 다시 학교에 받아들이는 것을 고민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방문하니 집에 소똥말린 것들을 보관하고 천정의 한켠에도 소똥을 모아두었는데 소똥이 연료로 사용되니 재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벽이나 나무에 소똥을 잘 펴서 발라서 말리고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집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시는데 할머니는 먼 친척집의 처마에 벽을 세워서 처마와 벽사이가 이 할머니가 기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대로 다 통하는데도 옷도 이불도 변변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왜 구걸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 너무 늙어서 구걸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담요를 가져다주겠다고 하니 따라 나오시면서 쌀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쌀과 담요를 주시겠다고 하면서 실무자에게 쌀과 담요를 할머님께 전달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오자 할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참 많이 먹먹해집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내는 적은 돈의 후원금들이 이분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담요와 쌀과 식수로 돌아가는 것을 현장체험 하듯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니 나오니 아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손을 잡습니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인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 돌아와서도 스님은 오늘 행사로 멀리 상카시아에서 찾아오신 석가족 청년 활동가들과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저녁에는 전체 순례단이 모두 모여 마을을 다녀온 소감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칠엽굴, 나란다대학을 가는 일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