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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 3시 30분에 일송정으로 출발했습니다. 오늘 백두산을 보고 심양으로 출발하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 새벽 5시30분경에 비암산 일송정에 도착해서 용정시를 내려다보며 스님께서는 처음에 우리 민족이 이곳에 와서 살아가기 위해 정글로 덮혀있던 이 땅을 가꾸고 이만큼 살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고 설움을 견디었을 것이라며 우리선조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당시 우리 선조들은 그 외로움과 한을 달래기 위해 여기와서 고향을 그리며 ‘고향의 봄’을 부르기도 했답니다.
일송정 아래에 일송정 기념탑을 만들고 시비를 세웠는데, 원래는 선구자를 새기려고 했으나 민족감정을 고취시킨다고 허락 되지 않아서 다른 시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선구자, 고향의 봄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송정에서 부르는 선구자, 고향의 봄은 또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대종교 3인묘로 가면서 논밭 한가운데 있는 발해의 두 번째 수도인 중경현덕부의 서고성을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벽이 남아 있었고 매우 큰 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대종교 3인묘는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2대교주 김교현, 서일의 묘로 초기 독립운동의 주류는 대종교인들이었습니다. 처음 이분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이후에 우리가 이들의 정신을 잘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법륜스님께서 이곳을 방문했을때에는 이들의 묘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풀이 무성했었는데, 대종교에 조상들의 묘를 관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어졌다고 합니다. 역사기행팀은 이곳에 올 때 마다 낫을 가지고 와서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청산리 마을 기념탑에서 기념식을 하지 않고 백운평을 지나 직소택까지 가서 청산리전투터에서 사라져간 독립운동가들을 기렸는데, 오늘은 기념탑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라져간 독립운동가들과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재를 지냈고,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백두산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백두산 서문아래에서 먼저 점심을 먹고 백두산으로 올랐습니다. 미니버스를 타고 약 40여분 이동하고 다시 1400여 계단을 걸어오른 백두an산에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안개가 걷힌 중간중간 모습을 보이는 천지를 볼 수 있었지만, 환호성을 지르게 할 만큼 푸른 천지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천지를 제대로 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르려고 했던 금강협곡등도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습니다. 오늘 밤새 달려서 내일 아침에 심양에 도착해야 서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저녁일정이 더 이상 늦출수가 없어서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다시 식당에 도착해서 스님께서 이번 역사기행을 정리해주시고 마무리 해주시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번 역사기행 전체 일정을 되짚어 주면서 과거 역사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동아시아 시대를 열어가는 것으로 인류에게 더 나은 대안적인 역할을 한다면 인류사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깔고 우리는 역사기행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앉아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구려 유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뿌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고구려의 문화가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고민하며 역사기행을 기획했습니다.
처음 우리가 심양에 도착해서 요하문명이 전시된 요녕성 박물관을 들렀고 백암산성에 올라서 고구려 성벽의 독특한 치, 옹성을 봤습니다. 둘째날은 고구려의 첫수도인 오녀산성(홀본성) 에 올라서 자연의 위엄이라 할까, 자연지세를 이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환도산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셋째날은 고구려인들이 국동대혈에서 천손임을 잊지 않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것을 알았고,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 5회분 5호묘를 보고 전시된 벽화속에서 단군신화의 내용도 봤습니다.
넷째날은 백두산으로 가는길에 압록강을 따라서 최윤덕이 개척한 사군이 있는 여연, 자성, 무창, 우예지역을 바라보며 그 지역의 모서리를 돌아서 양강도의 중심인 혜산이 내려다 보이는 발해의 유일한 탑인 영광탑 참배했습니다. 압록강 상류를 따라 백두산 남문으로 왔지만 들어갈 수가 없어서 서문으로 와서 모형도를 보았습니다.
다섯째날은 백두산 북문을 통해 올랐는데, 천지의 아주 일부만을 보고 아쉬움이 남아서 오늘 다시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이번의 아쉬움은 백두산에서 사진다운 사진을 찍지 못한 것입니다. 돈화로 가서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성, 강동 24개석을 보았습니다.
여섯째날은 요전자 24개석. 상경용천부를 둘러보고, 발해의 유물인 석등, 불상을 보았습니다. 상경용천부의 황성옛터를 둘러보고 발해에 대한 자긍심을 가졌습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인 도문으로 와서 우리선조들이 처음 중국땅으로 넘어와서 새로운 삶의 현장을 개척한 것이 토대가 되어서 일제 강점기 나라의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음을 보았고 온성의 최북단을 둘러보았습니다.
일곱째날인 오늘 아침에 용정 우물가를 지나 비암산 일송정에서 선구자를 불렀고, 중경현덕부인 서고성을 지나왔으며, 대종교 3인묘에서 애국적인 그들의 삶을 기렸습니다. 청산리 기념탑 앞에서 그들의 원혼을 달래고 백두산 서문으로 올라서 천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까지 7일간의 일정을 다시 정리해주시면서 스님께서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남의 민족도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을 침해받지 않고 남의 정체성도 침해하지도 않으면서 공동의 번영을 만들어가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로 연대해서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미래 문명의 선진적 방향입니다. 아직도 상대를 억압하거나 스스로 자존을 가지지 못한 경우, 설령 자존감을 가졌어도 서로 대립하는 수준등 이것을 뛰어 넘어 자존감도 갖고 상호존중하고 공동의 번영을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일본에 사는 한국사람도 편하고, 한국에 사는 화교도 편하고, 중국에 사는 조선족도 편할 수 있습니다.
소수자가 핍박받게 되면 저항하게 되고 그러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지금보다는 이런 문제들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과거역사에서 교훈으로 삼아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가지고 함께 새로운 백년을 꿈꾸자고 하시면서 7박8일간의 모든 역사기행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이번 역사기행에 참여하신 분들은 단식을 하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모든 일정을 해주시고 이끌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법륜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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