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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4시에 발해의 왕성이 있던 상경용천부로 이동하였습니다. 가는 길에 요전자 24개석을 보았는데, 어제 본 강동 24개석과 같은 형태와 비슷한 크기로 요전자 마을의 밭에 있는 것으로 특별히 보호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경용천부에 도착해서 먼저 박물관을 들러 발해의 유물, 유적들도 둘러보고 궁성의 모형을 보고 그 규모를 짐작해 봅니다. 화려했던 옛 명성을 짐작 할 수 있듯이 왕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고 기단부분들만 남았지만, 내성과 외성의 길이나 각 궁궐이 놓였던 기단의 크기를 보면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발해의 역사만큼이나 유적이나 유물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상경용천부는 입구에 오봉루가 있고 그 뒤에 제1궁궐부터 제5궁궐까지 순서대로 있었으며, 기단의 높이도 제1궁궐부터 차례로 낮아지며서 각 궁궐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제2궁궐터가 가장 큰데, 아마도 이곳이 왕이 정사를 보던 곳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4궁궐은 온돌까지 발견된 것을 보면 왕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 이었을 것입니다. 궁내에는 어화원이라는 큰 화원도 있었고 내성과 외성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고 기초석이나 주춧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 주춧돌 위로 궁궐이 복원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역사에서도 발해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상경용천부를 떠나면서 또다시 발해를 그리며 옛 영광을 상상해 봅니다.
흥륜사는 발해시대의 절로 발해가 멸망한 후 불타 없어졌다가 청나라때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발해시대의 석등, 불상과 청나라때의 돌거북등 유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
발해시대의 유일한 불상앞에서 공양미를 올리고 법륜스님의 집전으로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스님께서 직접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하루바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며, 또 625 희생자들의 왕생극락을 빌려 축원해주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봉오동전투터로 향했습니다. 봉오동전투터 앞의 개울물이 불어서 도로를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버스가 지나갈 정도는 되었습니다. 봉오동전투터 기념비는 더 잘 정비하기 위해 현재의 기념비를 떼어내고 계단을 쌓는등 공사중이어서 약간은 어수선한 느낌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는 삼일독립운동 후 계속되는 일본의 통치속에 비정규군인 우리의 독립군이 정규군인 일본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의 사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봉오동전투터에서는 이번 역사기행에 참가하신 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중학생들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봉오동전투터에서 전사한 우리의 독립군들은 물론 전쟁의 희생양이 된 일본의 군사들의 영혼까지 기리며, 또 이후에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롭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 기념촬영을 한 후 두만강을 따라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군 풍서리까지 가면서 다시 북한땅을 바라다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처음 JTS를 통해 온성군에 농업지원을 하면서 수확량을 3배이상 올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북한은 주체농업에 의해 밀식재배를 했었는데, JTS의 지원으로 중국의 신농법으로 하면서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이래서 될것인지 걱정하다 오히려 자라면서 가지가 벌어지고 수확량이 더 많아지면서 매우 좋아했던 이야기들을 해주셨습니다.
다음은 두만강을 따라 걸으면서 중국의 도문과 북한의 온성간 놓인 국경다리를 둘러보았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후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저녁 강의가 있었습니다.
“1811년 서북지역 주민들의 불만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지만, 리더십부재로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1860년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서 민중의 봉기(삼도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1860년에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만들었고, 1864년에 순교할때까지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뒤를 이어 최시형 선생에 의해 전국적 조직을 만들면서 동학혁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젊은 지식인층, 즉 개화파는 세계가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는데 우리만 뒤떨어진다고 우리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개화파들은 일본쪽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며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갑신정변입니다.
지난 200년간 청나라의 세상이었지만, 청나라는 지는 해였고 일본은 떠오르는 세력이었지만, 떠오르는 세력이 아직 영향력이 약한데 이것을 읽지 못하고 개화파들이 일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니 청나라 군대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국내가 분열되니까 외세에 이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현실과도 비슷합니다. 미국은 이제부터는 지는 해이고 중국은 떠오르는 해에 해당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떤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는 역사속에서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떠오르는 신세력과 너무 빨리 함께 하면 세력의 힘에 억압받게 되고, 너무 늦어지면새로운 세력에 침략받게 됩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자기 주관이 뚜렷해야 하고 자신의 역량을 알고 주변정세를 정확하게 읽어야 구세력과 어떻게 함께 하면서 신세력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10년 후 동학혁명이 일어났는데, 왕조의 중앙권력은 이를 무마 하기 위해 전주관찰사를 파면하고 동학이 내건 개혁 10조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동학군들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2차 봉기를 했지만, 관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군에 요청했고 청이 조선에 관여하자 일본군도 들어오게 되면서 청일 양군에 의해 동학혁명은 무참히 패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작게는 30만, 많게는 60만이 학살되었습니다. 동학혁명은 민중에게 엄청난 희망이었지만, 또 그 패배는 엄청난 좌절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속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이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고종황제는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황제로 칭하였지만, 현실적인 역량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은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서원을 철폐하고 개혁정책을 시행할 정도로 국내정세는 잘 알았지만,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쇄국정책을 씀으로 해서 그의 개혁속도는 세상의 변화속도보다 늦어지다 보니 수구파로 분류되고 반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에 대한 권한을 일본이 행세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간섭을 하는 나라가 미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이 협의를 해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관장하는 것을 서로 인정한 것이 카쓰라태프트 협약입니다.
두 번째 카쓰라태프트 협약은 해방후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분할하고 군정을 실시한 것이고, 세번째는 지금 미국은 북의 핵을 중국이 제거한다면 북의 관할권을 중국이 행사하는 것을 미국이 양해하겠다는 분위기입니다. 미국이 중국에 요구하는 것은 미국이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국제 질서 안에 들어오라는 것이고, 중국은 커진 국력에 맞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미국이 인정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중국이 가진 영향력등을 중국이 북핵제거에 협력한다면 고려해서 제3의 카쓰라태프트 협약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대출신이 의병에 동참하면서 의병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1910년에 오면 의병이 몰락하는 분위기로 가니까 국내에서 의병활동하던 사람들은 결국은 포기하거나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만주지역으로 많은 독립투사들이 뜻을 품고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용정벌을 중심으로 연변지역은 매우 넓었기에 수십만이 넘어와서 개척했습니다. 논농사는 조선족이 와서 개척한 것이며 이렇게 이루어지니까 이것을 기반으로 학교도 세우고, 독립을 준비하고, 무장을 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것입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3.1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결국 비폭력운동으로는 안되는구나 해서 무력항쟁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일본의 압력이 세어지니까 중국은 독립군에게 중국영내에서 나가라고 하고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중국으로 일본군이 들어오게 되자 독립군들은 백두산으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독립군들이 화룡 청산리에서 일본군이 추격하는 것을 되돌아서 공격한 것이 청산리 전투입니다. 김좌진 장군이 한 것을 청산리전투라고도 하고 광의의 청산리 전투는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1일에서 26일 사이에 있었던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등에서 승리한 전투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1920년대 이 소식은 삼일운동에 실패한 우리 국민에게 엄청난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지역의 민간인들을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등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독립은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로 이루어졌고, 독립운동사를 보면 어느민족보다 적극적이며 용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도 민족의 독립을 우리손으로 이루지 못함으로 외세에 의해 남북이 갈리게 되고 분단으로 남북이 체제경쟁을 하면서 오히려 많은 독립운동사들의 규모가 축소 되어버렸습니다.
축소된 규모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화해가 필요하고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독립운동역사가 반쪽이 될지, 온전하게 될지 결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단순히 이 시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민중들의 의병활동부터 내려오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은 원래 청산리 전투터, 용정의 대성중학교, 일송정, 대종교 3인묘를 보고 연길에서 전체 마무리를 하고 심양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제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절반정도 되기에 일정을 조정해서 내일 아침에는 좀 더 일찍 일어나고 연길에서 일정을 취소하고 오후에는 백두산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스님께서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일정을 조정해서 다시 백두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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