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3.8.8. 역사기행 다섯째날 - 백두산, 장백폭포, 동모산성, 강동24석

오늘은 어제 보지 못한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차량에 올랐습니다. 어제 백두산 남쪽은 출입이 금지 되었기에 오늘은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출발할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긴장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습니다. 실무자들은 서둘러서 표를 끊고 참가자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오르니 구름이 몰려와 천지는커녕 한치 앞도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바람은 매우 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진한 구름속에 갇혀 있던 백두산 정상과 천지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를 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바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몇십분이 흐른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천지를 맑은 하늘과 함께 온전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구름속에 갇힌 천지를 기다리는 간절함 속에 잠시 보이는 천지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천지를 보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있어서 좀 더 기다리는 동안 천지를 가둔 구름이 비를 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우리들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장백폭포로 이동했습니다. 이제는 비가 아예 퍼붇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간 우비나 우산이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스님과 우리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장백폭포를 보고 잠시 경관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줄기를 좋아만 할 수 없어서 다시 다음 장소인 소천지로 이동했습니다. 

스님께서도 비를 맞으면서 우리에게 계획된 모든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애를 쓰셨고, 참가자들도 비를 맞아 추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스님 뒤를 따랐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천지라는 뜻으로 작은 연못이 맑고 고요하며 하늘을 그대로 물에 품고 있는 모습이 천지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서 소천지의 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면이 일렁거리고 있었고, 소천지 입구를 제외하고는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천지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버스를 탈 수 없어서 우리들은 중간 버스승차장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그러나 버스들이 씽씽 달리는 길이다 보니 스님께서는 혹여나 사고가 생길까 계속 대중들을 챙기며 주의를 주면서 움직였습니다.

 

녹연담은 통제를 해서 볼 수가 없었고, 지하산림은 차를 기다리며 지체한 시간이 많았고 또, 더 이상 비를 맞고 추위에 떨 수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우리들이 타고간 버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침을 옥수수로 대신 한 채 비를 맞은 터라 다들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가운데 스님께서는 동모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신 후 오전 일정으로 피곤할테니 한숨 자라는 배려까지 해주셨습니다.  

동모산성은 얕은 야산에 산성을 쌓은 것으로 주위는 평지이므로 주변에서 오는 적들을 한누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대석하가 흐르고 있고, 우물도 있고, 병영자리, 거주지도 있습니다.



평지성은 영승유지로 추정되나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대석하와 목단강이 만나는 자리에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이 평지성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오리정도 떨어진 곳에 육정산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해인의 기록물이 나왔는데,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해인 기록한 기록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아직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이것이 공개될 때 발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강동 24개석은 아직 정확하게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건축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무엇에 쓰인 건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저녁을 먹은 후 숙소에서 발해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곳 돈화는 발해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첫 도읍지인 동모산성을 보았고, 강동 24개석을 보았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주로 왕성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발해의 국력,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2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발해의 문화는 규모는 컸지만, 정교성등을 보면 문화 수준은 신라보다 떨어졌습니다. 신라의 유물은 중국것과 비교해도 정교함에 있어 더 우세합니다.

발해의 수도는 고구려의 국경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해의 영토는 연해주까지 고구려의 2배 정도가 되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지배층이 분열, 항복을 해버리니까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 유입되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9개의 도독. 46주, 100개현을 설치 하여 직할 통치하였습니다. 그중 28,000호 사람들을 당나라로 잡아가는등 역사상 이렇게 잔인하게 탄압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을 대단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주도가 되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하였으나 대부분의 백성은 말갈족이었습니다. 

고구려 영토의 2배로 확장해 번성하던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백두산의 화산폭발설도 있고, 또, 발해가 번영하면서 안주하게 되었고 주변의 거란을 만만히 보면서 멸망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발해를 계승한 민족이 없었습니다. 고려도 명확히 발해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발해가 멸망한 후 역사가 사라졌다가 조선조 실학자들에 의해 발해에 대해 우리역사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통일을 할 때 어떤 국가 이념으로 어떻게 북한을 수용할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역사가 바뀌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왜소해지기도 하고 자존감이 없어질수도 있고, 오히려 고구려, 발해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강의를 듣고 ‘발해의 옛 영광을 꿈꾸며’ 발해의 첫 수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웅장한 문화를 볼 수 있는 상경용청부로 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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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인

대학생 때 중국 연변에서 백두산 천지와 장백폭포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때 경험이 되살아나네요.
그 땐 인솔 대학교수가 계셨지만 발해에 대한 역사의식 부족으로 놓친 게 많아 아쉬워요.
백두산 천지를 둘러싼 중국의 이권다툼을 보며 그저 안타까워했는데...

발해의 역사 의식을 품는 통일 되길 기원합니다.
그저 통일이 아닌... 어떤 통일이 되어야할지.... 깨달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며 그저 안타따워했던
발해에 대한 욕사의식이

2013-08-13 02:09:52

좋은걸어떠케

그렇네요...스님 정말 청년같으세요...우산쓰고 동모산? 가리키는 모습도....멋있어요^^ 사진다운받아야지~~~ 고맙습니다. 모니터에 깔아야겠습니다. 근데 스님 독사진 없나요?

2013-08-11 20:50:33

^^^^

정말 법륜스님 청년같으시네요 ㅎ육로로 가자는 댓글 재미있습니다^^<br />고생 많으셨겠어요 ㅠㅠ안그래도 한국에도 비가 많이와서 힘드실거라 걱정되었는데..스님께서 많이 힘드셨을거 같습니다..잠시 모습을 드러낸 천지사진이 더 신령스럽네요..사진을 참 잘찍으신거 같아요^^우리나라에 어떻게 백두산같은 천지가 있는지 참 신기하네요..

2013-08-11 20: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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