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동북역사기행 셋째날입니다. 집안 시내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20여분 정도 지나면 한적한 시골도로와 만나는데, 함께하는 벗들과 산책삼아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며 걸어 올라가는 길이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 길같아 정겹고 아늑합니다. 국동대혈 전에 먼저 들른 곳은 관세음보살상을 오래도록 모셔온 관음굴입니다. 관음굴에 도착하니 굴의 오른쪽에는 건강의 신이, 왼쪽에는 재물의 신이, 정면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우리 일행을 맞이합니다. 오랜만에 부처님께 예배를 올린 후, 스님께서는 ‘의신으로부터는 건강을, 재신으로부터는 재물을, 관세음보살로부터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였으니 모두 여러분들의 뜻한 바대로 실현될 것입니다’라며 축원해 주셨습니다.
관음굴에서 조금 더 오르니 유리왕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사랑바위에 다다릅니다. 워크숍에 참여하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세월을 넘나드는 사랑이야기에 함박 웃음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 아침 이슬이 촉촉이 땀으로 배어나올 즈음에 눈 앞의 거대한 암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는데, 바로 국동대혈입니다. 스님도 땀을 식히시고 차분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 국동대혈 참배를 마친 후 스님께서는 특별히 참가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관음굴에서 마음의 평화와 육체적 건강과 재물을 얻기를 기원하고, 또 사랑바위에서는 사랑이 깃들기를 기원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개인에게 간절히 요구되는 바람입니다. 이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 공동체 사회를 위한 공적인 마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곳 국동대혈에서 천제를 올린 뜻입니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 나라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는 그런 마음도 내고 그런 활동도 하셔야 합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조금 비장한 각오로 버스에 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압록강 국경변을 따라 장장 10시간에 걸친 버스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워크숍의 종착지라 할 수 있는 백두산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길이기에 마음을 단단히, 그러나 가볍게 내어봅니다. 집안 시내를 벗어나 통화, 백산, 림강을 지나자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믿지 못할 광경에 참가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강 너머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녘 산하의 헐벗은 모습 때문입니다. 일명 ‘뙤기밭’으로 불리우는 북한의 산 중 개간지가 강변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마치 산 전체를 조각난 연초록색 누더기 천으로 짜깁기 한 듯, 뙤기밭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이어집니다.
“제가 15년 전, 1996년도에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을 위해 제가 식량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경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과연 국경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왜 저쪽에서는 굶어 죽고, 이쪽에서는 음식이 남아도는데, 왜 국경이라는 장벽 때문에 식량 한 줌을 주지 못하는가? 제가 북한 강변의 굶주린 아이를 불렀을 때 그 아이는 대답이 없었어요. 인도 같으면 가난한 아이들이 따라 다니면서 손을 내밀고, 아니면 내 손을 잡고 계속 따라 옵니다. 그런데 북한의 그 어린아이가 배고픈데도, 음식을 주려고 하는데도 대답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 아이는 도대체 나에게 무엇일까? 그 때 동행했던 조선족 분이 ‘조선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습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기에 배고픈 것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인가? 그 배고픔을 배고프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담담한 어조로 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절절한 마음을 담아 흔들리는 버스를 따라 북한이야기를 써내려 가십니다.
“저 비탈진 뙤기밭은 우리가 모르는 동안에 북한에 사는 동포들이 그만큼 어려움을 겪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식량이 없어서 많은 이들이 굶어 죽었고, 굶어죽지 않으려고 서있기도 어려운 비탈진 산에 붙어서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존을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처절한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이 저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굳이 외면하거나 보복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이런 문제는 꼭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들이 지금까지도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소수의 북한 관리들의 주장에 동조해 북한 정부를 두둔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봐야합니다.”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여 통화를 거쳐, 12시 30분경 림강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다시 한참을 달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장백에 도착하였습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였습니다. 오늘의 저녁 강의는 스님께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구호활동 등 ‘인도주의 정신과 활동’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이야기들로 가득 메워집니다.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주민들의 고통,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우리가 너무 정치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에겐 식량이 필요할 뿐인데, 왜 이것이 정치적 이념이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그것이 북한체제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잘 살펴보면 사회체제의 구조적 희생자들이고, 지도자의 잘못에 의한 희생자들인데, 지도자가 밉다고 희생자들을 외면하면 그들은 이중고통을 겪는 것과 같습니다.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가 적을 죽이죠. 그런데 적이 부상을 당해서 공격력을 잃어버리면, 옛날에는 확인사살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는데도 굳이 확인사살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은 보복심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호간에 전쟁 중에 서로 총을 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굳이 확인 사살하기 보다는 치료해 주는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라는 인류애의 보편성을 갖게 된 것도 백년 남짓한 일입니다. 또한 전쟁 포로를 해치지 않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도 19세기 말에 정착된 규범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이념이 아니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완전히 실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문제에서 이상보다는 현실의 힘이 강력한 것 같아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안타까움이 더해집니다.
“우리가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접근합시다. ‘인류가 지난 수 천 년 문명이 발전해왔다고 하는 그 결과물로 우리가 전쟁에 관계없는 사람들을 보호하자’는 것은 세계시민의 의무로서 수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북한 동포들이 어떻게 굶어죽게 되었는가를 살펴야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당장, 전부 해결해 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굶어죽는 사람들은 구제를 하면서 동시에 그 원인을 제거해가자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원인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그런 희생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적어도 제 생각에서는 UN인권선언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북한 군인도 굶어죽으면 먹여 살려야 합니다. 굶어죽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상과 관계없어야 해요. 군인도 배가 고파서 지원받은 식량을 가져간다고 할 때, 무조건 거부해야할 일일까요? 군인도 사람이고 젊은이잖아요. 북한의 젊은 남자가 다 굶어 죽어야 하는 것인가? 북한주민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최소한 보장받아야할 대우, 즉 인도적 지원이나 난민 보호에 관한 사항은 외면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북한시민도 세계시민가운데 하나에요. 우리는 아프리카의 인권은 얘기하면서 왜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외면하느냐? 겨우 북한 인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북한 인권개선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핑계로 북한정권의 타도를 얘기한다면, 그것은 남북간에 합의한 내정불간섭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남북정부가 나서서 인권을 빙자해서 인권을 외면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또한 인권을 주제로 해서 북한체제를 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이념,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북한주민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북한주민들이 인류의 한 사람이고. 인간의 권리를 최소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우리는 자기 이념을 너무 앞세워서 북한을 수단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북한주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려면 그들의 이념이 어떻든 마땅히 구제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북한법에 문제가 있다면 UN헌장에 따라서 법개선을 요구할 수도 있고, 또 그들이 북한법마저 지키지 않을 때에는 우리 생각으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잘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북한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처럼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제는 개선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동안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인도주의적 관점과 이념의 문제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의 마음을 담아 더욱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돌아보면 공적인 마음, 즉 공심이 조금 부족하지 않는가? 모든 인간은 다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기본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에는 어떤 것보다도 사람을 더 소중히 하는 것을 바탕으로 어떤 이념이든, 이익이든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오늘도 아침에 국동대혈에 가는데 참 좋았잖아요. 왼쪽으로는 건강, 오른쪽으로는 재산, 그리고 사랑이 있었죠. 그러나 제일 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공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 있어줘야 우리가 인류의 당면 문제, 북한동포의 생명을 살리는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들이 북한주민들이 겪은 지난 20여년의 고통을 외면했던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 대한 무관심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통일만이 그들의 인권, 생명권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의 국가비전과 같은 큰 목표도 있지만, 작게는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과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통일에 대한 여론형성과 활동영역을 좀 더 활발하고 광범위하게 만들어가야 북한동포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밤이 깊었습니다. 압록강변을 따라 가며 바로 눈 앞에서 보았던 처참한 북한동포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내일 백두산에 오르면서는 굶어죽는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새로운 미래와 희망, 새로운 100년, 1000년을 만들어나가는 상상력을 가져 봅시다’ 라며 하루의 맺음말을 해주신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내일은 또 다시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를 열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