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동북아역사기행 둘째날인 오늘은 ‘고구려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요한 고구려 유적지 6곳을 둘러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아침 5시, 고구려의 첫 도읍인 환인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도시 ‘집안’으로 새벽 버스는 달립니다.
“저희는 지금 집안으로 향합니다. 유리왕 22년(AD 3년) 졸본에서 천도한 후 장수왕 15년(BC 427년) 평양으로 3차 천도할 때까지 집안은 425년간 고구려의 찬란한 수도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집안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서 뒤로는 험준한 노령산맥을, 앞으로는 압록강이 펼쳐져 있어 주변 지역에 비해 기후는 온화하고 토지는 비옥하며 수산물이 풍부하여 동북지방의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주변국들을 복속하여 동북지역의 맹주로 발돋움하며, 독창적인 고구려 문화를 꽃피워 갔습니다. 마치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어느 곳을 둘러보더라도 유적유물이 나오는 것처럼, 집안 시내 어느 곳을 파더라도 고구려의 문화유물이 발견될 정도로 고구려인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도시입니다. 오늘 저희는 환도산성, 국내성, 장군총, 광개토왕릉과 비석, 오회분오호묘, 서대묘와 천추묘 등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집안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 주시는 스님의 안내를 들으니 집안으로 향하는 가슴이 더욱 설레어 옵니다. 집안 고구려 유적 답사의 시작은 환도산성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환도산성은 전쟁이나 재난 발발시 평지성인 국내성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이렇게 평지성과 산성이 하나의 짝을 이루어 건축되었다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환도산성을 빠져나오니 통구하를 사이에 두고 넒은 들판에 수천기의 고구려 무덤군이 있는데, 이것을 ‘산성하 무덤떼’라 이름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는 무명비를 보니 긴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무덤양식을 이렇게 발전시켜 온 고구려인의 기술력에 자긍심이 돋아나기도 하였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유명한 장군총, 광개토대왕릉과 비석을 연이어 답사하였습니다. 그 무덤의 웅장함에도 놀라움이 있었지만, 이 무거운 돌을 운반해서 쌓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들은 참가자들은 고구려인의 과학적 기술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듯하였다고 합니다.
이어서 간 곳은 ‘오회분 오호묘’입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고구려 고분 벽화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중국사관이 아닌 스님으로부터 직접 전해 듣는 우리민족의 신화와 설화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는 조선족 식당 인근으로 압록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국내성의 해자 역할을 했던 통구하가 미끄러지듯 흘러들어가는 압록강변을 따라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북한 식량난 이야기를 함께 걸으며 들으니 더욱 절절히 다가옵니다. 압록강 너머 북녘땅을 바라보니 스님께서 15년 전, 역사답사 중에 전해들은 북한의 식량난 소식이 도저히 믿기질 않아 직접 배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북녘땅을 둘러보다가 만난 ‘구걸할 자유도 없었다던 그 굶주린 북한 아이’가 눈에 어른거리고 손에 잡힐 듯도 하여 안타까움이 더해만 가는 하루였습니다.
오늘의 저녁강의는 고구려의 역사를 뛰어넘어 ‘역사의 정통성’에 관한 집중 강의로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민족문화의 우수성에 대해 힘차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오늘 우리가 돌아본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산성하 고분군, 서대묘와 천추묘 등은 중국 대륙의 유적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그리 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술적, 예술적 측면에서는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고도의 선진문명을 계승한 민족적 특징이 그것입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의 유물·유적 또한 당나라와 비교해서 규모는 작지만 정교함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것을 능가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섬세한 기술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민족의 뿌리, 즉 시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제는 우리 민족의 시원인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삼신이며, 세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인은 큰님, 밝은님, 하느님을 의미한다면, 환웅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한 사람, 즉 토착세력과 함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사람을 의미하는데, 바로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정신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환웅은 정신적으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단군은 이주민과 토착세력과의 결합을 통해서 진정한 나라를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국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천지인의 개념으로 보면, 진정한 인의 실현자라고 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남미에서 지금까지 백인이 대통령을 하다가, 최근에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웅이 하늘의 문을 열었고, 그것이 혼탁해지자 단군에 의해 새롭게 그 뜻을 인간적으로 실현한 것이 단군의 건국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구상의 가장 선진적인 문명중의 하나인 하늘문명을 계승한 것이 배달문명이고, 그것을 또한 계승한 것이 단군조선 문명인데, 이것은 모두 중국의 문명보다 앞선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명의 시원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중국문명의 흥망성쇠와의 역사적 비교를 통해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와 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민족문화의 계승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시면서 ‘역사의 정통성’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고구려의 역사유적을 답사하면서, 환인-환웅-단군-부여-고구려-발해(신라)-고려로 연결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발해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했을까요? 고려가 영토나 사람으로 보면 신라를 계승했는데, 그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토적 역사성은 대동강 이남 밖에 안되고 민족역사도 2천년 밖에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를 계승했다고 한다면, 발해는 신라와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성에는 배타적인 불완전한 계승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결국 신라와 발해를 모두 계승했다, 즉 온전한 역사성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조선왕조는 역성혁명을 통해 왕의 성만 바뀌었지 고려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큰 한나라’라는 뜻으로 환인의 ‘한나라’ 또는 ‘삼한’에서 온 나라명입니다. 조선왕조가 청나라로부터 굴욕을 당하면서 자주성을 잃었기 때문에 자주국가라는 것을 재천명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바꾸었습니다. 이 대한제국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가라는 뜻으로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은 과거 대한제국의 부흥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 수립운동이라고 용성조사님께서 제창하셨습니다.”
민족의 시원으로부터 현재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지를 한눈에 알게되니 가슴 뿌듯한 자긍심이 샘솟습니다. 스님은 다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남북한 통일 과정에서도 역사적 정통성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민족사의 미래를 보았을 때, 남북한 합의통일을 통하여만 독립운동사를 모두 계승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의 계승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한 주도의 통일이 되더라도 반드시 북한주민의 동의에 기초한 통일이 되어야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북한까지도 온전히 계승한다는 것은 한중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까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역사의식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역사적 정통성, 정체성, 자신감에 대한 결여가 있는 것은 바로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민족사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한중일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룬다면, 역사유적과 그 해석을 두고 네 것, 내 것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동북아의 문명사로 인식하여 창조적인 공동문명으로 수용해 가야 합니다. 서양은 인류의 시원이 서구라고 믿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발견되었을 때, 이를 인류의 시조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인류문명사 연구가 무려 100년이 지체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하문명을 중국사의 일부로만 본다면 큰 한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갈수록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요하문명은 반드시 동북아 문명사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볼 때 영토적으로는 1천년, 정신적으로는 6백년의 단절기간이 있었습니다. 전자가 발해의 멸망이라면, 후자는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입니다. 남북한이 통일이 되고, 동북아 공동체를 이루고, 나아가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떠오른다면 고구려·발해 이후 1천년, 배달문명 이후 다시금 세계문명의 중심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원대한 꿈과 희망, 그 가능성과 기회가 열려있고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가능성은 우리가 식민지 시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간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하고, 이제 새로운 통일시대의 기초를 닦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대륙의 밤은 깊어갑니다. 반도와 대륙의 경계에서 외적으로는 민족의 방파제로서, 내적으로는 민족문화의 찬란한 꽃을 가꾸어 온 고구려, 고구려인의 꿈을 꾸고 싶습니다.
전체댓글 4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