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아침 일찍 라즈기르에서 바이샬리로 출발했습니다.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4개의 강이 모여 큰 강가강을 이루는데 안개가 심해서 원래 일정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3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2개방의 사람들이 3시 30분 출발할 때까지
자는 바람에 20분 늦은 3시 50분에 출발했습니다. 내일부터는 방을 미리 두드려서 깨워야 할 것 같습니다.
바이샬리로 가는 길은 역시 안개가 심했습니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시간도 줄일 겸 차에서 먼저 바이샬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사르나트, 보드가야, 라즈기르에 이어 네 번째로
바이샬리에 가고 있습니다. 바이샬리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현재 유적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첫 번째,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사회에서 제일 좋아했던 도시입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보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바이샬리는 시민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가지는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상가는 바이샬리가 모델이었습니다.
리차비족과 밧지족이 바이샬리를 이루는 종족이었어요.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를 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밧지족이 자주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독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재를 하는데는 자주 모임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모일 때 의기투합한다는 것은 민주적이면서도 통합적인 것을 말하죠.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거나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준법정신이 투철하다는 것입니다.
노인을 경애하고 존중하며 숭배하고 공양하고, 양가의 부인이나 규수를 폭력으로 붙잡아 가거나
구속하거나 가두지 않는다는 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지를 잘 가꾸냐는 전통문화를 잘 보호한다는 것이고, 위대한 수행자를 초빙해서 잘 받든다는 것은 세계적인 석학이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존중해서 정치에 잘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 하나만 이뤄져도 좋을텐데, 이 7가지가 이뤄지는 것은 오늘날 봐도 이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이것이 부처님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국가형태였습니다.
바이샬리가 공화국 제도의 기원이라 해서 지금도 인도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카라우나 포칼 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공화제의 원류라고 보는 것이죠.
두 번째,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열반을 선언한 곳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안거 장소였고, 마지막 안거 끝나고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한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곳에 왔을 때 아주 유명한 암나팔리라는 기생이 있었어요. 사교계의 여왕, 유곽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어요.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귀의를 하고 암나팔리 망고동산을 기증했어요.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오셔서 어떤 망고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유녀 암마팔리의 망고동산이었어요. 그래서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침 공양 초대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 나라 왕족이 암나팔리보다 뒤에 부처님께 갔어요. 암나팔리에게 십만금을 줄테니 부처님 공양 초대권을 넘겨달라고 했어요. 암나팔리는 이 바이샬리 전체를 다 줘도 안된다고 했어요.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은 비록 유녀일지라도 이렇게 당당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유녀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린 유명한 사건이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이샬리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여성들이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샤키족의 여성들이 세 번이나 청했는데도 승낙하지 않았어요.
부처님이 바이샬리로 오셨어요. 샤키족 여성들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이 곳 바이샬리까지 맨발로
험난한 길을 따라왔습니다. 이 곳에서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승낙하셨어요.
바이샬리는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 곳입니다. 당시 여성은 삼종지도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출가한다는 것은 여성이 스스로 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소위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인격을 인정받는다는 것이죠.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갖는 거예요.
바이샬리는 세계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있지만 남방에서는 없어졌습니다.
남방에서 비구니제도를 복원하려고 해도 사회적 저항이 심합니다. 여성이 최초로 출가해서 비구니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에 이 곳에서 비구니 수계를 한다면 저항이 적지 않겠나 하는 생각합니다.
또 이 곳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 2결집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하는 유마경의 배경이 이 바이샬리입니다. 유마의 집, 유마거사의 집터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이 도시가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이샬리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 가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할 때 공평하게 8등분으로 나누어서 각각 탑을 쌓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이샬리 리차비족이 가져가서 모셨습니다. 8개 진신사리탑 중 3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바이샬리 진신사라탑터에 지금 우리가 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신사리를 모신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기초만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바이샬리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것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입니다.”
스님께서 바이샬리에 대한 설명을 다 해 주셔서 전체적으로 이해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바이샬리란 도시가 좋습니다.
스님으로부터 차안에서 전체적으로 설명을 듣고, 진신사리탑 앞에 내려 기도를 하다보니
안개가 조금 걷히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지순례객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 바퀴 돌면서 정근을 하고, 자리에 돌아와 예불을 올렸습니다.
경전 독송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진신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처님을 생각하며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경전 중 여성 출가에 대한 부분을 독송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의 당당함을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에 대한 열의가 느껴져서 눈물이 나고,
마하파자파티부인과 부처님, 아난다의 대화 속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이 느껴져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까지의 많은 여성들의 눈물과 피땀이 있었음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최초의 비구니 수계를 받은 마하파자파티는 부처님의 이모이자 새어머니입니다.
진신사리탑터에서 국제선원 관계자를 만났는데, 가까이 있는 베트남 절에서 세계여성불자대회인
‘샤카디타대회’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스님께서 잠시 들러서,
전체 대중들 공양비에 보태라고 보시금을 전달하고 원후봉밀터로 향했습니다.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에서 기도를 하고,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원후봉밀터는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발우가 제자들 것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원숭이가 부처님 발우에
꿀을 가득채워 공양했다는 곳입니다.
식사 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케사리아탑터를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향했습니다.
케사리아대탑은 부처님이 바이샤르를 떠나자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을 좇아 칸타키강까지 왔습니다.
부처님은 칸타키강을 건너시고, 증표로 부처님의 발우를 바이샤르 사람들에게 띄워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해 세운 탑이 케사리아대탑입니다.
춘다의 공양터에 들릴 예정이었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이동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내일로 미뤘습니다.
사탕수수 수확철이라 사탕수수를 실은 트랙터를 비롯, 소와 말이 끄는 수레, 화물트럭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어쩌겠어요? 저렇게 우마가 끄는 수레가 앞에 가고 있으니 속도를 낼 수도 없죠.
인도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한국 사람들만 늦다고 답답해하는 거예요.
이런 길을 가봐야 인도에 와봤다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중앙선 개념도 없잖아요?”
큰 도로인데도 깊게 파여 있어서 조수들이 뛰어가 옆에 있는 큰 돌을 바퀴 밑에 받치고
겨우 차가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인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거예요. 길이 많이 좋아져서 이 정도입니다. 여기에 비까지 오면 더 어렵지요.
진흙탕이 되어서 시속 20km도 못 갑니다.”
일정표의 2시간이 실제로는 4시간이 되었습니다. 4시간동안 중간 중간 자기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
쿠시나가르에 도착했습니다. 쿠시나가르 대한사에 도착해서 법당 참배를 하고, 미리 준비된 저녁식사를 하고,
인근에 있는 중국절, 티벳절, 스리랑카절로 나눠서 들어갔습니다.
내일 먹을 밥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절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쓰다보니, 전력이 약해서
밥솥 3개만 꽂으면 전체 전원이 나가 버립니다. 스리랑카절은 전원 코드도 1층에만 있어서,
16개조 밥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내일은 춘다의 공양터, 카쿳타 강, 열반당, 부처님 화장터에 갔다가 네팔로 이동하는 일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체댓글 11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