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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근한 입담으로 시작된 인터뷰, 직접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면 1박을 하고도 모자랐겠다 싶었습니다. 편안하고 잔잔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굴곡진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차마 글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세세한 속사정도 있었지만, 그 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수행의 깊이와 꾸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3살에 첫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생활이 아주 힘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 감각이 부족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남편의 잦은 행동을 보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마음에 이혼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돈을 벌어 살 집을 먼저 마련하기 위해 어린 아들은 시댁에 두고 딸은 친정에 맡겼습니다. 이후 식당에서 일하며 생활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도망치듯 울산으로 왔습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린 뒤 친정에 있던 두 돌 된 어린 딸을 데려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댁에 두고 온 9살 첫째 아들이 늘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이가 잘 지내는지 한 번씩 확인하던 중, 할머니와 자주 갈등을 빚어 아들이 보육원에 보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렵게 수소문해 충남 부여에 있는 보육원을 찾아가 보니 아이는 그곳에서도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구박받기도 하고 몰래 보육원 밖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재혼한 상황이라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든 아이를 도와 학교를 졸업시켜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옥탑방을 하나 얻어 살게 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아들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등교 거부가 잦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 매번 아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요. 손이 떨려서 그러는데 담배 하나 피고 들어갈게요.” 아들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빨리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왜 안 들어가지?'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당시 돈을 벌기 위해 어린 조카를 돌보고 있었고, 아들이 등교할 때마다 조카를 업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빨리 교실에 들어가야 집에 가서 조카에게 우유 먹이고 기저귀를 갈 수 있었기에 늘 마음이 초조했습니다. 그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서서 버티는 아들의 모습이 갑갑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정토회에 들어와 법사님과 대화하던 중 “아들이 학교에 안 들어가는데 왜 본인이 괴로웠어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질문이 황당했고, 왜 이런 걸 갑자기 물으시지 싶었습니다. 그 후로 제가 왜 괴로운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아들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손까지 떨며 안 가려고 했을까?’ 저는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아들의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들을 이해하고 내 마음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은 독립했지만 앞가림이 쉽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까지도 새벽 3~4시쯤 술에 취해 전화해 욕을 하거나 돈을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화가 올까 봐 늘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때론 남편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점점 아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전화를 차단했다가 다시 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새벽마다 전화해 기도를 방해하는 아들이 불편했지만, 그날은 묵묵히 아들을 이해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랬구나. 네가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구나.' 그럼에도 아들은 여전히 욕을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을 텐데 그날은 그냥 들어주었습니다. 이런 제 태도에 놀랐는지 아들은 오히려 제 말에 잠시 침묵했습니다. "듣고 있어. 계속 말해." 아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은 아들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마음이 덜 요동했고 한결 가벼웠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제 마음을 바라보며 아들을 대했습니다.
때때로 새벽에 아들이 돈을 달라고 했지만, 그 돈을 탕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그때마다 아들이 요구한 금액만큼 JTS에 보시했습니다. 아들에게 보내고 싶어도 참고, 그 돈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썼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들의 삶을 제가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는 마음도 조금씩 내려놓았습니다.
지금은 몇 년 전부터 아들과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자식과 연이 끊어졌으니 당연히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침마다 108배를 하며 기도합니다. "자식은 아무 일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내가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묵묵히 기도하며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아들의 메신저 사진과 강아지를 키우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법회에 참석해 스님의 법문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또한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온 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삶을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태어나 지금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하다 JTS에 보시하기로 했습니다. 친정엄마도 노인 일자리에서 일하며 번 돈을 천룡사 불사 보시금으로 보냈습니다. 보내면서 엄마가 “둘째 딸이 보살이구나” 라고 해서 뭉클했습니다.

둘째 딸과의 관계도 쉽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이 워낙 속을 썩이니 은근히 딸에게 기대가 컸습니다. "너라도 잘해야 한다. 나중에 오빠도 챙겨야 한다."며 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딸도 자퇴하고 힘겨운 일에 휘말리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저를 힘들게 하고 어려운 일이 계속 생긴다고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수행하면서 알았습니다. 자식에게 문제가 있어서 제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자식이 제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다는 것을.
지금은 가족도 많이 편안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퇴하고 치료까지 받아야 했던 딸이 다시 일어서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불법을 만나 나를 점검하며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 덕분입니다.
예전에는 상황이 바뀌어야 제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먼저 편안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봉사도 즐거웠습니다. 결혼 전 동대문에서 재봉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 두북수련원 유통팀 바느질 공방에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물건을 고쳐주기도 하고, 천을 재단해 필요한 물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느새 책임 봉사자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특히 부탄에 보낼 연장 가방을 만들 때는 봉사자 두 명이 많은 양의 가방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한두 달 동안 거의 매일 공방에 나가 하루 4~5시간씩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 의뢰한 행자들의 법복 100여벌을 3개월간 수선해 보내기도 있습니다.힘들기도 했지만 제가 가진 기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봉사에도 권태기가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부족해 혼자 많은 일을 맡게 되자 ‘이제는 책임 봉사자를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결국 두 달 가까이 봉사를 하다 말다 했습니다. 그러다 지회장 도반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봉사를 왜 그만뒀느냐고 야단칠 줄 알았는데, 그저 제 마음을 묻는 말에 오히려 의아했습니다. 하기 싫은 마음이 있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이야기하면 되죠. 왜 그렇게 미안해해요?”라는 의외의 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봉사를 하면서 왜 이렇게 주눅 들어 있었을까?’ 봉사는 제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책임’이라는 생각에 매여 있었습니다. 하기 싫은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수행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제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이라 스스로 차분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행동을 살펴보니 늘 급했습니다. 차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안전띠를 풀고, 차를 세우자마자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현관에서는 신발을 벗어 던지듯 놓았습니다. 헐레벌떡 벗어 던진 신발은 늘 저보다 집 안으로 먼저 튀어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제 모습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내가 참 급하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그때부터 신발을 가지런히 놓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은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변화가 제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봉사를 갈 때도 빨리 가고 싶어 과속 단속에 종종 걸리곤 했습니다. ‘봉사가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급하지?’ 싶었습니다. 마음을 돌아보고 행동을 살피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제 마음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삶은 참 갑갑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걱정했고, 아들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했고, 딸 때문에 속상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도 사람과 일에 매여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사람과 상황이 저를 괴롭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수행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상황이 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제 마음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아들의 삶을 제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딸의 삶도 제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봉사도 늘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일어나는 제 마음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 괴로운지,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살피다 보니 조금씩 삶의 여유를 찾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걱정이 생기고,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오고, 급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것은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상황이 좋아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행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편안하면 내 주변도 편안해집니다. 오늘도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제 마음을 살피며 한 걸음씩 수행해 나갑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그 시간을 살아낸 한 사람의 마음이 참 오래 남았습니다. 아들의 떨리는 손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기 시작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행은 지나간 삶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다시 바라볼 힘을 키우는 일이구나.' 또한 매 순간 솔직한 마음을 마주하면서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듣고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봉사하고 보시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정미애 님의 여정이 참으로 귀하고 멋지게 느껴집니다.
글_허수정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부 경기광주지회)
편집_윤정환(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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