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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혼란하고 불안했던 계엄사태가 일단락났습니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2025년 4월 첫 주말에 남울산지회 강홍선 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출생률 0.75명(2024년 통계)인 저출산 한국 사회에서 아이 세 명을 낳아 키우는 강홍선 님은 직장인입니다. 육아, 봉사에 직장 일까지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며 삶의 균형을 이루는 강홍선 님의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여섯 살 터울 세 남매를 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2017년, 마흔이 넘어 막내딸을 낳았습니다. 육아휴직 중에 즉문즉설을 자주 들으며 고교 시절 친구와 전화로 울고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참 소중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행복학교에 입학했고 저도 행복학교와 인연 맺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내니 정말 행복했고, 그 경험이 신선하고 놀라웠습니다.
당시 짧은 치마에 화장하고 다니는 중2 큰딸은 제 맘 한구석 걱정거리였습니다. ‘저러다 공부와 멀어지고 나쁜 친구들과 사귀어 엇나가면 어쩌나?’라며 저와 너무 다른 맏딸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사춘기 딸 문제를 풀고 싶어 언양법당 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법당에서 도반과 함께 수업한 후, 공양하고 청소하며 도반의 따뜻한 눈빛과 말 없는 지지로 힘을 얻었고 그 속에서 저절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늘 같은 자리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든든하고 따뜻했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정토회로 이끈 복덩이입니다.
삶을 돌아보면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가장 큰 고비는 대학 4학년 때, 후두암을 앓다가 40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자랑스러워하고 속 깊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길에 눕거나 고성방가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술에 취하면 엄마를 때려 미웠습니다.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면서도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니 ‘나는 좋은 딸이다’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하면서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살갑게 대한 적 없는 못된 딸이었음을 깨닫고 펑펑 울며 참회했습니다.
맏딸인 저는 형편이 어려운 친정의 생계를 도와야 했습니다. 6살, 7살 터울의 두 동생 대학 학비도 마련해야 해 삶이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꼭 해내야만 하는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2019년 봄 불교대학 다닐 때, 남산 순례 후 즉문즉설 시간이 있었습니다. 법륜스님께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해야 할 일만 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취미도 없고, 고교 동창생을 가끔 만나는 것 외에 친구 모임도 없습니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스님은 “그럴 만해서 그렇게 사니까 괜찮다”라고 했습니다.
스님 말씀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아이 셋을 돌봐야 해서, 남편이 협조 안 해줘서 이런저런 모임에 못 나갔다고 생각해 억울했으나, 실제는 그런 모임을 좋아하지 않아서 안 갔던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여행을 포기한 것도 누가 못 가게 해서가 아니라, 불편할 것 같아 가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남 탓, 환경 탓을 해왔으나 실제로는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음을 알고 나니 억울했던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안 좋을지 미리 계산하기보다 인연 따라 해보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온라인 이전 정토회는 천일마다 전국 회원이 한자리에 모여 입재식과 회향식을 했습니다. 저는 천일결사1 제9-9차에 첫 입재했고, 무주 태권도 도원에서 개최했던 제9-10차 천일결사 입재식에는 직접 참여했습니다. ‘천일마다 모인다니 앞으로 참여기회가 많겠지’라며 머리를 굴리고 망설이다가 그래도 한번 가 보기로 했습니다.
새벽 버스 타고 도착한 입재식은 축제 분위기였고,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처음 본 도반과 손잡고 <산회가> 부를 때에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후 코로나 팬데믹으로 천일결사 입재식을 오프 모임으로 하지 못하니, 지금 주어지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바로 해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습니다. 지금의 저와 나중의 저는 다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입니다. 직장 다녀와서 밥하고 빨래하고 막내 돌보는 것까지 혼자 다 하려니 몸도 고단하지만, 마음이 더 괴로웠습니다. 남편은 가끔 분리수거 하고, 청소하는 수준으로, 자고 싶으면 자고 쉬고 싶을 때 쉬었습니다. 뭐든지 힘들면 나중으로 미루어버리니 성격 급한 제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반복할 때, 남편이 저를 아끼지 않는다고 여겨 미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편 미워하는 마음을 수행 과제로 정하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니, 제 마음대로 안 된다고 남편을 미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참다 참다 도움을 요청할 때는 ‘남편이 꼭 들어주어야 한다’라고 고집했습니다. 또, 남편이 기분이 좋거나 기운이 나면 척척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남편이 여유와 쉼, 가족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사람인 것도 인정했습니다.
저는 몹시 피곤하거나 아파도 밀린 설거지와 쌓인 빨래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남편은 “쉬었다 하자, 차 한 잔 마시고 하자”하며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편을 보는 저의 시선이 달라지니 아이들도 게으른 아빠에서 느긋하고 여유 있는 아빠로 달리 봅니다. 남편을 살펴서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 ‘남편 찬스’를 지혜롭게 씁니다. 덕분에 아등바등하던 엄마에서 여유 있고 가볍게 해내는 엄마로 성장했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마치고 전법활동가 소임을 맡으니, 저녁 시간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이 많았습니다. 수업과 리허설, 학사회의와 통일의병 활동 등 어떤 주는 매일 저녁 일정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제가 좋아하는 일 때문에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첫째가 고2, 둘째가 초5, 막내가 다섯 살이었는데 특히 어린 막내에게 미안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거리를 두고 지켜봐 주면 되지만, 막내는 말도 느려 엄마와의 시간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엄마 노릇도 잘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정토회 봉사 전, 씻기고 먹이고 아이에게 필요한 일 먼저 도와주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아이를 재울 때는 온 맘과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학사 수업이나 회의를 마치면 마음이 충만하고 행복하니, 아이들에게 사랑도 듬뿍듬뿍 표현했습니다. ‘아이는 문제없이 잘 자라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을 넘어서니, 3년간 꾸준히 학사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막내가 초등학생이 되니 정토회 활동을 좀 더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정토회 봉사가 주말까지 이어질 일이 자주 생겼고, 거기에 새물정진까지 할 즈음엔 남편이 심하게 괴로워했습니다. 정진 중이어서인지 저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남편의 마음이 먼저 와닿았습니다. ‘2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도 여전히 함께 있고 싶어 하니 정말 고맙다’라는 마음을 남편에게 전하고 남편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남편은 제가 다른 쪽을 보고,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아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 말에 공감하며 남편이 싫어서 정토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님을 알렸습니다. 세상에 도움 되는 일에 서로 지지하고 격려해주면 좋겠다는 진심을 전했습니다. 이후 남편은 제 활동을 묵묵히 지원합니다.
저는 영어 교사입니다. 역량을 뛰어넘는 일을 맡으면 부족한 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혼자 전전긍긍했고, 제게만 힘든 일이 주어지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2023년에는 학교를 ‘고교학점제 교과 교실’로 새롭게 고쳐야 했습니다. 모두 피하는 이 일의 책임을 제가 맡았습니다.
설계 단계에서 교무실을 옮겨야 했는데, 소수지만 강력한 반대 의견에 부딪혔습니다. 그동안의 마음공부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반대 의견이 ‘반대’가 아니라 ‘다른 의견’으로 들렸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의견을 귀담아들으니, 제3의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 의견이 결국 결과를 더 좋게 할 수 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다치지 않고 웃으며 배우고 느끼는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새 학교로 자리를 옮긴 올해, 세 아이 육아로 담임을 맡지 않다가 10년 만에 고3 담임을 맡았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처음으로 불교대학 반 담당 소임을 해야 했습니다. 경력 25년 차 교사지만, 고3 담임이 처음이다 보니 불교대학 반 담당 소임까지 맡기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이 늘 잘하는 모습만 보이고 싶은 업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리고, 반 담당 소임을 가볍게 맡았습니다. 부족함을 드러내고 모르면 묻고 의논하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머리로 미리 계산해보고 될 일만 하면서 잘 산다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이리저리, 이렇게 저렇게 그만 재고, 인연 따라 주어지는 대로 경험하면서 몸으로 하나하나 느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수행입니다.
법륜스님 법문을 일상에서 적용하며 수행, 봉사의 균형을 잘 잡아가는 젊은 도반이 부러웠습니다. 강홍선 님은 지속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비결을 ‘가족이 많아서’라고 환한 미소로 답합니다. 우리의 경쟁교육 현실에서 교사이기 때문에 자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키우는 것이 오히려 더 쉽지 않다고 말하는 강홍선 님. 그럼에도 지혜롭게 해결점을 찾아가는 당당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글_희망리포터 이경분 (서제지부 관악지회)
편집_곽정란(대구경북지부 구미지회)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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