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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기 전부터 칠십이 가깝도록 ‘내가 참아야 한다.’라는 생각은 무겁고 단단한 돌처럼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삶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질문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의 책도 읽고, 불교 경전도 여러 권 읽으며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마흔 살 무렵부터는 매일 아침 절에 가서 염불 수행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첫 딸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어머니가 둘째 딸인 저를 낳을 무렵,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저의 형제는 모두 일곱이 되었고, 어머니는 네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아버지가 너무 못마땅했습니다. 미웠고, 원망스러웠습니다. ‘나는 자식이니까 아버지가 미워도 내가 참는 수밖에 없어. 이건 내가 참아야 하는 일이야.’ 어린 저는 속엣말을 꺼내지 못하고, 원망과 불만을 마음 깊숙이 눌러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반항을 일삼았습니다.
“아버지, 내가 먹은 엄마 젖이 독이지, 젖이었겠어요? 독을 먹고 자란 제가 어찌 잘되기를 바라세요?” 하며 대들었습니다. “후처를 들여서 아들을 얻고, 본처를 내쫓았으니 엄마가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하며 퍼부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가정교사 선생님을 짝사랑했습니다. 졸업한 뒤에는 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낙태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버지는 약학대학에 들어가면 약국을 차려주겠다고 했지만, 아버지에게 반항하려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랑했던 사람은 떠났고, 첫사랑에 실패했다는 생각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결혼도 취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마음 가는 대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언니와 저, 연거푸 딸 둘을 낳고, 아버지의 후처가 아들을 낳자 곧 이혼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예쁜 양산을 쓰고 과자를 사서 언니와 저를 보러 왔습니다. 예닐곱 살 무렵, 우리 자매를 만나고는 또다시 떠나는 엄마를 따라가려 땅바닥에 데굴데굴 뒹굴며 울었습니다. 엄마는 돌멩이를 던지며 저를 떼어 냈습니다.
어머니한테 가려고 가출하기도 했습니다. 늘 어머니가 그리웠습니다. ‘그 시절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어머니는 나를 버리고 갔는가?’ 미워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혼 위자료로 그 당시 기와집 열 채 값을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재혼하였으나 새 남편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여 나중에는 사채까지 얻어 쓰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늙고 외로워졌을 때는 큰 딸인 언니마저 외국에 나가 살았기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었습니다.
오십이 훨씬 넘어서야 방황을 끝내 볼 요량에 조용한 시골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때마침, 정부 예산 지원 사업에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국산 콩으로 된장과 간장을 빚어 파는 일을 자그마한 규모로 시작했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식품을 만들어 팔아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가정학을 공부했기에 자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좋은 의지만으론 되지 않았습니다. 광고와 포장 미흡에, 콩을 씻고 쑤어서 메주를 만들고, 청국장을 띄우는 일이 힘에 부쳤습니다. 그때 주위에서 ‘지금까지 힘들게 살았으니 이제는 보호받으며 살아보라’ 하면서 아내와 사별한 영감님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지난 시월, 팔십팔 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결혼은 하지 않고 영감님과 십팔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처음 십 년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된장 만들고 파는 일이 힘은 들었지만, 우리 둘 다 건강하고 행복했습니다. 제가 차를 운전해 놀러도 다녔습니다. 영감님은 어떤 나무람도 하지 않았고 저에게 한없이 다정했습니다. 그러다 팔 년 전, 영감님이 갑작스레 공황장애를 시작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농약을 먹고 저수지에 뛰어들기를 비롯해 세 번이나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끝내는 종일 말 없이 천장을 보며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가까운 사찰에서 염불 수행과 불교대학에서 경전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19 확산 방지 정책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던 시절인 2021년, 우연히 인터넷으로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인욕바라밀이란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것이 없게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참을 것이 없다면 참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구나!’ 충격이었습니다.
갑자기, 힘겹고 방황했던 시간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원망과 화를 꾹꾹 누르며 참았던 마음의 둑이 터지는 듯했습니다.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떠돌며 불안정했던 이유는 ‘참아야 한다.’라는 한 생각에 눌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아야 할 것이 없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 비로소 참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다른 일도 그렇게 참을 일이 없겠다 싶었고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차츰 자유로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였고, 이어서 경전 대학에서 부처님 법을 배웠습니다. 이전에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읽긴 했어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선명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육바라밀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도 하나씩 배웠습니다. 배운 대로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마음을 냈습니다.
우울증은 정말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영감님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종일 말 한마디 하는 날이 드물었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저도 아마 우울증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영감님을 보며 다짐했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무지하여 태어나지 못한 생명이 셋입니다. 이제 이 생명 하나만큼은 끝까지 보호하겠습니다.’ 누워만 있는 환자가 불쌍하여 하루에 한 번은 웃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농담도 하고 애교도 부렸습니다. 영감님은 웃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 웃음이 가짜일지라도 “아, 웃는다.” 하고 제가 좋아하면, 영감님은 따라서 빙긋이 웃었습니다.
팔 년이라는 긴 시간을 누워 앓으면서도 환자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고, 저도 간호하는 일이 귀찮지 않았습니다. 삼 년 전부터는 똥, 오줌을 받아냈는데, 처음엔 토하기도 하고 밥을 먹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하면서 이런 저의 반응을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똥을 보면서 ‘더럽다’ 생각하자, 연이어 역겨움이 따라 일어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 법에서 배운 대로 실천해 보았습니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 때 ‘아, 지금 더럽다는 생각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니, 곧 평정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환자를 씻길 때 간단히 샤워기로 씻기지 않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지도록 했습니다. 환자를 씻긴 물은 바로 버리지 않고 제가 목욕한 뒤에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한 번 사용한 물이나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한번 헹구면 되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변비로 막힌 항문을 손가락으로 뚫을 때도 환자의 고통을 덜어 준다 생각해 힘들지 않았습니다. ‘더럽다’ ‘깨끗하다’ 분별하지 않으니 씻고 또 씻고 할 일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별로 없으니 편안하고, 환자를 돌보는 일이 부담되지 않았습니다.
2021년 11월 14일부터 정토회 천일결사1에 입재하여 3년을 작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몸을 낮추고, 마음을 낮춥니다. 기도하면서 지나온 삶을 이해합니다. 어리석었기에 부모에게 반항하고, 잘못된 짝사랑과 그 사랑에 실패했다는 생각으로 긴 시간 방황하면서 스스로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저로 인해 상처받았을 사람들, 지키지 못한 소중한 생명에게 참회하며,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죄책감을 조금씩 내려놓습니다. 일어나는 분별심을 내려놓고 정토회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니 많은 것에 감사하며, 자신감이 생깁니다.
영감님을 만나 감사합니다. 누워 있었어도 제가 챙겨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습니다. 저에게 말없이 웃어 주는 영감님을 보면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집에서 편안하고 깨끗하게 세상 떠날 때까지 돌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골목에서 뒹굴며 울던 어린 저를 안으며,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걱정도 말아라. 너는 어떻게든 편안하고 건강하게 살게 해줄 거야.”라며 등을 토닥여주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버지가 얼마나 저를 사랑했는지 알았습니다.
엄마 사랑이 목말라 울부짖는 저를 두고 어찌 그리도 모질게 떠났느냐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부자 아버지가 있는데 네가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냐.”며 미안하게 여긴 적 없다고 했습니다.
직선적인 성격에 자기주장이 강한 어머니는 아이한테는 엄마의 자상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이해했고 천천히 화해도 했습니다. 홀로된 어머니를 챙겼고, 담도암에 걸린 후엔 우리 집에서 간호했습니다. 어머니는 비교적 편안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홀로 가시지 않고, 집에서 따뜻이 돌아가심은 두고두고 감사합니다.
남편을 간호하며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때 배운 지식과 간호했던 경험으로 제 주변 노인들에게 잘 쓰이고자 합니다. 몸이 너무 아픈데 어떤 병원, 어떤 진료과를 찾아가야 할지 모르는 노인 환자들에게 적절한 병원을 찾아 안내합니다. 운전할 수 있었을 때는 직접 차로 태워 주기도 했습니다. 운전을 그만둔 요즘은 함께 버스를 타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기도 하며 병원에 동행합니다. 가는 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진료 접수도 대신하고, 엑스레이 찍을 때도 곁에 앉아 같이 기다립니다.
나이가 비슷한 제가 친구도 되고 보호자 노릇도 하니 다들 좋아합니다. 아직은 건강하니 소임도 맡고 싶고, 젊은 도반들과 함께 봉사활동 하면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생을 살고 싶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노년에 이런 소망을 품게 되고, 여러 도반과 함께 할 수 있다니! 너무나 감사하고 축복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스님이라네.”라고 했던 서암스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참을 것이 없어져 버리자 제 마음은 맑고 평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참는 마음을 놓아버리니 더는 이리저리 헤매며 방황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집을 단정히 정돈하고, 매일 새벽 기도합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는 절간 같다고 합니다. 남편이 떠난 지금은 휴식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평화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더욱 수행에 집중하며 필요한 곳에 잘 쓰이고 싶습니다.
배영애 님은 부끄럽게 여겼던 과거를 꺼낼지, 계속 덮어둘지 많이 고민했는데, 인터뷰 당일 아침에야 있는 그대로 말할 것을 결심했다 합니다. 자기 삶의 어느 부분에서 잘못이 있었는지 탐구하고, 이해하고, 회복하여 자유롭고 평안에 이른 여정에 감동했습니다. 배영애 님의 인내와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삶을 나누어 주셔서 깊이 감사합니다.
글_이경희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서대문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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