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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부자였습니다. 결혼을 세 번 했습니다. 엄마도 결혼을 두 번 했습니다. 저는 그 두 분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용돈도 넉넉했고 필요한 건 모두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웃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고, 어딘가 위축되었습니다. TV에 나오는 집과 우리 집은 달랐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가족’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습니다.
아빠에게는 저 말고도 자식이 여섯이나 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엄마도 완전하지 않았고 부담스러웠습니다. 엄마는 자기 삶의 어려움을 저에게 하소연했습니다. 또, 집 근처 절에 다니며 새벽마다 천수경을 외웠지만, 그 마음은 블랙홀 같아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외모가 잘난 것도 아니고, 뭔가 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완전하지가 않았습니다. 항상 화가 났습니다. 저 자신이 제일 미웠습니다. 자긍심도 없었습니다.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뭘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몰랐습니다.
90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90학번은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였습니다. 강의실에서는 정의와 정도를 이야기하지만, 길거리에서는 최루탄을 맞아야 하는 좌절이 반복되었습니다. 토론해보면 분명히 이 길이 맞는 방향인데 어떻게 가야 할지는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는 후배의 죽음에 대한 왜곡 보도가 이어졌고 선배들과 동기들은 잡혀갔습니다. 세상도 완전하지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소정당의 선거운동도 해보았지만 미미한 지지를 받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렴 세상은 잘못되어 있고 바꿔야 할 대상인데, 저는 힘도 없었고 다 같이 뭘 해 봤자 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차니 결혼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꿈은 없었습니다.
저는 키 큰 사람을 좋아하는데 남편 될 사람이 키가 컸습니다. 조건도 좋았습니다. 대기업에 다녔고 성품도 착실해 보였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내가 원하는 돈과 생활의 안정만 가져다준다면 나머지는 대강 맞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예상대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다른 인격이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일단 기억하질 못했고, 점점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 아이들에게마저 폭력적이었던 날, 저는 남편에게 나가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아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남편은 주섬주섬 짐을 싸서 나가더니 다음날 소리소문없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 중의 문제였습니다. 이후로 남편은 술과 관련된 세 가지 사고를 더 쳤습니다. 저에게 남편은 '음주 삼관왕'이자, 금요일 저녁 술을 먹고 들어와 일요일까지 소파에 누워있는 '소파 ○○○선생'이었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것들로 둘러싸인 제 삶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욕구는 늘 있었습니다. 남편의 해외 근무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3년 반을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미국 학교에 다녔고 비싼 학비는 모두 남편 회사에서 지원했습니다. 주말에는 한인 교회에 나갔습니다.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운동도 했습니다. 삶은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제 어린 시절만큼이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괴로웠습니다. 여전히 화가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간단한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화를 냈습니다. 아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엄마 화났어?”였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제 눈치를 살폈습니다. 진리를 찾아서, 지혜를 찾아서 성경을 세 번 넘게 통독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음공부를 집중적으로 한다는 단체에도 쫓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를 즐겨 들던 어느 날, 우연히 높은 순위에 자리매김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클릭했습니다. 듣는 순간 ‘아, 이분이구나!’ 드디어 스승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나의 스승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천 개가 넘는 즉문즉설을 다 듣고 제 발로 창원 법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님과 정토법당은 제 상상과는 달랐습니다. 파마한 보살들이 법복을 입고 목탁을 두드리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마침 엄마가 담관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법당을 그만두었습니다. 엄마의 유일한 딸인 제가 병간호를 해야 했습니다. 그만두면서도 그때는 별로 아쉽지가 않았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의식도 없는 엄마는 계속 울컥울컥 토했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세상에 정말 '엄마와 나' 둘뿐이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직면한 것은 엄마의 외로움이었습니다. 엄마에게는 자식이 많았지만, 그들은 엄마가 낳은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자식인 저에게 엄마는 자신의 외로움을 말했던 것입니다.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그저 외로웠던 것입니다. ‘엄마가 외로웠구나’를 깨닫자, 곧 ‘나도 외로웠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 엄마처럼, 외로웠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외로운 줄 모르고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밖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2017년 장유법당의 가을 불교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법문도 그대로고 환경도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였습니다. 나누기는 ‘무엇 무엇이 좋았습니다.’하고 무조건 한 줄로 짧게 했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하랬더니 매번 자신의 괴로운 이야기를 길게 하는 도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참지 않고 다 말하는 성격이라 도반들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마찰과 함께 수행과 함께 경전대학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진행자로 봉사하면서 ‘천일만 딱 해보고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으면 스님한테 따지고 그만둬야지.’생각했습니다. 스님과 법문은 등대였고, 저는 망망대해에서 등대에 의지해 나아가는 외로운 돛단배 한 척 같았습니다. 그렇게 새벽 정진을 천일이나 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만 절감한 천일이었습니다. ‘나’를 알면 알수록 '나' 자신이 더 싫어졌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싫은 나를 데리고 천일을 더 해봐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두 번째 천일은 법당의 살림살이를 맡아 하는 총무 소임으로 시작했습니다. 제게 총무를 맡긴 보살님을 원망했습니다. 종종 “보살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잖아.”라며 뼈있는 농담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원망과 함께 수행과 함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법당을 정리하고 온라인 기반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기에는 김해지회 지원담당 소임을 맡았습니다. 지금은 지회장 소임을 하고 있습니다. 도반들과 여전히 아옹다옹하고 사과하며 수행과 봉사를 이어가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더는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명상 중에 제가 등대가 되어 있는 형상을 마주하였습니다. 저는 외로운 돛단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등대였습니다. 등대가 된 제 미약한 도움으로 줌과 미트를 새로 배우며 재잘재잘 실천활동에 참여하는 많은 돛단배가 보였습니다. 등대 주변에는 항상 배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그저 불을 켜고만 있으면 작은 배들이 알아서 길을 찾았고, 저에게 고맙다고 말해왔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저는 외로운 ‘나'를 위해서 등대가 되었을 뿐인데 저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웠습니다. 그 돛단배들이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가 누굴 돕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법등명1보다 자등명2이 먼저구나, 내가 등대가 되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나도 좋고 남도 좋구나.' 이러한 깨달음이 이어졌습니다. 두 번째 천일이 다가오는 지금, 제가 지회장 소임을 하기에 부족함을 잘 알지만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부족하면 다시는 지회장 안 시키겠지’하고 편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저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더는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스님의 조언처럼 남편과 마음속으로 이혼했습니다. 아마 남편이 첫 번째 사고를 치기도 전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제 남편이 아니라 사장님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술 때문에 운전도 못 하게 된 주제에 골프를 치러 가고 싶어 하는 ‘한심한 남편’이 아니라 월급을 제때 잘 주는 ‘착한 사장님’이다 생각하니, 골프장에 태워다 주면서도 화나지 않았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술상도 봐주었습니다. ‘사장님에게는 술이 보약’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님(남편)이 두 번째 음주 사고를 쳤습니다. 그래도 술상을 보아주었더니 이번에는 세 번째 음주 사고를 쳤습니다. 세 번째 음주 사고를 수습하면서 피해자에게 갖은 욕설을 들었습니다. 왜 남편을 저 모양으로 내버려 뒀느냐며 “아줌마도 잘못이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장님(남편)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돌아와 사장님(남편)을 만나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환자야. 아픈 것 같아. 이제 당신에게 술은 보약이 아니라 독이야.” 사장님은 제 말을 이해한 듯했습니다. 그리고 제 말속에 원망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도 느낀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제게 아직도 사장님으로 남아 있지만, 집에서 탁주 한 잔씩 하는 것 말고는 다시는 긴 음주를 즐기지 않습니다.
스님은 '스님의 만일'을 달성하셨습니다. 저는 '나의 만일'을 달성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뒤 돌아보고 종종 후회하며 마음도 잘 들뜹니다. 저는 도반들의 말을 듣기보다 제 하고 싶은 말을 더 많이 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야 한다지만 저는 오른손이 한 일을 온몸의 세포가 다 알게끔 해버리곤 합니다. 저는 여전히 부르르 화내고 황급히 사과합니다. 마음도 바닷속 해초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립니다. 그래도 이 모습 이대로 짊어지고 세 번째 천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는 만일로 나아갈 것입니다. 매일 수행하고, 하던 소임을 잘 마치는 것 말고는 원하는 바가 없습니다. 더 좋은 모습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신선혜 님은 희망리포터 소임을 막 시작한 저에게 ‘소임이 진짜 수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약속에 늦어 사과를 반복하는 저에게 “소임을 계속하세요. 바쁜데 괜히 소임을 하겠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준다는 생각이 들어도 계속하세요. 양해를 구하고 읍소하세요. 그러면 절로 숙어집니다. 상대가 양해해줄 상황이면 양해를 해줄 것이고, 안 되면 안 된다고 사실대로 말해 줄 거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리포터님 때문에 화나거나 짜증 난다면 그건 그의 사정입니다.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그의 수행입니다. 리포터님은 그냥 리포터가 해야 하는 소임을 하세요. 계속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임을 맡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수행을 하고자, 이 글을 완성합니다.
글_이승준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편집_박은영(대전충청지부 천안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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