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엄마는 무척 바쁘고 고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막내였던 저는 엄마의 관심은 많이 못 받았지만 언니와 오빠들의 보살핌과 희생 아래 큰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기반을 잡았고 저도 대기업에 입사하여 지금의 남편을 만나 편안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큰아이가 5살 때 엄마는 갑작스럽게 3개월 시한부 암 진단을 받았고 거짓말처럼 3개월 후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암인지도 모르게 너무 많이 퍼져 있어서 손쓸수도 없이 그리고 가족들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처음 목격하였습니다. 영원히 곁에 계실줄 알았는데 한순간에 엄마가 사라지시니 엄마를 잃은 불쌍한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 남편과 아이에게 이유 없이 짜증내고 화내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고 언니마저 폐암 선고를 받자 다시 엄마 돌아가실 때의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양산에서 대구까지 일주일에 절반을 병원에서 지내며 언니의 병간호를 도맡아서 하였습니다. 아이들을 제쳐두고 언니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더 이상 불교공부를 늦추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 간간이 법륜스님 즉문즉설은 듣고 있었던 터라 언니의 병이 잘 회복 될 쯤 아파트 앞 현수막을 보고 바로 2016년 불교대학을 입학하였습니다.
제가 맞벌이를 해서 3살 때까지 시어머님께서 큰아이를 돌봐주셨는데 그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나의 어릴 적 소홀했던 엄마의 사랑에 대한 결핍이 사춘기에 접한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났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의 결석같은 사소한 문제가 생길때 마다 왜 그랬는지 우선 들어주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하나 따지며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이가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는데도 사춘기면 겪을 수 있는 방황을 엄마로서 그대로 지켜봐 주지 못하고 사사건건 간섭을 했습니다. 나의 결핍이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아이가 별난게 아니라 제가 별난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이런 모습에 아이들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한없이 엎드려 참회했습니다. 10-8차 입재를 시작하면서 ‘아, 이 아이가 자기 안에 있던 것을 표출 하는구나! 당연한 거지. 이 정도로 감사하지’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시어머님이 시한부 4개월 선고를 받게 되셨습니다. 시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는 걸 원치 않아서 시누이와 번갈아가며 간병을 했습니다. 저는 경전반 학생이었고 여러 봉사 담당을 하며 공부하고 수행하는 덕에 큰 마음의 동요 없이 어머님 간호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맏며느리라 시어머니의 병간호는 제 역할이라 받아들이고 몸이 탈이 날 정도로 나름의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큰아이가 고3이 되던 3월까지 1년을 더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시어머니가 평소에 다니셨던 절에서 49재를 마치고 오는 날, 시누이와 시동생이 어머니가 평소에 저희 부부에게 섭섭했던 기억들을 적은 내용을 전달하며 ‘너희 부부가 한 게 뭐가 있느냐?" 는 원망과 질책을 했습니다. 남편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이고 저 또한 시어머니를 잘 따랐던 터라 그런 상황에 대해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당혹스럽고 억울했지만 이야기를 담담히 들으며 "어머님 옆에 형님이 계셔서 힘든 마음을 잘 들어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돌아오는 내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후 재산이 정리되는 과정을 보며 시누이와 시동생이 왜 그렇게까지 밖에 할 수 없었는지 ‘돈 앞에 상전 없다’는 옛 말이 어떻게 현실로 일어나는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보왕삼매론의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를 수행문으로 삼아 긴 시간 정진도 하였습니다. 돌아가실 무렵 시어머니와의 인연이 변했다 할지라도 시어머님과 같이했던 추억과 사랑은 오로지 둘 밖에 모릅니다. 어쩌면 돌아가실 때 까지 저희 부부를 사랑하신 방법이 아니었을까도 싶습니다. 아직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제가 이해하는 만큼 자유롭다는 걸 깨닫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올해 3월 큰아이는 제대를 하여 집으로 왔고 작은 아이는 곧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온 가족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합니다. 군에 가있는 동안 법당으로 사용했던 큰아이 방을 허락을 받아 사용해야 하고, 어느 날은 잠자고 있는 남편의 발치에서 새벽회의도 하고 있습니다. 책임감 강하고 정직하지만 다혈질의 성격을 가진 남편의 그늘 속에서 안락하기도 하지만 정토회 활동을 남편에게 속박을 받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시간들과 마주하는 것이 저의 본격적인 독립이 시작되는 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을 통해 어릴 적 엄마에게서 부족함으로 느꼈던 결핍들이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불법을 만난 저보다도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이 얻는 것이고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보아야 한다며 하는 사업도 밥 먹고 살기 딱 좋을 만큼만 합니다.
얼마 전 5개월의 서원행자 교육도 마쳤습니다. 처음에는 특별한 서원 없이 그냥 정토회에 오래 남으려면 서원행자가 되어야 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통일특위로 2년 활동하다 전법 모둠장 소임을 맡으면서 서원행자교육을 병행하니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많이 부족 하구나, 경험이 많이 없구나, 긴장을 많이 하는구나, 애를 쓰는구나.’ 하며 저를 알아가는 시간이 참 재미있고 소중했습니다.
교육을 받는 중에 상대가 원하는 쓰임에 ‘네’하고 받았습니다. 지금하고 있는 소임은 전법 모둠장, 지회 통일꼭지, 지회 홍보꼭지, 그룹장으로 어느덧 경험치가 알게 모르게 쌓이고 있습니다. 삶의 무게가 아니고 앞으로 저의 자산이 될 것을 알기에 소중히 받았습니다. 다양한 소임을 통해 도반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아갑니다. 나와 다름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해 일이 더 잘 굴러감을 봅니다. 모두의 덕분으로 평범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지금은 그 소중한 인연을 정토회에서 쌓고 있습니다.
작은 원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중지된 인도성지순례가 내년에는 꼭 재개 되었으면 합니다. 여태까지 선배님들 따라 스승님 따라 여기까지 잘 왔고 내년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인연 따라 봉사하면서 받은 사랑을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편안한 얼굴의 잔잔한 미소의 조경옥님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잘 버텨볼까 힘들어 하며 꾀를 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내 보기로 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을 알게 한 도반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_이순남 희망리포터_경남지부 김해지회
편집_박문구_서대문지회
전체댓글 16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김해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