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2.3. 인도성지순례 11일째, 쉬라바스티
“부처님은 신통을 금하셨는데, 천불화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11일째입니다. 네팔을 떠나 다시 인도로 들어와 삐쁘라하와, 천불화현탑, 동원정사를 차례로 순례했습니다.

오늘은 네팔에서 인도로 다시 국경을 넘는 날이었습니다. 순례단은 새벽 일찍 일어나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새벽 4시, 대성석가사를 출발해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새벽 예불을 올렸습니다.

새벽 5시에 국경에 도착해 출입국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네팔 출국 수속은 입국에 비해 절차가 간소한 편이어서 비교적 빠르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측에서는 올해부터 국경 수비가 강화되어 작년보다 절차가 까다로웠습니다.

오전 7시 50분, 먼저 도착한 버스 5대가 인도 입국 절차를 완료했습니다. 스님은 입국 절차를 마친 5대와 함께 삐쁘라하와로 향했습니다.

9시 25분이 되어 삐쁘라하와에 도착했습니다. 성지는 정갈했고, 짙은 안개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삐쁘라하와에는 쉬라바스티 일정을 경호해 줄 경찰이 나와 있었습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스님. 순례 일정이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다.”

스님은 경찰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탑돌이 동선과 순례단이 앉을 자리를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참배장소와 떨어진 곳으로 대중을 인솔하여 도시락으로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칠 즈음 버스 5대가 더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선발대와 함께 참배 장소인 탑 앞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삐쁘라하와 탑은 넓은 평원 한가운데 낮고 둔중하게 서 있었습니다. 탑 주위에는 별다른 구조물이 없었습니다. 탁 트인 공간에 오직 탑 하나만 서 있었습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문양 없이, 둥글게 쌓아 올린 흙과 벽돌만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가사를 수하고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탑돌이가 끝나갈 즈음 짙은 안개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예불을 올리고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의 발굴 과정과 사리 봉안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삐쁘라하와(Piprahwa) 진신사리탑입니다. 여덟 곳의 진신사리탑 가운데 석가족이 세운 사리탑입니다.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의 주요 유적들은 대부분 네팔 지역에 남아 있는데, 이 유적만은 인도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 사람들은 이곳을 인디아 카필라바스투라고 부릅니다.

발굴로 확인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부처님 진신사리

이 유적은 19세기 말, 영국 식민지 시기에 발굴되었습니다. 발굴은 영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클랙스턴 페페(William Claxton Peppé)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탑 안에서 사리 용기가 발견되었고, 그 용기에는 석가족이 세운 사리탑임을 밝히는 명문이 함께 나와 이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었습니다.

그 이후 인도가 독립한 뒤, 1970년대에 인도 고고학조사국이 이곳을 다시 발굴했습니다. 이 재발굴 과정에서, 초기 발굴 지점보다 더 깊은 층에서 또 다른 사리 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이 사리탑이 한 번에 쌓인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를 거치며 점차 증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아소카 왕 시대에 사리탑의 기단이 마련되었고, 이후 쿠샨 왕조 시대에 한 차례 더 증축되었습니다. 다시 굽타 왕조 시대에 이르러 탑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면서, 사리탑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점차 커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초기에는 아래쪽에 사리가 봉안되었고, 후대에는 위쪽에 다시 사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리탑에서는 사리 용기가 두 점 발견되었고, 출토된 사리도 여러 점에 이릅니다.

현재 우리가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고 접할 수 있는 사리로는, 이곳 삐쁘라하와의 사리가 사실상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지 설명을 마칠 즈음 마지막 3대의 버스가 삐쁘라하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후발대에게 공양과 참배를 마친 뒤 천불화현탑으로 오도록 안내하고, 참배를 마친 순례단과 먼저 쉬라바스티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약 세 시간 반을 달려 오후 3시에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탑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합장한 채 염불하며 천천히 탑을 돌아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아래에서 볼 때는 나지막한 동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자 탑의 형상을 갖춘 탑터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탑돌이를 마친 뒤 그 자리에 서서 예불을 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천불화현탑의 유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쉬라바스티(Sravasti)입니다. 이 탑은 쉬라바스티의 천불화현탑(千佛化現塔)입니다. 부처님께서 망고나무 씨앗을 하나 심었는데, 그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 나무가 되었고, 망고가 열렸으며, 그 망고가 천 명의 부처님으로 화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해 천불화현탑이라 불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고, 왕사성의 죽림정사에서 약 3년 가까이 머무셨습니다. 이후 수닷타 장자의 초청을 받아 이곳 쉬라바스티, 즉 사위성으로 오셨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이 지역 출신의 큰 부호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1,250명의 대중과 함께 머물며 수행과 교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라지기르(왕사성)에서와 같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쉬라바스티는 당시 신흥 강국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쉬라바스티는 팔리어로 사왓띠(Sāvatthī)라 불리는데, 이는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물자가 풍성하고 삶이 넉넉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수많은 신흥 사상가들이 경쟁적으로 나타나 '이것이 옳다', '이것이 그르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의 눈에 부처님 역시 여러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수닷타 장자와 같은 뜻있는 이들은, 이곳의 대중이 부처님의 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쉬라바스티의 사람들은 수행의 깊이나 가르침보다도, 신통이나 기적과 같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대중의 이해가 아직 부족하니, 무엇인가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부처님은 왜 기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이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특정한 날과 시각에 이곳 쉬라바스티 성 밖으로 대중을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이자 부처님께서는 망고나무 씨 하나를 땅에 심으셨고, 곧 싹이 트며 빠르게 자라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에는 수많은 망고가 열려 노랗게 익었고, 그 망고가 모두 부처님의 모습으로 화현했다고 합니다. 망고나무 위에 황금빛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난 모습을 본 대중은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화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코살라국의 왕은 팔리어로 파세나디(Pasenadi), 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세나짓(Prasenajit)이라 불립니다. 이 왕은 처음에는 교만하고 교양이 부족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닷타 장자의 권유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깊이 감동하여 귀의하게 됩니다.

프라세나짓 왕은 귀의한 뒤 부처님께 여러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들을 보면 다소 세속적이고 단순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와 같은 질문들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것보다는 현실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질문의 수준과 상관없이, 그에 맞는 법문을 설해 주셨고, 그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귀중한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프라세나짓 왕은 천불화현의 기적 이후 완전히 교화되었고, 그 인연으로 이 천불화현탑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이 탑은 케사리아 대탑(Kesaria Stupa)에 이어 규모가 매우 큰 탑으로, 케사리아 대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경전을 독송한 후 순례단은 동원정사로 이동했습니다. 동원정사로 가는 길은 마을을 지나야 했습니다. 순례단의 긴 행렬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와 구경했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동원정사에 도착했습니다. 동원정사의 한가운데에는 동그랗게 쌓인 낮은 벽돌무더기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을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주변이 비교적 한적하고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습니다. 한때 이곳에 동원정사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은 동원정사를 세운 베사카 부인의 삶을 통해, 한 여성의 신심과 선택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상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동원정사입니다. 팔리어로는 푸바라마 비하라(Pubbārāma Vihāra)라고 하며, 사위성 동문 밖에 조성된 정사라는 뜻입니다. 쉬라바스티, 즉 사위성의 서문 밖에는 제따바나라는 기원정사가 있는데, 그에 견주어 동쪽 문 밖에 베사카 부인이 세운 절이 바로 이 동원정사입니다.

동원정사를 창건한 베사카 부인의 고향은 밧디야라는 지역입니다. 밧디야가 속한 앙가국은 빔비사라 왕에 의해 마가다국에 병합되었습니다. 베사카 부인의 할아버지는 밧디야 지역의 대부호였는데, 나라가 병합된 이후에도 마가다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큰 부호가 되었습니다. 베사카 부인은 이런 가문의 영향으로 일곱 살 무렵부터 이미 부처님께서 그 집에 공양을 드시러 오실 때 시중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처님을 뵈었고, 불심이 깊은 여성이었습니다.

베사카 부인은 열여섯 살에 사위성의 큰 부잣집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남편 집안도 부유했지만, 베사카 부인의 집안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 큰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손녀의 지참금으로 보낸 재산이 남편 집안의 전 재산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또 시집살이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오늘날로 치면 법률 고문단과 같은 사람들까지 함께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 사연

베사카 부인의 시댁은 니간타 외도의 신자였습니다. 불교 신자인 베사카 부인이 시집을 오면서 종교적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들이 그 집에 탁발을 왔는데, 시아버지는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밥을 먹고 있을 때 탁발승이 오면 한 숟가락이라도 공양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시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외면했습니다.

베사카 부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께 '죄송합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지금 식은 밥을 드시고 있어 공양을 올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돌려보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시아버지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자신은 금그릇에 유미죽을 먹고 있는데, 며느리가 식은 밥을 먹고 있다고 표현했다며 무례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시아버지는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파혼이 성립되면 며느리가 가져온 지참금을 시댁이 모두 가져가게 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합당한 이유 없이 며느리를 내쫓을 경우에는 지참금을 모두 돌려줘야 했습니다. 시댁에서는 베사카 부인이 시아버지를 모독했다고 주장했고, 베사카 부인 측에서는 스님들께 공양을 드리지 못한 상황을 설명했을 뿐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재판으로까지 이어졌고, 베사카 부인을 따라온 고문단의 협력으로 파혼 사유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 결과, 시댁에서 이혼을 원한다면 베사카 부인의 막대한 지참금을 모두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시댁은 이혼을 포기하고 함께 살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베사카 부인이 조건을 제시합니다.

'제가 이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 주십시오. 저는 부처님을 집에 초청할 것이고, 스님들이 오시면 공양을 올릴 것입니다.'

시댁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베사카 부인은 자유롭게 부처님과 대중을 집으로 초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 미가라는 끝까지 설법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집에는 니간타 외도의 지도자가 상주하며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사카는 부처님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고 설법을 들었습니다. 미가라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고타마 붓다가 어떤 사람이기에 며느리가 저토록 따르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병풍 뒤에 숨어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지혜의 눈이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숨어서 법문을 듣고도 곧바로 깨달았는데, 여러분은 몇 년을 듣고도 아직 못 깨달으니 어떻게 된 일이죠? 여러분도 한번 숨어서 법문을 들어볼래요? (웃음)

미가라는 며느리인 베사카 부인을 '법의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이 말에서 유래해 베사카 부인이 세운 절을 녹자모 강당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베사카 부인은 이처럼 집안을 교화했을 뿐 아니라, 부처님과 상가를 위해 많은 공양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지역에서 여러 음해와 분쟁에 휘말렸을 때도, 수닷타 장자와 함께 베사카 부인이 중심이 되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재정적 후원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풀어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손녀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견뎌야 합니까?" 부처님의 답변

베사카 부인과 관련해 또 하나의 일화가 전해집니다. 나이가 든 어느 날, 베사카 부인은 사랑하던 손녀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부처님을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부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습니까, 적은 것이 좋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위성 사람만큼 많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위성에서는 하루에 몇 명이나 죽습니까?’

‘적어도 하루에 한 명 이상은 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 슬픔에 잠겨 울겠군요.’

이 말씀을 듣고 베사카 부인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베사카 부인은 이 외에도 출가 승려들의 건강과 위생을 위해 여러 제도를 마련하는 등 상가를 위해 많은 헌신을 했습니다. 그녀가 창건한 동원정사는 기원정사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위성을 찾는다면 반드시 들러볼 만한 성지입니다. 특히 여성 불자들에게 베사카 부인의 수행력과 헌신은 깊은 울림을 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지설명을 마치고 순례단은 함께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독송 중에 4대의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선발대는 먼저 천축선원으로 이동하도록 안내하고, 후발대에게 다시 성지설명을 했습니다.


성지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마을 앞에 모여 있는 150여 명의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오후 5시 30분,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인도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이 길 위로 펼쳐졌습니다.



저녁 6시, 천축선원에 도착하자 주지 대인스님이 공양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인스님께 다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대인스님, 건강히 잘 계셨습니까?”

“네, 스님. 어서오십시오. 잘 있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우선 공양부터 드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스님은 인사를 나눈 후 저녁공양을 했습니다. 순례단도 천축선원에서 준비해 준 따뜻한 국과 밥으로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저녁 7시부터 천축선원 마당에서 저녁 예불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법회를 열기 전 천축선원 주지 대인스님이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인연을 맺고 산 지 올해로 26년째 됩니다. 코로나 3년을 빼고는 법륜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을 해마다 이렇게 뵈어 왔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의 반야회상이 열린 곳입니다. 금강경을 비롯하여 경전 속 많은 법문들이 이곳에서 설해졌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성지입니다. 도량 안에는 160명의 학생이 공부하는 학교가 있고, 올해 두 번째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20명이 됩니다. 앞으로도 이 도량이 진실한 수행자들이 모여 마음을 밝히는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어서 대인스님과 함께 천축선원을 운영하고 있는 적조행 보살님이 유쾌한 말솜씨로 순례단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작년에 오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희 절에서 일하는 매니저 와르단이 있어요. 이름이 와르단 샤카이고, 석가족입니다. 작년 정토회 인도성지순례 기간에 부인이 출산 예정이었는데, 하필 행자님들이 오시는 날 양수가 터져서 급하게 수술하러 갔어요.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법륜스님께 '이름 하나 부탁드립니다' 했더니 그 자리에서 '베사카'라고 지어주셨어요. 오늘 동원정사에 다녀오셨죠? 베사카는 부처님의 여성 제자 중에 최고 아닙니까. 그 이름을 지어 주시면서 금일봉까지 아기 앞으로 주셨어요. 와르단의 부인은 모리아족입니다. 모리아족은 아쇼카 왕의 가문입니다. 즉 석가족과 모리아족이 결혼한 거예요.”

재미있는 일화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늘이 그 아기의 첫 돌이라 와르단은 처가에 아기를 데려다주고 돌잔치를 마친 뒤 돌아올 예정이라고 해서 순례단 모두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그동안 성지순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질문해도 좋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시간 남짓 동안 여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로 손을 든 질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소 신통력을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천불화현탑에서는 망고나무에서 천 명의 부처님이 화현하는 기적을 직접 보여주셨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부처님은 신통을 금하셨는데, 천불화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천불화현탑에서 설명을 듣고 의문이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을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망고나무 열매가 천 개의 부처가 되었다는 경전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 지역의 교화가 어려웠던 만큼 부처님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같이 있던 천 명의 비구들이 같이 망고나무가 있는 집에 각각 들러서 교화를 한 것을 신화적인 요소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종교적인 언어를 해석할 때는 상징적으로 보거나, 그 연유를 따져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목련존자와의 설화뿐 아니라 여러 경우에서 신통을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신통은 중생을 현혹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깨달음과 지혜는 중생의 정신을 맑게 하지만, 신비한 현상은 오히려 중생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신비는 본래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큰 배가 물 위에 떠서 많은 짐을 싣고 가는 것을 우리는 신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배가 뜨는지 그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이 물 위를 걸으면 신비하게 느낍니다. 사람이 왜 물에 뜨는지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오백 명을 태우고 공중을 날아 미국까지 가도 신비하게 느끼지 않지만,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주문을 외우며 공중에 오십 센티미터쯤 떠 있으면 신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효용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짐을 싣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웃음)

이처럼 신비는 무지에 기반해 생겨납니다. 종교가 인간의 '모름', 곧 무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두려움 또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와 아는 사람을 만날 때를 떠올려 보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모르는 곳에 갈 때, 모르는 일을 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종교에서는 이 두려움을 일종의 협박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 신비감이라는 유혹이 더해집니다.

그래서 종교는 이 두 가지, 신비감과 두려움을 통해 사람을 통제합니다. '선을 행하면 천당에 가고, 악을 행하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항상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세속에서는 이를 당근과 채찍이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무지에 기반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이 무지를 꿰뚫어 보게 하기 때문에 신비감도 사라지게 하고 두려움도 사라지게 합니다. 그래서 여래는 늘 '나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불교가 신비감을 조성한다면, 그것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고 무지를 깨우치기도 하지만, 스님이 열반한 뒤 시간이 흐르면 스님에 대해서도 신비감을 덧입혀 이야기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 신비감이 사람들을 모으는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교가 대중에게 널리 확산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신비감이 믿음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불멸 이후 약 200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8대 성지 가운데 네 곳에는 신비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라즈기르에서는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에게 절을 했다고 전하고, 바이샬리에서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렸다고 합니다. 쉬라바스티에서는 천 명의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하고, 상카시아에서는 부처님께서 하늘나라에 다녀오셨다고 전합니다. 모두 종교적인 성격을 띤 이야기들입니다.

이는 불교가 확산되고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연유가 있었고, 그 위에 신비적인 요소가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천불화현의 경우에는 어떤 교화의 사례가 시간이 흐르며 이렇게 변형되었는지 저도 아직까지 분명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반면 마하가섭 존자에게 부처님께서 법을 전하셨다고 전해지는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는 테라바다 경전, 니까야에 기록된 내용으로, 기원정사 제타바나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법문 도중 마하가섭이 늦게 도착했는데 대중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자, 부처님께서 '가섭이여, 이리 오라' 하시며 자신의 자리를 나누어 주신 일입니다. 이 사건이 훗날 선종의 화두로 전해졌습니다. 또 '곽시상부(槨示雙趺)'라는 이야기 역시 실제 인도의 화장 방식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발을 내놓고 화장하는 관습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며 상징적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천불화현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어떤 사건이 어떻게 그렇게 신비적으로 묘사되었는지, 현재까지도 뚜렷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러한 신비적 서사가 불멸 이후 천 년이 지난 뒤가 아니라, 약 200년 정도 지난 시점부터 나타났고, 우리가 오늘날 보는 8대 성지의 조형과 묘사는 굽타 시대, 즉 4세기에서 6세기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이어지는 인도의 종교적 흐름 속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3년 전에 성지순례를 왔을 때는 벽돌만 보였는데 두 번째 오니까 조금 더 보입니다. 바른 불교가 후대에도 잘 이어지게 하기 위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부처님 당시에는 1,250명의 제자가 함께했다고 합니다. 마이크도 수신기도 없던 시대에 부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맨 끝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었을까요?
  • 수자타아카데미를 보며 헌신적인 삶에 존경심이 들었고,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본업도 있고 생활도 해야 하는 재가 수행자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활동에 참여해야 할까요?
  • 부처님을 묘사하는 모든 단어는 숭고하고 아름다운데, 아들 라훌라의 이름은 왜 '장애'라는 뜻일까요?
  •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인데 현재 불교 인구는 0.7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이 좋은 불교가 어떻게 인도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질문에 모두 답변을 하고 나니 저녁 8시 40분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습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점점 날이 추워지고 있어서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또 다른 숙소로 이동하셔야 하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순례단은 각자 숙소로 가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쉬라바스티에서 11일째 성지순례의 날이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랜 기간을 머무시며 수많은 법문을 설하신 기원정사를 순례합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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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정

고맙습니다.

2026-02-06 07:22:17

순선

스님 존경합니다 감사드립니다

2026-02-06 07:19:18

차덕환

성지순례를 통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02-06 06: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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