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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제35차 인도성지순례 10일째입니다. 네팔 고산 도시 탄센에서 히말라야의 일출을 보고, 부처님께서 청소년기를 보내셨던 카필라바스투와 출가 후 가족들과 다시 만나셨던 쿠단을 순례했습니다.
새벽 2시, 순례단은 해발 2,000m의 고원 도시 탄센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버스가 움직이자 차 안은 이내 고요해졌고, 대부분의 대중은 다시 잠에 들었습니다.

오전 5시 10분, 버스는 탄센에 도착했습니다. 안개가 짙지 않아 예상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했습니다. 사방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스님과 순례단은 산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습니다.


가파른 계단 앞에서 스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앞장서서 걷기가 어려우니 여러분이 먼저 올라가세요.“
스님은 뒤따라오는 순례단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습니다.

오전 6시 무렵, 산 정상에 도착했지만 주변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일출까지 약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해가 잘 보일 만한 자리에 순례단과 함께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일출을 기다렸습니다.
"일출을 먼저 보면 올해 시집이나 장가를 갈 수 있대요. 그러니까 공동체 사는 분들이나 보살님들, 거사님들은 해를 등지고 서서 기다리세요.“
스님의 농담에 순례단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날이 점점 밝아졌지만 아직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수신기를 통해 다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해가 뜬 것 같은데 아직 안 보이네요. 사실 시간으로는 이미 지났어요.“
해가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분주히 옮겨다니는 순례단을 보며 스님이 말했습니다.
“지금 해가 잘 안 보인다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데 5분만 지나면, 보고 싶지 않아도 다 보입니다. 어디에 서 있어도 누구나 볼 수 있게 돼요.”

잠시 후 누군가 외쳤습니다.
"해 뜹니다!“

오전 7시경, 붉은 태양이 설산 위로 천천히 솟아올랐습니다. 곳곳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히말라야 산맥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어느 정도 떠오르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자,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가는 길에 설산이 잘 보이는 곳도 있습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르막이 나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설산이 잘 보이는 지점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청년 수백 명이 군사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자리를 옮겨 다른 공터로 갔습니다. 대중이 모두 모이자 공양게송을 하고, 각자가 준비한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스님은 순례단에게 안내했습니다.
"오늘 탄센에 행사가 있어서 주차공간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정차해 둔 버스를 바로 빼줘야 한다고 합니다. 내려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장 보느라 늦지 말고, 곧장 주차장으로 와 주세요.“

스님과 순례단은 곧장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오전 8시 45분, 산을 내려온 순례단은 부처님이 성장하신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더 빨리 가려고 국도를 선택했지만, 4차선 확장 공사 중이라 길이 좋지 않아 오히려 한 시간이나 더 늦어졌습니다.


오후 12시 40분,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스님의 안내에 따라 염불을 하며 성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순례단은 부처님의 태자 시절 궁터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되기 이전, 한 인간 싯다르타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지금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에서 서쪽으로 약 28km 떨어진 곳으로, 현재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는 타올리하와(Taulihawa)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스승에게서 배우는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인 왕을 따라다니며 왕이 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배우는 시기에 접어듭니다. 경전에서는 이때의 나이를 대략 열두 살 또는 열다섯 살 정도로 표현합니다. 마침 봄이 되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였고, 싯다르타 태자는 처음으로 농경제에 참석하게 됩니다.

농경제는 왕이 금으로 칠한 쟁기를 몰고, 대신들은 은으로 칠한 쟁기를 몰며, 그 아래 사람들은 동으로 칠한 쟁기를 모는 행사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철로 된 쟁기를 들고, 천여 명이 한꺼번에 밭을 가는 대규모 행사였습니다. 이는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자리였고, 정반왕은 싯다르타 태자가 이를 직접 보고 배우게 하려고 함께 농경제에 참석시켰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이때 처음으로 왕궁 밖 세상을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왕궁을 벗어나 보니, 당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고, 하층민은 피부가 검은 드라비다족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야윈 몸으로 다 해진 옷을 입고, 힘든 노동으로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싯다르타 태자는 깊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왕궁에서 누리던 좋은 옷과 좋은 음식, 편안한 생활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농민들과 노예들의 삶을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린 풍요가 그들의 고통 위에 놓여 있었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가 쟁기질을 하며 소를 때리자, 소는 피를 흘리고 입에 거품을 물며 쟁기를 끌었습니다. 또 소가 쟁기로 땅을 갈아엎자, 땅속에 있던 작은 벌레들이 밖으로 드러났고, 새들이 쟁기 뒤를 따라다니며 그 벌레들을 쪼아먹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 싯다르타 태자의 마음속에 깊은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왜 하나가 편리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불편해져야 하는가? 왜 하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까? 함께 편리해지는 길은 없을까? 함께 살아가는 길은 없을까?'
이 경험은 훗날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라고 답하신 가르침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농경제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염부나무 숲 그늘에 앉아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붙들고 깊은 선정에 들었습니다. 이때는 호흡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의문 하나에 집중한 상태였습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이 뭐꼬'라는 화두를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훗날 부처님께서는 여섯 해 동안 극심한 고행을 한 뒤, 이때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장면이 경전에 나옵니다. 고행을 통해 얻은 선정의 깊이가, 어린 시절 염부나무 아래에서 사색하던 때보다 오히려 못하지 않는가 하고 돌아본 것입니다. 고행은 늘 긴장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에 머무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이렇게 의문에 깊이 몰두한 나머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습니다. 경전에는 시간이 지나 해의 위치가 바뀌어 그늘에 햇볕이 들자, 염부나무 가지가 움직여 태자가 앉아 있는 자리에는 계속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반왕은 농경제의 장엄한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려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아들이 보이지 않자 이리저리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염부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앉아 사색에 잠긴 아들을 발견합니다. 그 모습이 매우 고요하고 거룩해 보여, 왕은 자신도 모르게 아들 앞에 절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 카필라성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사문유관입니다. 사문유관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가 직접 보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는 이 장면이 다소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동문으로 나가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의 머리는 허옇고, 살가죽은 늘어져 겹겹이 주름이 지고, 털은 빠지고, 입에서는 가래가 끓고, 눈에는 눈곱이 끼고, 콧물이 흐르고,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경전에서는 늙음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도에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인들 가운데 이 묘사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노인에 대한 표현이 매우 사실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시종에게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라고 묻자, 시종은 '늙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저렇게 되고, 그 누구도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부처님은 자신 또한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그 이후 왕은 태자에게 길거리의 노인이나 거지, 병자 같은 사람을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경전에는 이후 작병천자라는 신이 노인이나 병자, 시신의 모습으로 화현하여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남문으로 나가 만난 사람은 병들었으나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장면 또한 경전에서는 차마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환자의 모습을 보며, 부처님은 사람이 저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 역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얼마 후에는 서문으로 나가 사람의 시신을 보게 됩니다. 시신은 썩어 문드러지고, 구더기가 끓으며, 새들이 파먹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묻자, 시종은 죽은 시신이라고 답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죽고, 자신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때 노인이나 병자, 시신을 처음 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궁 안에서도 노인과 환자, 시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 밖에서 본 모습은 달랐습니다. 늙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 병들었지만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된 사람, 죽었지만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고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는 늙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버려지고, 병들어 치료비가 더 들면 버려지며, 죽으면 장례조차 없이 시타림에 버려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출가하지 않고 왕족으로 남아 있었다면, 전쟁에서 이겼을 경우 전륜성왕이 되었을 수 있지만, 전쟁에서 졌다면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석가족의 대부분은 전쟁에서 패해 학살당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께서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출가의 근본 원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피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하나의 큰 과제로 삼은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원이 분명했기 때문에, 수행 중에 퇴굴심이 일어나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출가할 때 느꼈던 중생의 고통을 떠올리며, 그 고통이 아직 남아 있는데 수행을 멈출 수 없다는 다짐이 수행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원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에, 이미 부처님께서는 출가 수행 과정에서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큰 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삶의 모순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고,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져야 하는 세상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북문으로 나가 한 수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수행자는 바싹 마른 몸에 다 해진 옷을 입고 있어 겉모습만 보면 노예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고, 두 눈은 맑고 자세는 늠름했으며 태도는 당당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누구인지 묻자, 그는 수행자라고 답합니다. 이 수행자와의 만남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수행자의 삶에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출가를 결심하게 되지만, 이때 부모는 태자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는 늘 '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왕이 되지 못해서 삶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왕궁을 뛰어넘어 출가하셨습니다. 이렇게 왕궁을 뛰어넘어 출가한 일을 '유성출가(踰城出家)'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동문으로 출가하면서 '내가 깨달음의 도를 얻기 전까지는 다시는 이 왕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정반왕이 군사를 보내 태자를 잡아오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자 말을 타고 세 나라를 지나갑니다. 그리고 아노마 강이라는 큰 강을 건넌 뒤, 여기까지는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시종 찬타카와 함께 타고 온 말 칸타카를 돌려보냅니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오른손에 칼을 쥐어 스스로 긴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이어서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수행자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던 그 순간에는 곧바로 깨달음을 얻을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이 몰려오고, 벌레는 몸을 물고, 야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가 떠오르고, 후회하는 마음도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후회를 위대한 부처님이 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흔들림을 표현하기 위해, 마왕의 유혹이라는 형식을 빌려 설명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속삭임이 일어날 때마다, 처음 세웠던 원을 다시 떠올리며 정진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자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밥을 얻기 위해 마을로 내려갑니다. 당시의 탁발은 오늘날 스님들이 공양받는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밥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먹고 남긴 것을 받아 오는 일이었습니다. 수행자의 모습으로 그 음식을 받아 와 입에 넣자마자 토할 것 같았습니다. 냄새가 나고 역겨워서 도저히 삼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스스로를 꾸짖습니다.
'싯다르타여, 너는 출가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느냐. 그런데 겨우 일주일 만에 이 모습이 무엇이냐.'

이 경험을 통해 혼자의 힘만으로는 수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향한 여정은 라즈기르에서 스승을 만나 배우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다시 여섯 해의 고행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역사적 이야기들은 비교적 짧게 다룰 수 있지만, 오늘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시기가 부처님 생애 가운데 출가에 이르기까지의 스물아홉 해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의 삶은 이미 깨달음을 얻은 뒤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인도 성지순례에는 청년들도 많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처음 출가하고 수행을 시작하던 시기의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민은, 위대한 성자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번민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 깊이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우리가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여느 때보다 경전 내용이 길었습니다. 경전을 독송하기 전에 스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오늘은 경전 독송이 조금 길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일생 29년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그렇습니다.”(웃음)

경전 독송과 명상을 마친 뒤, 순례단은 카필라성 동문을 바라보며 '출가의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합창을 마치고 가사를 정리한 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 동문으로 나가 북쪽 문 밖 수행자를 만난 탑을 지나 쿠단으로 가겠습니다. 가는 길은 논길입니다. 한 줄로 천천히 걸으며 인도 농촌의 풍경도 함께 느껴보세요. 유채꽃이 만발해 있을 겁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동문으로 나갔습니다.
"이곳이 바로 동문입니다. 청년 싯다르타가 이 문을 지나 출가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문을 지났으니, 오늘은 출가한 겁니다. 모두 카필라성을 바라보고 서 주세요.“


모두 카필라성을 향해 서서 염불을 한 뒤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마을길부터는 아이들이 순례단을 따라왔습니다.


논길로 접어들자 마을 사람들이 사는 풍경도 함께 펼쳐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순례단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길을 헤맬 때면 다가와 길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들에는 보리의 초록빛과 유채의 노란빛이 어우러져 가득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길을 내어주고 안내해 준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선물을 드렸습니다.


오후 3시 30분, 순례단은 쿠단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을 찾은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반왕이 직접 나와 천막을 쳤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순례단은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탑을 한바퀴 돈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대중이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은 카필라성에서 펼쳐진 여러 일화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족과 계급의 틀을 어떻게 넘어섰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지 여섯 해가 지나고, 출가하신 지 열두 해 만에 카필라성을 처음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 정반왕과 마하파자파티 부인, 그리고 라훌라는 카필라성에서 기다리지 않고 이곳까지 부처님을 마중 나왔습니다. 당시 최고의 예법은 1유순 전까지 나와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사성에서 빔비사라 왕은 왕궁에서 약 1유순, 곧 15킬로미터 정도를 나와 부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정반왕은 부모라는 관계 때문이었는지, 약 4킬로미터 지점까지 나와 이곳에 텐트를 치고 부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정반왕이 열두 해 만에 돌아온 부처님을 처음 만난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부처님의 탑과 정반왕의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밖에도 다른 탑들이 더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저 탑은 마하파자파티의 탑이고, 입구 쪽의 탑은 라훌라의 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부인인 야소다라의 탑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수행자에게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의 문화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만 대부분의 성지에는 두 개의 쌍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자타가 공양을 올린 곳에는 부처님과 수자타의 탑이 있고, 수행자를 만난 곳에는 부처님과 그 수행자의 탑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부처님이 정반왕을 만난 자리이므로, 부처님의 탑과 정반왕의 탑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 밖의 유적들은 후대에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요사를 짓는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들입니다. 이 유적의 이름이 바로 쿠단(Kudan)입니다.

정반왕은 궁 안에 맛있는 음식을 가득 준비해 두고 이곳까지 나와 기다렸지만, 부처님께서는 궁으로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전해집니다. 부처님이 발우를 들고 마을의 가난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탁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정반왕의 입장에서는 한 나라의 왕자가 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과 인사를 나누던 중 정반왕은 '궁으로 들어오지 않고 왜 길에서 걸식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것이 저희 가문의 법도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정반왕이 '석가족 가문에 언제부터 구걸하는 법도가 있었느냐'고 되묻자, 부처님은 '출가 사문의 법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부처님에게는 이미 카스트나 종족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을 향해 설법을 하셨는데, 그 설법을 듣고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석가족 젊은이들 가운데 일곱 명의 왕자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칠공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의논한 끝에 함께 출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그룹에는 아난다, 아누룻다, 데바닷타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열 명의 제자 가운데 두 명이나 나올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데바닷타는 훗날 잘못된 길로 가게 되지만, 초기에는 매우 총명한 제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출가 의식이 따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출가하려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석가족 왕자들은 이발사 우팔리를 찾아가 머리를 자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장신구와 폐물들을 모두 우팔리에게 주고 떠납니다. 우팔리는 머리를 잘라주며 생각합니다. 왕자들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는데, 자신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처지에서 무엇에 집착할 것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팔리도 출가를 결심합니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여섯 해가 지나 상가의 체계가 이미 정비된 뒤였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리푸트라에게 가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뒤 출가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는 절차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우팔리는 이런 절차를 알지 못해 곧바로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렸고, 출가를 원하자 부처님께서는 '오라 비구여'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 뒤에 일곱 명의 왕자들이 출가하여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러 옵니다. 부처님은 인사를 받으며 '선배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씩 인사를 하다가 맨 끝에 서 있는 인물을 보니, 며칠 전까지 자신들의 종이었던 우팔리였습니다. 쉽게 고개를 숙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우팔리에게 경배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는 카스트나 계급을 따지는 마음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법의 테두리 안에는 카스트가 없다. 세상에는 네 개의 강이 있지만 바다로 흘러가면 하나가 되듯이,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이 있지만 나의 법 안에서는 하나다.'

이로써 상가 안에서는 어떤 계급 차별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출가했을 때 친구나 가족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브라만 계급은 수드라 계급과 접촉조차 하지 않았고, 브라만의 그림자를 밟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대중은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산다며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출가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일종의 신분 상승 효과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출가는 훨씬 더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이제 라훌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라훌라가 태어난 뒤 출가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라훌라의 나이는 열두 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 고향으로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야소다라 공주는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야소다라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차라리 세상을 떠났다면 오히려 상황이 단순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잘 키워 훗날 왕이 되게 한다면 태후로서 큰 명예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수행자가 되어 살아 있으니, 자신의 삶은 오히려 제약 속에 놓이게 됩니다. 남편이 고행하고 있는데 부인 혼자 좋은 음식을 먹거나 편안한 잠자리를 누릴 수도 없고, 원하지 않아도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더구나 부처님께서 성도하고 돌아와도 부모는 부모라는 이유로 마중을 나가지만, 부인은 부인이라는 이유로 나설 수 없는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심정은 경전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야소다라 공주는 라훌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라훌라야, 저분이 너의 아버지다. 가서 인사를 드리고, 인사를 하면서 상속물을 달라고 말씀드려라.'

이 말에는 야소다라 공주의 복잡한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출가한 수행자에게 상속물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라훌라는 어머니의 말대로 부처님께 가서 인사를 드리고, 그대로 상속물을 요청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라훌라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사리푸트라에게 '이 아이를 출가시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주신 최고의 상속물은 재산이 아니라 출가였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반왕은 크게 놀랍니다. 아들이 출가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부처님의 동생들이 출가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손자까지 출가시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반왕은 아들에게 직접 항의할 수는 없었고, 대신 미성년자의 출가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을 얻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제안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이후 스무 살 미만의 사람이 출가할 때에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을 받도록 제도가 정해졌습니다. 이것이 사미와 사미니 제도의 근거입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본인의 결정으로 출가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의 승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라훌라는 예외에 해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인 부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외가 아닙니다. (웃음)

이렇게 라훌라는 출가했지만, 어린 나이에 출가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자로 살다가 갑자기 수행자의 삶에 들어왔으니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발심해서 출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라훌라는 대중이 부처님 계신 곳을 물으면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장난도 자주 쳤습니다. 그로 인해 '왜 이런 어린아이를 출가시켰느냐'며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부처님께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라훌라를 불러 새 대야에 물을 받아오게 하셨습니다. 라훌라는 물을 받아왔고, 부처님께서는 그 물로 발을 씻게 하신 뒤, 그 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라훌라는 더럽다며 마실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럼 이 대야에 공양을 담아 먹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훌라는 그것 역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물을 담아서 대야 자체도 더러워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도 이 대야와 같다. 본래 이 대야가 깨끗하듯이 우리 몸 또한 청정하다. 그러나 거짓말과 같은 나쁜 마음을 담으면, 아무도 너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더러운 대야를 발로 차버리듯이.'
이 설법을 듣고 라훌라는 크게 깨닫고, 그 이후로 매우 깊은 정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라훌라는 십대제자 가운데 '밀행 제일'로 불립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수행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계승한 인물로 마하가섭 존자를 들고, 밀교 전통에서는 부처님 다음으로 라훌라가 법을 계승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정반왕은 누군가 기원정사에 다녀오기만 하면, 늘 부처님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어디서 자는지에 대해 먼저 물었습니다. 부처님을 직접 만나서도 음식과 옷차림 등 생활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보다는 생활의 품위, 즉 '우리 아들이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가', '왜 저런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가' 하는 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반왕은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가족의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정반왕만은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제자들이 어느 날 부처님께 그 이유를 묻자, 부처님께서는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반왕에게는 아들만 보이지, 부처님은 보이지 않는다.'

정은 이렇게 사람의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정반왕은 아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만 보았을 뿐, 아들이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끝내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반면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렸고, 이후 출가를 청해 수행 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기록이 경전에 전해집니다.
아마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보기보다 늘 '내 자식'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여든이 되어도, 노모는 여전히 길 조심하라고 당부한다고 하잖아요. 정은 인생에서 소중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지혜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명을 마친 뒤 경전 독송을 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


참배를 마친 후 스님은 청년들이 타는 차량 상황을 언급하며 말했습니다.
“매년 차량을 신경 써서 준비해도 몇 대는 상태가 좋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청년들이 탄 차가 많이 열악하다고 하네요. 버스가 아니라 달구지 같다고 합니다. 약속한 대로 제가 차를 바꿔 타겠습니다. 이 기회에 청년들과 대화도 나누고, 오늘 저녁은 청년들 숙소에서 함께 지내겠습니다."

청년들은 기쁜 마음으로 스님과 함께 버스에 올랐습니다. 저녁 8시, 숙소에 도착한 스님은 곧바로 청년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떠돌아다니며 살았는데 정착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 몸이 아파서 상근활동을 못하는 상황이 괴롭다는 이야기, 명상 중에 화가 올라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청년들의 다양한 사연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의 태몽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청년도 있었고, 요즘 불교는 왜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데 스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하시는지 묻는 청년도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눈 뒤 밤 9시 20분에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원고를 교정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로써 네팔에서의 순례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내일은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재입국하여,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시며 법을 설하셨던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를 순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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