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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울 정토회관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결사행자·법사단 자자수련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결사행자와 법사단 110여 명도 전국 으뜸절 별로 모두 모여서 오늘 하루 종일 진행되는 자자수련에 참석했습니다.

예불과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결사행자와 법사단은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입재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정토회가 ‘자자’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남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아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더 쉬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남을 아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을 아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 어려운 만큼, 자기 마음을 아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정작 나는 모를 때도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알기 어려운 것은 이해되지만, 자기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모순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수행은, 자기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마음의 병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아는 것을 한문으로는 ‘자각(自覺)’이라고 합니다. 자각이란, 스스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즉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의해 마음이 오염되어 있을 때, ‘지금 내 마음이 이런 상태에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청정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돌이키는 수행을 ‘참회(懺悔)’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스스로 자기 마음을 점검하는 참회 정진을 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평상심이 도(道)’이므로 매 순간 알아차려야 하지만,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자기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열반 이후에 부처님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상가(Saṅgha)입니다. 상가란 한 명의 스님이 아니라 수행자들의 공동체 모임을 의미합니다. 상가는 하나의 인격체처럼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화합을 해야 비로소 부처님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수행 과정 중에 있고, 마음을 매 순간 자각하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모든 허물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른 상가 구성원들의 눈과 귀, 지혜를 빌려 지난 1년 동안 내가 수행자로서 청정성을 유지하지 못했거나 공동체 계율을 어긴 허물이 있었다면 그 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는 제도가 자자(自恣)입니다.
‘여러분의 지혜로 저의 허물을 보시고 저를 위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 허물을 지적해 주시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허물을 고치겠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자에 임하는 것입니다. 자자를 할 때는 분별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상대에 대한 자비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 수행자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지만 이 계율을 늘 어겨 신뢰에 흠이 된다. 이 부분이 개선되면 그 사람에게도 좋고 상가 구성원 간에도 신뢰에 도움이 되겠다.’
이런 자비심과 원(願)이 있어야 자자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분별심 때문에 자자를 망설입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인데 내가 말할 자격이 있나?’, ‘내가 지적했다가 나중에 나도 지적받으면 어떡하나.’, ‘오죽했으면 그랬겠나, 그냥 넘어가자!’ 등의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계율에 근거하여 나와 상가를 위해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말하면 됩니다. 듣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으로 귀담아듣고 자신의 과오를 고치면 됩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해명할 기회도 있습니다. 다만 그 해명 기회를 변명이나 자기 방어로 사용하면 오히려 상가의 분열 요소가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방어를 합니다. 육체적으로 위협이나 위기를 느끼면 도피하거나 투쟁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도 누군가의 지적을 받으면 자아(自我)를 방어하려는 본능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허물을 숨기거나 드러내기를 꺼리고, 드러날 때는 변명으로 자기 방어를 합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그런 마음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그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그런 중생심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자를 하지 않으면, 허물을 자각하더라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덮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이렇게 반복되면 처음에는 ‘이러면 안 된다.’, ‘이건 계율에 어긋난다.’고 느끼던 마음이 점점 무뎌지고 문제의식마저 사라져서 만성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허물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자각하더라도 별문제 없이 넘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자를 통해 도반의 지혜로 지적을 받아야 내가 그동안 습관적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허물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중생심으로 자자를 하면 불편한 시간이 되지만, 수행의 관점으로 자자를 하면 기쁘고 감사한 시간이 됩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오늘 자자(自恣)수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어서 결사행자와 법사단은 40 계본에 따라 참회를 한 후 모둠별로 각자 모둠원들에게 자자를 청했습니다.
“저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들으며 의혹이 있거나 저의 수행을 위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 있으면 저를 위하여 자자를 청합니다.”

이후 오후 4시까지 자자를 진행했습니다. 자자를 모두 마친 후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자자를 마친 결사행자와 법사단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2025년도 정토회 포살과 자자 법회를 잘 마쳤습니다. 이로써 정토회의 상가는 청정함을 얻었습니다. 포살과 자자를 진행하는 동안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드러내어 대화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자자를 하는 과정에서 궁금한 점이 생긴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중 한 명은 수행자로서 조언과 지적 사이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계율 중에 ‘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라는 조항에서 지적하거나 반대로 정보를 제공하거나 의견을 제안하는 그 경계가 헷갈리고 혼란스러워서 질문드립니다. 이번 청년페스타에서 제가 '한입 명상' 코너를 세 타임 진행했는데요. 오른쪽에는 마법의 흙, 왼쪽에는 미니 발우공양 코너가 있었습니다. 모든 활동이 끝난 뒤 청년 봉사자가 ‘어땠어요?’라고 묻기에 제가 ‘미니 발우공양하고 자리 위치를 바꾸면 참 좋았겠습니다. 마법의 흙은 오시는 분들한테 계속 설명해야 하니까 아주 시끄러워서요. 명상은 5분밖에 안 하지만 좀 시끄러웠습니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얘기를 하고 나니 아차 싶었습니다. ‘아, 이게 또 지적질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행자로서의 자세나 관점을 전하는 것과 가르치려고 드는 것 사이에서 그 경계가 늘 헷갈립니다.”

“제안 사항을 말하는 것은 지적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명상은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하니까 부스를 옮길 수 있다면 옮겨서 하면 좋겠다는 것은 제안 사항입니다. 또한 상대가 ‘어땠느냐?’하고 물었기 때문에 의견을 말한 것이니까 지적질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이건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제안인지 지적인지 구분하기가 조금 애매합니다. 제안이 되기도 하고 지적이 되기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이래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적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저쪽은 시끄럽고 이쪽은 조용하니까 다음에는 공간 배치를 바꾸면 좋겠다.’ 하고 말하는 정도는 제안 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안내하는 것에 해당하고, 이건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내가 그것을 잘 구분해서 말하기도 쉽지 않고, 내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또 다릅니다. 나는 안내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가르쳤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는 약간 분별심을 갖고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좋은 안내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을 칼로 베듯이 정확히 나눌 수는 없습니다. 인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법사라면 가능하면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게 좋습니다. ‘남편이 이러이러해서 같이 못 살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무조건 네가 엎드려 절하고, 남편을 부처님으로 보고 공부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이게 가르치는 거예요. 반면에 ‘남편이 그래서 네가 참 힘들겠구나.’라고 하는 것은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말해 주면 좋습니다.
‘나도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막 싸우다가 스님의 법문을 듣고 어떤 순간에 자각이 생겨서 마음을 바꿨더니 내 마음이 편안해졌어. 시간이 흐르니까 남편도 조금 변하더라.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상대가 ‘나도 한번 그래봐야겠다.’ 하면서 배움이 생길 수도 있고, ‘그건 네 사정이고 내 남편은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인간이다.’라고 받아들인다면 그만인 거예요. 이렇게 하는 게 안내하는 겁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내가 경험이 좀 부족해서 뭐라고 얘기하기 어려운데, 지난번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는데 비슷한 얘기가 있었어. 내가 추천할 테니까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 싶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도 안내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건 네가 아상(我相)이 강해서 그런 거야. 남편을 부처님으로 모셔. 그렇게 기도해 봐.’
누구나 대화를 하다 보면 이렇게 남을 가르치기가 쉽습니다. 책을 보고 아는 내용이나 스님의 법문을 듣고 아는 내용을 그대로 정형화해서 하는 얘기는 모두 남을 가르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경전을 보니 이런 얘기가 있더라.’, ‘스님이 즉문즉설을 할 때 이런 얘기를 하더라.’ 이런 말들은 다 안내에 해당해요. 가능하면 안내하는 관점을 가지면 법사가 상담할 때 부담이 없습니다. 몰라도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남을 가르치려고 하거나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의도하면, 뜻대로 잘 안 될 때 ‘내가 능력이 없나?’, ‘법사 자격이 안 되나?’ 이런 자괴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면 상대에게도 부담이 되고, 나한테도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는 관점을 가지면 나도 편안하고, 상대에게도 도움이 되고, 결과적으로 교육의 효과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의견을 가볍게 제안할 때는 ‘이걸 말하면 간섭일까? 아닐까?’ 이렇게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해라!’ 하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예전에 했을 때는 이렇게 했는데, 한번 참고해 보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같은 정토회 활동가들끼리 의견을 서로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다만 아랫사람 가르치듯이 ‘이래라. 저래라. 그건 잘못되었다.’ 이렇게 말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네. 관점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동북아 역사 기행 기간 중 수행법회에 빠졌을 때, 매주 1회 수행법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계율을 어긴 것에 해당하나요?
이미 충분히 의견을 냈음에도 부결된 안건에 대해 다음 단계 회의에서 다시 반대 의견을 내면 계율 위반인가요?
자자를 할 때 같은 내용의 지적을 반복해서 강조를 해도 되나요? 상대에게 고질적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은 지적을 하기가 망설여지는데 이런 경우 어떻게 자자를 진행하는 것이 맞을까요?
온라인 회의가 이어지면 정해진 때를 놓쳐 먹게 되는데, 이를 참회의 대상으로 봐야 하나요?
법사 후보 중 정신 질환 이력이 있는 경우, 회의에서 이 사실을 어디까지 공유해야 하나요? 민감한 내용인데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해야 할까요?
명상 중 무의식이 건드려져 경련이 일어나 옷을 벗는 상황이 있어 공동 정진 참여가 부담됩니다. 이런 몸의 반응이 있을 때도 공동 정진에 참여해야 할까요?
평상시에도 법사는 일정 수준의 복장 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가 적절한 기준일까요?
공동체와 대중부를 과하게 구분하고 유연함이 없는 태도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마지막 질문자는 상대에게 고칠 점을 말해줘도 효용이 없을 것 같을 때는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하는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저희 그룹에서는 자자를 할 때, 도반에게 ‘이거 잘 안 고쳐지실 텐데.’라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본인도 자기 업식을 알고 있지만, 주변에서도 ‘이걸 말해 주어도 워낙 몸에 밴 습관이고 업식이라 잘 안 고쳐질 건데.’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자자를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자자를 한다고 다 고쳐지는 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자자를 한 번 하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리지요. 자자를 해도 안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할 때 ‘내가 이렇게 말해도 당신이 안 고쳐질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말한다.’ 이런 자세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말해도 너는 안 들을 건데.’라고 하면서 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든다면 말을 안 하면 됩니다. ‘고쳐지지 않을 것 같은데도 말해 주겠다.’ 하는 전제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고치고 안 고치고는 상대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상대를 위해서 자자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해봤자 너는 안 고칠 것 같다.’ 하는 말은 내가 불평하는 것이지 상대를 위한 게 아닙니다. 즉문즉설을 할 때도 ‘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지만...’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 든다면 말을 안 해야죠. 말을 하려면 그런 전제를 붙이지 말고 그냥 말을 해야지요. 그런 것처럼 ‘그 행동은 계율에 어긋난 행동이니 고치면 좋겠다.’하고 그냥 말하면 됩니다. 고쳐지고 안 고쳐지고는 그의 문제입니다. 내가 말해 봤자 안 고쳐진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은 상대의 인생에 내가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자’가 아니고 내 불편함이 그 속에 묻어 나온 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 회향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서둘러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결사행자와 법사단은 회향식을 한 후 자자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오후 5시 30분에는 청년페스타를 준비하고 진행했던 서포터즈들이 해단식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에 모였습니다. 먼저 지하 1층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청년페스타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청년 활동가들을 위해 소박한 저녁 밥상을 차렸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청년페스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며 케이크 커팅식을 했습니다. 청년페스타 총괄을 맡은 정토회 대표, 청년특별지부장, 청년지부 법사님들이 모두 앞에 나왔습니다. 스님이 관세음보살이 그려진 케이크를 보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자르면 어떡해요?”(웃음)
관세음보살을 비켜 케이크 커팅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케이크를 자른 후 스님이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앞으로도 청년페스타를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힘드니까 이번 한 번만 하고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번처럼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하는 게 좋아요? 동국대학교 같이 더 넓은 장소에서 하는 게 좋겠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동국대에서 하는 게 낫고, 참여한 사람들이 정토회와 인연을 이어 가게 하는 구심점을 마련하려면 장소가 좁긴 하지만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하는 게 낫습니다. 장단점이 있어요. 더 넓은 곳에서 하는 게 좋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청년페스타의 다음 개최 장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다 함께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100여 명의 청년 활동가들이 모인 가운데 저녁 6시 30분부터 청년페스타 서포터즈 해단식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청년특별지부에서 해단식을 축하하며 여는 공연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시경과 아이유가 함께 부른 ‘그대네요’를 두 사람이 듀엣으로 부르자, 현장은 단번에 축하 분위기로 물들었습니다.

이어서 ‘흰수염고래’를 열창했습니다. 작은 연못에서 시작했지만 고래처럼 헤엄친다는 노래 가사처럼 청년페스타가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염원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함께 노래를 부르며 큰 박수로 고생했던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이어서 청년페스타를 진행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서포터즈들의 소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연국, 세미나국, 부스국, 홍보국, 안내국, 지원국 등 각 국별로 한 명씩 나와 자유롭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엔 바늘도 못 잡던 제가 바느질 놀이터 봉사를 맡으면서 번뇌도 많이 올라왔지만, 그 과정이 수행이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연습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배우다 보니 기초라도 하나 제대로 익힐 수 있었습니다. 행사 날은 ‘분별 날 때마다 100만 원 시주한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임했더니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물질이 주는 편안함보다 마음의 평온과 몰입이 더 값지다는 걸 깊이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참여자로 즐기려 했는데, 준비하는 도반들을 보면서 나도 함께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여러 소임을 맡게 됐습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정이었지만, 하나씩 해나가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도반들의 모습이 큰 힘이 되었고, 함께 준비했다는 사실이 든든함으로 남았습니다. 이번 청년페스타 덕분에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을 마음껏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홈페이지, 체크인, 좌석 배정 등 참가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 전반을 개발하고 운영했습니다. 여러 국과 연결되다 보니 소통할 일도 많고 행사 전체를 보게 되면서 더 잘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부족한 부분도 많았지만 진심을 다해 소임을 하다 보니 제 안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남았습니다. 여러 도반들과 함께 큰 행사를 해냈다는 게 감사하고 많이 배운 시간입니다.”
“세미나 팀은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였지만, 새하얀 도화지 같아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약도 많아 속상한 적도 있었지만, 3일 동안 31회 세션을 해내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좋아하는 팀원들과 함께하니 이것 자체가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했습니다. 청년들이 마음을 내어 놓고 연결되길 원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런 장을 더 넓혔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행사 내내 촬영하며 청년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청년’이라는 단어를 무겁게만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한 분들이 있었기에 청년들이 이곳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는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의 정성과 따뜻함을 느꼈고,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이 함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 선 청년은 쑥스러워서 했던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소감을 계속 이어 갔습니다.
“행사 내내 ‘나는 별로 하는 일이 없고,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책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공양하러 갔을 때 맛있게 준비된 공양을 보니 도반들의 노고가 너무 고마우면서도, ‘나는 밥값도 못 한다.’는 마음이 올라오더라고요. 보시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마음이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진하면서 계속 제 마음을 돌아보았고, 오늘도 준비를 충분히 못 해 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다음에 행사가 끝나고 물품을 정리할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래도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스님은 청년 활동가들의 소감을 경청하며 한 명씩 발표가 끝날 때마다 큰 박수를 보내 주었습니다.

청년 활동가들은 도반들의 발표를 들으며 그동안 자신들이 만들어 간 의미 있는 시간들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청년 활동가들은 스님에게 해단식을 마무리하는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이번 청년페스타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자산을 얻게 되었는지를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감을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니 더욱 반갑습니다. 이번 청년페스타를 준비하며 우리는 대외적으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마련한 행사’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목표 아래 정토회 청년 활동가 여러분은 기획을 하고, 이를 실제로 구현해 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남습니다.
일반 사회에서 큰 행사의 성공과 실패는 보통 경제적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들여 얼마나 수익을 냈는지를 기준으로 삼죠. 그러나 이번 청년페스타는 투자금을 받아서 한 일도 아니고, 참가자들에게 돈을 받고 진행한 행사도 아니었습니다. 금전적으로 흑자가 날 일도, 적자가 날 일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행사의 성패를 돈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는가?’라는 기준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약 3000명이 참가했고, 대부분 좋아했고 만족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여전히 추상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번 행사를 평가해야 할까요?

첫째, 여러분이 청년페스타를 직접 기획하고 실현해 본 그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해본 것입니다. 등산에 비유하면 ‘힘든 걸 견디며 산을 올라본 경험’이 남는 것과 같습니다. ‘등산하면 체력 단련이 되는구나.’, ‘이번엔 개울도 건너보고 가파른 길도 올라봤다.’ 하고 느끼듯, 이런 경험은 오래 기억됩니다. 즉, 수익을 저축하듯 이번 행사에서는 ‘경험’이라는 자산이 쌓인 것입니다. 공양 준비, 조직 관리, 행사 물품 제작 등 실제로 몸으로 부딪치며 해본 모든 일은 여러분에게 귀중한 자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도반들과 함께 일하며 ‘사람에 대한 경험’을 깊게 해 본 점도 큰 자산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인사 나누고 같이 정진하는 정도지만, 일을 함께 해보아야 그 사람의 생각, 성격, 장단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생을 함께하면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드러나죠. 소감에서도 ‘좋은 사람들과 일했다.’는 말이 나왔듯,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함께 일해보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여러분은 사람을 경험했고, 사람과 관계를 맺어보는 다양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이성과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소개팅 자리에서도 서로 어색합니다. 밥 먹고 차 마시는 것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죠. 그런데 이번처럼 공동의 목표를 두고 함께 일하면 서로의 성격과 장단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끌리고, 어떤 사람과는 부딪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분 좋고 나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을 경험해 봤다.’, ‘다른 사람에게 맞춰보는 경험을 했다.’는 그 자체입니다.
함께 일하려면 상대에게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의 목표 없이 모인 사람들은 마음이 틀어지면 그냥 떠나면 되지만, 이번 청년페스타는 월급을 주는 일도 아닌데 대부분 끝까지 현장을 지켰을 것입니다. 중간에 나가 버리면 단지 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정토회와의 관계도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속된 말로 하면 ‘정토회 회원들에게 찍힐까 봐’ 떠나기 어려웠던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 머물다가 마음이 바뀐 분들도 있었겠죠.
부부관계도 비슷합니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자녀나 부모님, 또는 결혼식에 와준 사람들을 생각해서 한 고비 넘기다 보면 버티게 됩니다. 버티다 보면 나중에는 별일 아니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몇 달만 지나면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함께하자.’ 하고 버틴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만약 이 행사가 30년 프로젝트였다면 중간에 떠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버티는 과정’도 여러분에게 매우 값진 경험입니다.
셋째, 여러분에게는 앞으로 이 경험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추억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추억, 시간이 지나 후회가 되는 추억,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미소 지어지는 추억도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의 고생들도 나중에는 ‘그때 우리 고생 참 많이 했지.’ 하며 좋은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억지로 한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함께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순간순간에는 즐거움이나 돈이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돈은 생겼다가도 사라지고 즐거움은 신기루처럼 잠시 머무르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보람은 오래 남습니다. 저는 이번 경험이 여러분에게 ‘그때 그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한 것이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회상할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저 역시 지난 30년간 도반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정토회 회원 수가 늘어나거나 건물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 될까요? 회원이 많아질수록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일이 많아지니까요. 오히려 아무 시설도 없던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곡괭이질 하며 수련원을 짓고 요사채를 만들던 시절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질적 기준은 밥을 먹고 똥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요리하고 먹고 소화해서 결국 내놓는 결과물이 뭔가요? 똥입니다. 삶에서도 결과물에 집착하는 것은 똥에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 보람은 그 과정을 사는 동안 이미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의 찌꺼기인 ‘지위, 재산, 명예’ 같은 결과물인 똥에 집착해 그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합니다.
어떤 예술가가 20년간 만든 작품이 홍수로 모두 사라졌을 때 큰 충격을 받고 저에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저는 ‘왜 똥에 그렇게 집착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작품도 결국 하나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과정 속에서 이미 삶의 의미는 실현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결과물인 똥의 색깔과 크기로 성공과 실패를 따지며 괴로워합니다.
정토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회원이 천 명이든 만 명이든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그 과정입니다. 정토회 초창기 15평짜리 건물에서 다섯 명에게 법문 하던 시절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법사님들도 모두 그때의 온갖 고생과 갈등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일을 맡겨도 불평이 없고, 적게 맡겨도 서운해하지 않고, 아프면 쉬고, 남이 쉬면 존중합니다. 지난 30년간 분별심의 과정을 이미 다 거쳐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서툴러도 좋은 때입니다. 처음이기 때문에 백지 위에 자유롭게 그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서툴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그 평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겪으며 성장해 나갑니다. 이번 청년페스타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굳이 평가하자면,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았는가?’, ‘그 경험이 여러분에게 보람과 추억이 되었는가?’, ‘나도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는가?’ 이것이 진짜 기준입니다.
경험을 반복하면 실력이 늘기 마련입니다. 발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듬더듬한다 해도 서너 번 하면 훨씬 좋아집니다. 움츠러들면 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몇 번 반복하면 결국 익숙해지고 능숙해집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한 회사를 맡아도, 한 나라를 맡아도 운영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우리 몸의 세포도 처음부터 눈이나 귀 세포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세포가 역할을 나누고 반복하다 보면 눈이 되고 귀가 됩니다. 줄기세포는 바로 역할이 정해지기 전의 세포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줄기세포입니다. 아직 역할이 특정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맡으면 이런 능력이 생기고, 다른 역할을 맡으면 또 다른 능력이 생깁니다. 타고난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하다 보면 누구나 전문가가 됩니다.
청년페스타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운동이 될 것입니다. 정치 운동도 아니고, 경제적 활동도 아니며, 하나의 문화운동입니다. 적게 소비하고,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운동이죠. 과거의 저항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것저것 시도하며 새로운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지금은 전환기입니다. 여러분에게 맞는 새로운 옷이 필요합니다. 선배들이 만든 옷은 지금 청년들에게 잘 맞지 않습니다. 선배들은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청년들은 선배 세대의 방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직 청년 세대의 몸에 맞는 새로운 활동 방식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일종의 전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직접 이것저것 입어보며 ‘내 몸에 맞는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 청년페스타가 바로 그 과정입니다. 그 토대를 함께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잘 놀았습니다!”

스님은 법문을 마친 후 청년 활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한 유수 스님에게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유수 스님도 오늘 해단식을 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며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청년들과 함께 큰 행사를 치를 수 있어 정말 기쁘고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힘들다’가 아니라 ‘좋았다, 또 하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청년페스타가 여러분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준 것 같아 더욱 기쁩니다. 이런 경험이 앞으로 한국과 세계의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자산이 되길 바랍니다.”
이어서 청년특별지부 담당 법사를 맡고 있는 향화 법사님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행사 전에도, 행사 중에도, 끝나고 찾아올 때도 밝게 웃는 여러분의 모습이 제게 큰 따뜻함으로 다가왔어요. 너무 힘들어서 행사 끝나면 정토회에 안 나온다고 하더니 오늘 모두 와 주셔서 더 감사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마지막으로 청년페스타 행사를 총괄한 박수정 지부장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도반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하기 싫고, 화도 나고, ‘제발 나 찾지 마라!’ 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결국 함께 웃을 수 있는 건 여러분이 동지애로 버텨냈기 때문입니다. 이번 청년페스타가 활동의 정점이 된 만큼, 마음속에 남는 것도 많을 거예요. 내년에는 더 큰 역할로, 더 많은 세계 청년들과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해단식을 마무리할 무렵 스님이 앞서 소감 발표에서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던 청년 활동가를 다시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아까 전에는 제대로 말을 못 했는데, 이번에는 조리 있게 1분 안에 소감을 이야기해 보세요.”
다시 사람들 앞에 선 청년 활동가는 1분 안에 조리 있게 다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님은 청년 활동가를 다시 한 번 따뜻하게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요. 잘했어요. 자꾸 연습을 해야 합니다. 못 한다고 물러서지 말고, 더듬거리면서도 말해 보고, 짧게도 말해 보고, 길게도 말해 보고, 연습을 하면 점점 좋아져요. 인생살이가 뭐 별것 있어요? 다람쥐도 살고, 토끼도 사는데, 사람이 무엇 때문에 못 살겠어요? 다람쥐와 토끼는 숲에서도 살잖아요. 조그만 짐승도 숲에서 잘 사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사는 여러분이 왜 못 살겠어요? 이렇게 관점을 딱 잡으면 사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아요. 안 되면 다시 하고, 이렇게 연습을 해보면 됩니다. 아직 젊으니까 연습을 하면서 함께 만들어 갑시다.”
이어서 사홍서원으로 청년페스타 해단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 모두 잘 놀았다!”

큰 함성으로 청년페스타를 마무리했습니다. 정말 신나게 잘 놀았습니다.
청년 서포터즈들은 그룹별로 모여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고, 스님은 청년 서포터즈들을 격려한 후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인간붓다’ 수업을 듣고 있는 정토담마스쿨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갖고, 이어서 하루 종일 행복운동특별본부의 날 행사에 참석하여 대화를 나눈 후, 저녁에는 김포공항으로 이동하여 내일 제주 강연을 하기 위해 제주도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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