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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과 정토회 회원들이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종교인 모임을 하기 위해 새벽 2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4시간 30분을 달려 오전 6시 30분에 정토사회문화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령님, 교무님도 차례로 지하 1층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평화재단 실무자들이 정성껏 준비한 아침 밥상으로 식사를 한 후 평화재단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어제 두북수련원 농장에서 주워 온 밤을 삶아서 종교인 분들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밤을 좀 주워 왔습니다. 맛보아 주십시오. 햇밤입니다.”
다들 밤이 아주 굵고 맛있다며 기뻐했습니다. 세 개만 먹었는데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습니다. 박남수 교령님이 밤을 맛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밤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가을을 먹는 겁니다.” (웃음)
한 줄의 시를 낭송하는 것 같다며 다 함께 웃었습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국민 통합을 주제로 지난 한 달 동안 언론에 보도된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종교인 분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여당과 야당 사이에 갈등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습니다. 스님이 먼저 현재의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우려를 말했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내란 척결’이 자칫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처럼 정치적 분쟁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내란 세력을 되살려 주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여당 정치인들을 만날 때마다 ‘시간을 끌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수습하고, 이제는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여러 차례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언론 보도를 보면 정치인들의 언행이 여전히 시정잡배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국민들에게는 ‘내란 척결’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단지 두 세력이 다투는 모습만 남게 될 것입니다. 특히 사법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중도층의 지지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집니다. 외교 문제는 그나마 잘 대응하고 있지만, 국내 정치는 너무나 어리석게 풀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인 분들도 스님의 의견에 공감하며 말했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갖고 상대를 공격하는 게 아니니까 상대는 오히려 더 거세게 저항을 하고, 그러다 보면 오히려 상대를 키워 주게 되는 꼴이 날 것 같아요. 그래서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되면 다음에 국회 의원 공천도 받게 되고, 변호사를 개업할 때도 유리한 거거든요.”
“맞습니다. 강하게 발언을 해야 존재감을 계속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더 걱정인 것은 국내에서 여야가 서로 싸우다 보니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국제 질서의 대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의 동맹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니까 한반도의 평화가 요원해지지 않나 싶어서 우려가 됩니다.”
스님은 종교인 분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여야 정치인들이 국제 질서의 변화에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생각하면 ‘애국’이라는 틀 속에 보수를 껴안아 주어야 합니다. 내란 척결을 해서 상대를 없애는 게 핵심이 되어서는 안 돼요.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어떻게 도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란의 주요 가담자는 과감하게 처벌을 해야 하지만, 그 외에는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 애국이라는 틀 속에서 껴안고 가야 합니다.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외부의 압력에 제대로 대응을 하려면 진보 세력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미국의 압력에 대응하기가 어려워요. 보수 세력까지 껴안아 주어야 외부의 압력에 대응하는 힘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만 보면 안 되고 국제 질서의 변화도 함께 보면서 대응해야 하는데 그런 지혜가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박경조 주교께서 스님의 말에 공감하며 말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혐오감에서 나오는 힘이 통제가 안 되는 상황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헌법 개정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밝힌 헌법 개정은, 종교인 모임에서 오랫동안 주장해 온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한 권력 분산, 지방 자치 강화, 선거법 개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습니다. 대통령 4년 연임제로의 전환은 오히려 제왕적 대통령제를 더욱 강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의 개헌 논의는 권력을 분산시켜 민주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종교인 모임이 이러한 개헌에 동의한다면, 자칫 개혁이 아니라 ‘개악’에 동참하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헌법 개정은 무조건 찬성할 일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개정인지, 그 목적이 권력 분산과 민주화에 맞닿아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다음 모임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특검, 헌법 개정 등 여러 주제에 대해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 가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언제 또 해외로 가십니까?”
“내일 밤에 갑니다. 사실 이 모임을 하려고 잠시 한국에 왔습니다.”
“건강히 다녀오십시오.”
스님은 종교인 분들을 배웅한 후 3층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설법전에서는 12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한 가운데 오전 10시가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낭독하며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도 화상 회의 방에 입장하여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주간 정토행자의 소식을 영상으로 본 후 정토회 대표가 11월 초에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개최되는 청년 페스타 행사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보름 동안 스님이 유럽 순회강연과 동남아 답사를 다녀온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대중이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성큼 다가온 가을 소식을 전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아침저녁으로는 더위가 누그러지고 제법 쌀쌀함이 느껴집니다. 저는 어제 귀국해 바로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농장에 도착해 둘러보니, 밤나무에서는 벌써 굵은 알밤이 밭둑에 수북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들녘의 벼도 고개를 숙이며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는 한층 더 차가워진 아침 공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도 가을이 오면 물러가고, 아무리 매서운 겨울이라도 봄이 오면 사라지고 맙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젊음을 아무리 자랑해도 세월 앞에서는 주름이 지고, 머리는 하얗게 세고, 발걸음은 느려집니다. 아무리 부자이거나 임금, 혹은 절세미인이라 해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설날이나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1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고, 더 늙으면 청춘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머리가 희어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돌아보면, 인생 백 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짧은 세월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별일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만약 우리가 지금의 일들도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닌 줄 안다면, 인생을 좀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에 매달려,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괴로워하다가 한을 품은 채 생을 마치곤 합니다.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보면서도, 정작 나에게 닥친 일은 작은 일도 큰일처럼 여깁니다. 돌아보면 다 사소한 일인데도 그 순간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남의 일 보듯 바라보고 훗날 돌아보듯 마음을 다스린다면, 인생을 훨씬 더 여유롭고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유럽을 순회하면서 느낀 세계 각국의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이 속에서 수행자는 어떤 관점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온라인에서 두 명이 질문한 후, 이어서 현장에서 한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알아차림과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며 스님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알아차림과 깨달음은 같은 것인가요? 저는 감정이나 생각에 빠져들 때, ‘내가 지금 이러고 있구나.’, ‘또 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벼워짐을 체험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고,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고 마음이 시원하게 뚫리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만 할 수 있다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깨달음이 따로 없다고도 들었는데, 그렇다면 선방(禪房)에서 오랜 시간 참선하는 선승들의 깨달음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흔히 말하는 ‘이 뭣고’ 하는 마음과 알아차림의 마음은 같은 것인가요? 이렇게 가다가는 죽는 순간에야 깨달음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상에서는 확연한 깨달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알지 못함을 한문으로 무지(無智), 또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이 무지가 모든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전생 때문도 아니고, 신(神) 때문도 아니고,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 때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모르기 때문에 억울함도 생기고 괴로움도 생기는 것입니다.
무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근본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찰나 무지입니다. 근본 무지는 어떤 것에 대해 아예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면 찰나 무지는, 근본 무지를 깨닫고 ‘아, 이렇구나!’ 하고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에서는 순간 그 깨달음이 사라지고 캄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라고 할 때는 근본 무지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고, ‘알아차림’이라고 할 때는 찰나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근본 무지를 깨닫는 것과 찰나 무지를 깨닫는 것 모두 넓은 의미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과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는 동격일까요? 알아차림에도 근본 무지를 알아차리는 경우와 찰나 무지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이 용어들이 함께 쓰이기도 하고, 구분해서 쓰이기도 합니다. 함께 사용할 때는 알아차림이 곧 깨달음이고, 깨달음이 곧 알아차림이에요. 반면 구분할 때는, 근본 무지를 깨치는 경우를 깨달음이라고 하고, 찰나 무지를 알아차리는 경우를 알아차림이라고 주로 표현합니다.
근본 무지를 깨달은 뒤에도 찰나 무지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자신의 근본 무지를 깨달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보면, 깨달음과 알아차림은 같은 성격을 가지기도 하고, 다른 성격을 가지기도 하는 겁니다. 근본 무지의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라는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이때 ‘내가 있다고 믿는 것’이 근본 무지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수행을 통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라고 무아(無我)를 체험하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여전히 자의식에 순간순간 집착하게 됩니다. 깜빡하고 사로잡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알아차림이 중요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무지가 발생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 과정을 통해 일상에서도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알아차림은 통상적으로 이렇게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법회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 수행법회는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 회의실에서 ‘일상 속 기묘한 화학 이야기’를 주제로 열린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장홍제 광운대 화학과 교수는 화학이 실험실 속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인류 문명과 함께 발전해 온 일상 그 자체임을 강조하며 흥미진진한 강연을 펼쳤습니다.
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가 화학의 출발점이었으며, 이후 청동기 시대를 거쳐 현재의 반도체와 플라스틱 시대에 이르기까지, 화학이 인류 문명과 함께 발전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코끼리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플라스틱의 탄생 배경과 고래를 구하려고 시작된 석유 사용의 역사는 화학이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비밀부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죽음에 얽힌 화학 이야기, 그리고 마찰 전기를 이용한 미래 에너지 기술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교수님은 지구온난화 해결책도 이미 과학적으로는 해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공기 중 이산화탄소로 에탄올, 휘발유, 심지어 빵과 고기까지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걸을 때 생기는 마찰로 전기를 만드는 기술과 배터리 옷까지 구현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런 기술들이 실제로 도입되지 않는 이유는 정책적 뒷받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관심과 정책적 의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주기율표의 의미와 구조, 일상에서 사용하는 화학 물질들의 안전성을 확인하는 방법, 차세대 에너지원인 핵융합 발전의 상용화 가능성, 시민 사회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요구해야 할 정책, 그리고 알코올이 인간의 뇌에 미치는 화학적 영향 등 다양한 질문들이 오갔습니다.
스님도 세 시간 가까이 교수님의 발표 내용을 경청했습니다. 화학이 가져온 편리함과 문제점, 그리고 그 해결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청중과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스님은 장홍제 교수께 스님의 저서를 선물했습니다.
“강의 잘 들었어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곧바로 오후 4시부터는 평화재단 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젊은층이 점점 우경화 되어 가고 있는 원인과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현황을 살펴본 후 그 속에서 평화재단의 역할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8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하고, 정토회 회원들은 온라인 화상회의 방에 접속했습니다. 청년 페스타 행사 소개, 유럽 순회강연과 동남아 답사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요즘 세계와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난 보름 동안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세계가 조금 시끄럽습니다. 개발 도상국에서는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젊은 세대의 불만이 폭발하고, 그 결과 폭동과 정권 교체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은 여러 나라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유럽조차 내부 갈등으로 시끄럽습니다. 한때 진보적 가치를 앞세우던 유럽에서 지금은 극우 정당이 각국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 곳곳이 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국내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회 법사위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시정잡배들이 주먹다짐과 욕설을 주고받는 수준의 난투극을 보는 듯합니다. 이런 모습을 접할 때면, 더욱 마음 공부를 하고 평정심을 찾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행은 단지 개인의 평화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마음의 평정을 통해 분쟁을 완화하고, 더 나아가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검소하게 살아가는 작은 실천 하나 하나가 지구 환경을 지키는 의미 있는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갈등과 기후 위기가 심화하고, 전쟁과 증오심도 점점 커질 것입니다. 그럴 때 ‘굳이 이런 활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단기간의 성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른 길이라면 그저 묵묵히 나아갈 뿐이에요. 성공과 실패는 몇 년의 단기적인 평가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서야 ‘그때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이 가장 바른 길이었다.’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는 많은 것을 반성했습니다. 그 결과 남녀평등, 약소 국가의 해방, 신분제 철폐, 인종차별 금지 등 사회 정의와 진보적 가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역주행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평등보다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정의보다는 부정의가 자리를 잡아가는 듯합니다. 물론 이 조짐이 세계 대전과 같은 큰 재앙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인간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시야를 넓혀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의 상황은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보다는 낫고, 중세보다는 훨씬 더 나은 편입니다. 단기적으로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도, 긴 흐름 속에서는 인류가 발전해 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동남아를 답사하고 왔습니다. 미얀마는 군부 정권으로 인해 소수 민족이 폭격을 당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여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는 여전히 기본 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도 목격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부정적인 면만 보면 여러 문제가 눈에 띄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그만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현장에서 한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올해 상반기에 정토경전대학에 다니며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때 ‘비록 내가 부처님의 제자까지는 못 되더라도 수행, 보시, 봉사를 실천하며 살아가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 정토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지난 6월에는 천일 결사에도 입재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밝아지고, 그 기운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머리로는 법문을 기억하고 몸은 절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마음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마음이 변하지 않고 평생 가야겠다.’ 하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불교 공부를 통해 마음이 좋아졌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좋은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고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교적 관점이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를 간단히 말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하여 이루어지고, 머물다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도 생노병사(生老病死)하고, 마음도 생주이멸(生住異滅) 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머물다가 흩어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옛말에 ‘똥 누러 갈 때 마음과 똥 누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 하는 것처럼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죽 끓듯 변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기분이 좋으면 ‘이 기분이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불법(佛法)이 아니에요. 기분은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 좋은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고, 또 지금 이 순간 싫은 마음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집착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저 이랬다저랬다 할 뿐이에요. 이렇게 알면 마음이 좋을 때나 싫을 때나 크게 구애받지 않게 되어 결과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들뜨지 않고, 싫은 일이 있어도 가라앉지 않게 되죠. 좋다는 마음도 잠시 일어날 뿐이고, 싫다는 마음도 잠시 일어날 뿐이에요.
길을 가다 보면 평지도 있고, 산길도 있고, 냇물도 건너고, 숲길이나 뙤약볕 길도 지나갑니다.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현상이 일어날 뿐이에요. 여기에 구애받지 않을 때 평정심이 유지됩니다. 한번 먹은 마음이 그대로 간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경전대학에 다닐 때는 좋은 마음이 일어났다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 그 마음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마음은 늘 이랬다저랬다 하는 하나의 현상이에요. 이렇게 이해하면 기분이나 마음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다시 그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없습니다. 지금 우울한 마음이 일어나면 ‘우울한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기쁜 마음이 일어나면 ‘기쁜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면 ‘불편하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사실 ‘불편하다’, ‘기쁘다’, ‘싫다’ 하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면 가로수가 스쳐 지나가듯, 마음도 그렇게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에요.
이렇게 볼 수 있으면 현실에 너무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할 뿐,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되지요. 예를 들어, 가게를 하면 어떤 날은 손님이 많고, 어떤 날은 적습니다. 어떤 달은 이익이 나고, 어떤 달은 손해가 납니다. 주식도 오를 때가 있고 내릴 때가 있잖아요. 친구를 사귀면 도움이 되는 이도 있고, 손해를 끼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늘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고, 마음도 이렇게 저렇게 일어납니다. 그것들을 중요시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편안할 수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질문자는 불교를 잘못 공부한 거예요. 경전을 읽고 기분이 좋아진 것은 술 한잔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기분일 뿐이지 불법의 핵심은 아니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데에 있습니다.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행복하다고 느낀 것도, 사실은 돈을 벌어 행복하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남자가 마음에 안 들면 처음에 좋았던 인연 때문에 평생 고생할 수도 있고, 가게를 열었을 때도 처음엔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팔지도 못하고 유지하지도 못해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법을 따라 바르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집착에 따른 현상일 뿐입니다.”
“정토회 회원이 되고 나니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행복한 마음을 지속해야겠다는 집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차가 지나갈 때 가로수가 스쳐 지나가듯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온라인으로 두 명이 스님에게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다 되었습니다. 대중은 모둠별로 동그랗게 둘러앉아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설법전을 나와 평화재단 접견실로 향했습니다.
밤 9시부터는 청년 페스타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유수 스님, 청년특별지부장으로부터 행사 준비 상황을 보고 받고, 쟁점이 되는 내용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 11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 동안 1만 명의 청년들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방문하게 되는 큰 행사이다 보니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부 프로그램과 안전 문제까지 1시간 동안 꼼꼼하게 점검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평화재단에서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한 후, 오전에는 외교 안보 전문가들과 미팅을 하고, 오후에는 JTS 사무국장과 부탄 공무원 한국 초청 행사 준비에 대해 논의하고, 저녁에는 북미 동부 순회강연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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