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5.3. 백일법문 76일째
“저는 왜 저 자신이 늘 못마땅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76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1080배 정진이 있었습니다. 150여 명의 대중이 참석하여 목탁 소리에 맞춰 우렁차게 염불을 하며 절을 했습니다.

스님은 수행팀과 함께 오전 내내 지난 20여 년 동안 모아 온 자료를 정리하여 자료실로 옮겼습니다.

점심에는 JTS 박지나 대표가 어제 파키스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후 지원 방안에 대해 논의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강연 일정이 없어서 밀린 업무를 많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77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일요 명상을 안내하고, 오후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2030 청년들과 함께하는 ‘온종일 청춘톡톡’에 참석해 김제동 씨, 노희경 작가와 함께 청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18일 금요 즉문즉설 강연에서 질문자와 스님이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는 왜 저 자신이 늘 못마땅할까요?

“저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너무 긴장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어요. 이런 제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옆에서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다른 질문자들을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못하지?’ 하며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해낸 일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면 잘했어. 예전보다 늘었는데?’라고 얘기하지만, 저는 ‘이 정도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제 노력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스스로 인정해 온 점이 한 가지 있긴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는 예뻤습니다. 젊었을 때 얼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한 건 없어도 ‘그래도 난 좀 예뻐, 그거면 됐어.’ 하면서 자부하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서른 아홉이고, 배는 나오고 주름은 늘고 얼굴은 점점 까매지고 너무 못생겨진 거예요. 주변에는 젊은 사람도 많고요. 이제 저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난 진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네. 내세울 것도 없고 나이만 많아. 이제 곧 그냥 아줌마네.’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못마땅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래, 나는 태생부터 자존감이 낮았어. 태어날 때부터 자긍심이 없었어.’ 자꾸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제가 미워집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늙어가는 제 모습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지금 질문자가 말을 잘하는 편인가요? 못하는 편인가요?”

“잘해요.”

청중이 웃으며 크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말을 아주 잘해요. 질문자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질문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합니다. 질문자는 지금 이대로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을 뿐이에요. 쉽게 말해 약간 과대망상증 같은 게 있어서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는 자아상(自我像)이 너무 높은 겁니다. 예를 들어, 외모는 배우처럼 예뻐야 하고, 노래는 가수처럼 잘해야 하고, 말은 법륜스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막상 거울을 보면 얼굴은 배우보다 못났고, 노래를 해보면 가수보다 못하고, 말은 법륜스님보다 못 하니까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다 가져다가 나와 비교하다 보니 현실의 나는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라는 존재는 잘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나’ 일뿐입니다.

예를 들어, 이 컵을 보세요. 이 컵은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마이크와 비교하면 작고, 컵 뚜껑과 비교하면 클 뿐이에요.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컵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인식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다 마음이 짓는다고 합니다. ‘깨끗하다’, ‘더럽다’, ‘비싸다’, ‘싸다’, ‘잘생겼다’, ‘못생겼다’ 이런 모든 것이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나의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입니다. 이것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금이라고 하면 금이 되고, 은이라고 하면 은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크다’, ‘작다’ 하는 분별은 마음속 비교를 통해 생겨나는 것이지, 존재 자체는 본래 크지도 작지도 않다는 뜻입니다.

질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자는 그냥 질문자일 뿐입니다.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자신에 대한 기준을 높게 두면 스스로 못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기준을 낮게 두면 잘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은 과대망상 없이 질문자를 보기 때문에 ‘그 정도면 잘했어.’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반면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잘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다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그래서 남들이 나에게 잘한다고 해도 안 믿어지는 겁니다.

나는 그냥 나일 뿐입니다. 이 컵은 그냥 컵이에요. 그런데 다른 것과 비교하면 이 컵은 작아 보이기도 하고, 커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자 스스로 환상의 자신을 그려 놓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현실의 내가 초라하고 부끄러운 겁니다. 결국 욕심이 많은 거예요. 이 병이 심해지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외출도 꺼리게 되고,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이걸 저는 ‘못났다 병’이라고 합니다. 질문자는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나고 싶어서 생긴 병이에요. ‘잘나고 싶다.’ 하는 생각에 집착하다 보니 결국 ‘못났다 병’에 걸린 겁니다.

그게 좋으면 계속 그렇게 사세요. 제 기준으로 보면 질문자는 젊어요. 질문자가 본인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여성을 보면서 ‘이 정도면 젊은데?’ 하면 될 텐데, 굳이 훨씬 젊은 여성들과 비교하며 ‘난 너무 늙었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좋은 건 전부 가져 와서 비교하는 거죠. 나보다 돈 많은 사람과 비교하니까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이 되고, 나보다 젊은 사람과 비교하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 되고, 나보다 말을 잘 하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나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자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게 좋으면 계속 그렇게 사세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질문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돼요.”

“어떤 방법으로 하면 될까요?”

“현실의 나를 어떻게든 끌어올려서 잘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잘나고 싶다.’ 하는 집착을 버리면 돼요. 허상을 버리면 지금 이대로도 좋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명심문을 하나 주십시오.”

“환상의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 열등의식은 사실 우월 의식 때문에 생깁니다. 잘나고 싶은 생각 때문에 항상 스스로를 열등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겁니다. 나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숫자 자체에는 많고 적음이 없어요. 누군가와 비교하니까 많거나 적은 것 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누군가 ‘서른 다섯인데 아직 결혼도 못 했다.’라고 한다면, 그런 고민은 옛날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옛날에는 성인이 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열여덟에서 스무 살 사이가 결혼 적령기라고 여겼어요. 이 시기를 놓치면 노처녀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요즘엔 결혼 적령기라는 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혼자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고 서로 함께 살 준비가 되었을 때가 바로 결혼 적령기예요. 준비가 안 되었다면, 아무리 나이가 적어도 적령기가 아닙니다.

또한 결혼했다고 해서 꼭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출산은 더 이상 결혼의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다고 결혼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70대나 80대 노인들도 재혼을 많이 해요. 옛날에는 ‘늙어서 무슨 결혼이야?’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요즘은 노인들도 친구를 사귀고 결혼도 많이 합니다. 이제는 결혼을 언제 해야 한다는 고정된 기준이 사라지고 있어요. 예전에는 신체 나이가 중요한 기준이었고, 출산이 결혼의 핵심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혼했지만 아이 없이 살아가는 부부도 있고, 미혼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기도 합니다. 내 유전자를 꼭 물려주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사라지고 있어요. 정자는 정자은행에서 구매하고, 인공 수정으로 아이를 낳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내 아이와 네 아이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양해서 내가 키우면 그게 바로 내 아이예요. 몸은 현대를 살고 있는데 사유 체계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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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열등감은 잘나고 싶어서 생기는 마음이네요.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05-06 12:11:01

최영관

고맙습니다...

2025-05-06 11:49:38

문미경

못났다병에 걸렸딘 말았다 하는 내모습을 봅니다ㆍ.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혼자사는것이 선택입니다ㆍ감사합니다

2025-05-06 11: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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