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50분, 순례단은 라즈기르에서 바이샬리로 향했습니다. 이동 중 차량 안에서 새벽예불을 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약 3시간 30분을 달려 예상보다 1시간 빠른 오전 8시에 바이샬리에 도착했습니다. 인도의 도로 사정이 점점 좋아지면서 이동시간이 단축되고 있습니다. 마침 숙소가 비어 있어 순례단은 각 숙소에 짐을 풀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오전 9시에 도보로 진신사리탑터로 이동했습니다.
진신사리탑터에 도착해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후 스님이 성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곳은 바이샬리입니다.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는 인도 16 대국 중 하나로, 당시 작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중 16개가 대국으로 불렸고, 마가다국과 코살라국 같은 초강대국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이샬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부처님 시대의 인도는 대국이 소국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부처님의 고향인 석가족도 부처님의 생전에 코살라국에 합병되었고, 그 과정에서 석가족이 저항하자 코살라국이 무력으로 석가족을 거의 멸족하기도 했습니다.
바이샬리는 릿차비족과 밧찌족이 이끌던 곳으로, 공화제 형태의 정치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 정치제도는 당시 가장 이상적이어서 학자들은 상가 조직이 운영되는 모델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도 인도는 의회를 개원할 때 바이샬리의 연못에서 물을 가져와 의식에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바이샬리의 인연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처님께서 출가 후 카필라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바이샬리를 지나가며 고행주의자들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들에게 고행의 이유를 묻자, 그들은 고행을 통해 천상에서 복락을 얻을 수 있다 답변했는데, 부처님은 이러한 고행의 논리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고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부처님이 왕사성에서 교화하며 명성을 얻고 있을 때, 바이샬리에 가뭄이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 바이샬리 사람들은 가뭄이 심할 때 성인을 모셔와 공양을 올리면 비를 부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초청했는데, 부처님이 강가강을 건너 바이샬리에 발을 딛는 순간 비가 내렸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 이후 바이샬리 사람들은 자연스레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웃음)
세 번째,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린 일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후봉밀터에서 자세히 나눌 예정입니다.
네 번째, 바이샬리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암스테르담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개방적이고 다양한 사상을 포용한 곳이었습니다. 여성의 출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덕분입니다. 당시 인도에서 여성은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종속된 존재로 간주되었기에 독립적 인격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카필라성에서 여성 출가를 요청받고, 바이샬리에서 이를 허용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섯 번째, 부처님께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고 열반을 선언하신 곳도 바이샬리입니다. 또한, 부처님 열반 100년 후 제2결집이 열린 곳으로, 보시를 돈으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논쟁은 결국 교단 분열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여섯 번째, 대승불교 경전 중 가장 진보적인 경전인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도 바이샬리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재가수행자로, 사리푸트라와 문수보살도 유마거사와의 문답에서 그 지혜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웃음)
이처럼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관계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많은 순례객이 그냥 지나치며 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과 바이샬리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한 후, 스님은 진신사리탑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이곳 진신사리탑은 부처님 열반 후 릿차비족이 쿠시나가르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근본사리탑입니다. 현재 사리는 파트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지금 비하르주에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대규모 탑을 짓고 있습니다. 옆을 보면 건설 중인 탑이 보일 겁니다.”
설명이 끝나자 대중은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진신사리탑을 향해 정성스레 예불을 올린 후, 탑을 돌며 부처님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4백여 명이 탑을 중심으로 촘촘히 에워싼 후 탑을 향해 삼 배를 드리고 삼귀의를 한 후 천천히 탑을 돌아 다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후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종교적으로 따지면 지금 우리는 가장 성스러운 곳을 참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2600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육신에 대해서도 ‘이 몸은 곧 늙고 병들어 죽을 몸인데 이 허망한 몸을 봐서 무엇하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른다면 우리는 항상 제법이 공한 이치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가장 성스러운 곳을 오늘 참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예불문의 뜻이 무엇인지 자세히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순례단은 매일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예불을 하고 있는데 한문으로 된 예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예불문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진신사리탑 참배를 마치고 스님과 순례단은 원후봉밀터로 이동했습니다
모든 대중이 자리에 앉자 먼저 스님이 원후봉밀터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곳 중에 아소카 석주가 머리 부분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물론 다른 곳에도 남아 있지만 우리가 가는 곳 중에는 유일한 곳입니다. 부처님이 원숭이에게 꿀을 공양받은 곳이라고 해서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아소카 대왕이 석주를 세웠습니다. 원숭이의 꿀 공양을 한문으로는 ‘원후봉밀(猿猴奉蜜)’이라고 합니다.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올린 곳
어느 날 부처님과 제자들이 대중의 공양을 받기로 했습니다. 발우를 쭉 놓아두면 식사를 초대한 사람이 발우에 음식을 나누어 담아줍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몰려오더니 부처님의 발우를 들고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벌집을 뜯어 부처님의 발우에 담았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드시지 않자 원숭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꿀을 보니 벌집을 통째로 뜯어 넣어서 애벌레가 꾸물거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원숭이들이 나뭇가지로 그 벌레를 다 골라냈는데도 부처님은 또 드시지 않고 계셨어요. 원숭이가 다시 물을 넣고 저어서 드리니 부처님께서 받아서 대중들과 나누어 드셨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이 얘기는 짐승도 부처님을 알아봤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도를 이루시고 법을 설하시고 열반에 드신 4대 성지는 역사적 사실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8대 성지 중 나머지 네 곳은 모두 이렇게 기적을 일으킨 일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라즈길은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일화를,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린 일화를, 쉬라바스티는 천불화현을 한 일화를,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강림하신 일화를 각각 담고 있습니다. 모두 신화적인 이야기들이죠. 이런 일화들이 모두 후대에 만든 것이라면 인도의 신화적 문화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쇼카 석주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초기부터 그런 설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런 설화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기부터 있었던 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부처님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법을 하셨더라도 위대한 성인에 대해서는 일생이 늘 신비하게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인류 최초로 여성의 출가가 이루어진 곳
또한 이곳 바이샬리는 여성 출가를 처음 허용한 곳으로 전해집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전한 다섯 비구가 있고, 그다음에 재가 수행자인 구리가 장자와 그의 부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초기부터 재가수행자는 남자 수행자와 더불어 여성 수행자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 출가를 허용하신 것은 그 후 20년 뒤의 일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당시 시대 상황이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이 출가를 요청한 사례도 없었습니다. 아마 신분 제도에 묶여있어서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처님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어졌고, 아들은 출가했고, 손자마저 부처님이 출가시켜서 없으니 주인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신 상태죠. 당시에 주인 없는 여성은 누가 잡아가도 괜찮았습니다. 야소다라 공주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석가족 중에 이런 여성들이 오백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큰 문제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그들은 재가 수행자로서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출가하자’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출가에 걸림돌이 될 게 아무것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부모도 없고, 모든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의 어머니가 그들을 대표해서 부처님께 출가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보통 불가의 전통에서는 세 번 청하면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 세 번 청했는데도 부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너무 상심해 있다가 몇 달 뒤에 다시 청했지만, 부처님은 다시 거절하셨습니다. 그 후 부처님은 바이샬리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그러자 오백 명의 여성들도 바이샬리까지 따라왔습니다. 아마도 집에서 머물 때는 귀한 모습이었을 여성들의 몰골이 형편없이 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바이샬리까지 따라와서 출가를 다시 청했는데 부처님은 또 거절하셨습니다.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난다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 가서 다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공덕에 관해 아난다가 얘기했습니다. 부처님이 어릴 때부터 젖 먹여서 키운 과정과 남편이 죽어서 주인이 없어진 신세, 그래서 출가를 허용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여성이라는 것만 빼면 출가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춘 거예요. 그래서 아난다는 여성은 수행해도 해탈을 이룰 수 없는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성도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대로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공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가 태어나서 7일 만에 생모가 돌아가시자 부인은 나를 키우는데 헌신적이었다’ 이러시면서 여성들의 출가를 허용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난다의 제청으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비구니 제도가 생겼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긴 이유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실제로 그 당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기가 사회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거절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경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세 번을 거절했다는 건 부처님은 반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결국 아난다 존자가 다시 요청을 해서 허용하게 되었다는 말은 여성의 출가가 부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난다가 간절하게 얘기해서 부처님이 허용을 했다. 그러니 부처님의 본래 뜻대로라면 폐지하는 게 옳다’ 하고 주장하기 위해 그 근거를 마련하려고 이렇게 기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부처님이 허용했다고 하면 그걸 누가 폐지할 수가 있겠어요. 이걸 폐지를 하려면 그 근거를 마련해야 되니까 그 책임을 아난다한테 씌운 게 아닌가 이렇게 보는 게 좀 합당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성 출가를 폐지하는 것을 위해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을 남겼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입멸 후 500년이 지나서 폐지가 됐거든요. 그때는 굽타 왕조 시대였는데, 힌두교가 새로 일어나고, 카스트 제도가 더 강화되고, 성차별이 더 강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어쨌든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니 제도가 허용이 됐습니다. 왜 바이샬리에 와서 허용이 됐느냐면, 첫째, 이곳이 진보적인 도시여서 여성의 출가를 수용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수천 년 동안 여성이 남성에 의존해서 사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이 형식적으로 출가한다고 해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거절했는데도 이 먼 곳까지 따라왔다는 것은 이미 독립적인 존재가 될 준비가 됐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아마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여성 출가를 허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 바이샬리는 그런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남방불교에서 비구니 제도를 복원하려면 그 나라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게 아니고 바이샬리에 큰 비구니 절을 지어서 여기에서 수계를 해야 됩니다. 테라밧다는 전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경전에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반대하기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남방불교는 대승 비불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한국에 가서 비구니계를 받아 왔다고 하면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러나 바이샬리에서 비구니계를 받아오면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의 성지 안내를 마치고 다 함께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고 순례단은 발우에 식빵과 꿀을 공양받은 후 천천히 탑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공양예불을 올리고 명상을 한 후 천천히 꿀과 식빵을 먹었습니다.
대중이 공양을 마치자 스님이 그동안 성지순례를 하면서 부처님은 정말 어떤 분인지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매년 성지순례에 와서 부처님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동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첫째, 26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합리적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 그 깨달음을 당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실현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전체 인도 사회에서 실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상가라고 하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평등을 실현하셨거든요. 여성 차별을 뛰어넘어 여성 출가도 허용을 했고, 계급 차별을 뛰어넘어 누구나 다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출가하면 브라만이든 수드라든 누구나 다 계급 차별 없이 함께 모여서 살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절대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그 당시에는 계급 차별과 성차별이 적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그렇게 차별이 심했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차별이 덜했거든요. 인도도 굽타 시대에 차별이 더욱 강화됐습니다. 지금도 스리랑카에 가면 그 영향으로 상가도 계급별로 승단이 3개가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수드라는 수드라 출신 상가가 있고, 브라만은 브라만대로 상가가 따로 있어서 계급이 다른 계급 사람과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천민이 출가하여 스님이 된 절에는 브라만 신도가 안 갑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 2600년 전에 한 것도 그대로 못한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은 걸식을 하고 나무 밑에서 자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부처님 당시에는 종교나 권력이 절대적이었는데 부처님은 걸식을 하니까 왕이나 부자에게 특별히 요청할 게 없잖아요. 절이라도 크게 지을 필요성이 있어야 왕이나 부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가진 게 있다 보니까 부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뭐라도 얻으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많은 스님들이 권력자나 재벌을 만나면 ‘절 하나 지어주세요’, ‘불교 병원 하나 지어주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 병원이 없어서 전법이 제대로 안 되는 걸까요? 절이 없어서 불교가 확산이 안 되는 걸까요?
오히려 ‘부처님 당시에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지금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데, 지금 우리는 2600년 전 부처님께서 하신 만큼도 못해서 쩔쩔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분이 위대하다고 하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나 초라해지잖아요. 자꾸 부처님이 위대하다고 해야 우리도 보통 사람 축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웃음)
부처님의 일생을 보면, 연기법을 설한 것을 봐도 그렇고, 중도를 발견한 것도 그렇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신 내용을 봐도 그렇고, 왕이나 부자 앞에서 당당했던 것도 그렇고, 너무나 위대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왕과 재벌도 찾아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어 했는데, 숨 넘어가는 날까지 걸식하고 길거리에서 죽는다는 게 쉽나요? 오죽했으면 아난다가 ‘재가 신자도 많고, 출가 신자도 많은 바라나시 같은 곳에 가서 돌아가시면 참 좋을 텐데, 왜 이런 외진 숲 속에서 돌아가십니까? 돌아가시더라도 왕궁에 가서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겠습니까.
정토회도 이런 부처님의 모습을 흉내 내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운영해 보자는 것만 갖고도 쩔쩔매고 있습니다. 몇 사람만 고용해서 월급을 주면 훨씬 좋은 콘텐츠를 엄청나게 만들 수가 있는데,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자원봉사자로만 운영하다 보니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많습니다. 부처님처럼 나무 밑에서 자면 사람을 고용하지 않아도 될 텐데, 건물을 지어 놓으니까 6명만 고용하면 될 일을 자원봉사자 150명이 붙어서 건물 관리에 쩔쩔매고 있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부처님이 얼마나 자유로우면서도 원칙적으로 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경전에 나오는 마왕의 유혹 이야기가 너무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닿지 않나요? 요즘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하는 이야기는 전부 마왕이 하는 말과 그대로 닮아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마왕의 제자이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에요. (웃음)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과 당당함
유녀 암나팔리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탁 깨달으니까 자신의 손님인 왕자들이 ‘부처님을 식사에 초대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면 10만 금을 주겠다’ 하고 제안을 하는데도 ‘바이샬리 나라를 다 줘도 싫다’ 하고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식사초대권이란 게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돈을 내서 밥을 해야 되는 일인데도 왕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습니다.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런 자부심이 생겼을까요? 비록 몸을 파는 유녀라고 할지라도 깨달음을 얻으니까 엄청난 자부심과 당당함이 생긴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암나팔리도 대단하지만, 부처님도 대단합니다. 저 같으면 어떤 사람과 약속을 해놓았는데 대통령에게 전화가 오면 ‘미안합니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서 지금 가야 되니 다음에 봅시다’ 이렇게 말하고 약속을 바꾸었을 겁니다. (웃음)
우리가 부처님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해서 오히려 부처님의 위대함이 감퇴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날았다’, ‘물 위를 걸었다’ 이런 일화를 보고 위대함을 느끼는데, 비행기도 날고, 배도 무거운 짐 싣고 가는데, 신기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후대 사람들이 공연히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오히려 부처님의 위신력을 떨어뜨렸다고 저는 생각해요. 부처님의 말과 행위를 사실대로 기록했다면 우리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가 저절로 땅바닥에 숙여질 정도로 감동을 했을 겁니다.
저는 미래 우리 인류가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다가 결국 기후 위기로 인해 한계에 봉착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꾸 소비를 줄이라고 하지 말고, 그들보다 조금 잘 사는 우리가 소비도 줄이고 고개도 숙이고 살아야 이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검소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마약에 한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듯이 우리는 이미 ‘편리함’이라고 하는 소비에 중독이 되어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먹고 입고 자는 수준은 이곳 인도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나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힘들다고 하잖아요. 힘들어 죽겠는데 그걸 억지로 참고 다니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쓰러지는 사람이 한 10명씩 생깁니다. 긴장이 풀려서 발을 헛디디고 기절도 하고 그럽니다. 지금 이를 악다물고 다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에요. 인도 14억 인구도 이렇게 사는데 힘들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 마음을 좀 편하게 갖고 다니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 함께 ‘행복의 나라’를 부른 후 원후봉밀터 순례를 마쳤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약 두 시간 동안의 원후봉밀터 참배를 마무리하고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네 대의 차량에 해당하는 16개 조와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원 후봉밀터 밖으로 나갔습니다. 입구에는 스님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마을 아이들이 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을 내미는 이들에게 스님은 사탕과 과자를 한 움큼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준비한 간식을 모두 나눠준 후 즉문즉설 방송을 하기 위해 서둘러 숙소로 갔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방송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 시간으로 오후 4시, 한국 시간으로 저녁 7시 30분에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4천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중 한 명은 결혼 이후 지금까지 남편과 부부 관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결혼 후 부부 관계를 거부하는 남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결혼하여 아들을 한 명 둔 워킹맘입니다. 제 고민은 남편이 결혼 이후로 지금까지 부부 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지자고 합의하여 관계를 한 번 하고 바로 아이가 생겼습니다. 기적처럼 찾아와 준 아이에게 감사하지만 그 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부부 상담을 해보자 했지만 남편은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며 상담을 거부하였습니다. 남편은 아이에게 잘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하여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남편의 장점을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다른 부부들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지며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무너지고 자괴감이 듭니다. 아이가 있어 이혼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의 엄마로서 최소한 20년 동안은 가정에 충실하려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도 종종 우울하고 슬픈 마음이 올라올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지금 남편은 바람을 피우지도 않고, 가정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으며,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결혼이란 친구와 같이 동거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결정은 본인의 몫입니다. 비구니 스님이나 수녀처럼 성생활을 하지 않고도 평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꼭 비구니 스님이나 수녀가 아니더라도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친구처럼 남편과 지내도 되고, 아이의 아버지로서 역할을 해주는 것에 감사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자가 성적 욕구를 꼭 충족하면서 살고 싶다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생활을 포기하고 가족 공동체로만 사는 것이 도저히 어렵다면, 그것은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됩니다. 이것은 남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이에요. 하지만 이혼을 해야겠다는 입장이 분명하지 않다면,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질문자가 성적 욕구가 있음에도 남편이 응하지 않는다면,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없고, 결국 참고 살아야 하잖아요. 이것도 하나의 불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를 키우며 현재와 같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질문자는 스님의 답변을 듣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다시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질문자가 우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왜 슬픈가요? 현재 남편이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술주정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문제라고 하면 부부 관계라고 하는 성생활을 못 한다는 것이잖아요. 질문자가 성적 욕구가 강한데 이를 해소하지 못해 슬프다고 하면 그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성생활을 못 한다고 해서 둘이서 알콩달콩 살 수 없는 건 아니에요. 질문자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를 명확하게 봐야 됩니다. 남편이 아이한테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직장도 잘 다니고, 다 잘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우선 부부 클리닉에 가서 전문가한테 부부상담을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걸 거부하고 있다면, 첫 번째 가능성은 남편은 신부나 스님처럼 살겠다는 자신만의 인생관을 갖고 있는 거예요. 결혼해 놓고도 자기는 수행자로 살면서 부부 관계를 안 하겠다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남편이 성애가 없는 사람일 수 있어요. 성애가 없는 사람은 성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고, 심지어 성생활이 귀찮고 불결하다고 여깁니다. 여성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고, 남성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남편에게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었다면 아기가 생기지 않았겠죠. 남편은 성애가 없기 때문에 본인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대화를 나눠봐서 성애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성애가 있는 나를 남편이 고려하든지, 성애가 없는 남편을 내가 고려하든지, 서로 안 맞으니까 이혼을 하든지, 셋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질문자가 자신에게 좀 솔직해야 됩니다. 이건 참고 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을 알고 내가 선택해야 되는 일이에요. 신부, 스님, 수녀, 이런 사람들이 성애가 전혀 없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그런 삶을 선택하고 자제를 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도 남편과 같이 살기로 선택을 했다면 성적 욕구를 자제해야 되는 거예요.
세 번째 가능성은 남편의 성애가 동성애일 수 있습니다. 남자가 남자에 대해서는 성애를 느끼는데 여자에 대해서는 성애를 안 느낀다거나, 여자가 남자에게는 성애를 안 느끼고 여자에게만 성애를 느낀다거나, 이런 것을 동성애라고 해요. 물론 일반적이지 않죠. 옛날에는 이것을 죄악시했지만 이런 성향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면서 지금은 개인의 자유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성애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동성애 기질이 남편에게 있다면 이성에게는 전혀 성애가 안 일어나는 겁니다. 남자의 성 기능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관계를 맺으면 아기가 생기는데, 여성에게 성애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아내와 잠자리를 갖는 게 굉장히 불편한 거예요.
이렇게 남편은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생활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무성애라서 성적인 욕구가 없거나, 동성애라서 이성에 대해서 성애를 못 느끼기 때문에 남편이 지금 그런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질문자가 남편하고 얘기를 한번 해봐야 됩니다. 물론 남편이 그냥 나와 동거하는 사람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입장 정리를 하면 남편하고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아기도 있고, 직장생활에도 별 문제가 없고, 수녀나 비구니 스님도 이렇게 사는데 나도 성적 욕구를 좀 자제하고 살자’ 이렇게 입장을 가지면 더 이상 남편과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적 욕구를 충족하면서 살아야겠다면 그것은 질문자가 누려야 할 소중한 권리이니까 남편과 의논을 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그 이유가 뭔지 물어봐서 '좋다. 당신이 그렇다면 나도 자제하고 살겠다'라고 하든지, '나는 당신과 이혼을 하고 성적 욕구를 추구하며 살겠다'라고 하든지, 둘 중에 결정을 내리면 돼요. 괴로워할 일도 아니고, 참을 일도 아니고, 충분히 서로 의논해야 합니다.
남편이 말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앞에서 제가 말한 세 가지 경우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아마도 도저히 밝히기 어려운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충분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에 거기에 맞춰서 질문자가 선택을 하면 됩니다. 이것은 울 일도 아니고, 참을 일도 아니고, 그냥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질문자는 아직 젊어서 살아가야 할 날이 아주 많잖아요. 대화를 하고, 문제를 파악하고, 선택을 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야 아이도 건강하게 자랄 수가 있습니다. 질문자가 스트레스받으면서 억지로 참고 살면 아이도 심리적으로 그 영향을 받아서 정신적으로 장애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편과 대화도 나누고, 상황도 파악하고, 그런 다음에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헤어지지 않고 버티려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항상 노력했지만, 그것도 부족한 모습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참지 마세요. 불행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남편과 얘기해서 상황 파악을 하고, 그 상황에 따라서 선택을 하면 됩니다. 18세기 중세 시대도 아니고,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 남의 눈치 볼 게 뭐 있습니까. 먼저 현황 파악을 하고, 그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고, 그렇게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6시 30분에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바이샬리 왕궁터로 향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풍경이 펼쳐져 순례단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습니다.
논둑길을 따라 걷자 광활한 왕궁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왕궁터에 도착해 4백여 명의 대중은 큰 원을 이루고 섰습니다. 스님이 대중에게 말했습니다.
“불빛을 모두 꺼보세요. 그래야 별빛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불빛을 모두 끄자 은은한 별빛 아래 서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순례단의 장기자랑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분은 자신의 6년간의 수행 생활을 담은 노래를 부르며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또 다른 분은 한국의 매운맛이 그리울 순례단을 위해 ‘신당동 떡볶이집’을 열창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각양각색의 노래에 이어 피리 연주, 단체 가무까지 다채로운 무대가 이어졌습니다.
깊어가는 밤, 왕궁터는 정토행자들의 밝은 웃음과 노랫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달이 뜰 때까지 여흥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내일 순례를 위해 밤 8시에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바이샬리를 떠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를 순례합니다.
전체댓글 46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1-25 09:21:33
지명화
감사합니다
2025-01-24 10:16:39
길상
인도 14억 인구도 이렇게 사는데 힘들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 마음을 좀 편하게 갖고 다니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