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1.18. 인도성지순례 8일째_쿠시나가르
“부처님,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8일째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여정을 따라 쿠시나가르(Kushinagar)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 케사리아탑, 춘다의 공양터, 카쿠타강을 거쳐 열반당과 라마바르총을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원고를 교정하고 출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새벽 4시 50분, 순례단 전원이 차량에 탑승하자 버스는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나가르로 출발했습니다.

바이샬리에서 약 40km를 이동해 새벽 6시 30분에 케사리아탑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이제 막 해가 떠올라 케사리아탑 주변이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탑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개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탑의 형상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케사리아탑의 규모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스님은 탑 앞에 모인 순례단에게 이 탑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탑은 세계에서 가장 큰 탑 중 하나로, 케사리아탑이라고 불립니다. 이곳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집니다.

첫 번째는 출가를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설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를 결심한 후 카필라성을 떠나 밤새 말을 타고 달려 아노마 강을 건너 이곳에 도착해 말과 마부를 돌려보내고 머리를 깎은 뒤 사냥꾼의 누더기를 입고 출가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을 선언하신 후 바이샬리를 떠나실 때 발생한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입니다.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이 열반에 든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이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뵙는 기회라 생각하고 부처님을 배웅하기 위해 계속 따라왔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이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이 칸타키강을 건너갔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발우를 강물에 띄워 보냈고, 바이샬리 사람들은 그 발우를 받아 이곳에 탑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탑을 세운 것을 보면 저는 첫 번째 설, 즉 부처님이 출가한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이야기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설명을 다 듣고 순례단은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탑의 둘레가 매우 커서 4백여 명의 순례단이 다 둘러서도 탑을 모두 에워싸지는 못했습니다.


순례단은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차분한 염불 소리와 함께 추운 날씨에 경직되었던 몸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짙어진 안갯속으로 케사리아탑은 다시 형체를 감추었습니다.



케사리아탑을 뒤로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춘다의 공양터로 향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칸타키강이 넓게 펼쳐졌습니다. 이 강이 부처님이 발우를 띄워 바이샬리 사람들에게 건넸다는 바로 그 강입니다.

버스로 1시간 30분을 이동한 끝에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했습니다. 탑 터는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순례단은 육교를 건너 좁은 골목길을 따라 줄을 지어 이동했습니다.


마을을 지나 넓은 탑터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탑 앞에 자리를 잡고 잠시 명상에 들었습니다.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부처님과 춘다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바이샬리에서 열반을 선언하시고 칸타키강을 건너 쿠시나가르로 향하셨습니다. 매일 약 15km씩 걸어 파바 마을에 도착하셨는데, 이 마을 입구에 있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이 망고나무는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의 것이었습니다. 춘다는 부처님을 찾아와 예를 올리고 법문을 청했습니다.

법문을 들은 춘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 감격한 나머지 부처님과 승가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 내일 아침에 제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부처님은 침묵으로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난다는 걱정했습니다.

‘올해는 흉년이라 부유한 사람도 공양을 올리기 어려운데, 춘다가 어떻게 공양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걱정하지 말아라. 춘다는 공양을 능히 준비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춘다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부처님, 공양이 준비되었습니다. 때를 아소서!’

부처님과 대중이 춘다의 집으로 갔을 때, 음식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발우에 음식을 담으신 뒤 마지막에 받은 공양물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춘다여, 이 음식은 대중에게 주지 말고 땅에 묻어라. 이 음식은 아무도 소화시킬 수 없느니라.’

‘알겠습니다.'

공양이 끝난 후 부처님은 춘다에게 설법을 하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서둘러 가자. 배가 몹시 아프다.’

부처님은 피가 섞인 설사를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잠시 나무 그늘 아래 멈추어 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목이 몹시 마르다. 물을 가져다 다오.’

‘부처님, 조금 전에 마차가 수백 대 지나가서 근처 개울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카쿠타강이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목이 몹시 마르다. 물을 가져다 다오.’

부처님의 간청에 아난다는 결국 근처 개울로 가보았고, 물이 생각보다 깨끗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그 물을 떠 와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부처님은 물을 드신 후 다시 길을 걸으셨습니다.

카쿠타강에 도착한 부처님은 강가에서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신 뒤, 근처 망고나무 아래에 가사를 벗어 네 겹으로 접고 누우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난다여, 춘다는 어떠하냐?’

‘춘다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아무 공덕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춘다를 이리로 오게 하라.’

춘다가 부처님께 와서 곁에 앉았습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은 무엇이냐?’

‘수자타의 공양입니다.’

‘그렇다. 수자타의 공양은 여래가 정각을 이루기 전에 마지막으로 받은 공양이었다. 그런데 이 공양과 같은 또 하나의 공양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받은 마지막 공양이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했습니다. 반면,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더욱 위대하게 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춘다여,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올린 공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을 가진 공양이 될 것이다.’

이 말씀에 춘다는 근심을 내려놓았고, 대중들 사이에서도 춘다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춘다의 공덕을 기리며 그가 공양을 올린 자리에 탑을 세웠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단순히 음식을 먹고 아무렇지 않으신 데 있는 게 아니라, 죽음의 과정 속에서도 대자비심으로 중생의 근심과 고통을 없애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춘다의 공양터를 찾아 참배하는 것입니다.”

설명이 끝난 후 순례단은 탑을 향해 경전과 삼귀의,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독송을 마친 후 탑을 돌며 염불을 하고 참배를 마쳤습니다.


춘다의 공양터 바깥에는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누어 주고 버스를 탔습니다.

춘다의 공양터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이동하니 카쿠타강에 도착했습니다. 강물은 많이 줄어서 물의 양이 적었습니다.

“강물이 많지 않네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야지요.”

“안 됩니다. 물이 깨끗해 보이지 않습니다.”

“인도에서 이 정도면 물이 맑은 거지요.”

스님은 강가로 내려가 세수를 한 뒤 물을 한 모금 마셨습니다.

“자, 다들 내려와서 물 한 모금씩 하세요. 특히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변비약 대신 물을 드세요. 오늘부터 설사가 잘 나올지도 모릅니다." (웃음)

대중들도 강가로 내려와 세수를 하거나 손을 담가보았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오전 11시에 캄보디아 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숙소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점심 공양 후 12시 20분, 순례단은 열반당으로 출발했습니다. 12시 30분에 열반당에 도착해 경내로 입장했습니다.


스테프들은 미리 와서 순례단이 열반당 앞마당에 참배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열반당을 한 바퀴 돈 후 스태프들이 준비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대중은 스님께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의 모습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듯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한 생을 마감한 열반 장소입니다. 지명은 쿠시나가르입니다. 당시에 조그마한 왕국이었습니다. 이곳의 왕족은 말라족이었는데요. 쿠시나가르 말라족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께서는 파바 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받고 급성 설사병을 앓았습니다. 꼭 춘다의 공양 때문에 돌아가셨다라기 보다는, 이미 돌아가시려고 자신이 예정한 장소를 향해서 나아가는 중에 돌아가시는 시간이 조금 앞당겨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부처님은 원래 어디를 열반 장소로 생각했을까 궁금해했습니다. 아마 고향인 카필라성에 돌아가서 열반에 드시려고 하시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는데, 이것이 춘다의 공양 때문에 며칠 앞당겨진 것이라고 보는 거죠. 사실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이런 시골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부처님께서는 파바 마을을 출발하여 카쿠타강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이곳 쿠시나가르에 이르셨습니다. 지금은 사라 나무가 몇 그루만 서 있는데, 그 당시에는 사라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나 봐요. 보리수나 망고 나무는 한 그루가 느티나무처럼 넓게 펼쳐지니까 그늘이 넓어서 그 아래에서 명상을 할 수 있는데, 사라 나무는 위로 자라므로 빽빽한 사라 나무 숲에 들어가서 누울 자리를 깔게 되니까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된 거예요.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자리를 깔아다오’ 하고 말하자 아난다가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자리를 깔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다리는 남쪽으로 하셨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니까 얼굴은 서쪽이 되겠죠. 그렇게 옆으로 누워서 ‘오늘 밤에 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갑자기 풍악 소리가 울리고 꽃잎이 떨어졌습니다. 사라 나무는 꽃필 때가 아닌 데도 불구하고 하얗게 꽃이 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전에서는 이 모습을 ‘사라 나무가 학처럼 휘어졌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신기하니까 아난다가 부처님께 ‘이게 무슨 현상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여래에게 올리는 마지막 공양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이 여래에게 올리는 제 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 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담은 것이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예불문입니다. 예불문의 첫 구절이 ‘계를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고, 해탈을 얻고, 해탈지견을 얻는 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마을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여래가 오늘 밤에 열반에 든다. 그러니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다 오도록 하라.’

그러자 아난다가 또 물었습니다.

‘부처님을 존경하는 왕도 있고, 재가 신자도 많고, 부자도 많고, 수행자도 많은 라즈기르, 바라나시, 코삼비 이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런 외진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먼 옛날에는 이곳이 성스러운 곳이었다. 먼 미래에도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될 것이다.’

그러자 아난다가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말라족의 왕궁에 가서 열반에 드시지 왜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부처님이 답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숲 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늘의 신들이든 본인이 원하면 누구나 다 여래를 친견할 수가 있다.’

만약에 부처님이 왕궁에서 열반에 든다면 어떨까요? 천민들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겠죠. 아무 막힘이 없는 숲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본인만 원하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수긍이 된 아난다는 마을에 내려가서 알렸습니다.

‘여래가 오늘 밤에 열반에 드신다. 그러니 친견할 사람들은 모두 와서 친견해라. 여래가 열반한 뒤에 후회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마을에 알리고 돌아왔는데, 위대한 스승께서 오늘 밤에 열반에 드신다니 아난다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래서 숲 속 나무에 기대서 혼자서 흐느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옆에 있는 제자에게 아난다가 어디에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제자가 ‘아난다는 지금 슬픔을 못 이겨서 숲 속에서 홀로 흐느낍니다’ 했더니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이리 오게 해라’ 하고 아난다를 불러서 칭찬했습니다.

‘아난다는 지난 25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마치 그림자가 따르듯이 여래의 마음을 헤아려서 입 안의 혀처럼 시봉을 했다.’

입안의 혀처럼 움직였다는 것은 아난다가 여래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는 뜻입니다. 만날 사람과 안 만날 사람을 조정하고, 또 인품이 아주 부드러워서 남을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고 해요. 비서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권력을 행사할 때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출가할 때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부처님께 직접 말씀을 못 드리면 아난다를 통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는 그런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 아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마치 녹음해 놓은 듯이 재현해 낼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아난다를 칭찬하시자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의지하며 수행해 왔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서 여래처럼 의지할 것은 사념처이다. 사념처에 의지해라.’

사념처는 몸은 성스럽지 않고 부정하다는 관신부정, 느낌은 곧 괴로움이라는 관수시고, 우리의 마음은 늘 죽 끓듯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관심무상, 모든 존재는 다 실체가 없다는 관법무아, 이 네 가지를 의미합니다. 테라밧다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관을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난다가 또다시 물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며 수행해 왔는데, 부처님이 떠나시면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사성지를 생각하라. 사성지를 돌며 이렇게 생각하라.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실 때의 모습은 이러하셨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셨다. 도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다.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열반하실 때의 모습은 이러하다.’

우리가 사성지를 늘 생각할 수 있다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발우공양을 할 때 제일 먼저 읊는 게송이 사성지를 생각하는 내용입니다.

‘불생가비라(佛生迦毘羅) 성도마갈다(成道摩竭陀) 설법바라나(說法波羅奈) 입멸구시라(入滅俱尸羅).’

부처님은 가필라성에서 태어나셨고, 부처님은 마가다국에서 도를 이루셨고, 부처님은 바라나시국에서 최초로 설법하시었고, 부처님은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아난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우리는 큰 공덕을 쌓을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과 똑같은 공덕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고, 둘째,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는 것이며, 셋째,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고,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JTS의 이념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하고, 병든 사람은 치료받아야 하고, 아이들은 제때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또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신자들이 그들의 풍속대로 할 것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한국이라면 매장을 할 것이고, 인도에서는 카스트에 따라 다르게 장례를 치를 것입니다. 부처님의 장례는 말라족이 주관하였고, 이는 왕족의 예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부처님이 곧 열반에 드신다고 하자 숲 속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원래는 한 사람씩 인사를 시키려 했으나 인원이 많아 가족별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밤이 깊어지자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편안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조용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수바드라’라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들여 보내라고 하십니다. 수바드라는 ‘고타마시여, 이 세상에는 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 다릅니다. 누구의 주장이 맞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탐욕과 성냄이 있다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출가한 지 51년이 되었고,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정진해 왔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논하지 말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알아차리며 바르게 행동하라.’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자각하여 출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상가의 규칙에 따라 외도인의 경우는 3개월 동안 지켜본 뒤에 출가를 허락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바드라는 ‘3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대중을 모아 놓고 마지막 유훈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리고 부처님은 조용히 열반에 드셨습니다. 세상 나이로 80세였습니다. 출가하고 나서 51년, 성도하고 나서 45년 동안 중생을 위해 교화와 설법을 하시다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대중은 한 걸음씩 천천히 열반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열반당은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로 붐볐습니다. 빈자리가 없어 스님과 순례단은 열반당 외부를 돌며 염불을 했습니다. 순례단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앞서 열반당으로 들어간 순례자들이 참배를 마치고 나오자 스님과 순례단도 열반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부에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중앙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4백여 명의 순례단은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서 정성스럽게 예불을 올렸습니다. 순례단의 예불 소리가 열반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순례단은 천천히 마당으로 돌아 나왔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이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의 발원문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스님은 이곳 열반당에서 우리 모두가 염원해야 할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열반당을 참배할 때 감동이 있었어요? 부처님이 누워 계시니까 실감이 나죠?”

“예!”

“이렇게 열반당에서 부처님 열반의 모습까지 순례를 했습니다. 중생은 부처님께 늘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합니다. 수행자라면 부처님께서 이렇게 큰 깨우침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이제 남은 일들이 있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앞으로 ‘도와주세요’ 하지 말고 ‘할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힘 닿는 데까지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알았죠?”

“예!”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좀 도와주세요’ 하지 말고 ‘제가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난 다음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평생 애썼지만, 부처님께서 건진 중생은 나뭇잎 한 장 만큼에 불과합니다. 남은 중생은 숲 속의 나뭇잎 만큼이나 많습니다. 나머지 나뭇잎에 대해서는 우리가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우리가 임한다면 이 세상은 더욱더 밝아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불법이 위축된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한 명의 부처님에서 열 명의 부처님, 백 명의 부처님, 천 명의 부처님, 만 명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부처님의 법이 널리 전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먼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까지 법이 전해졌고, 그 은혜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불법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는 불법의 인연을 맺지 못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에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 염원을 갖고 우리가 전법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수행 정진해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이 법을 전해서 그들도 괴로움 없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합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 즉 ‘보살’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보살로 승단을 구성합니다. 출가한 남자 스님과 여자 스님뿐만 아니라 재가 수행을 하는 남자 수행자와 여자 수행자까지 합해서 사부대중이라 이르고, 이들로 승가를 구성합니다. 신자로 승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가는 수행자들의 모임입니다. 정토회는 이런 지향을 갖고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한 사람의 수행자가 되기 위해 이렇게 성지순례를 온 것입니다.”

성지 안내를 마치고 스님은 라마바르총으로 먼저 이동하여 스태프들과 함께 행사장을 점검했습니다. 이후 3시 30분이 되어 순례단이 라마바르총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탑을 한 바퀴 돈 후 한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리를 정돈하고 대중과 함께 예불을 올리고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이 끝나자 스님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긴 하루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처님의 생애 마지막 여정을 따라 답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부처님 열반 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열반당이 있던 곳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쿠시나가르의 말라족은 부처님의 유해를 자신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장소인 바쿠바반다나로 옮겼습니다. 바쿠바반다나는 왕위 계승 시 왕관을 씌우는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입니다. 말라족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곳 라마바르 총에서 부처님의 유해를 화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뒤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히란냐바티라고 부르는데, 사라수 숲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입니다. 카쿠타강이 큰 강이라면 히란냐바티는 작은 개울입니다.

당시 마하가섭은 500명의 대중과 함께 다른 곳에서 안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안거가 끝난 후 부처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바이샬리로 향했지만, 부처님은 이미 떠나신 후였습니다.”

스님은 라마바르총의 의미를 설명하며 순례단과 함께 영가 천도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우리가 이곳 라마바르총에 온 이유는 부처님을 화장하신 장소에서 우리 또한 영가에게 천도의 공덕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이 의식은 종교적인 행사이므로, 참여하고 싶은 분들만 하면 됩니다. 부모님을 포함해 고마운 분들에게 잔을 올리셔도 좋습니다.”

순례단은 천도의식을 진행하며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했습니다.


라마바르총에서 천도재를 끝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가사를 접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가사 접는 일도 모두 능숙하게 해냅니다.

스님도 숙소로 돌아와 저녁 공양을 하고, 원고를 교정한 후 일찍 휴식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2시에 일어나 국경을 넘어 네팔로 이동해 부처님의 탄생성지 룸비니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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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주

고맙습니다.

2025-02-11 21:39:15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1-25 19:33:24

지명화

감사합니다

2025-01-24 10: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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