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01.25. 인도성지순례 5일째, 라즈기르
“얼마나 많이 가져야 욕망이 끝이 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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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라즈기르로 가서 제띠안, 죽림정사, 영축산, 칠엽굴을 순례했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에서 6년 고행 후,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발견하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셨습니다. 이후 보드가야에서 49일 정진 후 성도하셨습니다. 성도 후 사르나트(Sarnath)에서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였고 야사 비구 등 55명을 교화하였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보드가야로 이동하여 우르벨라 가섭, 가야 가섭, 나디 가섭과 그들이 이끌던 1,000여 명을 교화하고, 가야산에서 ‘마음 속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불의 설법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교화한 1,000명의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왕사성(Rajgir, 라즈기르)으로 나아갔습니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은 인도 대륙에서 최강국이었습니다. 명성이 높은 많은 수행자들이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 주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발자취를 따라 라즈기르를 순례했습니다.

순례단을 태운 차는 새벽 4시 30분에 수자타아카데미를 나와 라즈기르로 향했습니다. 1시간 10분 동안 약 65km를 달려 제띠안(Jethian)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사방이 캄캄했습니다.

10여 분을 걷자 큰 골짜기가 나왔습니다. 산 중턱에 탑터가 보였습니다. 순례단은 탑 앞에 도착해 가사를 수하고 탑을 향해 섰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탑이 있는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탑을 향해 삼배를 하고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제띠안입니다. 지금 이곳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쭉 가서 저 산골짜기를 지나 고개를 넘어 15km를 가면 왕사성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시고 1,0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어제 우리가 올라갔던 가야산을 출발해서 5일간 천천히 걸어서 이곳에 이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이르렀을 때, 빔비사라 왕이 대신과 권속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곳 제띠안에서 부처님 일행과 빔비사라 왕 일행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붓다와 빔비사라 왕의 만남

이 산 위에서 만나지는 않았을 테고 앞쪽으로 돌아보면 넓은 들판이 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만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높은 곳에 기념탑을 쌓았습니다. 부처님과 왕이 만난 자리를 기념하는 이 탑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후에 아쇼카 왕 때 쌓은 것인데, 이렇게 산 위에 쌓은 이유는 아마도 부처님이 높은 곳에 앉으셔서 대중을 바라보고 설법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기 쌓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겠고 저 밑에 쌓았다면 다 유실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빔비사라 왕을 만나 교화를 한 것은 불교사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부처님과 대중 그리고 빔비사라 왕과 그 권속들이 만났을 때, 빔비사라 왕뿐만 아니라 많은 권속들은 ‘소문처럼 저 젊은 사문이 스승인가? 아니면 위대한 수행자 우루벨라 가섭이 스승인가?’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때 빔비사라 왕은 자기 앞에 있던 우루벨라 가섭에게 예를 표한 후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표했습니다.

‘제가 듣기로 우루벨라가섭께서 한 젊은 사문에게 귀의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을 두고 ‘이 아이는 내 손자요’ 하는 것만큼이나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우루벨라가섭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면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제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제 이분을 만나 저는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윤회의 씨앗을 심었다는 말은 복을 빌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설령 천상에 태어나 비록 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육도 윤회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윤회의 씨앗을 버렸다는 말은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소문이 사실인 줄을 알게 되었고, 부처님을 향해서 예를 행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린 왕자일 때는 왕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왕이 되었고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저에게 또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내 나라에서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붓다가 출현하셨습니다. 다음 저의 소원은 붓다를 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붓다를 친견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소원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제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 법을 청하니 부처님께서 빔비사라 왕을 위해 설법을 하셨습니다. 먼저 보시의 공덕과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는 공덕, 그럴 때 하늘나라에 나는 공덕을 말씀하셨어요. 세상 사람들을 위한 설법을 먼저 하신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안온하게 한 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데 그 상태를 유지하는 여덟 가지 길에 대해서 설법하셨습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도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져야 욕망이 끝이 날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왕은 늘 괴로움이 많았는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붓다는 괴롭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왕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늘 뺏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자도 예쁘면 데려오고, 마차도 좋은 것을 선물 받고, 어디 가서 귀한 것을 보면 왕궁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붓다는 왕에게 한 번도 무엇을 달라고 해본 적이 없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을 위해서 많은 설법을 해서 고뇌에서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잖아요. 그런데 이런 부족함은 죽을 때까지 끝이 안 납니다.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끔 저한테 ‘스님, 3년만 기다리세요. 제가 집안 정리를 딱 해 놓고 바랑 메고 스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가 70년을 사는 동안 그렇게 말한 사람 중에 아직까지 한 사람도 따라온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길을 가다가 만나서 우연히 법문을 듣고 저를 따라온 사람은 있지만요.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욕망은 만족해야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욕망을 멈춰야 합니다.”

경전을 독송한 후 죽림정사로 이동했습니다. 죽림정사는 2600년 전 빔비사라 왕이 걸식하시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 기증한 최초의 절입니다.

죽림정사는 제띠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대나무가 무성한 입구로 들어가 쭉 걸어가니 연못이 보였습니다.

“이 연못은 카란다카 연못입니다. 카란다카 장자가 보시한 연못입니다. 어느 절을 가든 연못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탁발을 하고 오면 아무래도 손을 씻거나 발을 씻어야 하니까 연못이 있어야겠죠.”

조금 더 들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습니다. 순례단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죽림정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처님이 제띠안에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한 후 그 소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마가다국에 있는 소위 돈 있고 힘 있는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진 인연으로 부처님께서는 이곳 라즈기르(왕사성)에서 많은 위대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자가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입니다.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의 출가 이야기

사리푸트라(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ana)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제1제자와 제2제자로 꼽힙니다. 사리푸트라는 ‘지혜 제일’이라고 하고, 목갈라나는 ‘신통 제일’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부처님이 이곳 죽림정사에 계실 때 제자가 되었는데,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고, 문하에는 이미 제자를 250명이나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또, 두 사람이 모시는 스승이 있었는데 바로 산자야(Sañjaya)였습니다. 회의론 또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설파하던 산자야의 교단은 당시 신흥 교단 6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여섯 개의 신흥 교단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합니다.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의 고향은 여기서 가깝습니다. 날란다 대학이 있는 지역이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의 고향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브라만으로 높은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스승 산자야를 모시면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리푸트라가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Assaji)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출가 사문이 걸식을 하러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여법한 거예요. 그가 평범한 수행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사리푸트라는 그를 멈춰 세우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수행자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위대한 고타마 붓다의 제자입니다.’

그렇게 고타마 붓다의 제자라고 겸손하게 답을 한 사람은 사르나트에서 부처님의 첫 설법을 들은 다섯 비구 중 한 명인 앗사지(Assaji)였습니다. 앗사지의 언행만 보고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스승은 얼마나 훌륭한 분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앗사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저한테 묻지 마시고 스승님께서 대나무 숲에 계시니 그곳에 직접 가보시오.’

사리푸트라는 성격이 급했는지 긴 설명이 없어도 괜찮으니 그분의 가르침 중 한 마디만이라도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앗사지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 마치 두 개의 볏단이 서로에게 의지해서 서 있듯이.’

아사지의 이야기를 들은 사리푸트라는 마음의 문이 탁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수행을 하면서도 뭔가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게 있었는데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부처님이 대나무 숲에 계시다는 걸 들은 사리푸트라는 대나무 숲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친구인 목갈라나를 데리러 우선 자신의 수행처로 돌아갔습니다.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같이 나누자고 평소에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리푸트라는 부처님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목갈라나에게 알려주려고 수행처로 돌아갔습니다. 사리푸트라의 얼굴을 본 목갈라나는 무언가 좋은 일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자 사리푸트라는 앗사지와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그분의 스승께 법을 들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스승 산자야도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스승 산자야를 찾아갔는데, 산자야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믿을 게 못 된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자였습니다. 주어진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는 측면에서는 불교와도 유사한 반면 회의론자들은 끝없이 의심만 할 뿐 결론이 없습니다. 산자야에게 붓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도 믿을 게 못 된다’며 의심을 하고 가지 않겠다고 하자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는 자기들만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산자야 없이 제자 250명을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법을 청했는데, 붓다의 설법을 듣고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같이 간 제자들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두 출가를 해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붓다의 제자가 1,250명이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후대에 나온 경전에도 사람이 많이 모인 모임에 대해서는 1,200명 또는 1,250명이 모였다고 기록을 합니다. 우리 예불문에도 ‘천이백 제대 아라한’이라고 나오고, 금강경에는 ‘천이백오십 대비구’라고 나옵니다. 그 숫자가 이곳 죽림정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1년 안에 교화된 사람들이니까 후대 교단에서 볼 때는 대선배들이죠. 그래서 ‘대선지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마하가섭의 출가 이야기

마하가섭은 큰 부잣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하가섭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권해도 오로지 수행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하도 권하니까 결혼을 안 할 심산으로 향나무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해 주면서 그 조각과 같은 여인이 있으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마하가섭의 어머니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향나무 인형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결국 그 인형과 비슷한 사람을 구해왔습니다. 자기가 한 약속이 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던 마하가섭은 결혼을 하긴 했는데, 첫날밤에 아내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 자기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러이러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형식적으로는 결혼을 했지만 부부 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부인도 똑같이 부모 등쌀에 못 이겨서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둘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만 부부 행색을 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딱히 결혼 생활에 흥미가 없고 수행에만 관심이 있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아기가 생길 리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의논을 한 끝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나라에 기부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하고, 등을 맞대고 서서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마하가섭은 이미 붓다가 출현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 길로 죽림정사로 찾아와서 부처님께 법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오라 가섭이여,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10대 제자 중 세 번째 제자였습니다.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는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두 사람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다음 마하가섭이 상수 제자가 되어 교단의 체계를 잡고 경전을 결집하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선(禪)에서는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사람으로 마하가섭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마하가섭은 브라만이자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수행자들에게는 승복도 없었고 딱히 정해진 옷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입던 대로 입고 지내거나 길거리에서 버려진 천을 주워서 몸을 가리고, 머리도 자기가 직접 잘랐습니다. 그렇게 걸식을 하는데 어느 날 부처님이 마하가섭이 입고 있던 옷을 만지며 ‘옷이 참 좋구려’ 이렇게 한 마디를 했습니다. 집에서 입던 걸 그대로 입고 지내던 마하가섭은 그제야 자기 옷을 보게 되었는데, 자기는 비단옷을 입고 있고 부처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서 부처님께 드리고 부처님의 옷을 받아서 자기가 입고, 그 후로 죽을 때까지 음식도 매우 간소하게 먹으며, 옷도 분소의만 입고 지냈다고 합니다.

옷에 빗댄 이야기지만 실은 삶의 습관에 대한 일화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에서는 깨달음을 얻어도, 생활 속 습관은 하루아침에 버리기가 힘듭니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부잣집에서 자란 모습이 많이 드러났을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에게 한 번 지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마하가섭은 더욱 조심하고 아주 검소하게 지냈는데, 오히려 거지가 봐도 가난하다고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상수 제자들이 많이 귀의했습니다. 그러자 왕사성에는 고타마 붓다를 비난하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뺏어갔고,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뺏어갔다. 내일은 누구의 제자를 뺏어갈고?’

이런 노래가 소문처럼 퍼졌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제자들이 걸식을 하러 가도 아무도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걸식을 못한 제자들이 부처님께 하소연을 하자 부처님께서 일주일만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그런 유언비어를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라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바른 길을 가르치신다. 바른 길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

제자들은 부처님이 일러준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바른 길을 듣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말은 오히려 따르지 않는 사람이 바보라는 뜻이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정말로 소문이 잠잠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부처님 초기에 그만큼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켰고, 동시에 저항도 있었다는 걸 알려줍니다. 이런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 이곳 왕사성입니다.”

법문을 마치고 경전 독송을 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앉은 그 자리에서 도시락으로 조용히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다음 순례할 장소는 영축산, 칠엽굴, 날란다(Nālandā) 대학입니다. 세 곳 다 한꺼번에 오백 명이 입장하면 복잡하기 때문에 세 팀으로 나누어 순례를 했습니다. 스님은 칠엽굴로 가서 세 팀을 차례로 안내했습니다.

첫 팀이 칠엽굴에 도착하자 스님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은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화장을 한 후 그 유골을 나누어 여덟 군데에 탑을 쌓는 것으로 부처님의 일생이 마감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 모두가 아쉬워하고 있는 그때 한 젊은 수행자가 ‘이제 잔소리하는 영감도 없고,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겠다!’ 하고 경망스럽게 얘기를 했나 봅니다. 그때 장로인 마하가섭이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습니다.

‘이거 큰일 나겠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다고 사칭하는 무리가 횡행해도 증명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가 대중에게 제안합니다.

‘부처님이 살아계셨을 때 하신 법문과 실천 덕목인 계율을 모아서 부처님의 법을 결집하고 법 아닌 것은 정리합시다.’

모든 대중이 동의하고 경전 결집을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경전 결집에 누가 참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너나없이 결집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인원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인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이 참여한다는 규칙을 정해놓고 보니 대략 5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백나한’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하마터면 경전 결집에 참여하지 못할 뻔한 아난존자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25년간 시봉했는데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어요. 부처님을 시봉하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부처님과 수많은 얘기를 나눈 사람이지만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후대에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전 결집을 하려면 아난존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난존자는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하면서 항상 부처님 옆에 붙어있었으니까요. 대중도 아난존자가 필요했고, 아난존자도 경전을 결집하는 일에 꼭 참여해야 했지만 정해놓은 규칙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7일간 용맹정진을 해서 결집을 시작하기 하루 전에 깨달음을 얻어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는 장소로 이 산을 선택해서 올라왔습니다. 대중이 모여서 오랜 시간 동안 결집을 하려면 먹을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경전 결집 소식을 들은 이 나라 왕인 아자타사투 왕이 경전을 결집하는 3개월간 음식을 제공하기로 하고, 오백아라한은 3개월간 외부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경전 결집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경전이 만들어졌을까요?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 아난존자였기 때문에 경은 아난존자가 초안을 내고, 오백아라한이 아난존자가 낸 초안에 동의를 하는 방식으로 경전을 결집했습니다. 동의를 한다고 하면 넘어가고, 빠진 내용이 있으면 추가하고, 사실과 다른 내용은 수정하거나 빼는 방식으로 결집했습니다. 500명이 모두 동의를 해야 한 페이지가 완성이 되었어요. 검증 절차를 굉장히 꼼꼼히 거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게송(偈頌)으로 외웠습니다.

지금도 인도 사람들은 금방 가사에 음을 넣어서 노래를 부르잖아요. 우리나라 판소리와 흡사합니다. 인도는 이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어요. 어떤 좋은 구절이 있으면 음을 붙여서 노래를 만듭니다. 가사를 모르는 우리가 들으면 항상 똑같은 곡조예요. 게송이란 부처님의 말씀에 약간의 음을 넣어서 외우는 것을 말합니다. 외워야 하니까 내용을 축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글처럼 내용이 너무 길면 외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律)은 누가 초안을 제출했을까요? 지계(持戒) 제일인 우팔리 존자입니다. 우팔리는 석가족의 이발사 출신으로 천민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십 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분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순수하게 부처님이 하라고 하는 그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보통은 크게 와닿는 부분은 그대로 행하지만, 어떤 작은 것들은 그냥 알아서 처리하기도 하는데, 우팔리 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잘 받들어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우팔리 존자가 계율의 지침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실천하였기에 초안을 우팔리 존자가 내게 하고, 그에 대해 대중이 동의를 해서 결집을 했습니다.

이곳은 제1 결집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우리가 읽는 경(經)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칠엽굴입니다.”

스님의 말씀이 마치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었습니다. 첫 팀이 떠나고 약 한 시간 뒤에 두 팀이 동시에 칠엽굴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칠엽굴에서 이루어졌던 제1 결집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칠엽굴 안내를 마치고 스님은 먼저 숙소로 이동해서 저녁 공양을 한 후 업무를 보고 휴식했습니다.

내일은 최초로 여성 출가를 허용했던 도시 바이샬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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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그분께서는 바른 길을 가르치신다. 바른 길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

제자들은 부처님이 일러준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바른 길을 듣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말은 오히려 따르지 않는 사람이 바보라는 뜻이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정말로 소문이 잠잠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2024-03-25 21:06:40

바람

라즈기르! 가장역사적인 곳이군요…우리 순례단도 여법합니다.

2024-01-31 06:16:11

도종

스님 감사합니다 ㅎㅎ

2024-01-30 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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