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01.26. 인도성지순례 6일째, 바이샬리
“망막 질환으로 실명하게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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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바이샬리로 가서 진신사리탑을 친견하고 원후봉밀터를 순례했습니다.

새벽 4시, 숙소에 불이 하나 둘 켜졌습니다. 순례단은 재바르게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4시 30분에 바이샬리로 향해 출발했습니다. 쌩쌩 달리던 버스가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오늘은 인도 최대 국경일인 인도 공화국 정부 수립일이었습니다. 도로 곳곳에서 차량을 통제하는 데다 대형 교통사고까지 나서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늦게 바이샬리에 도착했습니다. 4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6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도착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오늘 일정에 차질이 생겼으니 신속하게 움직여주세요 숙소에 짐은 내리지 말고 도시락만 가지고 내려서 공양하고 바로 진신사리탑터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도 순례단과 함께 숙소 입구 계단에서 도시락으로 공양을 하고 바로 진신사리탑터로 걸어갔습니다.

곧 순례단도 도착했습니다. 진신사리탑터를 향해 삼배를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성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이샬리는 아주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유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곳 바이샬리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출가가 이루어졌습니다.

바이샬리, 여성의 출가가 처음 이루어진 도시

부처님이 성도 후 6년이 지나 카필라성을 방문하셨는데, 그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깨달음을 얻고 출가했습니다. 여성들 중에도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시 여성이 출가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도 후 20년이 지났을 때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 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7일 후에 돌아가셨고,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양모였는데 부처님 외에도 ‘난다’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아들이자 마하파자파티의 손자인 라훌라도 출가를 해서 직계 가족 중 남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도 전통에서는 직계 가족 중에 남자가 없으면 지위도 다른 사람에게 물려질 뿐만 아니라 재산도 잃게 됩니다. 여자에게는 지위 상속권이나 재산 상속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자 마하파자파티 부인도 출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부인인 야소다라 공주를 비롯해서 출가를 희망한 여성들이 5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된 숫자일 수 있지만 그만큼 석가족의 젊은이들 중에 출가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는데, 남자들이 모두 없어지니까 그만큼 여성들도 누군가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 부처님께 출가를 청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승낙하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승낙을 안 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 부처님이 석가족을 다시 방문한 일이 있었고, 그때 다시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그때도 승낙을 안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이곳 바이샬리로 떠나셨어요. 그러자 500명의 여인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머리도 자르고, 바이샬리까지 따라왔습니다. 거의 맨발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먼 길을 떠났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거예요. 오면서 먹을 건 어떻게 해결하고 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여인들은 바이샬리에 도착해서 부처님께 다시 출가를 청했습니다. 세 번을 청하면 보통 부처님께서는 다 들어주시는데 이번에도 거절을 하셨습니다. 머리도 깎고 먼 길을 따라와서 출가를 청했는데도 거절을 하시니까 여성들의 낙담이 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난다가 ‘부처님께 제가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고는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여성은 부처님의 법을 만나 수행 정진을 해도 해탈하지 못합니까?’

‘해탈할 수 있다.’

대답을 들은 아난다가 그럼 왜 밖에 있는 여인들에게 출가를 허락하지 않느냐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마야 부인이 돌아가신 후로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부처님을 얼마나 정성껏 돌봤는지를 말하면서 ‘저렇게 간곡하게 원하는데 청을 들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네 말이 맞다’라고 하시며 출가를 허락하는 대신 여덟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신분이 종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살았지 자신의 독자적인 신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출가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나 어머니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갖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니까 사회적으로 굉장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안하신 여덟 가지 조건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비구니가 비구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조건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자유인이 되어 수행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곳 바이샬리에서 최초로 여성 출가가 이루어졌습니다.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를 어렵게 승낙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인도에서 여성이 출가 수행자가 된다는 것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출가 수행자가 되면 거의 아무것도 입지 않고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혼자서 정진을 해야 하는데, 당시 인도에서 여성이 그런 수행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여성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소속이 되어 있어야 했고, 소속이 없는 여성은 아무나 잡아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출가를 한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여성의 출가가 허용된 뒤 여성 출가자들이 숲 속에서 정진을 하다가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나마 이곳 바이샬리가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가를 허락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허락을 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자발적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이미 자유인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난다가 제안을 해서 부처님이 허락을 하셨다는 내용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후대에 여성 출가 제도를 없애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처음에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난다가 간곡하게 요청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없애도 괜찮다고 정당화했을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아난다가 청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명분을 만들기 위해 아난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 역경을 뒤로하고 여성이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곳이 이곳 바이샬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류 역사에서 이곳을 여성 해방의 성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비구니 스님들에게도 바이샬리에 비구니 절을 하나 지어서 여기서 여성들이 계를 받고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보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해방 운동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옆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구가 나서서 이런 운동을 하기에는 조금 모순된 점이 있어요.

이번 순례에 태국에서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오셨는데, 태국에서는 아직 비구니가 법적으로 인정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분들은 굉장한 분들입니다. 인정이 안 되는데도 그냥 비구니로 수행하며 살아가시고 계세요. 대신 사회에서는 엄청난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순례단은 태국에서 온 비구니 스님 두 분에게 격려의 박수를 크게 보냈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비구니 제도가 처음 시작된 곳도 바이샬리이고, 부처님께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신 곳도 바이샬리이고, 부처님이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하신 곳도 바이샬리이고, 부처님이 ‘법등명 자등명 법귀의 자귀의’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신 곳도 바이샬리이고,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제2결집을 한 곳도 바이샬리입니다. 어쩌면 불교사에서 바이샬리만큼 소중한 곳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샬리는 멸망한 후로 이곳에서 이렇다 할 왕국이 새로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완전히 시골 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 유적지도 제대로 발굴되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의 유골을 넣어서 쌓은 근본탑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곳이 소중한 이유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관련이 깊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여러 부족들이 부처님의 유골을 서로 가져가려고 하다가 여덟 등분해서 나누어 갖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당시 유골을 청한 부족들이 각기 8개의 탑을 세웠습니다. 훗날 아쇼카왕이 그 사리탑에서 사리를 조금씩 꺼내서 기념탑을 쌓는 데마다 사리를 넣었습니다. 처음 세워진 8개의 탑을 ‘원형탑’ 또는 ‘근본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이 근본탑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중 3개가 발견되었는데, 묘하게도 석가족이 세운 사리탑과 꼴리족이 세운 사리탑 그리고 이곳 바이샬리에 있는 사리탑입니다. 꼴리족은 부처님의 외가입니다. 마야 부인, 마하파자파티 부인, 야소다라 공주가 모두 꼴리족 출신입니다. 나머지 다섯 개의 사리탑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이 유적지가 바리샬리의 리차비족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져와서 세운 탑 터입니다. 탑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발굴 작업에 의해서 기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다른 기념탑들은 굽타 시대에 증축을 해서 크게 남아 있는데, 이곳은 아쇼카왕 때 세운 후로 증축이 없었기 때문에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탑터의 지하에서 사리 용기가 나왔고, 그 유물은 현재 파트나(Patna)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탑터 설명을 마치고 다 함께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산란했던 마음이 한결 고요해집니다. 눈을 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 보입니다.

진신사리탑을 바라보며 다 함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순례단의 예불소리가 진신사리탑터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진신사리탑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다음은 동물도 부처님을 따르고 존경했다는 일화가 있는 성지 원후봉밀터(猿猴奉蜜)로 갔습니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서 머무실 때, 제자들과 함께 걸식을 했는데 원숭이가 부처님의 발우에 꿀을 가득히 채워 부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순례단도 발우에 꿀 공양을 받고 기념탑을 돌아 원후봉밀터에 입장했습니다.




태국에서 온 담마까말라(dhammakamala) 비구니 스님의 염불 소리에 맞추어 테라밧다식으로 공양 예불을 올렸습니다.

발우에 든 식빵 한 조각이 꿀맛이었습니다.

스님도 순례단과 함께 꿀 공양을 마치고 물로 발우를 닦아 먹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원후봉밀터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올린 사건은 이곳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기가 힘들죠. 그래서 이것은 부처님이 행하신 어떤 하나의 기적에 대한 상징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곳에 있는 불상 중에는 발우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바이샬리를 상징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부처님이 이곳 바이샬리에 머무실 때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열반하시던 그 마지막 해예요. 그 가뭄으로 오백 명의 대중이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가뭄이 들었는데 많은 대중이 한 마을에 머물면 음식을 구하기가 힘들었겠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을 흩어서 한 마을에 한 명씩만 가도록 했습니다. 또는 친척이나 친구 등 아는 사람들에게 가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흉년이 들었더라도 한 마을에 한 명 정도는 걸식을 할 수 있으니까요.

부처님은 벨루바나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가셔서 시봉 하던 아난다와 함께 마지막 안거를 보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마을에 걸식을 가셨지만 주민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드릴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말먹이로 쓰는 밀 겨를 얻어 드신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쌀겨죠. 그만큼 가뭄이 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그때 팔십의 고령이셨고 열악한 기후와 음식 때문인지 병이 나셔서 아난다가 보기에 거의 돌아가실 정도로 위독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아! 내가 이제 목숨이 다 되었구나!’ 하고 자각하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안거 중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더라도 흩어진 대중을 다시 모으기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딱 집중시켜서 수명을 3개월 정도 연장하는 유수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아난존자는 혼자 걱정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장례 문제나 다른 문제 등을 걱정한 거죠.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면 뭔가 유훈을 남기실 것이다. 아무 얘기도 없으시니, 열반에는 드시지 않을 것이다’ 하며 안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안거의 끝무렵이 되자 부처님은 건강을 약간 회복하셨고 아난존자는 안심했다고 합니다. 안거가 끝나자 부처님은 대중들을 한 곳에 모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 그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다른 사람을 등불로 삼지 말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 아닌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우리는 대부분 남에게 의지하며 삽니다. 여러분들도 주로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 또는 돈이나 지위 같은 것에 많이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죠? 저한테도 ‘스님, 오래 사세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제가 오래 살아야 여러분들이 고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물어볼 수 있으니까요. (웃음) 물론 인사로 하는 말씀인 건 알지만 우리는 이렇게 늘 무언가를 의지하며 삽니다. 그래서 평소 의지하던 분이 돌아가시거나 예전과 태도가 변하면 실망하거나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설법을 하셨음에도 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법보다 돈을 더 좋아합니다. 또 명예나 지위를 더 추구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라고 설법을 하신 뒤에 ‘앞으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 하고 열반 선언을 하십니다. 또 경전에는 어느 날 부처님께서 탁발하고 돌아오시며 고개를 돌려 바이샬리 시내를 보셨는데, 마치 늙은 코끼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듯이 돌아보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천천히 고개를 돌리셨다는 표현인데, 연로하셔서 동작이 많이 느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바이샬리를 돌아보시며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대중과 같이 바이샬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이샬리 사람들은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일 것이라고 예감했던지 돌아가지 않고 계속 부처님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라로 가려면 간타키강을 건너야 합니다.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간타키강을 건넌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강변에서 절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에게 발우를 물에 띄워 보내며 징표로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이샬리 박물관에 가시면 강물에 발우가 하나 떠내려가는 모습이 묘사된 유물들이 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다 함께 노래 ‘행복의 나라’를 부른 후 원후봉밀터 순례를 마쳤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숙소는 인터넷 연결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릭샤를 타고 인터넷이 잘 되는 호텔로 갔습니다. 다행히 방송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 시간으로 오후 4시, 한국 시간으로 저녁 7시 30분에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5천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인도 비하르 주 바이샬리에 도착해서 오백여 명의 대중과 함께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서 인도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보여준 후 곧바로 즉문즉설을 이어나갔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중 한 명은 망막 질환으로 실명을 하게 될 것 같다며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망막 질환으로 실명하게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살아가죠?

“저는 망막 질환으로 4년 전부터 왼쪽 눈이 안 보이게 됐습니다. 그래도 오른쪽 눈으로는 볼 수 있으니 크게 충격받지 않고 적응하여 일도 하고 여행도 다니며 즐겁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10년 전 수술했던 오른쪽 눈에도 질환이 재발했습니다. 수술 후 망막은 붙었지만 이번에는 각막에 문제가 생겨 수술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30년 남짓 살았는데 망막 수술만 여섯 번 했습니다. 아무리 고쳐 쓴다고 해도 언젠가는 오른쪽 눈도 안 보이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안 보이는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낫습니다. 사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헤쳐나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오감 중에 눈이 제일 중요하죠. 벌레의 경우는 감촉이 중요합니다. 벌레는 기어가다가 뭔가에 부딪쳐야 방향을 틀잖아요. 그런데 벌레보다 조금 더 진화를 한 물고기는 맛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먼 태평양에 가서 살다가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옵니다. 동물들은 후각과 청각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시각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의 90퍼센트를 시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감각기관이 있는데도 시각이 워낙 강하다 보니까 다른 감각 작용이 덜 중요하게 느껴지죠.

우리가 보통 ‘안다’ 하고 말할 때도 같은 의미로 ‘본다’ 하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냄새 맡고 알고, 맛을 보고 알고, 감촉해서 아는 것인데, 그중에서 아는 것과 보는 것을 같다고 하잖아요. 안다는 말이 곧 본다는 말이 될 정도로 시각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정견’이라는 말도 바르게 안다는 뜻이 되죠. 그래서 시각에 장애가 생기게 되면 다른 장애보다 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많은 한계가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자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눈이 안 보이면 불편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알지 못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각 장애가 생기면 대신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집니다. 청각이나 촉각이 예민해지면 지팡이를 짚어 가면서 손으로 느껴지는 촉각으로도 물체를 식별하게 되고, 청각으로도 계단인지 평지인지 구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지압사들 중에는 시각 장애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손의 감각이 굉장히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눈이 안 보이면 다른 신체기관으로 감각이 이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은 맞지만 시각이 안 보인다고 못 사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보일 때에 비해서 불편한 건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두 눈이 없다고 못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인생에 있어서 행복과 불행이 따로 없습니다. 두 손 모두 쓰다가 한 손을 못 쓰게 되면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손을 못 쓰다가 한 손을 쓰게 되면 행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행복과 불행은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질문자가 지금 한쪽 눈이라도 보이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설령 나중에 두 눈이 다 안 보인다 하더라도 옛날에는 보이기라도 했던 것이 다행인 거예요. 그래서 비록 안 보이지만 ‘어떤 색깔이다’, ‘어떤 모양이다’ 하고 말해주면 옛날에 봤었던 경험을 토대로 감이라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감도 잡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지면 굉장히 불행해진 것 같지만, 처음부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한때 잘 살아본 경험이 있는 게 낫잖아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현재를 더 비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눈이 잘 보일 때와 비교하면 앞으로의 인생이 매우 불편할 것이라고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못 사는 건 아니에요, 좀 불편할 뿐이죠.

앞으로 과학이 자꾸 발달하면 인공 눈이 개발될 겁니다. 인공 귀도 생길 수 있고, 여러 가지 신체기관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수가 있어요. 요즘은 인공 지능도 개발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인공 눈 개발도 예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불편한 것이야 말해 뭐 하겠어요. 그러나 ‘그럴 바에야 죽는 게 낫다’ 하는 생각은 좀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10억이 있었는데 주식을 해서 다 날리고 1억만 남게 되었다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천만 원이 있었는데 1억을 갖게 된 사람은 부자가 됐다고 기뻐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볼 것들을 많이 봤으니까 이제 안 봐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시각 장애인은 밥은 스스로 먹을 수가 있잖아요. 음식의 맛도 느낄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가 있고, 음악도 들을 수가 있잖아요. 만약 맛을 못 느끼거나, 냄새를 못 맡거나, 소리를 못 듣는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첫째,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둘째, 앞으로 살다 보면 인공 눈이 나와서 보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저도 눈이 좀 안 보여서 얼마 전에 수술을 했거든요. 눈에서 검은 반점이 수천 개가 보여요. 마치 때가 많이 낀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질문자는 ‘그래도 스님은 보이잖아요’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그런데 저 역시 옛날에 잘 보일 때와 비교하기 때문에 불편한 겁니다. 그러니 항상 과거와 비교하지 마세요. 지금 한쪽 눈이라도 보이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앞으로 두 눈이 다 안 보이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잖아요. 게다가 기술이 자꾸 발전하고 있고요.”

“나머지 한쪽 눈도 수술을 많이 해서 잘 안 보이는 상태입니다. 인공 눈도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직은 먼 미래에 개발이 될 것 같아요. “

”그러면 질문자를 냉동 인간으로 만들어서 한 50년 후에 인공 눈을 달아 줄까요? (웃음) 그렇게 되면 질문자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을 텐데, 그때 혼자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저 같으면 안 보여도 지금 아는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게 낫겠어요. 불편한 것은 맞아요. 그러나 못 살 정도는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지금 하고 있는 취미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있고, 냄새도 맡을 수가 있고, 음악도 들을 수가 있잖아요. 헬렌켈러는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고 말도 못 했어도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보다 불편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못 살 정도는 아니에요. 남은 인생은 눈 감고 살아보는 것도 한 번 연습해 봐요. 자식이 죽고도 사는데, 저 같으면 눈이 안 보여도 사는 게 낫겠어요. 저는 차라리 말을 못 하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말을 못 하면 마치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거든요. 저는 눈이 안 보여도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은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눈으로 하는 일이 많습니다. 눈이 안 보이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남은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원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벌레가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다람쥐 한 마리가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생은 원래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사는 것입니다.

눈이 보일 때까지 보다가, 눈이 안 보이면 귀로 들으면서 살고, 귀도 안 들리면 손으로 만져가면서 살고, 그렇게 살다 보면 일부러 안 죽어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죽어요.”

“돈을 벌고 살아야 되는데, 어떡하죠?”

“장애인이 되면 정부에서 다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걱정을 안 해도 돼요. 옛날에는 가족이 생계를 책임져 주었지만, 지금은 정부에서 다 지원을 해줍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아직 젊으니까 걱정하는 것은 이해가 돼요. 그래도 살아야지 어떻게 할 거예요.”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 감사하게 잘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않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아쉽고, 친구와 헤어져도 아쉽고, 재물을 잃어도 아쉽고, 건강을 잃어도 아쉽잖아요. 아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아쉽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돌아가셔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부부가 헤어져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자식이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발이 하나 없어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눈이 안 보여도 나는 살아야 해요. 이런 이유로 못 살겠다고 생을 마감한다면 그것은 정신 질환에 속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눈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리던 것을 조금이라도 잃는 것을 못 참는 극단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보이는 데까지 보고, 안 보이면 또 안 보이는 대로 살아간다는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온라인 세상이 좋기는 좋네요.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여러분과 대화를 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직 인도는 인터넷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청할 때 화면이 어둡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을 겁니다.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마친 후 스님은 숙소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6시 30분에는 순례단과 함께 왕궁터로 갔습니다. 벌써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스님의 안내로 모두 왕궁터에 안전하게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불빛을 모두 끄세요. 그래야 저 달이 잘 보여요.”

모두 불을 끄고 하늘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었습니다.

“이곳은 과거 릿챠비족의 왕궁이 있었던 왕궁터입니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노래 부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무변심 법사님 먼저 노래 한 곡 불러주세요.”

스님의 요청에 무변심 법사님이 고즈넉한 목소리로 노래 ‘두레박’을 불러주었습니다. 이어서 순례단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리랑을 부르는 이도 있고, 민요를 부르는 이도 있고, 신나는 트로트를 부르는 이도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함께 나와 춤을 추고, 외국인 참가자들은 옛 팝송을 불러주었습니다.

저마다 노래 솜씨를 뽐내는 가운데 음치인 사람도 자발적으로 나와서 한 곡을 불렀습니다. 모든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래 ‘사랑으로’를 다 함께 부르고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좋은 공간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노래를 부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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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우리는 이렇게 늘 무언가를 의지하며 삽니다. 그래서 평소 의지하던 분이 돌아가시거나 예전과 태도가 변하면 실망하거나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2024-03-25 21:39:51

보리왕

인도 현지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도반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이 다시금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그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4-02-29 09:00:37

오정숙

스님의 명쾌하신 말씀 고맙습니다.

2024-02-07 08: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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