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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2023년 법륜 스님의 해외 순회강연 중 두 번째 강연이 독일 뒤셀도르프(Düsseldorf)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 20분에 따뜻한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습니다.
아침 7시 20분에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출발했습니다.
기차가 5분 연착되고 탑승구가 바뀌었지만 다행히 기차를 타기 전에 확인이 되어서 무사히 기차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오전 8시 15분에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한 기차는 1시간 45분이 지나 10시에 뒤셀도르프 역에 도착했습니다.
두이스부르크(Duisburg)에 사는 정토회원 최순진 님이 마중을 나와서 스님 일행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오늘 숙소인 최순진 님 댁에 도착한 후 삼배로 인사를 하고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짐을 풀고 휴식을 한 후 오후 1시 40분에 강연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장소는 게하르트 하웁트만 재단(Gerhart Hauptmann Haus)입니다.
주말이어서 다른 도시보다 강연을 이른 시간에 잡았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부터 절반 이상의 좌석이 차 있었습니다.
스님은 일찍 온 참석자들을 비롯하여 봉사자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4년 만의 방문이라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후 3시 정각에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과 함께 뒤셀도르프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무대 앞에 모습을 내비치자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스님은 며칠 전 부탄을 방문하여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고 온 근황을 나누면서 기후 위기 시대에 적게 소비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어서 두 시간 동안 일곱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외국에 나와서 살다 보니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게 될 것 같아 우울해진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병이 있으면 치료를 해야 되겠죠. 만약에 병이 없다면 치료할 일이 없겠죠. 질문자가 지금 고민하는 것이 고민할 만한 일이라면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찾아봐야 하지만, 고민할 일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아무런 할 일도 없겠죠.
예를 들어, 비둘기, 펭귄, 타조, 세 마리가 있다고 합시다. 펭귄과 비둘기가 아무리 잘 달려도 타조만큼 못 달립니다. 그렇다고 비둘기와 펭귄은 열등한 존재입니까? 펭귄과 타조가 아무리 잘 날아도 비둘기만큼 잘 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타조와 펭귄이 열등한 존재입니까? 타조와 비둘기가 아무리 헤엄을 잘 쳐도 펭귄만큼 잘 칠 수는 없겠죠. 그렇다고 타조와 비둘기는 열등한 존재입니까?”
“열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누가 나보다 잘 달린다고, 수학을 잘한다고, 기억력이 좋다고 해서 내가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을 할까요? 이 세상에는 열등한 존재도 없고, 우월한 존재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헤엄치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펭귄이 일등을 하게 되고, 비둘기와 타조는 꼴등을 하게 되어있는 거예요. 나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펭귄과 타조는 꼴등이 돼요. 달리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펭귄과 비둘기가 꼴등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런 기준이 몇 개쯤 있을까요? 수천, 수만 개가 있습니다.
학교 교육의 문제는 그중에 한 서너 개만 기준으로 잡아서 줄을 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국어, 수학, 영어, 세 가지 과목만 선택해서 줄을 쫙 세운 후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를 평가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가 사회에서는 잘 살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그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물론 사회로 나왔을 때 잘 산다는 기준도 명확하게 말하기가 어렵지만요.
그래서 사실은 열등할 것도 없고, 우월할 것도 없어요. 우주를 기준으로 잡으면 질문자는 티끌 같은 존재가 되고, 원자나 분자를 기준으로 잡으면 질문자는 우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질문자는 티끌 같이 작은 존재도 아니고, 우주 같은 큰 존재도 아니고, 다만 나일 뿐이예요.
하나를 기준으로 잡으면 편견이 됩니다. 우주를 기준으로 잡고 나는 티끌 같은 존재라고 규정하면 하찮은 존재라는 편견이 생기고, 원자를 기준으로 잡으면 나는 우주 같은 위대한 존재라는 편견이 생깁니다. 우리는 양쪽을 같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과 동시에 티끌 같은 존재예요. 이것을 같이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한쪽만 보는 것이 편견입니다.
부모님이 점점 늙는다는 것은 질문자도 늙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질문자가 늙으니까 부모님도 늙을 수밖에 없지요. 내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이 자꾸 생긴다는 이유는 하느님이 내 주위에 재앙을 주어서 그럴까요?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내가 늙어서 그럴까요?”
“내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늙으면 내가 아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세대가 죽고, 형님 세대가 죽고, 친구 중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이유는 주위에 죽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늙으면 주위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지요. 이것은 전생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재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헤엄을 못 친다고 타조는 열등하다고 생각하거나, 달리기를 못 한다고 펭귄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인 겁니다.
부모가 늙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질문자의 도움이 필요하면 가서 도우면 됩니다. 자연생태계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은 종의 유지를 위한 생태 원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늙은 부모를 돌봐주는 것은 선택사항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자연생태계를 한 번 보세요. 늙은 어미를 돌봐주는 동물이 있습니까? 성인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지켜야 하고, 때가 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생명은 돌봐주지 않으면 종이 끊깁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자연의 원리이고,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선택사항입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부모님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하면 가서 돌보면 됩니다. 자기 일이 중요해서 부모를 돌보지 못한다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면 됩니다. 불효라고 생각하면서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불효에 대해서는 매우 자의적인 해석을 하기가 쉬워요. 굳이 불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가진 것을 뺏거나 부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자연 생태계에는 없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살면 이방인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이 독일에 와서 살면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한국 사람이 독일에 와서 살게 되거나, 독일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살게 되면, 그걸 ‘이주민’이라고 하죠. 이주민은 소수이기 때문에 소외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이방인이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이란 원래 없습니다.
질문자가 독일에 왔다는 것 자체가 이방인이 되려고 온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왜 나는 이방인이냐고 묻는다면 진짜 웃기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질문자는 본인이 독일에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이 되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 놓고 ‘왜 나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방인인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이주민이 소수라서 가난과 소외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미래 사회에서는 이주민이 주류가 될 겁니다. 오히려 토착인이 소수인 사회가 곧 다가옵니다. 지금 서울은 이주민이 주류입니다. 서울 토박이라고 해서 이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은 국민 대다수가 이주민이기 때문에 토착인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오히려 소수자인 원주민이 차별을 받죠. 그러니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문제 삼는 것들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마치 자다가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도망을 다니면서 지금 저에게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제가 볼 때는 눈을 뜨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눈을 뜨고 ‘꿈이었네!’ 하면 끝입니다.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깨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러니 빨리 꿈에서 깨세요. (웃음)
물론 지금 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꿈에서 깨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눈이 감길 거예요. 계속 꿈을 꾸는 거죠. 그럴 때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자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류가 되고 싶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독일에서 자꾸 주류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한국말을 하고 싶으면 한국으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교민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한국 사람이 극소수에서 소수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조금씩 더 늘어나게 된다는 뜻이지요. 한류 바람도 불면서 한국인이 점점 주류로 나아가게 될 겁니다.
50년 전에 한국에서 독일로 이민을 오신 간호사 분들은 진짜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독일에서 살면서 외롭다고 하면 그분들이 듣기에는 웃을 일입니다. ‘미쳐도 유분수지’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 당당하게 사세요. 아시겠죠?”
“감사합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일곱 명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강연을 마칠 시간을 훌쩍 넘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고통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통을 승화시키지 못하면 트라우마가 되고, 고통을 승화시키면 고통이야말로 깨달음의 길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재앙을 피하려고 하면 재앙이 큰 흉이 되지만, 재앙을 복인 줄 알고 재앙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재앙이야말로 복입니다. 그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훨씬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고, 세상을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저는 고문도 당해보고, 억울한 일도 당해보고, 왕따도 당해보고, 온갖 경험을 해봤습니다. 저는 나이가 칠십이 되었는데도 주민등록증 빼고는 자격증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승려 사회 안에서도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따를 당하고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왕따를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의식을 갖지 않으면 늘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자유로운 세상에 태어나서 왜 그런 피해의식을 갖고 삽니까? 세상을 버리고 출가까지 해서 왜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합니까? 진리를 향해 출가한 수행승이 왜 제도와 자격증에 얽매이고, 또 무엇 때문에 기득권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까? 이런 관점을 딱 가져야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독일에 왔다고 해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심었던 콩을 독일에 가져와서 심었다고 콩이 팥 되는 것이 아니듯이, 여러분들의 까르마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까르마를 바꿔야 합니다. 즉, 나에 대해서 자각을 해야 합니다.
‘아,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구나’
‘아, 나에게 이런 습관이 있구나’
‘아, 이건 내 손실이구나’
이런 자각만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는 자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요. 그래서 성전에 가서든 어디에 가서든 진실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얘기를 하셨습니다. 붓다는 6년 고행 끝에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붓다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붓다인데 누가 나에게 상처를 줍니까?
여러분들은 늘 전전긍긍하면서 피해의식 속에서 누가 나를 잘 봐주기를 바라거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과거의 계급 질서와 성차별 속에서 형성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교육을 아무리 받고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고 기술을 아무리 습득해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각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스스로 ‘아,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네’ 하고 자각하는 것만이 인간 해방의 유일한 길입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오늘 법륜 스님을 통해서 내가 도움을 얻었다면 그것은 법륜 스님이 준 것이 아닙니다. 법륜 스님과 대화하는 과정에 스스로 자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별일 아니네!’ 하는 자각이 일어나서 여러분들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같이 대화를 해도 자각이 안 일어난 사람은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자유를 주려야 줄 수도 없고, 여러분들의 자유를 뺏으려야 뺏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자각이 일어날 수 있는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그 길을 가고 안 가고는 여러분들이 결정하면 됩니다. 필요하면 제가 안내를 해드릴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루를 살더라도 세상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뒤셀도르프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온 스님은 질문했던 분들을 찾아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독일 정토회의 초창기에 활동했던 거사님은 스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스님을 부둥켜 앉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반가운 마음을 서로 나눈 후 책 사인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사인을 해주며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참석자들이 강연장을 모두 빠져나가고, 스님은 봉사자들과 동그랗게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독일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곳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러 왔습니다. 먼저 각자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작년에 암에 걸려서 즉문즉설 시간에 질문을 했었습니다. 스님이 따끔하게 말씀해 주신 덕분에 정신 차리고 치료 잘 받았고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자원봉사도 하러 왔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온라인으로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시간을 내어 봉사하러 왔습니다.”
다양한 사연으로 자원봉사를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봉사자들을 위해 격려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이 많이 어지럽지만 앞으로 지구 환경은 점점 더 나빠질 것입니다. 국가 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정신질환자는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과거보다 더 고집스러운 지도자들이 등장할 것이고, 사람들도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할 겁니다.
100년 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반성을 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한 덕분에 인류는 지금까지 평화를 유지해 왔습니다. 세계대전 당시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다 죽고 이제 전쟁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만 남았어요. 그래서 ‘까짓것 한번 전쟁해 보지, 뭐’ 하며 극단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갈등이 더 심해질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못 살 정도는 아니에요. 지금 상황은 조선조 말엽이나 2차 세계대전 때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세계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갈등을 조금이라도 완화해서 개인을 행복하게, 세상을 평화롭게, 지구환경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막연히 두려워만 해서는 안 돼요. 코로나도 처음에는 몰라서 방치하다가 나중에는 몰라서 두려워했잖아요. 두려워할 게 아니라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악화되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아니면 좋아지는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일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여러분이 수행정진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정토회가 추구하는 수행과 사회적 실천의 가치는 미래 사회에서 더욱더 중요한 미덕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냥 막연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러한 가치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올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유럽에 와서 그저 돈 좀 벌고 눈치 보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유럽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적극적인 태도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수행하고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도 지금 여러 가지 불안 요인이 있지만 그래도 동남아시아에 가보면 우리가 어릴 때 미국을 동경했던 것 이상으로 한류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정토회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는 활동들은 종교를 넘어서서 여러분들이 좀 더 당당해지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봉사자들은 소감 나누기를 이어 나가고, 스님은 최순진 님 댁으로 돌아와 근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낮 시간에 강연을 한 덕분에 모처럼 유럽의 숲 속을 거닐 수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가 되자 최순진 님이 저녁 식사를 정성껏 준비해 주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며 오늘 강연에 대해 평가하고 내일 일정을 공유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뒤셀도르프를 출발하여 베를린으로 이동한 후 독일 통일의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통일 기행을 한 후 베를린 교민들을 만나 해외 순회 즉문즉설 세 번째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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