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1.30. 인도성지순례 2일째, 수자타아카데미 환영식, 전정각산
“불쌍한 사람들 돕는 게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학교”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6년 동안 고행을 한 전정각산을 순례하는 날입니다.

아직 순례자들이 잠들어있는 새벽 4시, 스님은 전법활동가 법회를 하기 위해 조용히 차를 타고 보드가야 호텔로 향했습니다. 3일 전 새로 개통한 다리로 가자 40분이 걸리던 거리를 20분 만에 도착했습니다.


간단하게 방송 준비를 하고 한국 방송팀과 리허설을 해보았습니다.

현지 시간 오전 6시 30분이 되자 전법활동가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깜깜하던 창밖이 점점 밝아졌습니다. 스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저는 지금 보드가야에 도착했습니다. 어젯밤 11시에 도착했고, 오늘 여러분과 만나려고 4시에 보드가야로 나와 방송을 준비해서 지금 인도 시간으로 새벽 6시 30분에 이렇게 생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순례자가 1250명이다 보니 원래는 천막을 치고 다니면서 순레를 하려고 했는데 어찌어찌해서 천막까지는 안 치고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도 숙소가 부족해서 일부 학교 교실을 빌리느라 돈이 좀 들었습니다. 학교 교실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화장실 지어주는 값이 들었어요. (웃음)

또 교실에 바닥 포장이 안 돼 흙바닥인 채 사용하는 학교가 있어서 교실 바닥도 새로 깔아주었어요. 학교를 리모델링해 준 셈인데, 돈이 들더라도 이건 학교를 도와주는 일이기도 하니까 필요한 공사를 하고 우리가 빌려 쓰는 것으로 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생기는 일들

이렇게 순례를 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벌써부터 중간중간에 많은 일들이 생기네요. 인도에 오려면 출국 전에 코로나 검사를 하고 오라고 해서 검사를 했더니 20여 명이 코로나 양성이 나와서 마지막 단계에서 비행기를 못 타게 됐어요. 도착 당일에 오토바이에 치어 발목을 다쳐서 깁스를 한 사람도 있고, 덥다고 라씨를 연거푸 마셨다가 배탈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나왔습니다. 아무리 주의를 줘도 사람이 많다 보니까 온갖 일이 생깁니다. 공항에 나올 때 비자를 종이로 출력해서 와라, 코로나 검사 결과를 출력해서 와라, 이렇게 상세히 안내를 했는데도 깜빡하고 와서 애를 먹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웃음)

특정한 사람이 문제인 건 아니에요. 항상 사람이 많다 보니 개중 누군가는 물건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플 수도 있고, 다양한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번 성지순례 대중이 1250명이 되다 보니 앞으로도 각종 사고가 빈번하게 생기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온갖 일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상을 여법하게

이런 과정 자체가 순례의 한 부분입니다. 또 이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법하게 해 나가느냐가 관건이에요.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가운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굳이 수행을 안 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사고가 안 생기면 좋지만, 사고가 생기는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잘 살아가는 것, 즉 온갖 예기치 못한 세상 일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상을 여법하게 영위해 나가는 것이 수행이 아닐까 해요.

순례 대중뿐 아니라 스태프 쪽에도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태프 50여 명이 와서 준비를 하는데도 일손이 부족할 정도예요. 규모가 워낙 커서 복잡해진 것도 있고, 또 코로나 때문에 지난 3년간 성지순례를 안 했잖아요. 그랬더니 실무자도 다 감을 잃어버려서 처음에는 실수도 많고, 미리 얘기 나눠둔 것과 달리 실제 현장에서는 소통이 잘 안 되기도 하고 있어요. 이런 일은 평소에 늘 손발을 맞춰야 서로 눈만 껌뻑껌뻑해도 알아서 하게 되는데, 우리가 오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3년이라는 공백이 있다 보니 이런 일이 생깁니다.

그래도 시행착오를 며칠 겪어보면 제자리를 금방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3일이 고비인 것 같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방문 일정을 지나고 나면 대중도 훈련이 되어 감이 잡히고, 스태프들도 손발이 맞아 들어가고, 옛날에 경험했던 감이 다 살아나게 되죠. 이게 인생이지 않을까 합니다. 성지순례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다 이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어서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두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다음 주 이 시간에도 인도 성지순례 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한편 A팀 순례자들은 새벽 기도를 마치고 오전 7시에 수자타 아카데미를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고행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드가야로 걸어갔던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순례 일정입니다. 순례단도 걸어서 보드가야까지 걸어갔습니다.


전법활동가 법회를 마치자마자 스님은 바로 보드가야 정토회 명상센터 부지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걸어온 순례자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명상센터 부지에서 도시락을 꺼내 아침을 먹고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먹는 대중들에게 스님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이곳에 앞으로 명상센터를 지으려고 해요. 여기 와서 살 사람 있어요?”

“네!”

스님은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조마다 찾아가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물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못했어요. 새벽 4시에 나와서 방송을 하고 여기로 바로 왔어요.”

명상센터 입구에 어느새 동네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였습니다.

“혹시 사탕 있어요?”

“안 가져왔습니다. 지금 학교에 연락해서 가져오도록 할게요.”

사탕을 기다리며 스님은 순례자들과 계속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탕이 도착하기 전, 아이들을 일렬로 줄을 세웠습니다.

“사탕을 받고 자기 자리에 잠시 있으세요.”

사탕도 받고 질서도 배우는 시간입니다. 보통 이렇게 사탕을 나누어 줄 때 아이들은 못 받을까봐 서로 앞자리에 서려고 다투고, 받고 나서도 또 앞으로 와서 받으려고 합니다.


스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사탕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작은 사탕 한 알을 입에 물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수자타가 공양한 터로 걸어 나와 이번에는 보드가야 대탑으로 갔습니다. 이틀 뒤 1250여 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기 전 점검을 해보았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해 행사를 담당하는 실무자들과 만나 대탑을 한 바퀴 둘러보며 순례자들의 동선과 자리를 확인했습니다.


티베트에서 기도하러 온 사람들로 대탑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난 다음날 정토회 순례자들도 참배를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쓰레기 줍기를 할까요?”(웃음)

답사를 마치고 나니 11시가 넘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로 돌아와 12시가 다 되어 그제야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치고 자그디스푸르 마을 공터로 나갔습니다.

오후 1시에는 오늘 새벽에 바라나시를 출발한 B팀까지 모두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A팀과 B팀이 모두 수자타 아카데미에 집결하여 두 줄로 나란히 서서 학교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전교생이 교문 앞으로 나와서 1250명의 순례객들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나마스떼!”

흰색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앞에 나와 스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맨 앞에 코끼리를 탄 아이는 스님의 머리 위로 꽃잎을 흩뿌렸습니다. 인도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은 음악으로 순례단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1,250명의 순례단 모두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고, 순례단 모두가 꽃목걸이를 걸고 수자타 아카데미 교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정문 앞에 자리한 전정각사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한 후, 고 설성봉 거사님의 부도탑을 참배했습니다. 고 설성봉 거사님은 한국 JTS의 스텝으로 파견되어서 기술학교를 건축하신 분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가 생기고 나서 무장한 강도 집단으로부터 세 번 습격을 받았는데, 설성봉거사님은 세 번째 습격 때 총격을 받고 이곳에서 사망하셨습니다. 2002년 1월 10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설 거사님의 부도탑을 지나 운동장에 들어서니 따뜻한 짜이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학교의 상급생들은 언제 한국어를 연습했는지 간단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짜이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가지는 사이 운동장에서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들의 환영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순례단을 환영해 주었던 아이들이 신나게 인도 전통악기를 연주했습니다. 3학년 여자 아이들의 댄스 공연에 이어서 중학생 남자아이들의 댄스 공연, 고등학교 남자 학생들의 댄스가 이어졌습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박수가 절로 나왔습니다.




구걸을 하던 아이들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서 이렇게 멋진 공연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정각산 앞에서의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운동장에 집결한 1250명의 순례단이 스님에게 삼배로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전정각산에서의 부처님의 행적과 수자타 아카데미를 이곳에 짓게 된 이유에 대해서 법문을 했습니다.

“둥게스와리 전정각산 수자타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 잘 받으셨습니까?”

“예!”

“이곳에는 불가촉천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 전정각산 주위로 15개가 있습니다. 개중 두 군데는 불가촉천민보다는 조금 계급이 높은 사람들, 즉 양민과 천민의 사이쯤 되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에요. 이처럼 이곳은 전체 주민의 85% 이상이 불가촉천민으로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왜 이 산 주위에는 이렇게 불가촉천민들이 많이 살까요? 방금 학생들을 보니 얼굴이 흑인처럼 많이 검지요? 이곳은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이 대대로 살아온 지역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리안족의 침입을 받고 피압박 민족이 돼서 천민으로 격하된 거죠.

이곳은 부처님 당시에는 가야라고 하는 큰 도시의 외곽에 있는 숲이었어요. 그냥 숲이 아니라 시체를 버리는 숲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양민 이상의 상위 계급은 화장을 합니다. 그러나 천민들은 시체를 쓰레기 버리듯이 그냥 갖다 버려요. 이 산 주변이 그렇게 시체를 갖다 버리는 숲인 시타림(屍陀林)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곳을 좋은 수행처라고 생각하고 여기 오셔서 수행을 하셨습니다.

평지에는 양민들이 살고, 천민들은 그 양민에게 소속돼서 일을 해줍니다. 그러다 보니 천민들은 다 자기의 주인 마을이 따로 있습니다. 가촉천민은 주인 마을에 같이 살면서 일을 해줘요. 집 안에 함께 살면서 애 키우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사람들은 가촉천민입니다. 불가촉천민은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거나 똥을 치거나 돼지를 키우는 것 같은 일을 해요. 이런 사람들은 그 양반집 안에 못 들어옵니다. 접촉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불가촉(不可觸)’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양민 마을에 같이 못 살고 저 멀리 떨어져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요. 우리나라도 옛날에 그랬습니다. 신라 시대에 이런 마을을 부곡(部曲)이나 소(所)라고 불렀어요.

가장 열악한 땅에 세운 학교

시타림이었던 곳이 지금은 불가촉천민 마을이 되었어요. 한 마을은 두르가푸르, 한 마을은 자가디스푸르, 그 주위에 빙 돌아가며 15개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이 두 마을 사이에 얕은 골짜기가 있고 샘물이 있어요.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실 때 여기에서 집중적으로 수행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흔적, 즉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 하는 유영굴(留影窟)이 바로 수자타아카데미 앞에 있습니다. 제가 유영굴에 참배를 왔다가 이 마을의 열악한 상황을 보고 여기에 학교를 짓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성지와 가까운 중요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게 아니라, 이 마을 사람들이 가진 땅 중에도 가장 열악한 땅, 다시 말해 산 쪽에 있고 토질이 메말라서 농사는커녕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는 땅을 마을 사람들에게 기부를 받아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고, 학생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규모가 조금씩 커져서 현재의 모습이 된 거예요.

그 당시에 말만 ‘수행’이라고 하고 형식적인 수행자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나는 진실로 수행자답게 수행하리라’ 이렇게 다짐하고 이곳에 오셔서 극심한 고행을 했습니다. 후대에서는 고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당신은 최선을 다한 수행을 한 거예요.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극심한 고행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그림이나 조각에서 보듯이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 될 때까지 수행을 했습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옷도 입지 않은 채 야생 짐승처럼 극심한 고행을 했어요. 같이 수행하던 친구 다섯 명이 존경할 만큼이었다고 해요. 자기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며 친구 사이인데도 존경할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이 이곳에서 하신 고행은 부처님이 여기까지 오면서 배격하셨던 고행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부처님이 오면서 본 고행주의자들의 고행은 일부러 고통을 주는 것이었어요. 자기 몸을 가시나 못으로 찌르거나, 불을 피워놓고 맨발로 밟거나, 물속에 들어가거나,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이렇게 일부러 육체에 고통을 주고 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고행을 한 게 아니라 욕구, 즉 욕망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먹는 욕망, 자는 욕망, 편하려고 하는 욕망이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이런 욕망을 모두 배격한 끝에 결국은 목숨을 마치기 직전의 경지에 이르게 됐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했나 하면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 있다 보니 아이들이 부처님을 두고 시체인지 아닌지 내기를 할 정도였어요. 인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인근 천민들이 치는 양이 가끔 이 숲 속으로 들어오는 일은 있었습니다. 양은 시체를 버린 숲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그냥 풀만 찾아다니잖아요. 양을 찾으러 숲 속에 들어왔던 아이들이 시신들을 보고, 또 어떤 아이들은 버린 시신의 패물이나 옷가지를 주워가려고 오기도 했어요. 이렇게 가끔 숲에 들어오던 아이들이 부처님을 보고 ‘저 사람은 죽었다. 고타마는 죽었다’, ‘아니, 살았어’ 이렇게 자기들끼리 내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흙덩이를 던져보고, 꼼짝도 안 하니까 나무 막대기로 때려보고, 그래도 꼼짝을 안 하니까 나무 막대기를 귓구멍에다가 막 쑤셔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장난을 해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집중적인 고행을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정신만 약간 잃어버리면 그대로 죽어버릴 정도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번뇌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마왕의 유혹’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모든 게 다 살아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죽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해라. 그러면 너의 나라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인도를 통일해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욕망이 다시 올라오기도 했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모두를 참아서 이겨냅니다. 이 부분을 경전에서는 마왕과 싸워서 이긴다고 묘사했어요. ‘내가 너한테 굴복할 것 같으냐!’ 하면서 단호한 자세로 내면의 욕망에 맞서 싸워 이겼다는 뜻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새로운 길

그러나 이렇게 각오하고 결심하느라 긴장이 되다 보니까 마음의 평화가 제대로 오지 않았어요. 어릴 때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선 하나가 죽어야 할까?’ 하고 탐구하는 명상을 할 때보다 마음이 더 고요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 수행을 돌아보고 성찰해 보았더니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따라갔고, 출가 이후에는 욕망과 싸우는, 즉 욕망을 억제하고 억압하는 쪽에 에너지를 쏟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둘은 정반대의 길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았더니 욕망의 대응 방식이 달랐을 뿐 결국은 모두 욕망에 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발견하시고 욕망에 대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셨어요. 그냥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볼 뿐 거기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런 제3의 길을 발견하신 부처님은 그냥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은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되어 이 산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산이라고는 해도 우리나라 산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작은 산이죠. 이 시타림 숲에서 여러분들이 일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신 거예요.

그리고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 덕분에 건강을 회복해서 이곳에 다시 와서 정진할 것인지 강을 건너가서 수행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었어요. 그때 둥게스와리 산신이 여기 와서 수행을 하라고 권유했기에 산신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어서 그림자를 남겨두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림자를 남겨두었다는 말은 흔적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부처님이 수행하셨던 동굴을 부처님의 그림자가 남은 곳이라고 해서 ‘유영굴(留影窟)’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 마을에서 강을 건너 지금의 보드가야(Bodh Gaya, 부다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앉았어요. 목동이 베어둔 풀을 조금 얻어서 자리에 깔고, 그렇게 49일간 용맹정진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보드가야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성지가 되었어요.

이곳에서는 주로 정진할 때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경전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끊임없이 싸워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좋게 말하면 아주 대결정심(大決定心)으로 하는 모습이고, 좀 나쁘게 말하면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것은 비록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하더라도 6년 고행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불쌍한 사람들 돕는 게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학교

수자타의 후예들이 오늘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부처님 법을 만나 삶이 달라졌으니 부처님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수자타의 공양을 드신 부처님이 살아나셔서 성도하셨으니 부처님의 후예인 우리가 그들에게 그 은혜를 수억 배로 갚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마음으로 수자타 아카데미를 지은 겁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고 지은 게 아니라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학교를 지은 거예요.

그러니 내일 만인공양 행사를 할 때 30년 만일결사를 회향하는 마음을 담아서 둥게스와리 마을 주민 1만 명에게 여러분이 극진한 마음으로 공양을 대접해 드리면 좋겠어요. 불쌍한 사람에게 동냥을 주듯이 하지 말고, 극진하게 손님으로 초대해서 도시락도 드리고 쌀도 드리고 공연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그분들이 이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뿌듯하겠어요? 구걸하던 아이들이 여느 도시 아이들 못지않은 모습으로 공부도 곧잘 하고 멋진 공연을 펼치는 것을 보면 그분들도 자랑스러울 겁니다. 집에서는 그런 모습을 못 보여주잖아요. 여기 와서 보면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나 성장했구나’ 하고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래서 내일 마을 사람들 1만 명을 수자타 아카데미에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이곳에서 다 함께 먹고 즐기는 잔치를 해야 하는데 공간이 협소해요. 예전에 3천 명 정도까지는 여기서 식사를 대접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1만 명이 식사할 자리까지는 도저히 안 나와서 내일은 도시락으로 공양을 하게 됐습니다.”

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실제 경전 속에서는 이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며 경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순례객 모두 다 함께 전정각산을 마주 보고 앉아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수행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아서 그때의 정황을 머릿속으로도 아주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서 극도의 고행을 행했던 부처님의 구도의 정열을 되새겨보며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 앉은 이 자리에서도 부처님께서 거닐었거나 정진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스님으로부터 전정각산의 전체적인 조망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순례객들은 차량별로 전정각산에 올라 유영굴을 참배하고, 샘터와 명상터를 둘러보았습니다.


해질 무렵이어서 노을이 아주 멋있었습니다. 산 아래에는 수자타 아카데미가 한눈에 보이고, 산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JTS가 세운 유치원도 보였습니다.

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은 전정각산 위에 부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금방 다 식었고, 순례객들은 기념사진을 찍거나 둥게스와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저녁 6시에는 법사단 전체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법사님들은 차량별로 대중을 인솔하는 소임을 맡고 있는데, 스님은 며칠 동안 순례를 하면서 불편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의견들을 수렴했습니다.

시골 오지를 다니다 보니 버스 운전기사들이 숙소를 못 찾는 문제, 현지 물을 마시거나 라시를 사 먹어서 배탈이 난 사람들이 생기는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야기한 후 각각의 해결 방안에 대해 스님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6시 30분부터 쁘락보디홀에서 저녁 예불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이번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줄 버스 운전기사들을 스님이 직접 소개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운전기사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순례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버스 운전기사들입니다. 인도는 교통법규가 잘 지켜지는 나라가 아니고 자동차가 전부 자기들 마음대로 다니는 곳입니다. 서두르면 사고 위험이 높고, 안전하게 가려고 하면 한없이 일정이 늦어지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적절하게 조율을 하면서 가야 합니다.”

운전기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건네자 순례객들은 다시 한번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인도JTS에서 근무했던 활동가들을 스님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역대 사무국장을 지낸 분들, 마을개발 등 각 파트 책임자로 일했던 분들, 행자대학원 교육과정으로 1년 간 근무했던 분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오자 순례객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법사단, 차장, 조장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 의료인정토회에서 환자들을 돌봐주는 소임을 맡고 온 분들도 소개했습니다. 1250명 모두가 비로소 하나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순례를 다니면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준 후 저녁 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1250명 모두가 스태프가 되어서 봉사하는 날입니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마을 주민들을 대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줄을 나란히 서서 주민들이 쌀을 받아서 나갈 때 공손하게 인사도 해주시고요.”

법회가 끝나자마자 스님과 스태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후 숙소가 흩어져 있다 보니 전체 회의를 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내일 만인공양 프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질서 정연하게 잘할 수 있을지, 버스 운전기사들이 숙소를 못 찾아갈 경우 어떻게 대응을 할지, 가야산에 올라갈 때 버스 32대를 어떻게 주차할지, 면밀하게 점검을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둥게스와리 마을 주민 1만 명을 수자타 아카데미에 초대하여 개교 29주년 기념식을 한 후 참석한 모두에게 쌀과 도시락을 나눠주는 만인 공양을 하고, 저녁에는 인도JTS와 수자타아카데미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96

0/200

드림하이

“나마스떼!”

2023-11-12 21:25:25

박효진

지나고보면 별일 아닌게 맞습니다.. 벌써 아마득하네요.. 값어치 있는 추억이 생긴 거는 기억합니다.. 그날엔 오르지 못했던 전정각산, 사진으로 잘 보았습니다..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3-02-24 14:07:14

무진월

은혜갚기 위해 지은 학교~
부처님의가르침이 한국에서 다시 인도로 전법하는 모습을 봅니다~

2023-02-23 00:36:14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