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1.05. 천일결사 기도, 경전대학즉문즉설, 청년역사기행
“사람들이 저를 만만하게 봐서 고민이에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종송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예불,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하고,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후 국가에서 지정한 애도 기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번 참사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우선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주일 동안 가능하면 침묵하고 지켜보면서 애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번 참사를 정쟁(政爭)으로 몰고 가지 말고 모두가 힘을 합해서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상을 규명하거나, 책임자를 문책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예방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나라를 보다 안전한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은 돌아가신 영가들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빌고,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천도의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간소하지만 우리 정토행자들의 마음을 담아 돌아가신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오며 유족들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법문이 끝나고 스님과 정토행자들은 마음을 모아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오전 8시부터는 결사행자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2차 만일결사 방향에 대해 지부별로 한 공청회 결과를 공유하고 결사행자들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결사행자 회의가 끝나고 10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가을에 입학한 경전대학 학생들과 한 달에 한 번씩 그동안 배운 내용을 점검해 보는 즉문즉설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금강경 강의를 모두 들었습니다. 금강경 수업 중에 잘 이해되지 않았던 점, 현실에 적용할 때 어려운 점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12시가 넘어 즉문즉설을 마치고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 후 바로 경주 흥무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흥무공원에는 전국에서 2030 청년 3백여 명이 1박 2일간 스님과 역사기행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과 내일 청년들은 경주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그 속에서 현재 남북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통일의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스님의 설명을 듣습니다.

1시가 되어 흥무공원에 스님이 모습을 드러내자 청년들은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참가자 소개를 했습니다. 불교대학, 경전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청년과 지인, 진행자와 특별히 김제동 씨가 참석했습니다.


반갑게 서로를 환영한 후 스님은 오늘 역사기행의 취지와 목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왜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은 연기법을 배웠죠. 연기법이란 모든 것이 서로 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관성은 공간적으로는 상호 간의 연관으로 드러나고, 시간적으로는 원인과 결과로 드러납니다. 요즘 사회학, 국제관계학에서 배우는 건 공간적 연관성이라고 볼 수 있고, 역사학에서 배우는 건 시간적 연관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남북문제, 주변국과 관계 등의 다양한 문제들도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다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오늘날의 결과가 빚어지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어떤 사실이 있었다는 지식을 배우는 차원이 아니에요. 현재와 미래에 닥친 문제들을 풀어나갈 해결책을 모색하거나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 배우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살펴보면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푸는 게 좋을지를 배울 수 있어요.

가령, 삼국시대를 살펴봅시다. 신라와 백제가 싸웠죠.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볼 때는 백제 사람인 계백 장군과 신라 사람인 김유신 장군은 서로 원수 관계입니다. 신라 사람들에게는 계백 장군이 원수고, 백제 사람들에게는 김유신 장군이 원수니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이 옳고 한 사람이 그른 게 아니잖아요. 훌륭한 두 사람이 각자 나라를 대표하는 장수로 싸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김유신 장군묘에 가서도 인사를 하고, 계백 장군묘에 가서도 인사를 합니다.

6.25 전쟁 때 남한 사람을 죽인 북한 열사의 무덤에 가서 남한 사람이 참배한다면 아마 남한에서 난리가 날 거예요.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서 국립묘지에 참배한다면 북한에서 난리가 나겠죠. 그러나 통일된 이후의 먼 미래에서 바라보면, 그때의 국민들은 국립묘지에도 참배하고, 북한의 열사 무덤에도 참배를 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런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해결하지 못할 일도 한 발 떨어져서 역사적으로 보면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과거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그런 과거를 배우는 목적은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미래의 비전도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일까요? 당대의 시대적 과제는 그 시대를 살 때는 오히려 잘 안 보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연애하고, 취직하는 게 중요하지, 시대적 과제가 중요하게 와닿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몇십 년 지나서 되돌아보면 ‘아, 그 시대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구나’ 이렇게 알 수 있어요. 전쟁을 겪고 나면 ‘아, 그때 평화를 지키는 게 가장 중요했구나’ 하고 뒤늦게 알죠. 기후 위기가 전 세계를 덮쳐 인류가 공멸의 위기에 처하고 나면 그때 ‘아, 그때 학교 공부나 취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기후 위기를 막는 게 가장 중요했구나’ 이렇게 평가합니다. 늘 지나 놓고 보면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거예요. 막상 이 시대를 사는 동안에는 그게 잘 안 보이죠. 그 시대를 살면서도 그런 시대적 과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바로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잘하고 있는 일인지 파악하고자 하면 ‘이대로 몇십 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되돌아본다면 이것이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라고 생각해봐야 해요. 그러면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어요. 시대적 과제를 조금이라도 알고자 하면,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도 이렇게 질문해봐야 합니다.

‘당시 어떤 관점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좋았을까? 만약 지금이라면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또 지금 그와 같은 일은 없는지도 살펴서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이걸 하기 위해 역사 공부를 하는 겁니다.”

설명을 마치고 김유신 장군묘로 함께 걸어갔습니다. 묘 옆으로 청년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스님이 김유신 장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

“이곳은 김유신 장군묘입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인 문무대왕, 그리고 김유신 장군 이렇게 세 사람을 신라 삼국통일의 영웅이라고 합니다. 통일전에도 이 세 사람을 모시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왕이 아닌데도 후대에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왕호는 흥무왕입니다. 사실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당시 인재를 양성하고, 외교관계도 다 형성했습니다. 선덕여왕을 보필했던 사람들이 2~30년 활동을 한 다음 나이가 5~60대가 되었을 때 삼국통일이 이뤄졌어요. 그래서 돌이켜보면 삼국통일을 발원한 사람은 선덕여왕이고,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들이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 그리고 문무대왕입니다. 당시 군사적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외교적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가 중요했는데 정치외교 부분은 김춘추가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사실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을 만났고, 만약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면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갖는 것으로 당태종과 구두 약속을 했지만, 오히려 당나라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8년 동안 나당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 출신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정치적인 힘은 부족했지만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던 태종 무열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정치와 군사가 결합하면서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요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정치와 군사의 결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당시 나라의 안정에는 도움이 됐습니다. 군사력이 부족하면 권력에 대한 도전이 생기는데, 그런 권력의 흔들림을 군사적으로 안정시키고 신라가 통일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런 군사적 배경이 된 사람이 김유신 장군입니다.

이렇게 신라는 내정을 안정시키고 외교에도 눈을 떴습니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는 국력은 신라보다 센 편이었는데 국제 정세에 어두웠어요. 중국이 남북조 시대를 지나 첫 통일을 맞이하면서 어마어마한 제국으로 거듭났는데, 고구려는 중국이 분열됐을 때 동북아의 왕자 역할을 한 기억만 가지고 중국을 깔보고 협력을 안 하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신라는 반대로 외교 정책을 잘 펼쳤죠. 그리고 그 후로 이어지는 동북아의 패권 경쟁에서 당나라가 패권을 잡자, 당나라와 외교를 다져놓은 신라도 덩달아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통일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중간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태종 무열왕릉에 가서 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김유신 장군묘를 내려와 계단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넓은 계단이 청년들로 꽉 찼습니다.

다음 장소는 무열왕릉입니다. 커다란 왕릉 앞에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스님은 무열왕 김춘추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변방의 나라, 신라는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선덕여왕 때는 신라의 40여 개 성이 백제한테 점령당할 만큼 신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라를 기준으로 보면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고, 남동쪽에는 왜(일본)가 있으니까 신라는 고립된 위치였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몽골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당시 선덕여왕의 신라가 위기를 헤쳐가는 걸 보면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어요. 당시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해서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형성하고, 당나라도 당시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나당 연합이었어요. 백제가 의자왕 때 국력이 기울이지고, 고구려도 연개소문 때 내분이 일어나면서, 어지러운 틈을 타서 나당연합군이 먼저 백제를 침공하고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게 됩니다.

국외적인 통일을 이루려면 우선 국내 통합이 이뤄져야 합니다. 당시 신라의 내정은 김춘추의 정치와 김유신의 군사가 결합하면서 안정되었어요. 소위 반란이나 왕위쟁탈전이 없었습니다. 군권을 김유신이 잡고 있었으니까요. 국내 통합을 이룬 다음에 잘한 것이 외교입니다. 신라 혼자서는 힘이 약하니까 국제 정세를 읽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잘 풀어서 결국 동쪽에 치우친 작은 신라가 민족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신라는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결국 가야와의 통합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중국이 통일되는 역사적 변환기에 외교 정책을 잘 펼쳐서 역사의 주류로 등장한 겁니다. 지금 돌아보면 신라가 늘 주류였던 것 같지만, 역사의 본류에서 신라는 늘 변방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다가 내치와 외교를 잘하면서 우리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한 거예요.

이런 발전의 기초는 선덕여왕 때 닦았습니다. 선덕여왕이 ‘삼한일통’을 염원하며 황룡사 9층 탑을 쌓은 지 30년이 지나지 않아서 통일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삼국을 ‘삼한’이라고 불렀는데, 삼한일통은 삼한이 하나가 되어 고조선의 옛 영광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원(願)을 세우고 황룡사 9층 탑을 세웠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마주하는 혼란만 보면 안 되고, 오히려 혼란 속에서 무엇을 지켜내야 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신라도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결국 전화위복이 되고 통일까지 이뤄낸 거거든요. 신라는 처음에는 통일의 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옆에서 침공을 하니까 못 견디고 ‘계속 침공당할 바에야 그냥 한번 싸워보자’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로는 통일의 주역이 된 겁니다. 그런 통일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바로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입니다.”

설명을 듣고 무열왕릉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푸른 하늘, 곱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청년들의 발걸음이 경쾌했습니다.


무열왕릉을 나와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고 하는 낭산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문무왕의 화장터에 세운 능지탑을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 이동 중에 해진 가사가 찢어졌습니다. 스님은 클립으로 고정한 후 계속 기행을 이어갔습니다.

사천왕사가 있던 터는 지금은 공터이지만 절과 탑을 세웠던 흔적들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을 따라 12명의 유가승이 문두루비법을 행했던 터를 둘러본 후 넓은 대웅전 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님은 사천왕사를 짓게 된 배경을 들려주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은 사찰

“신라가 당나라의 한반도 주둔군을 선제공격해서 괴멸시켰는데, 당나라 황제가 화가 나서 20만 군대를 징집해서 신라 공격을 명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접한 신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한쪽에서는 얼른 항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끝까지 싸워야 된다는 입장으로 양분됐는데, 문무대왕이 끝까지 싸우는 쪽의 편을 들었어요. 그러자 당나라에서는 신라의 왕을 교체하려고 했습니다. 신라왕을 폐위시키고, 김인문을 왕으로 임명하는 사태가 발생한 거예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국군이 주한미군을 공격하자 미국에서 한반도에 직접 20만 대군을 파견하고, 한국의 대통령을 파면시키고 미국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내세운 것과 같은 상황이죠.

이렇게 당나라와 전면적인 전쟁이 벌어지니까 신라에서는 이건 도저히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라는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힘을 빌리고자 했어요. 당시 신통을 부리는 승려들을 ‘유가행을 한다’고 하여 유가파(瑜伽派)라고 불렀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명랑법사였습니다. 명랑법사를 통해 신의 힘을 빌리고자 했는데, 당시 신의 힘을 빌린다는 건 오방신과 팔부신장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도리천과 사대천왕을 합해서 오방신(五方神)이라고 하고, 또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이 팔부신장(八部神將)입니다. 신의 힘을 빌리는 장소는 신라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7개의 성스러운 땅 중 하나인 ‘신유림’에 절을 짓고, 오방신을 모신 다음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주력을 행했습니다. 신유림(神遊林)은 신들이 노는 곳이라는 뜻이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은 주술을 외우는 주력 중 하나예요.

그런데 당나라 군사들이 이미 당나라를 떠나서 신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절을 짓기도 전에 공격이 시작된 거죠. 그래서 얼른 임시로 절을 지었습니다. 대나무를 세우고, 비단으로 절 모양을 만들고, 짚으로 신상을 만들고, 이곳에서 유가행파 12명이 문두루비법을 행했어요.

그래서 이곳을 보면 12 지신을 모셨는지, 아니면 팔부신장과 사대천왕을 합해서 12 신을 모시고 가운데 인드라 신을 모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렇게 문두루비법이라는 주력을 외우자 서해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나서 20만 대군이 수장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니 이 사천왕사는 불교를 홍보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은 절입니다. 이런 절을 호국사찰이라고 합니다.”

사천왕사를 나와 산길을 걸어 선덕여왕릉에 도착했습니다.




선덕여왕릉 옆으로 모여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곳은 선덕여왕릉입니다. 신라 27대 왕이고,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여왕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나라는 신라밖에 없을 겁니다.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공식적으로 여왕이 인정된 기록이 없습니다.

선덕여왕은 가장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길은 ‘삼한의 통일’이라고 봤습니다. 지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어하고 평화협정을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는 건 통일입니다. 신라 당시에 사람들이 그런 원(願)을 세우고 ‘삼한일통’을 발원한 지 삼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통일을 이뤘습니다.

지난 1천 년 동안 우리가 약소국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포부가 작은데, 만약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고 30년 간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만약 중국이 어떠한 이유로 분열이 되거나 힘을 잃는 상황이 되면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중심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건 누군가의 예언이 아니라 요즘 미래학자들은 이렇게들 많이 생각합니다. 일본은 이미 기운이 꺾인 상태입니다. 일본은 규모가 크지만 정치나 사회 시스템 전반적으로 흐름에 기운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정치나 사회 시스템에 활기가 있고, 또 북한이라는 미개발 지역이 있기 때문에 미래 4차 산업혁명을 도입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면 통일된 한국에게는 아주 큰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통일이 되면 잘 살지 못하는 북한과 나눠먹어야 하니까 손실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데, 이건 아주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동북아시아에서 마치 서울 시내에 버려져 있는 빈 땅과 같습니다. 그걸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빠르게 발전해 왔지만 이제 발전 속도가 차츰 더뎌지고 있습니다. 포물선으로 치면 점점 꺾이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계속 꺾이는 추세가 이어질지 아니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떤 계기를 만나서 한 번 더 치고 올라갈지는 누가 점을 치거나 예언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얼마나 희망과 포부를 갖고 사는가에 달려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요즘 기가 많이 꺾인 것 같아요. 그리고 도전하기보다는 현실에 지나치게 안주하려고 해요. 이번에 우리가 이런 기행을 하면서 신라인들도 아주 어려웠지만 그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발돋움해 가는 모습을 보고,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신라는 영토가 큰 것도 아니었고, 인적자원이 풍부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라를 이끌었던 중요한 리더 중 한 분이 선덕여왕입니다. 통일이라는 열매를 거둔 사람은 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이지만, 그런 인력들이 키워지고, 통일이 가능하도록 터전을 닦은 건 선덕여왕 때였습니다. 그때 선덕여왕과 함께 기틀을 다진 사람들이 대부분 30대였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서 나이가 5~60대가 되어서 그 뜻을 이뤘습니다.

첨성대, 영묘사, 황룡사 9층 탑도 선덕여왕 때 지었고, 제가 출가한 분황사도 선덕여왕 때 지은 절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선덕여왕 때 다져놓은 문화재도 많고, 원효대사가 한참 활동하던 때도 선덕여왕 시대입니다.

선덕여왕을 보면서 여성 리더십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의 자질과 능력, 리더십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꼭 서양에 가서만 여성 리더십의 모델을 찾을 일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선덕여왕이라는 훌륭한 모델이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희망과 비전을 꼭 독일에서만 찾아볼 게 아니라 신라와 가야의 통합 과정에서도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꼭 우리 것만 고집하지 말고 남의 것도 참고해야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많은 사례들을 찾아보는 게 필요합니다.”

기가 꺾인 것 같다는 스님의 말에는 청년들을 향한 위로가 담겨있었습니다. 또 선덕여왕의 리더십과 신라인들이 이룬 삼국통일 이야기에는 진한 희망이 담겨있었습니다. 산 주변을 붉게 물들며 지는 해가 청년들의 얼굴을 밝게 비췄습니다. 이외에도 스님은 선덕여왕의 총명한 지혜를 보여주는 세 가지 일화, 무덤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무덤 위로 달이 떴습니다.

“이야, 달 보세요. 달과 무덤과 소나무가 어우러져있네요.”

스님의 지팡이가 향한 곳으로 청년들이 시선이 옮아갔습니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문무왕의 화장터에 세운 능지탑으로 향했습니다. 해가 지자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습니다. 청년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자 스님은 설명을 짧게 끝냈습니다.



능지탑을 돌아 나와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갔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7시 30분부터 강당에 모여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자유롭게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격식을 따지지 말고 편안하게 얘기해주세요.”

미리 질문을 신청한 사람이 스무 명이 넘었습니다. 그중 여섯 명이 질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중 만만해 보여서 고민이라는 질문을 소개해드립니다.

사람들이 저를 만만하게 봐서 고민이에요

“저는 순해 보이고 만만해 보여서 고민입니다. 이런 저의 이미지 때문인지 몇몇 사람들은 제 눈치를 보지 않고 장난을 치거나 편한 대로 행동해서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멋있고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안 맞는 옷을 껴입은 듯 잘 안 됩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생긴 대로 사세요. (모두 웃음)

나를 만만히 보고 함부로 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나를 편안하게 본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입니다. 아까 밥 먹으면서 제동님과 같이 앉아 있는데, 우리 둘이 앉아 있는 옆자리에는 자리가 비었는데도 사람들이 안 와요. 여러분들이 옆에 앉고 싶어도 약간 눈치가 보였겠죠. 그러자 제동님이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거나 하면 선생님 옆 자리에 아이들이 안 앉는 것과 같네요’ 하고 농담을 했어요.

사람들이 불편해하거나 눈치를 보며 예의를 갖추는 게 꼭 좋은 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요즘과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서는 같이 누워 있어도 되는데,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러지 못합니다. 또,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서는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는데,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는 담배도 못 피우고 술도 못 마셔요. 아무래도 아버지한테는 조심하고 어머니한테는 친구처럼 지내는 분위기예요.

얼른 보면 아버지가 더 좋은 것 같죠. 그런데 자식들이 성인이 되면 집에 찾아오는데, 아버지 방에는 들어가서 절만 하고 훈시 조금 듣고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있지 않고 절만 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고는 안방에 와서 어머니 하고는 편안하게 놉니다. 어머니한테는 경어도 잘 안 쓰고, 친구처럼 지내요. 사랑방에 혼자 있는 영감이 보기에는 안방에서는 막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자기는 혼자 방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심심해집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오라는 소리를 안 하니까 슬그머니 안방에 들어가 봅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놀다가 이제 담배도 다 끄고, 술도 치우고 ‘아버지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하고는 노는 것을 멈춥니다. 아버지는 아들, 딸이 재밌게 노는 걸 같이 구경하려고 왔는데, 아버지가 오면 판이 다 깨져요. (모두 웃음) 이제 다시 가지도 못하고 계속 앉아 있기도 그렇고, 그러는 사이에 아들들이 한 명씩 밖으로 나가고 결국 아버지 혼자 안방에 앉아 있게 됩니다. (모두 웃음) 이게 좋은 게 아니에요.

스님도 신도들한테 폼 잡고 그러면 젊을 때는 존경받고 카리스마 있다고 하지만, 늙어서 거동이 불편해지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요. 반면, 친구 같이 지낸 사람은 늙어서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만날 때 편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권위주의적으로 목에 힘을 주면 나중에 외로워집니다. 스스럼없이 지내면 언제나 사람이 함께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좋은 걸 갖다 버리고 나쁜 걸 가지려고 해요? 또 설령 카리스마가 있다고 해도 질문자 성격에 얼마나 카리스마 있게 할 수 있겠어요? 그냥 칼을 하나 쥐어줄까요? (모두 웃음)

옛날에는 그런 카리스마형 리더십을 이야기했지만, 이제 그런 리더십은 갈수록 없어지고 대중과 함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는 게 모범이 됩니다. 꼭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거나 엄격하게 하는 게 모범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가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리더십이 좋습니다.

제가 근래에 본 세계 지도자 중 가장 민주적인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독일 총리 메르켈입니다. 그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아요. 그리고 야당 하고도 싸운 적이 없어요. 입장 차이가 있으면 조율을 하지 싸우지 않습니다. 이웃나라하고도 격렬하게 주장을 하거나 갈등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원칙이 아닌 것에는 아주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용한 리더십을 지녔는데도 10년이 넘게 독일 총리를 했습니다. 그런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요즘 유럽에도 극단주의가 자꾸 득세를 하는데, 메르켈처럼 중재하는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 때문에 메르켈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조금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르켈은 러시아와도 관계를 좋게 유지했고,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입장을 유지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러시아 가스를 도입해서 유럽의 에너지 값을 대폭 낮췄습니다.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대신에 원자력 발전을 점점 감소시켰는데,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고 미국에서도 러시아 가스를 수입하지 못하게 하고, 러시아에서도 기분 나쁘다고 가스 공급을 중단시키면서 유럽 가스값이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가 올랐습니다. 러시아와 관계가 그렇다 보니 독일의 에너지 공급이 안정적이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메르켈이 러시아에 대한 안목이 부족했고, 그동안 원자력 발전을 많이 한 프랑스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쟁 중이라서 일시적으로 이렇게 평가되지만 제가 지난 10년을 봤을 때는 메르켈이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메르켈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지만 ‘나를 따르라’는 카리스마가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가부장적인 권위주의를 닮으려고 해요? 질문자가 가진 장점을 살리는 게 중요한 거예요. 질문자한테 없는 것, 남의 것을 흉내 내려고 하면 피곤해집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연애, 가족, 사회생활, 마음, 역사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 연애는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건가요?
  • 스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성적이 B가 나와도 C, D는 안 맞았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게 맞는 걸까요?
  • 노인 자살예방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저도 우울해져요.
  • 아버지가 가족에게 헌신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시고, 저에게 너무 과한 걸 바라시는 것 같아요.
  • 나중에 출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려면 노후자금이 많이 필요한지. 부모님은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중간에 하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현재 우리나라가 신라처럼 통일이 가능할까요?

즉문즉설을 시작한 지 어느덧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스님은 마이크를 김제동 씨에게 넘기고 거제도로 출발했습니다. 거제도에서 만일결사 회향을 앞두고 지난 20년 동안 필리핀 JTS에서 봉사했던 활동가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세 시간을 달려 12시가 다 되어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이원주 대표님 등 필리핀 JTS 이사진과 필리핀에서 봉사했던 활동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 후 새벽에 다시 경주로 돌아왔습니다. 내일도 아침부터 오후까지 청년들과 역사기행을 하고 주말 명상 회향 법문을 한 후 저녁에는 일요 명상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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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나들이를 몇 번 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맘때
'산림복지종말론' 연구에 삼매경이었습니다.

2013년에 이전 산림청장이
산림복지 시대로 전환되었다고 했는데

저는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산림복지종말론'을 열심히 연구했던 2022년.


스님은 김유신장군묘에 중독되셨군요.


저는 충효동민으로서 다짐했죠.

흥무공원과 김유신장군묘 쪽으로 가지 말자.
중독적인 코스다.

2024-02-19 00:19:51

정순점

다시보아도 스님말씀 한마디마다 감동입니다
어여쁜 청년들의 맑고빛나는 눈을보니 나라의앞길이 희망차보입니다
감사합니다

2024-01-22 06:53:53

김선태

통일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계승 발전 시킬수 있는 젊은 청년들의 이해와 실천이
우리의 미래가 나아가야할 방향인듯 합니다
청년들이여 통일이라는 대망의 꿈을 키우시길

2022-12-10 06: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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