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6.21. 정토불교대학 온라인 졸업수련, 온라인 일요 명상
“수행을 왜 해야 하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코로나19로 인해 정토불교대학 졸업수련이 하루 종일 온라인으로 진행됐습니다. 저녁에는 온라인 명상수련이 생방송으로 열렸습니다.

두북 수련원의 하루 일과는 새벽 예불과 기도를 마치자마자 간단히 참을 먹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선선한 아침에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어제 수확한 감자가 참으로 나왔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호호 불어가며 설탕에 찍어 먹고 나서 밭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은 일 년 중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고 낮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하지(夏至)입니다. 뜨거운 햇살에 이슬을 머금은 구름이 맑은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산 아랫밭으로 갔습니다. 어제 감자를 수확하고 난 아랫밭 반쪽에 고구마가 쑥쑥 자라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고 나니 갑자기 쑥 자랐네요.”

고구마는 줄기에서 작은 뿌리가 나와 고구마로 자랍니다. 땅 위로 뻗어 나온 줄기는 고구마로 자라지 않고 줄기로 뻗어나갑니다. 밖으로 나온 줄기를 땅에 묻어주면 줄기에서 또 뿌리를 내려 고구마가 됩니다. 그래서 땅 위로 자란 줄기를 다시 땅에 묻어주면 고구마 수확량이 2-3배는 늘어난다고 합니다.

스님은 김제동 씨에게 고구마 줄기를 묻는 이유와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고구마 줄기 옆으로 비닐을 뜯고 고구마 줄기를 묻어주면 돼요.”



이랑의 끝에 한 사람씩 자리를 잡고 차례차례 고구마 줄기를 묻어주었습니다.

더 긴 이랑에서 시작한 스님은 어느새 김제동 씨를 앞질렀습니다.


한 줄을 끝내고 다음 줄을 할 때, 스님은 먼저 모종삽으로 비닐에 구멍을 다 뚫고 지나갔습니다. 엉덩이 방석을 빼고 앉을 새도 없이 빠르게 했습니다.

“해보니까 요령이 생기네요.”

그리고 흙으로 고구마 줄기를 착착 덮어주었습니다.

오전에 비닐하우스에 단배추도 솎아주려고 했는데, 고구마 줄기를 다 묻고 나니 8시가 넘었습니다. 9시부터 불교대학 졸업수련 생방송 촬영이 있어서 밭을 내려왔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9시 정각에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작년 가을에 입학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의 졸업 수련을 하루 종일 온라인으로 진행합니다.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방송 음원을 함께 들으며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를 부른 후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아쉬움과 미안함을 전하면서 입재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정토불교대학 졸업예정자 여러분, 지난 9월에 입학해서 벌써 1년 가까이 지나서 졸업할 때가 됐네요. 여러분들의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여러분들을 지도했던 저로서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불교대학 하반기 일정이 효율적으로 관리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번 졸업수련도 문경 정토수련원에 모여서 같이 얘기도 나누고 질문도 받는 시간을 가져야 되는데 시절 인연이 이러다 보니 온라인으로 졸업수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우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로스로 인해 저희들이 졸업 수련을 문경정토수련원에서 못 하는 것보다 10배, 100배, 1,000배 더한 손실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생각하면 아쉽지만 더 큰 손실을 입고 계신 분들을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졸업수련을 함께 하게 된 것은 다행입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관점을 갖고 오늘 수련에 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불교대학을 1년 동안 다니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도반들의 소감을 영상으로 만나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행복해진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늘 부정적이었던 내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화가 났을 때 지켜보는 힘이 생겼습니다.”
“항상 힘들게만 생각했던 육아를 지금은 축복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어서 그동안 공부하면서 들었던 의문점을 해소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70분 간 가졌습니다. 영상 질문 8명, 서면 질문 8명, 총 16명이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8명의 질문에 답을 하고 나니 벌써 70분이 다 지나갔습니다. 점심식사 시간을 가진 후 오후 1시에 다시 생방송을 시작하기로 하고 오전 프로그램을 마쳤습니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오후 프로그램을 시작할 무렵 갑자기 두북 수련원 전체에 인터넷 연결망이 끊겨 버렸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생방송을 시작할 1시가 되어버렸습니다. 행정처에서는 대체 법문을 긴급히 내보내고, 방송팀은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근처에 인터넷 연결이 되는 공간을 빨리 알아봅시다.”

다른 방송 장비들을 그대로 두고, 카메라 한 대와 노트북 한 대만 들고 인터넷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갔습니다.

1시 30분에 작은 방 안에 앉아서 다시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방송팀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가운데, 생방송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양해를 구했습니다.

“방송 시작이 조금 늦었습니다. 저희 두북 수련원에 방송을 시작하기 15분 전에 갑자기 인터넷이 끊어졌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촬영을 포기했다가 학교에서 2km 떨어진 와이파이가 되는 장소에서 다시 장비를 설치해서 방송을 하느라고 20분 늦었습니다. 그래도 ‘안 하는 거보다는 낫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다시 법문을 하겠습니다. 카메라만 한 대 들고 와서 현재 상황에서 영상 질문은 화면에 못 보여드립니다. 제가 대신 질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한 영상 질문 대신 스님이 직접 질문을 읽고 답변을 했습니다. 오전에 이어서 8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수행이 왜 필요한지 물었던 마지막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행이 왜 필요한가요

“저는 저 자신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나를 돌아보기 위함인가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함인가요?”

“나와 타인이 어떻게 분리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이가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컴퓨터 게임만 하는 것을 보면 짜증이 납니다. 남편이 맨날 늦게 들어오면 화가 납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대가 하는 행동을 보고 괴로워합니다. 이 괴로움이 해결되려면 아이는 공부를 잘해야 하고, 남편은 빨리 들어와야 합니다. 즉 밖이 바뀌어야 내가 편안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괴로운 이유는 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 ‘내가 기도하면 남편이 일찍 들어온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은 남편이 일찍 들어오든, 늦게 들어오든, 그건 남편의 일이라고 보는 겁니다. 아이가 공부를 하든, 안 하든, 그건 아이의 일이라고 봅니다. 괴로움은 그걸 내 마음대로 하려는 데서 생기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지금 괴로운 거예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괴롭지 않습니다. 이게 수행이에요.

내가 사회적으로 나쁜 짓 안 하고,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그것과 수행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나는 원래 타인의 인생에 피해를 안 끼치고 살뿐만 아니라 괴로움도 없다’ 이렇다면 수행을 안 해도 됩니다.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거예요. 아무리 사회적인 조건이 좋고,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인기가 있어도 괴로우면 수행을 해야 됩니다.

괴로운 이유는 내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답답한 거예요. 먼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이는 놀고 싶어 할 수 있겠구나’
‘남편의 입장에서는 친구와 만나다 보니 늦어지겠구나’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면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상대 마음이 편안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즉, 나를 위해서 상대를 이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상대에게도 좋아요. 이것이 바로 ‘자리이타’입니다. 나에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좋습니다.

그런데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화내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에게도 나쁘고, 타인에게도 나쁩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합니다. 그러면 남에게는 좋은데 내가 힘들어요.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킨다면 나는 좋은데 남이 괴롭습니다. 이 둘은 지속 가능하지 못해요. 내가 희생되는 일은 오래 할 수가 없습니다. 남이 희생되면 그 사람이 오래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속 가능하려면, 첫째, 나한테 좋아야 돼요. 나한테 좋은 게 상대에게 손해가 된다면, 그건 상대에 의해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다면 지속 가능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이해하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습니다. 상대를 도와주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습니다. 상대를 사랑하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습니다. 이게 이치예요.

수행은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수행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렇게 먼저 관점을 잡아야 됩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도 피해가 안 가는 거예요. 즉 상대에게도 이익이 되는 길입니다.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나는 힘들지만 희생하면서 살아라, 이건 윤리도덕입니다. 희생한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에서 보상을 다 받는다는 것이 종교예요.

그러나 수행은 희생이 아닙니다. 남을 이해하면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니 남을 이해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오계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남을 해치지 말라는 것도 나를 위해서입니다. 남을 해치는 게 10이라면 나에게 돌아오는 과보는 100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자신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과 수행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왜냐하면 수행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을 바로잡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내 마음에 번뇌와 괴로움, 스트레스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럼 수행을 하게 되면 사회적 정의는 외면하게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적 관점을 제대로 갖고 살면, 저절로 타인에게 이득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인터넷 연결이 끊겨서 20분 늦게 법문을 시작했지만, 마치는 시간은 약속한 시간에 마쳤습니다. 다행히 행사 진행에는 차질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닫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방송 준비하는 분들이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다 해놨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끊어져서 여기저기 연락해서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온라인 명상 수련이 있는데, 인터넷 복구가 안 되면 명상도 어느 집에 가서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인터넷이 끊어져서 방송이 안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해 봤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잖아요. 최악의 경우는 방송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못 할 때 못 하더라도 어디든지 여기저기 연락해서 방법을 찾아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장비도 간단하게 들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방송을 하는 거예요.

이럴 때 성질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욕을 한다면, 그 사람은 수행이 안 된 겁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개선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괴롭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니에요. 재빠르게 개선책을 마련하되, 그런 가운데 괴롭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을 불교대학생 여러분, 마무리 잘하시고요. 7월 둘째 주에 졸업식과 수계식 할 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정된 시간에 방송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후에는 지역 정토회 별로 담당 법사님들이 결합하여 자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스님은 인터넷 문제를 해결하느라 식은땀을 흘린 방송팀을 격려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많이 놀랐죠? 그대로 무사히 해결해줘서 고마워요.”

스님은 허리를 숙이며 방송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원고 교정을 한 후 농사일을 하다가 저녁 8시 30분이 되어 스님은 다시 가사와 장삼을 수했습니다. 명상을 하며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벌써 온라인 명상을 시작한 지 11주째가 되었습니다.

비좁은 방에 카메라, 모니터, 노트북을 설치하고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늘 하던 장소가 아닌 좁은 방에서 방송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후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실시간 채팅창에는 방송팀을 응원하는 댓글도 올라왔습니다.

“두북에 인터넷이 빨리 복구되기를 바랍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인사말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지난주에 올라온 외국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질문 한 개에 대해서만 답변했습니다. 명상을 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지, 아니면 생각을 멈춰야 하는 것인지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오늘도 미국에 있는 제이슨이 전화통화 방식으로 영어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명상을 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나요?

“명상을 하는 목적이 좋은 아이디어를 얻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인가요?
Is the purpose of meditation trying to solve a problem by coming up with a good idea or is it to achieve a suspension of thought?”

“근본 목적은 둘 다 아닙니다. 명상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인도말인 빠알리어로는 ‘닙빠나’,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 경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이 한 곳에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일어나는 현상에 또렷이 깨어 뚜렷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유지될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곧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에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자기 몸에 집중해서 몸에 깨어 있어라.

몸에 깨어 있는 방법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호흡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동작에 깨어 있는 겁니다. 셋째,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넷째, 이 몸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 즉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연습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인 호흡 알아차림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몸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면서 몸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둘째, 감각과 느낌에 깨어 있어라.
셋째, 마음과 감정에 깨어 있어라.
넷째, 모든 법의 이치에 깨어 있으라.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알아차림의 수행법인 ‘사념처관’입니다. 자신의 호흡에 깨어있기는 전체 과정 중에서 그 첫발을 내딛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방 안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고 합시다. 이때 악몽을 꾸게 되면 그는 괴로워할 것입니다.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두려워도 하고, 슬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깨어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잠꼬대 하는구나’ 이렇게 보입니다. 잠을 자는 사람 주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백 명이 잠을 잔다고 할 때 똑같은 조건에서 잠을 자더라도 사람들은 각각 다른 꿈을 꿀 것입니다. 각각 그 꿈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호소할 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꿈의 종류에 관계없이 그냥 깨우기만 하면 됩니다. 꿈이라는 것은 정신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가상현실 같은 겁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착각하지만,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편안히 앉아 있는 30분간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명상하면서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거나 또는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또 걱정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 문제도 없어요. 이것은 다 생각이 지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상을 할 때는 부처님을 생각해도 번뇌에 불과합니다. 생각을 멈추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명상의 목적은 아닙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된 괴로움의 원인 중의 하나인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또 이렇게 물을 거예요.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멈춥니까?’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이 쉬어지는 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더라도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끌려간다는 겁니다.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났을 때 그런 가운데서도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조금 있다가 커피 생각이 사라집니다. 다시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또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끌려갑니다. 커피 생각이 떠오르면 같이 커피를 마시던 친구를 떠올리고, 그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이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호흡을 놓치게 돼요. 이것은 명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 상태는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각자의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어요.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다만 주어진 과제인 호흡을 알아차리는 데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면 자꾸 생각에 끌려가게 돼요. 그럴 때마다 ‘아! 놓쳤구나' 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마음을 콧구멍 끝에 딱 집중을 하고, 숨이 들어갈 때 들어가는 줄 알고, 숨이 나올 때 나오는 줄 압니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든,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것과 관계없이 다만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알아차립니다. 아무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다만 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질문자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명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번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의미부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려고 할 때는 안 일어나다가 이렇게 무념의 상태로 가면 부수입으로 저절로 좋은 아이디어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한 설명까지 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다음에 시간이 되면 설명을 하겠습니다.”

답변을 마치고 스님은 명상을 하는 방법을 천천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명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눈을 편안하게 감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딱 집중합니다.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려 봅니다.
Straighten your posture and close your eyes comfortably, both hands in front of you, focus your mind on the tip of your nose and check your breath.”

죽비 소리와 함께 30분 동안의 명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탁! 탁! 탁!

들숨과 날숨이 오가는 고요 적정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죽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탁! 탁! 탁!

스님은 채팅창에 소감을 올려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해 보니 어땠습니까? 해 본 소감이 있으면 채팅창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How was the experience? Please share your experience and your thoughts on the chat window.”

오늘도 수백 개의 소감이 소나기가 내리듯 채팅창에 쏟아졌습니다. 스님은 눈에 보이는 것만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습니다.

‘호흡에 집중이 잘 되고 마음이 매우 편안했습니다’
‘I was able to focus on my breath well and my mind was full of peace’

‘집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It's very difficult to focus.'

‘다리가 저려요’
‘My legs ache’

‘명상하는 중에 졸기도 하고, 아이도 재우고 왔습니다’
‘I dozed off during the meditation at times.’

‘생각이 내가 아니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I realized my thoughts are not me.’

‘호흡에 깨어 있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I really tried to make an effort to be mindful of my breath.’

마지막에 호흡에 깨어있으려고 애를 썼다는 소감에 대해서는 짧게 조언을 해주면서 명상을 마쳤습니다.
'

“애를 쓰면 안 돼요. 다만 할 뿐이지 애를 쓴다는 것은 긴장이 될 뿐만 아니라 의지가 담기기 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잘하려고도 하지 말고, 긴장도 하지 말고, 애쓰지도 말라고 여러 번 강조하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새로 올라온 질문이 있으면 다음 주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소를 옮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예정된 방송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내일은 오전에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를 마지막으로 할 예정입니다. 내일까지 생방송 강의를 한 후 이후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강의는 기존에 준비한 대로 교과가 운영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두북특별위원회 회의가 계속 이어집니다.

전체댓글 64

0/200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온라인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12-08 01:20:53

한상연

노력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그냥 머무른다는것이
쉽지 않습니다..ㅠㅠ

2020-10-13 10:12:57

전미리

내 마음상태와 몸 상태부터 점검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 순간을 깨우치는게 쉽지 않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20-06-30 15:15:18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