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6.10 온라인 수행 법회, 화엄사 초청법회
“역량을 키우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수행 법회를 온라인 생방송으로 한 후 화엄사 초청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해와 달이 공존하는 이른 아침에 스님은 농사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음식물 찌꺼기로 만든 거름에 물기가 많아서 한 번 뒤집어주었습니다.

오늘은 수련원 옆 컨테이너 주변을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법사님들은 컨테이너 뒤쪽 땅을 평탄화 하는 작업을 하고 스님은 다른 편 컨테이너 바로 옆에 무성하게 자란 가시나무의 가지를 쳐주었습니다.




스님은 가지치기를 하다가 엄나무 새싹을 뽑아서 나무가 없는 곳에 옮겨 심었습니다.

컨테이너 한쪽 화단이 무너져있었습니다. 스님은 비스듬히 파묻힌 벽돌을 캐내고 자리를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반대쪽에도 벽돌로 된 화단이 이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나다니기에 불편해 보였습니다. 벽돌을 다 빼내고 컨테이너 입구 가까이로 단을 만들었습니다.

부서진 벽돌과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들이 모두 공사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부서진 벽돌 틈에 작은 돌들을 이리저리 열두 번도 넘게 끼웠다 뺏다 하면서 틈을 메웠습니다.

나머지 벽돌도 가져와 하나하나 꼭 맞춰주었습니다.


컨테이너 입구가 높아서 콘크리트 벽돌을 쌓아 계단도 만들었습니다.


직접 계단을 밟고 올라가 문을 여닫아 보았습니다.

다른 쪽에 법사님들이 쌓은 계단도 밟아보았습니다. 돌 모양이 다 제각각이라 계단을 만들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내일 다시 합시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씻은 후 9시에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저수지 뽕나무에서 딴 오디와 앵두가 후식으로 나왔습니다.


10시부터는 수행 법회 생방송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밝게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건넸습니다.

“날씨가 많이 덥죠? 저희는 이곳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 보니까 아침 8시만 돼도 벌써 땀이 줄줄 흘러서 일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덥습니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하는데, 정말로 비가 오면 좋겠어요. 지금 가뭄이 아주 심해서 노지에 심은 감자는 알이 제대로 굵어지기도 전에 잎이 다 말라죽을 정도예요.”

방음이 따로 되어 있지 않은 학교 교실에서 촬영을 하다 보니 창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법복에 땀이 배어 나왔지만, 스님은 밝은 표정으로 법문을 이어갔습니다.

정토회 활동가들은 지난주부터 정일사(정토를 일구는 사람들)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정진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진정한 자유

"지난주부터 2주간의 정일사 정진을 시작했는데, 앞으로 1주일이 남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매일 300배 절을 하려니 힘들 거예요. 힘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절 한다고 뭐가 좋아? 절 한다고 해서 뭐가 되나?’

이렇게 자꾸 회의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하기 싫은 마음을 극복하는 겁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마음은 오래된 습관, 즉 까르마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이렇게 좋고 싫음에 매여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싫어도 기꺼이 해버릴 줄 알아야 해요. 손실이 난다면 하고 싶어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밖으로부터 오는 자유가 아니라 자기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정진을 하는 겁니다.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평지를 달릴 때는 기어를 3단으로 해서 달리다가 약간 오르막이면 기어를 낮추고, 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때는 1단으로 가야 합니다. 이렇게 길이 경사진 정도에 따라 기어를 조절해야 합니다. 기어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할 수 있으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고, 자동차의 성능과 길의 상태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성능의 한계치도 시험해봐야 해요.

내 역량을 미리 파악해 두기

조절과 연습이 필요한 건 주행 속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달릴 때 규정 속도가 시속 100km라고 하면 연습을 할 때는 시속 120km나 140km로도 한 번 달려보는 거예요. 이 차의 성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알면 오르막을 올라갈 때 기어를 적절하게 넣어서 조절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차에 대해서 잘 모르면, 기어를 조절하면 더 올라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힘이 부족해서 안 되나 보다’ 하고 멈춰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역할과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자기가 잘 알아야 해요. 평소 역량이 100이라고 한다면, 늘 100의 역량에 맞추어서만 일해 온 사람은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할 수 있는데도 ‘아이고, 나는 못 한다’ 이렇게 움츠러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테스트를 해봐야 합니다.

지금 내 역량이 평소에 100이라면 120도 한번 가동해보고, 140도 한번 도전해보세요. 그러다가 몸살이 나서 아프다면 조금 무리한 거예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고 나니까 ‘어, 되네!’ 이렇게 넘어갈 때가 있고, 너무 과하게 해서 무리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자동차 기어를 한 단계 당기면 올라갈 수 있는데도 포기해 버리는 건 자기 역량이 얼마인지를 몰라서 역량 발휘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예요. 반면에 차의 역량을 넘겨서 무리하게 올라가려다가 결국 멈추거나 미끄러지는 건 역량을 몰라서 역량 초과를 한 경우입니다. 이렇게 욕심으로 일하면 몸이 고장 나게 됩니다.

정진을 하는 기간은 자기 몸과 마음을 테스트해보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몰라요. 하루에 300배도 해보고, 하루에 500배도 해보고, 하루에 1000배도 해보고, 3000배도 해보고, 3일간 연 달아서 만 배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절하는 회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아무 이상이 없는 경험을 하고 나면 몸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하나?’ 이렇게 움츠러드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몸의 성능에 비해 너무 무리해서 일하게 되면 병이 나거나 부서지는 등 고장이 생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내가 따로 운동을 해서 힘을 키우지 않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무리겠다’ 이렇게 알아야 해요.

내 역량에 맞게 조절하기

이처럼 몸을 알아야 몸에 맞게 조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일을 할 때 조금 무리가 돼도 두려워함이 없고, 거꾸로 일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일정하게 조절하다가, 일시적으로 필요하다면 약간 무리하게 쓸 수도 있고, 한계에 가까워지면 조금 쉬면서 회복하고요. 이렇게 내 몸을 적절하게 쓸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알아야 운영을 잘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기 싫으면 안 해야 하고, 하고 싶으면 꼭 해야 한다는 것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싫어도 해버리는 연습과 좋아도 멈추는 연습을 자꾸 하게 되면 점점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욕망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싫으면 무조건 하고, 좋으면 무조건 안 한다면 고행 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고행 주의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것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나면 그 뒤로는 조절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물론 좋을 때 해도 되면 하고, 싫을 때 안 해도 되면 안 해도 돼요.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이걸 하면 손실이다’ 할 경우에는 딱 멈출 줄 알아야 하고, 아무리 싫어도 ‘이건 하는 게 이익이다’ 할 경우에는 딱 할 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정진 기간에는 이런 연습을 해나가는 거예요.

역량을 키우는 방법

내 역량을 좀 키우고 싶다면 약간 무리한 일을 받아서 한 번 해봐야 해요. 그러면 죽을 것처럼 굉장히 힘듭니다. 그러다가 정말 지치거나 다치면 그건 정말 무리였던 겁니다. 그러나 약간 훈련이나 연습이 돼서 극복을 하게 되면 내 역량도 함께 커지는 거예요. 그걸 도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도전을 하면서 테스트를 해봐야 합니다. 그것이 정진입니다.

‘힘들다’, ‘죽겠다’, ‘바쁜데 뭘 이런 것까지 하라고 시키느냐’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건 군대 훈련처럼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일 뿐 자기 것이 안 됩니다. 어떤 원리를 머리로 알기만 하면 지식이 되고, 그걸 몸과 마음으로 경험을 해서 체득하게 되면 지혜가 돼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절을 300배 한다면 회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300배 절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테스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싫은 마음에 내가 사로잡히느냐, 그것을 극복하느냐’
‘몸은 힘들지만 거기서 멈추느냐, 극복하느냐’
‘어느 정도까지가 극복의 대상이냐’

이런 것을 절을 하면서 테스트해보는 겁니다. 저도 옛날에는 더위를 힘들어했는데, 인도에 가서 47도까지 경험해보니까 지금처럼 35도 정도는 좀 덥긴 하지만 ‘더워 죽겠다’ 이렇게 느낄 정도는 아닙니다. 예전에는 추위를 많이 타서 추위도 겁냈는데, 몽골에 가서 영하 33도까지 경험해보니까 한국의 겨울은 춥긴 해도 예전처럼 ‘추워 죽겠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어졌어요.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습을 자꾸 하면 힘든 건 누구나 다 싫지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능히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진을 하는 거예요. 조금 힘든 건 저도 이해합니다. 평소에 일상생활하기도 힘든데 거기에다가 플러스알파를 하라고 하니까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정진 기간에 플러스알파까지 해내다가 정진 기간이 딱 끝나면 일상이 굉장히 수월해집니다. 체력을 단련하는 사람들은 발에다가 모래주머니를 차고 뜁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오랜 기간 그렇게 연습한 후 모래주머니를 탁 벗으면 날아갈 듯이 몸이 가볍습니다.

제가 요즘은 건강이 안 좋아서 그리 빠르게 다니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산에 가면 남들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다들 산에 오르면 힘들다고 하는데 제가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어릴 때 지게를 지고 산에 다녔기 때문이에요. 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도 산에 다녔으니 맨몸으로 다니는 게 뭐가 문제겠어요?

온갖 경험을 한 사람일수록 장애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진을 하는 거예요. 정진은 절을 몇 배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유로워지게 되면 여러분의 삶에 훨씬 더 여유가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정진을 하는 거예요.”

이어서 스님은 어제 전국 대의원 간담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공유하고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영상 질문과 서면 질문을 미리 받아두었습니다.

“지루하지 않도록 영상 질문하나 보고, 서면 질문 하나 읽고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온라인 법회도 이렇게 매주 발전하고 있어요.”

정회원들은 수행과 활동을 하면서 생긴 어려움을 내어놓았습니다.

  • 정일사 정진 기간에 삼백 배를 하다 보니 처음에 정한 실천과제 외에도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가지 과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욕심일까요?
  • 9-3차 천일결사에 입재하고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3년 기도를 하면 업식이 바뀐다고 하셨지만 저는 점점 더 꾀가 나고 게을러집니다. 이렇게라도 수행의 끈을 잡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 저는 피곤하면 간질 발작이 일어납니다. 그렇다 보니 몸을 핑계로 물러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 화가 났을 때, 화를 알아차려도 바로 통제가 안 돼서 사람들과 분위기가 어색해져요.
  • 저는 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이 아닙니다. 앞으로 정토회 활동에서 사람을 챙기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 같은데,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챙겨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 활동을 하다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 때문인지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험담과 험담이 아닌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 정토회 활동과 회사일이 겹쳐서 활동을 함께하지 못할 때 도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는데 어떤 마음으로 활동을 해야 할까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한 후 법문을 마쳤습니다. 명상을 한 후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는 화엄사에서 법회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대중은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곧바로 차를 타고 구례 화엄사로 향했습니다. 화엄사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몸과 마음이 지친 대중들에게 즉문즉설을 통해 행복의 진정한 의미와 마음 치유의 메시지를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두북 수련원에서 온라인 강의만 해오던 스님도 오랜만에 대중을 만나러 갔습니다.

두북 수련원을 출발한 지 2시간이 지나 차 안에서 김밥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두북 수련원에 머물 때는 계속 농사일을 하거나 온라인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휴식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장거리 이동을 한 덕분에 스님은 차 안에서 눈을 잠시 붙일 수 있었습니다.

화엄사에 도착한 후 먼저 대웅전을 참배했습니다.


화엄사 주지인 덕문 스님과 차담을 나누다가 오후 3시에 맞춰 법회가 열리는 경내 화엄원 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체온 측정을 한 후 방명록을 기재해야 강당으로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스님들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우리말 반야심경을 봉독 한 후 주지 스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마음이 힘든 분들이 많은데, 법륜 스님의 좋은 법문 잘 새겨 들어서 위안을 얻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쁜 와중에 강의 요청에 응해주신 법륜 스님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박수)

이어서 화엄사 스님들과 참가 대중이 법을 청하는 삼배를 했습니다.

스님은 준비된 법상에 앉아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2월 중순 이래 이렇게 많은 대중 앞에서 얘기를 해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요즘은 온라인으로 소통하다 보니 매일 카메라만 보면서 얘기하고 있어요. (웃음)

즉문즉답과 즉문즉설은 차이가 있습니다. 즉문즉답이 어떤 지식적인 답을 묻고 답하는 것이라면, 즉문즉설은 지식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마음의 얘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화, 짜증, 미움, 원망이 있거나,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근심이나 걱정이 생기는 것을 마음의 부정적 작용이라고 해요. 이처럼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고(苦)’라고 말합니다.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마음을 드러내서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즉문즉설입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 괴로울 일이 없네’, ‘어, 근심할 일이 아니네’ 이렇게 알아차리게 돼요. 이처럼 우리의 괴로움이 없어지는 대화를 설법(說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즉문즉설을 하기에는 제가 이런 법상에 올라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조금 안 맞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앉아 있는 아래로 내려가서 눈을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친구가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뭐가 괴로운데?’ 이렇게 진행해야 재미가 있어요. 이런 거룩한 법상에서는 금강경을 강설하면 몰라도 대화를 나누기에는 조금 어색해요. (웃음)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면 마스크를 껴야 합니다. 법문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오늘은 이렇게 떨어져서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자,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인생에 의문이 있으면 손을 들고 얘기해보세요.”

스님들도, 대중들도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가 좀 어려운지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30분 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법문을 더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정도로 제가 혼자서 법문을 했는데도 아직 질문이 없어요? 질문이 없으면 저는 이제 가야겠어요.” (웃음)

그러자 학인 스님 한 분이 조용히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화엄사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인입니다. 저는 불교의 연기론을 현대 물리학과 융합해서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원에 있는 도반들에게 저의 생각을 말했더니 '그건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법륜 스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스님은 마음의 공성과 물질의 공성을 규명한다는 차원에서는 함께 연구하는 게 가능하다고 답변하면서 불교의 과학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법문을 마칠 무렵 거사님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습니다.

스님이 제 아이를 거둬주시면 저도 출가를 하고 싶습니다

“부처님 법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많이 바뀌었고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완벽한 행복을 아직 이루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행복도가 높아졌습니다. 원을 세워서 ‘다음 생에는 꼭 출가수행자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도 드리고 있습니다.”

“미리 얘기하면 안 되지만, 질문자는 다음 생에도 출가를 못할 것 같네요.” (모두 웃음)

“사실은 아이들이 넷 있습니다. 스님이 두 명만 거둬주시면 지금이라도 출가를 할 의향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모두 웃음)

“그런 것은 사량 분별(思量分別)이에요. 진짜 출가를 할 사람은 그냥 지금 여기에서 출가를 해버립니다. 아이니 부인이니 집이니 하는 걸 생각하는 사람은 죽어도 출가를 못해요.”

“하지만 그건 현실 도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막내가 어린데...”

“그게 바로 사량 분별이라니까요. 출가를 못할 핑계를 대고 있는 겁니다. 출가를 하려면 ‘아, 내가 사량 분별하고 있구나’ 이렇게 딱 깨달아야 하는데, 질문자는 지금 질문하는 내용부터 꿈속을 헤매고 있어요.” (모두 웃음)

“질문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일상생활에서 수행정진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화엄사에 하는 새벽 예불에 가능한 나오려고 하고 있고, 안 바쁠 때는 백일기도도 몇 번씩 해봤습니다. 절에 나오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스님들 법문을 듣고, 기도를 하거나, 삼천 배를 하거나, 사경을 하는 게 너무너무 행복해요. 그런데 집에 가 있으면 정진이 안 되고 힘들어서 ‘야, 절이 나한테 맞는구나’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4주간 단기출가를 했을 때도 발우공양이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출가를 못할 것이라고 스님께서 바로 말씀해버리니까 저도 할 말은 없지만, 제가 어떻게 하면 수행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 겁니다. 전라도는 전체적으로 불자들이 너무 없고, 큰 행사가 있어도 참석하는 신도들이 적어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반면에 경상도 절에 가보면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신심이 대단한 것도 부럽고, 행사하면 법당이 미어터질 정도로 참석자가 많은 것도 부럽고요. 그런데 경상도 불자님들과 말씀을 나눠보면 아쉬운 면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정치나 사회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렇습니다. 법륜 스님께서는 해마다 새해를 시작할 때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는 꼭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분들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을 아직도 ‘빨갱이’라고 부르고, 국가 재정을 다 풀어서 북한에 쏟아붓는다며 비난합니다. 객관적으로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불심이 강한 경상도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분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안 갑니다. 스님, 그 부분에 대해서 답을 좀 주십시오.” (모두 웃음)

경상도는 불심이 깊은데도 왜 통일에 반대할까요

“두 가지 질문은 서로 연결된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에 기초하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진실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자라고 하면서도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진실에 기초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에 불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불법을 깨우쳐서 지역주의를 탁 벗어난 게 아니라 ‘경상도’라고 하는 지역주의를 움켜쥔 채 불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라도에 있는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투표를 할 때 진실에 기초해서 투표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경상도’ 혹은 ‘전라도’라는 지역주의를 우선하고 있어요.

질문자가 지금 얘기한 대로 절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열심히 염불 하는 것을 불심이 깊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불심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은 모양과 상(相)에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경상도는 불심이 깊고 전라도는 불심이 얕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 자체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모두 박수)

불심의 의미

경상도는 절에 다니는 사람이 많다, 전라도는 절에 다니는 사람이 적다, 전라도에 있는 절도 경상도 사람이 와서 먹여 살린다, 이런 말들은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불심이라는 것은 돈을 많이 보시하거나 절을 크게 짓거나 신도의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심의 기준은 ‘진실에 얼마나 깨어 있느냐’입니다.

질문자는 절이 크고 신도가 많은 정도를 불심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서 얘기하는데, 그건 옛날 양 무제가 가졌던 관점과 같아요. 양 무제와 달마대사의 일화 아시죠? 달마대사가 양나라에 왔을 때 양 무제가 달마대사를 왕궁으로 초대해서 이렇게 물었어요.

‘내가 절을 수백 개 짓고, 탑을 수백 개 세우고, 경전을 대대적으로 유포하고, 스님 수천 명을 교육시키고 있소. 대사, 이만하면 내 공덕이 얼마요?’
‘공덕이랄 게 없소.’
‘너는 누구냐? 네가 뭔데 도대체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나도 모르오!’

그래서 화가 난 양 무제가 칼을 빼어 들고 대사를 죽여버리려고 했어요. 그렇게나 불심이 깊다는 양 무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칼을 빼어 들고 고승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불심이겠어요? 그래서 달마대사가 ‘여기에는 불법이 없구나’ 이렇게 탄식하고 양자강을 건너서 가버렸다고 해요.

질문자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면 경상도에는 불심이 없느냐?’ 이렇게 봐도 안 되고, ‘전라도는 불자의 수가 적으니까 불심이 적은 것인가?’ 이렇게 봐도 안 돼요. 질문자는 지금 모양과 형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경상도 불자를 비판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전에 부처님 법에 대한 자기 관점부터 먼저 바로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가의 의미

그리고 제가 앞에서 ‘그런 관점을 가지면 출가를 못한다’라고 한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뭔가 준비를 해두고 이것저것 다독거려 놓고 집을 나가는 건 출가가 아니에요. 그런 건 외출입니다. (모두 웃음)

출가라는 것은 어느 순간에 탁 놔버리는 거예요. 자식이니 아내니 부모니 사업이니 하는 생각을 탁 놔버리는 게 출가입니다. 질문자가 그런 얘기를 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마음은 출가하고는 거리가 멀다’라고 한 거예요.

외국에 사는 교민들이 늘 양식만 먹어야 했는데 동네에 한국 음식점이 하나 생기면 무척 좋아하면서 자주 사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네에 절이 없어서 늘 외롭게 지냈는데 한국 절이 하나 생기면 무척 좋아하면서 자주 나갈 겁니다.

질문자가 질문하는 내용도 지금 한국 음식점 하나 생겼다고 좋아하며 찾아오는 것과 똑같습니다. 전자는 혓바닥에 굶주리고, 후자는 문화에 굶주린다는 차이일 뿐, 둘 다 부처님의 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질문자가 추구하는 건 문화로서의 불교예요. 부처님의 법은 해탈과 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 양식의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 것처럼 문화로서의 불교를 이어가는 활동도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진리로서의 불교를 논할 때는 이런 걸 다 떠나서 논해야 해요.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지, 자꾸 그런 까르마나 업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불법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꿈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꿈에서 깨세요.’
‘스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호랑이가 따라오는데 왜 호랑이는 안 잡아주고 저더러 깨라고 합니까.’

지금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는 격이에요. 그런 관점이라면 불심이라고 표현하지 말고 그냥 불교 세력이라고 표현하세요. ‘경상도는 불교 세력이 강하고 전라도는 불교 세력이 약합니다’라고 표현하면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속적 관점입니다. 만약 질문자가 ‘경상도에 불교 세력이 크니까 그 세력을 갖고 남북통일을 하는 데 힘을 보탤 것이지, 왜 그들은 남북통일을 반대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제가 대답해주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불심이 있니 없니 하고 질문하면, 그건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지 불심의 본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질문입니다.”

스님의 대답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대중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대중이 모두 전라도 불자들이기 때문에 스님의 이야기가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덧 2시간이 흘러 법회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불교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데에 힘을 쓰자고 강조하며 법회를 마쳤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불자라는 자부심은 가지고 계세요?”

“네.”

“이곳 전라도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교회에 가고 나 혼자만 불자라고 해도 자랑스러워할 수 있어요?”

“네!” (모두 웃음)

“수가 많고 적은 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꿈속을 헤매는 사람의 수가 많은 게 무슨 상관이에요? 여러분 자신이 깨어있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은 항상 진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작은 실천이라도 행해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데는 이러이러하는 것은 장애가 되니 하지 말라’ 이렇게 가르친 것은 딱 멈출 줄 알고, ‘이러이러한 것은 좋다’라고 가르친 것은 하기 싫더라도 딱 행할 줄 아는 연습을 해야 해요. 물론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가능하면 그런 쪽으로 가도록 연습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양이나 말로만 불자라고 내세워서는 온 세상이 다 불교를 믿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그런 방식으로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하루아침에 불교 신자가 된다고 한들 범죄율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다 함께 불교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데 좀 더 힘쓰면 좋겠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강당 앞마당에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대중은 모두 돌아가고, 스님은 주지인 덕문 스님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며 대화를 더 나눈 후 화엄사를 나왔습니다.

곧바로 김해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봉화 정토원 선진규 원장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지난 23일 노무현 대통령 11주기 때 잠깐 찾아뵙고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몰랐습니다.

학창 시절 민주화운동에 이어 불교 운동에 앞장서 왔던 선 원장님은 이후 정토원에 머물며 평생을 포교 활동에 전념해 오신 분입니다. 스님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추모제 때마다 매년 선 원장님을 찾아뵈었는데, 오늘은 영정 사진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헌화를 하고 삼배를 한 후 유족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평생 동안 염불 하셨으니까 편히 가셨을 거예요.”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대화를 더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며칠 전에 뵈었을 때만 해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시고 정정하셨는데, 같이 사진도 찍었거든요.”

며칠 전 함께 찍은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장례식장을 출발해 밤 10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원고 교정을 한 후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행복학교를 수료한 행복시민을 대상으로 온라인 즉문즉설 강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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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혜심

싫어도 해버리는 연습과 좋아도 멈추는 연습을 꾸준히 해보겠습니다. 싫고 좋고의 분별심에서 자유로워 지고 싶습니다 .

2020-07-09 19:41:59

정명

내한계를 알고 있는가? 시험해보고 싶나?

2020-06-21 20:45:37

굴뚝연기

김재우님 안녕하세요 ~그냥 일반인이에요‥오래전 다니던 회사에서 듣기로,파산신청인가?하는 ,빚을 탕감해주는 제도가 있을꺼에요‥한번 알아보세요~자세히는 못듣고 두번정도 서로 대화나누는 얘길 스치며 들었던 적이 있어요‥방법이 있을껍니다 잘알아보시구 용기잃지 마세요‥!

2020-06-20 00: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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