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17 인도성지순례 15일째 (델리)
“버르장머리 없는 직원들을 어떻게 다스려야죠?”

안녕하세요. 제31차 인도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고 델리에 도착했습니다. 성지순례단은 라즈가트, 인도 국립박물관을 본 후 한국으로 출국하였고, 스님은 순례단을 보낸 뒤 델리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델리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아그라에서 하룻밤을 잔 후 오전 7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순례자 숙소에서 잘 때는 세수도 못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모두들 깨끗한 얼굴로 단장하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말끔해진 얼굴을 보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어제까지는 꾀죄죄하더니 깨끗이 씻으니까 예쁘네요.” (웃음)

아그라에서 델리까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차량별로 소감을 나누거나 새해 계획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탄 5호차는 새해 계획에 대해 함께 나누기로 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새해 계획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새해는 1차 만일결사의 마지막 10차 천일을 시작하는 해입니다. 1차 만일결사의 목표를 어떻게 원만하게 성취할 것인지가 저에게는 가장 큰 일입니다. 잘 성취가 되면 저는 이제 3년 후에 은퇴를 해도 되는데, 성취를 못하면 죽을 때까지 계속 해야 될 것 같아요. (모두 웃음)

둘째, 아직 정토회가 개발하지 못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게 일하면서 명상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하는 명상은 가만히 앉아서 할 뿐 소비적이지 생산적이지가 않아요. 생산과 명상을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미래에는 이것이 꼭 필요한 일이에요.

셋째, 올해 북미 관계가 안 풀리면, 북한에서 또 사람이 굶어죽는다고 난리가 날 것 같아요. 여기에 대비해서 인도적 지원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지금 주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새해의 다짐과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5호차에는 해외에서 참가한 분들이 모여 있어서 정토회의 국제화에 대한 포부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전세계에서 1%도 안 되는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법에는 관심이 없어요. 99%를 대상으로 특히 영어권 사람들에게 전법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할 수 있기까지 스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고를 느꼈습니다. 저도 돌아가면 법당에서 어떤 소임이든 맡아서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존재를 실감나게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스님의 하루를 통해 읽는 감동보다 더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모자이크 붓다의 한 구성원이 되어 법당에 돌아가서도 작은 역할을 맡아 보겠습니다.”

“마음이 답답한 사람들이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정말 많아요. 외국인들 대상으로 요가 강사를 하고 있는데, 명상하고 스님 법문을 일주일에 한 번씩 틀어주니까 반응이 정말 좋아요. 열의는 큰데 법문 소스를 많이 제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돌아가서 외국인을 위한 열린법회를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제 남편도 외국인인데 어떻게 하면 남편도 같이 법회를 들을 수 있게 할지 연구를 해보겠습니다.”

“중국어로 스님의 희망편지를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즉문즉설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해보겠습니다.”

한 분은 “체력을 더 보강해서 다음에 한 번 더 성지순례를 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그 말을 받아서 한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성지순례에서 무엇을 한다고 체력이 필요해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간 것도 아니고, 밭을 간 것도 아니고, 차 타고 내내 다니는 것 뿐인데 왜 체력이 필요해요?

싫어하는 마음만 안 내면 돼요. 체력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아요. 어제 소감 나누기 할 때도 성지순례를 무사히 이겨냈다고 하던데, 도대체 무엇을 이겨냈다는 겁니까? (모두 웃음)

그리고 은퇴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신데, 평생 동안 자신의 재능을 돈 받고 팔았잖아요. 이제 은퇴하시면 더 이상 그러지 마시고 최소한 3년은 재능 기부를 좀 하시면 좋겠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필리핀 민다나오에도 많은 손길이 필요해요. 필리핀에는 저희 JTS 센터가 해발 1100미터에 있어서 기후도 좋아요.

외국인 전법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수행이 중요해요. 한국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 갈등을 해도 ‘모난 돌이 서로 부딪치면서 닦여 나가는구나’ 하면서 이해를 하는데, 외국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법문에서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해라’ 이렇게 들었는데, 돌아서자마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면 혼란이 오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전법을 할 때는 이점을 꼭 유의해 주세요.”

새해 다짐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버스는 어느덧 델리에 가까워졌습니다. 어제는 럭나우에서 아그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오늘은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지금까지 성지순례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델리에 가까워질수록 아파트가 줄줄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성지에서 만났던 맨발에 헐벗은 옷차림의 인도인들, 허름한 집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 차가 별로 없죠? 아직 인도 사람들은 돈 내고 도로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가 않는 거예요.”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도시락으로 먹는 마지막 식사입니다.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래며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어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내렸습니다. 화장실 개수가 적어서 긴 줄을 섰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에 왔을 때 인도에는 화장실이 왜 이렇게 없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인도 사람이 하는 말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인도는 화장실 아닌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길에서 볼 일을 보게 할 때는 시간이 얼마 안 걸렸는데, 화장실을 이용하니까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웃음)

12시 30분에 라즈가트에 도착했습니다. 야무나 강변에 위치한 라즈가트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간디를 화장한 곳입니다. 넓은 공간에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를 화장한 후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서 지금도 계속 불꽃이 타고 있도록 해놓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간디의 일생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1869년생입니다. 올해로 탄생 151년이 되고, 용성조사님보다 5살 적습니다. 두 분 다 한국과 인도가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주 혼란한 시기를 사셨습니다.

태어난 주는 인도 서쪽의 구자라트(Gujarat)주이고, 계급은 바이샤(vaisya) 계급입니다. 바이샤는 상인 계급인데, 평민 계급이라고 하지만 상위 카스트에 들어가는 편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정부 관리여서 간디도 학교 교육을 받았고, 영국에 유학 가서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 돌아와서 적당한 자리를 못 잡고 남아프리카에 가서 변호사를 하게 됩니다. 그때 네덜란드와 인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많이 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어인(Boer)’이라고 불러요. 간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 변호사를 하면서 아시아인들의 차별에 맞선 저항 운동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간디는 1915년에 인도로 돌아와서, 우리나라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인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고, 인도에서는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시인 타고르(R. Tagore)는 우리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불렀습니다.

간디의 특이한 점은 식민지 저항 운동을 하되 폭력적인 무장 운동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불복종 운동을 했다는 점입니다. 불복종 운동은 자기를 희생해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부러 부당한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감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는 운동입니다.

1945년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할 때, 인도에서는 무슬림 세력과 힌두 세력이 분리 독립을 계획했습니다. 그때 간디는 분리 독립에 반대했습니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가능하면 하나로 독립을 하자고 했는데, 정치적으로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더 우세했어요. 그러다 1949년에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디는 힌두교인이었지만 간디를 저격한 것은 무슬림이 아니라 힌두 민족주의자 청년이었습니다. 오늘날 인도의 모디(N. Modi) 총리가 속한 힌두 민족주의자 그룹의 뿌리가 간디를 저격했던 그 힌두 민족주의자 그룹이에요.

1869년에 출생해서 1949년에 돌아가셨으니 만 80세, 우리 나이로 81세에 돌아가신 셈입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야무나 강입니다. 야무나 강변 바로 이곳에서 화장을 한 겁니다.

간디는 20세기에도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20세기의 인물이면서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물론 인도 내에는 간디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많습니다. 생전에 불가촉천민들을 비하한 언어를 사용한 기록도 남아있고요. 그래서 암베드카르(B. R. Ambedkar)를 추종하는 사람은 간디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이면서 간디와 쌍벽을 이루는 독립운동가입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하리잔(Harijan)’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리잔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그저 말뿐이고, 결국은 하리잔이 곧 천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불가촉천민을 ‘달리트(Dalit)’라고 부릅니다. 달리트는 ‘억압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잘 모를 때는 ‘하리잔 계층’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달리트 계층’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다함께 묵념을 하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비는 묵념이 있겠습니다.”

다함께 간디의 삶을 생각하며 묵념했습니다.

라즈가트를 나와 5분 정도 걸어서 간디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간디의 전 생애가 다양한 사진들로 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간디가 얼마나 인도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는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분간 쭉 둘러보고 나와 버스를 타고 델리 국립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델리 국립박물관은 인도의 고대문명인 인더스문명부터 마우리안, 쿠산, 굽타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삐쁘라하와에서 출토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스님은 2시 20분부터 세 팀으로 나누어 차례로 박물관을 안내했습니다.

안내가 계속 이어지던 중 드디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앞에 보이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리키자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그 앞에 멈춰 섰습니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입니다. 앞에 사리 용기가 두 개 보이죠? 하나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커밍험이 발견한 사리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가 독립된 후 새로 발굴된 사리 용기입니다. 우리가 참배했던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에서 발굴된 거예요.

사리 용기에서 나온 사리는 투명한 유리관 속에 얹혀 놓았어요.

뒤에 보시면 사리를 돋보기로 확대해서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뼛조각이 자세히 보여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부처님 육신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겁니다.”

한 발 물러서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향해 삼배로 공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코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니 모두들 믿기지가 않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 1층부터 2층, 3층까지 모든 곳을 꼼꼼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온 스님은 인도인 스텝들에게 악수를 건네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저는 델리에서 한국 교민들을 위한 강연이 저녁에 있어요. 상카시아에서 3일 간 명상 수련하고 나서 수자타아카데미로 갈게요. 먼저 가 있으세요.”

공항으로 출발하는 순례단에게도 작별 인사를 한 후 4시 30분에 한국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

신봉길 주인도 대사님과 김금평 한국문화원 원장님이 스님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5시부터 ‘경계를 넘어(Beyond boundaries)’라는 주제로 전시회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국 미술가와 인도 미술가의 합동 전시회였는데, 전쟁의 아픔을 겪은 한반도의 분단을 다양한 그림으로 표현해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린 장희문님이 직접 스님에게 한 작품씩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38선이 그어져서 분단이 되어 있지만, 물과 공기는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흐른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전시회를 함께 관람하고 축하를 해준 후 대사님, 문화원 원장님, 델리불자회 회장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 6시 30분부터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도 교민을 위한 즉문즉설

한국문화원 지하 1층 강당은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많은 교민들이 자리했습니다. 먼저 한국문화원장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2012년 말에 한국문화원이 오픈했는데, 스님께서 매년 순례 끝에 이곳을 방문해주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주인도대사 부인께서 법륜스님을 환영하는 꽃다발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성지순례를 통해 느끼는 점을 소개하면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해보면 물론 부처님의 말씀과 행적도 우리에게 감동이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이 웃으며 사는 모습이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지역은 인도에서도 경제적으로 열악한 곳이고, 사회 시스템도 그리 근대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도, 사람들이 웃으면서 삽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가 ‘이것 때문에 내가 괴롭다’, ‘저것 때문에 내가 괴롭다’ 이렇게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물론 그것이 개선되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개선되지 않는 가운데에도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성진순례를 통해 많이 느낍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이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 성지순례를 해도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보름 동안 성지순례를 다녀도 ‘화장실이 없다’, ‘먼지가 많다’, ‘시설이 안 좋다’ 이렇게 불평불만만 하면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돈 버리고 시간 버리고 고생만 한 셈입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떻게 관점을 잡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 큰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자기 삶을 낭비하고 훼손할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에요. 주어진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좋고 나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은 다만 상황일 뿐입니다. 그 상황을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정하는 것이지, 그 존재가 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좀 깨우치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다시 말해 ‘다 마음이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뜻을 조금 체험할 수 있어요.

저는 성지가 꼭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탑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살아가려면 이름이나 모양, 형상이 있어야 하니까 ‘여기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셨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도를 이루셨다’, ‘여기에서 설법을 하셨다’, ‘여기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렇게 하면서 순례를 다니는 거예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장소가 아니라, 불평불만이 일어나는 열악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자기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차려서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수행자입니다. 반면 그런 상황에서 자기의 마음을 괴로운 쪽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의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놀러온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성지순례답게 알뜰히 다니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에 임했을 때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족 관계나 세상 일 등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괴로움이나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런 의문에 대해 아무런 제한 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니까 누구든지 소재를 꺼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선뜻 손을 들고 질문을 하지 않자,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은 대사님이 먼저 “처음에 누군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면 그 뒤로 질문이 나오더라구요” 하며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인도 불교의 흥망성쇠에 대해 긴 시간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젊은 사람들이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어떻게 다스려야할지 모르겠다는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직원을 어떻게 다스려야죠?

“저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책임자입니다. 요즘 20대 직원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제가 보기엔 버르장머리가 없어 보여요. 제가 가르치려 들면 저더러 ‘꼰대짓’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두는 것도 조직의 분위기를 해쳐서 고민입니다. 20대 ‘욜로(YOLO)족’들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까요?”

“질문을 왜곡하려는 뜻은 아닙니다만, 질문자의 관점에 문제가 좀 있어요.

‘젊은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좀 잘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겠느냐?’

이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모두 웃음)

젊은 아이들은 컨트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떻게 컨트롤하느냐’라는 기술상의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관점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기술적인 것을 아무리 개발해도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 조금 있으면 다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니 먼저 그냥 놔두고 가만히 한 번 지켜봐야 해요. 우리 기성세대가 자랄 때의 경험과 잣대로 보면 젊은이들이 버르장머리가 없어 보이는 건 맞아요. 그러나 그건 서로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에요.

정토회에 백일 출가로 들어온 행자들과 즉문즉설을 해보면 별별 질문이 다 나와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래도 절에 들어와서 백일 출가까지 했으니까 도에 대해서 묻든지 부처님 법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나오는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지난번에 사과가 한 박스 들어왔는데, 제일 좋은 것 두 개는 스님 드려야 한다고 빼놓고, 나머지 흠과를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스님은 늘 평등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평등입니까?’ (모두 웃음)

어른들이 들으면 문화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요. 과일이나 음식이 들어오면 부처님께 먼저 올리고, 그 다음에 어른들께 드리고, 그 다음에 나눠 먹는 게 그냥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젊은이들은 관점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번 성지순례 중에 ‘이곳이 수자타가 부처님께 유미죽 공양을 올린 곳입니다’라고 설명하니까 어떤 청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젊은 남녀가 만난 상황인데 아무런 썸씽이 없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아예 없는데 이런 생각도 하는 거예요. (모두 웃음)

이처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거예요. 국적이나 문화의 차이보다는 세대 차이가 소통에 더 영향을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실입니다. 한국 젊은이나 일본 젊은이, 태국 젊은이는 서로 소통이 되는 반면, 오히려 한국에서 한집에 사는 아버지하고 아들은 소통이 안 됩니다. (모두 웃음)

같은 세대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 등을 통해 교감이 되고, 한집에 살아도 다른 세대는 교감이 안 돼요. 이것이 현대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서 버릇을 바로잡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지치든지, 둘째, ‘젊은 애들은 못된 놈들이니까 전부 내보내야겠다’ 이렇게 되든지요.

젊은이들의 얘기를 그냥 들어주세요.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하고, 설명하는 데까지는 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수용하는 수밖에 없어요.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외국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라고 할 정도로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의 젊은 세대는 비슷한 세대의 외국인을 다루기보다 오히려 훨씬 어려워요. 우리 세대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웃음)

대학생들과 즉문즉설을 하면 500명이 참가해서 15명이 질문한다면 개중 절반 정도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아요. 이게 현실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은 깊이 있는 글을 읽기 보다는 단편적인 지식만 쌓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스님의 즉문즉설 동영상도 13분짜리면 짧은 편이잖아요. 어른들은 재미있다고 난리인데, 젊은이들은 길다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13분짜리 답변을 전부 3분짜리로 축약하는 편집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3분이 넘어가면 아예 동영상을 안 봐 버리니까요. 이렇게 단편적 지식만 쌓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웃음)

그렇다고 너무 우려할 일도 아니고, 그것을 너무 좋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하나의 사회 현상입니다. 사회 현상 중에 ‘이것은 정말 부정적이다’ 하는 것이 있으면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풀어나가는 게 좋고, 그 외의 것은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오늘 보고서를 하나 받았어요. 어떤 활동가가 다른 사람의 결재를 안 받고 업무를 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람이 일을 하려면 어느 부서에 소속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소속되어서 자기 위에 누가 있는 것 자체가 싫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일에 대해 모르면서 결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적어도 법륜스님이라도 네 위에 있어서 결재를 받아야 되지 않겠냐’라고 했더니 ‘그 영감쟁이가 이 일에 대해 뭘 아느냐’ 이랬다는 거예요. (모두 웃음)

나이 든 사람이 볼 때는 ‘스님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러나 그 사람 말이 맞긴 맞습니다. 제가 그 일에 대해서 모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우리 세대가 아는 것이 없는 건 맞지만, 그래도 일을 하려면 어느 부서에 소속이 되어서 결재를 받고 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큰 조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 어렵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 것도 우리가 직면한 일이고 현실이에요. 이처럼 세대가 달라지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들 슬퍼하는 중에도 젊은 승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고 해요.

‘아이고, 영감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 맘대로 해도 되겠다. 늘 이건 하라 그러고 저건 하지 마라 그러고 잔소리만 하더니 잘됐다. 이제 우리 마음대로 하자.’

그 당시에도 이런 사람이 생겼다는 거예요. 마하가섭 존자가 이 소리를 듣고 놀라서 생각했습니다.

‘당장 경전을 결집해야 되겠다. 이대로 놔두면 나중에 어떤 주장을 할지 모른다’

그래서 500명의 장로를 모아서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결집을 한 겁니다. 이것이 오래 전부터 계속된 인류 문화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문화가 쇠퇴하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합니다. 이게 좋은지 나쁜지는 지금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문화 현상입니다. 이런 문화 현상을 인정해야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도 일할 수 있지, 말버릇을 갖고 시비하면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어려워요. 사고방식은 달라도 또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도록 놔둬야 하기도 하는 겁니다.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부모를 떠나 이미 절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인데도 질문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저 사람이 절에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절에 들어와 사는 젊은이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머리만 안 깎았지 여러분은 스님입니다, 이 말이 제일 듣기 싫습니다. 저는 스님이 아닌데 왜 스님같이 살라고 합니까?’

그래서 제가 ‘그러면 너는 절에 왜 들어왔니? 밥 먹을 곳이 없어서 들어왔니?’라고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해요.

‘아뇨, 공동체에서 같이 사는 것이 재미있어서 들어왔습니다.’

제가 ‘절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은 머리만 안 깎았지 스님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라’ 이렇게 말하는 것의 의미는 ‘수행적 관점을 갖고 살아라’ 이겁니다. 그런데 그 행자님은 이 말을 ‘내가 왜 스님이어야 하느냐!’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머리를 기르고 있어도 절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는 스님 같은 마음으로 살라는 뜻인데, 그 말에 제일 거부 반응이 일어난대요. ‘내가 왜 스님이냐? 나는 스님이 아닌데 내가 왜 스님 흉내를 내야 하나?’ 이렇게 반발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과도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밭도 매고, 고추도 따고, 영상도 찍고 만들어서 여러분이 혜택을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몰론 어느 정도 선에서 지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들을까?’ 이런 관점 자체를 놔버리고 사물을 봐야 내가 편합니다. 수행이란 것은 내가 편해야 해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내가 못 견디면 내가 지쳐서 쓰러집니다.

성지순례에 온 사람들 중에는 여기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질서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나서 ‘도대체 인도 정부는 뭐 하느냐!’ 이러면서 성질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지금 성지순례를 왔소? 인도를 고쳐주러 왔소?’ (모두 웃음)

개선은 필요하지만, 개선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에 스트레스가 없어야 합니다. 수행은 개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개선은 해나가되 스트레스는 없도록 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스님의 경험담을 많이 들려주어서 더 많은 웃음이 나왔던 강연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5명의 질문이 더 있었습니다.

  • 저는 인도에 온지 2년 됐습니다. 불교가 시작된 나라에 부디스트는 오간데 없고 힌두교만 남아있습니다. 불교는 힌두교와 어떻게 다르고, 왜 지금처럼 쇠퇴하게 되었나요?
  • 어머니가 욕심이 잘 내려놓아지지 않는다고 하세요. 아마 자식들에 대한 욕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 인도에 처음 왔는데 순간순간 여기 있었던 것처럼 느껴져요. 혹시 제가 전생에 여기 살았을까요?
  • 아버님이 이번 여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실 까봐 불안합니다. 매일 전화를 드리고 일 년에 두 번은 한국에 방문하는데, 이 힘든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 정년이 3년 남았는데 전부터 북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북한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도와야할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자 스님은 강연을 마쳤습니다.

참석한 델리 교민들과 함께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한국문화원을 나왔습니다.

한국문화원 앞에는 16인승 미니버스가 스님 일행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짐을 모두 싣고 상카시아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버스 맨 뒷자리에 침낭을 깔고 누웠습니다. 도로 사정에 따라 새벽에 도착할지 언제 도착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내일부터는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한 명상수련이 2박3일 동안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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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다희

3.1운동을 기점으로 기점으로 5.4운동과 간디의 불복종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민족적 열등의식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타인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현상을 다만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대사님께서 먼저 질문해주신 것이 센스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2020-02-17 07:49:22

김은선

스님 감사합니다

2020-01-26 21:18:54

김용수

정토회 활동가 중에 결재를 안 받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네요. 일반 회사에서도 다 결재를 받고 일하는데...

2020-01-21 12: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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