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하루

2019.12.1 (오전) 정토불교대학 졸업 수련 4차_서울 제주, 광주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사람”

안녕하세요. 오늘은 새벽 6시에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정토불교대학 졸업 수련 특강을 한 후 대전으로 이동하여 통일특별위원회 의병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새벽 3시 50분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6시에 문경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출발할 때나 도착할 때나 날은 어두웠습니다.

오늘은 올해 마지막 불교대학 졸업 수련입니다. 서울 제주 지부, 광주전라 지부에서 50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불교대학생들은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어젯밤, 불교대학 학생들은 180평 대강당에서 침낭을 깔고 다 함께 잤습니다. 문경 정토수련원의 생태 화장실에서는 겨울 칼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스님이 ‘가장 큰 방에서 가장 많은 사람과 함께 잤으니 내 인생의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화장실에는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분다’라고 하자 강당은 온통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웃고 나니 피곤함이 풀립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인생이 자유로워집니다.”

불편했던 잠자리, 오들오들 떨었던 화장실도 마음공부의 장이 됩니다.

먼저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불교대학 과정의 핵심이 무엇인지 소개한 후 이 과정을 끝까지 잘 마쳤으면 좋겠다고 격려했습니다.

“제가 1969년에 절에 들어와서 올해로 50년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서 절에 들어왔는데, 들어온 뒤로 20년 정도는 혼란스러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부분은 너무나도 좋은데, 어떤 부분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20년간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불교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짧은 시간 내에 그 가르침을 자기화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입니다.

이 과정은 불교를 전공하는 학자가 되기 위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교리를 많이 알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도 아니고, 복을 빌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도 아니에요. 삶이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수행 프로그램입니다. 적어도 2년은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잘 맞으면 계속 공부를 이어나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안 다니겠다고 결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교대학을 다닐 때는 대충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만둔 뒤에 힘든 일이 있거나 하면 이 과정에 미련이 생겨서 다시 입학하곤 합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그만두는 건 예외입니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중간에 그만두고 다시 입학하고, 또 그만두고 다시 입학하는 건 시간낭비예요. 한 번 공부할 때 제대로 해보고, 괜찮으면 계속 이어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불교대학 교과 과정이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는데요. 내년부터는 모두 경전반에 입학하셔서 1년 동안 공부를 더 하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점검하는 방법은 2년 전과 지금의 나를 한번 비교해보는 겁니다.

‘지금도 화가 올라오긴 하지만 그래도 이 과정을 시작하기 전보다는 화가 확실히 줄었는가?’

‘지금도 꽁하긴 하지만 2년 전보다는 덜한가?’ ‘아직도 미움이 있지만 증오까지 나아가지는 않는가?’

‘지금도 하다가 관두었다가를 반복하지만 그래도 결국 오뚝이처럼 일어서는가?’

이렇게 냉정하게 자기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점검을 충분히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확실히 지는 태도를 가져야 살면서 우왕좌왕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 점검을 해보니 이 과정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중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내 입맛에 안 맞으면 ‘많이 드세요’ 하고 내 갈 길을 가듯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법륜스님이나 정토회가 좋다고 해도 자기와 맞지 않으면 자기 갈 길을 가야 합니다. 한 번 먹어보고는 모를 수 있어요. 지금까지 해온 것과 다르면 처음에는 어색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몇 번 반복해서 체험을 해보고 나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해요.”

이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6시부터 9시 30분까지 3시간 30분 동안 8명의 질문을 받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스님은 성불하셨나요?’라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사람

“즉문즉설을 통해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지금은 가볍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성불을 하셨나요? 그리고 불교대학 수업 중에 수행은 52단계로 구분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성불하신 게 아니라면 스님께서는 그중 어느 단계이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성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모두 웃음)

“수행의 52단계에 대해서는 대승불교 시대에 사람들이 그런 학문 체계와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당시에 그런 주장이 있었다고 받아들여야지, 그것이 맞냐 틀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승불교에는 수행의 4단계가 있습니다. 마음의 이치를 깨달은 초견성(初見性)의 단계를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윤회하는 일왕래(一往來)의 단계를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불환의 단계를 ‘아나함’이라고 합니다. 번뇌가 없는 단계를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승경전인 금강경에는 이 4단계를 거쳐야 할 필요가 없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각자 이전 시대의 체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체계를 형성하면, 그다음 시대가 되면 다시 이전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체계를 형성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말하기 위해 오온(五蘊)을 설했는데, 소승불교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오온 하나하나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니까 대승불교가 등장할 때는 오온설을 부정하면서 ‘공(空)’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보살 사상을 새롭게 주장하면서 그 안에 52단계를 거쳐서 부처가 되는 논리를 만들게 됩니다. 그 후 선(禪) 불교에서는 이런 체계에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걸 보면, 대승불교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어요.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너무 급히 가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정진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로 대승불교 시대의 사람들은 수행을 52단계로 분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불한다는 표현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괴로움이 있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하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니르바나(Nirvana)’ 또는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열반을 증득했다는 말이 곧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을 부처라고 말합니다.

괴로움이 있는 상태에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수행자’라고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들을 ‘보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괴로움이 있지만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길에 한 발 들어서서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하루에 열 번 괴로움이 일어나던 사람이 이제는 하루에 아홉 번 괴로움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이 길에 한 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괴로움이 일어나는 상태가 되었다면 열반의 경지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부처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이 길에 한 발 들어선 사람들을 초발심 보살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이 간 사람 중에서 본받을 만한 보살님들을 높여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모두 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다양한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법륜 스님은 지금 괴로움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까요? 아니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가운데 점차 없어지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을까요?

이런 건 굳이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질문자는 꼭 물어봐야 알겠어요, 안 물어봐도 알 수 있겠어요?”

“네,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박수)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목표이긴 하지만, 그 목표에 몇 명이 도달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목표에 도달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의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지금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 질문자는 앞선 질문에서 해소가 되었다며 인사만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방금 괴로움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그 말씀을 들으니 제가 적은 질문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스님은 부처님 곁에 20년을 있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법문을 많이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당시에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리석은 자가 깨우치고, 괴로워했던 사람이 괴로움이 사라지니까,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괴로움이 사라진 사람도 있었지만, 부처님 곁에 20년 넘게 있었지만 진척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진척이 없었던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입니다. 카필라국에서 아주 존경받는 사람이었는데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첫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걸 보고 의심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부처님 다음으로 존경받는 이 나라의 왕인 정반왕은 깨달아야 하지 않느냐. 정반왕이 깨닫지 못하는 걸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을 깨닫게 하지는 못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심이 든 제자 중 한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하인이었던 이발사 우파리도 깨우쳤는데 왜 정반왕은 깨우치지 못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반왕에게는 아들만 있지 부처는 없다.’

그 이야기를 접하고 저도 궁금증이 생겨서 경전을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정반왕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정반왕은 단 한 번도 부처님께 진리에 대해 질문하거나 법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아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자리는 어떠한지, 왜 먹을 것이 풍족한 성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구걸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만 묻습니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부처님이라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스승도 중요하지만, 결국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이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옆 사람이 아무리 훌륭해도 나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부처님이 오신다고 해도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부처를 못 알아보고, 부처님이 오신 줄도 모릅니다. 나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어야 해요.

제가 법문 하는 내용이 매일 ‘스님의 하루’에 담기잖아요. 그러면 스님의 법문 중에 질문한 사람이 그 내용을 알아듣고 뭔가 생각이 달라진 내용을 주로 담을까요, 제대로 못 알아들은 내용을 담을까요?”

“알아들은 내용이요.”

“그것처럼 부처님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수많은 법문을 하셨는데, 그중 깨닫지 못한 내용을 기록할까요, 깨달은 내용을 기록할까요?”

“깨달은 내용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팔만대장경과 같은 경전에 왜 사람들이 깨달은 내용만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런 법문 중에도 1시간 이야기해서 겨우 알아들었다면 1시간 법문 내용을 모두 다 기록할까요, 그중 깨달은 부분만 요약해서 기록할까요?”

“요약해서요.”

“스님의 하루만 봐도 법문을 다 기록하지 않고 핵심 내용을 위주로 요약해서 쓰잖아요. 물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달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요약을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상식적이겠죠. 게다가 당시에는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 모두 암송으로 외웠기 때문에 그에 맞게 축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전에는 사람들이 대개 법문을 듣자마자 깨달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기록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시에도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는지 질문한 사람이 있었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누구나 다 깨닫습니까?’

‘당신은 집이 어디입니까?’

‘저는 사위성에 삽니다.’

‘당신의 억양을 보니 이곳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원래 고향은 왕사성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사위성에서 왕사성으로 가는 길을 잘 아십니까?’

‘네, 잘 압니다.’

‘다른 사람이 물어봐도 잘 알려줄 수 있습니까?’

‘네, 알려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왕사성으로 가는 방법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다 왕사성에 도착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아무리 잘 알려줘도 그 길을 가지 않거나, 알려준 대로 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그 사람은 왕사성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저의 가르침도 그와 같습니다.’ (모두 웃음)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비유에는 늘 이런 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직접 경험하고 탐구한 내용을 설하셨지만, 만약 듣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법문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를 기울여서 ‘저게 무슨 말이지?’ 하고 탐구하는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법문을 들으니 스님이 한쪽만 볼 게 아니라 사물이 전모를 보라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핵심이 파악되어야 합니다. 이건 절에 오래 산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머리를 깎거나 승복을 입는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에요. 머리를 깎아서 되는 일이었다면 누구나 다 이발소에만 다녀오면 깨달았을 겁니다. 승복만 입는다고 되는 일이었다면 그냥 단체로 승복을 하나씩 맞추어 입으면 해결되었을 거예요. 지식을 쌓는다고 되는 일이라면 인공지능은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죠. (모두 웃음)

이건 이치를 터득해야 하는 일입니다. 법문의 핵심인 이치에 귀를 쫑긋 기울여서 그 내용을 간파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는 거 아니잖아요. (모두 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스님이 법문 중에 역사나 과학 이야기를 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아요. 학교 다닐 때 관심을 가지고 배우지 않고, 그저 시험 칠 때 바짝 외우고는 시험 끝나면 쓰레기통에 버렸기 때문에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다시 필요하면 잠깐 쓰레기통에서 꺼내서 잠시 들여다보고는 다시 집어넣으니까 대화를 할 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학벌 인플레이션만 생겨서 다들 학벌만 높지 실제로 내용을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대학까지 나왔는데도 우주의 근원에 대해 허황된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게 믿는 건 믿음의 영역이니까 본인의 자유이지만, 무엇이 이치에 맞고 안 맞는지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의 인생이 아니라 자기 인생이니까 중심을 딱 잡고 살아야죠. 요즘 세상에는 남자든 여자든, 몸이 젊든 늙든, 결혼을 해서 살든 혼자서 살든, 제가 볼 때는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혼을 했다고 해도 저랑 비교하면 본전이잖아요. 결혼 생활 10년 한 다음에 이혼을 했다고 해도 그 사람은 10년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아본 다음에 혼자 사는 것이니까 처음부터 계속 혼자서 산 저보다는 경험 면에서 유리한 조건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사별을 했다, 이혼을 했다, 집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보다 좋은 조건이네’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 웃음)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제가 이렇게 물어봤어요.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모두 줄 테니까 67세 법륜스님 할래? 아니면 22살 청년 할래?’

그러면 바로 22살 청년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해요. 지금 내가 그 어떤 사람보다 좋은 조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정치인이 되고 나서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아예 유명한 정치인이 안 되는 게 나아요?”

“안 되는 게 나아요.” (모두 웃음)

“너무 허황된 꿈을 꾸고 인생을 살지 마세요.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알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지구 환경을 위해서 나 하나라도 일회용 제품을 덜 쓰고, 빨대 하나 덜 쓰고,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는 게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원리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3시간 동안 모두가 집중된 분위기를 유지해 준 덕분에 오늘은 중간에 일어나서 잠 깨는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크게 칭찬을 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중간에 운동을 안 시킨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오늘 아주 잘하셨어요.” (모두 박수)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수행자에게 계정혜가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 기독교에서는 창세기에 우주의 기원, 초기 인류의 모습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간략히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기원, 초기 인류에 대해 남기신 말씀이 없나요?
  • 정토회에서 하는 구호활동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소외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싶은데요.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분별심이 커져서 고민입니다.
  • 기독교 가르침에서 보면 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이고, 조상님에게 저는 귀한 손녀인데, 왜 불교에서는 내가 없다고 하나요?
  • 보왕삼매론은 언제 누가 썼나요?
  • 협력이 중요하지만 직장에서 일해 보면 쉽게 되지 않습니다. 행정은 자신의 관점에서 일을 추진하고, 주민들도 관심이 없거나 자신의 이익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측면이 많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 저는 법륜스님의 말씀을 100퍼센트 신뢰하는데, 주위에서 제가 너무 맹신하는 것 같다고 걱정해요. 어떻게 스님 말씀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명쾌한 문답 속에 가슴이 시원해지고,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문경 수련원 대수련장을 나오니 날도 환하게 밝아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대전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12시 30분부터 대전 정토법당에서는 통일의병 대회가 열렸습니다. 차창 밖으로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두북 수련원에서 농사일을 할 예정입니다. 오후에 있었던 통일의병 대회 소식과 내일 있을 농사일 이야기는 다음 편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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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랭이

감사합니다~^^

2019-12-10 07:42:31

들풀

늘 부족한줄 알아차리며 어제보다
조금은 나아진 오늘이 되도록 부처님말씀 따르겠습니다

2019-12-09 10:58:39

박상민보경

감사합니다 ~^^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법체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_()_

2019-12-07 15: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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