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25 농사 회의, 대학생 소셜클럽 3강 인생관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두북에서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대학생들을 위한 강좌 소셜클럽 3강이 ‘인생관’을 주제로 열렸습니다.

새벽 어스름이 물러가자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밭을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이 어제 문경에서 불교대학 졸업 특강을 하고, 대의원회의를 하는 동안 행자들이 밭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한 해 동안 배추, 무, 가지, 오이, 호박, 생강, 들깨, 고구마 등 다양한 작물이 자랐던 밭은 이제 빈 땅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농사에 사용했던 끈이나 도구가 떨어져 있지 않은지 한 번 더 살펴보았습니다. 허술한 울타리는 망치로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밭을 둘러보고 고추 비닐하우스로 갔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전 수확을 마치고, 실험 삼아 남겨 둔 고추를 살펴보았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니 후끈합니다. 남겨 둔 고추들은 그 사이 붉어졌습니다. 누렇게 변한 잎 사이로 붉은 고추를 땄습니다.


비닐하우스 끝에는 가지와 토란을 키웠습니다. 한 때는 울창했지만 말라버린 가지 줄기에도 가지가 달려있었습니다. 먹을 만한 것들은 땄습니다.


다 따고 모아보니 고추가 두 상자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토란을 캤습니다. 먼저 토란 줄기를 베고 삽으로 토란 주위 흙을 펐습니다.




어미 알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토란을 떼냈습니다. 스님은 행자들이 버린 알줄기를 다시 땅속에 심었습니다.

“겨울을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실험해봅시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알줄기를 파묻고 보온이 되도록 고추 잎 무더기로 덮어주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을 보낸 토란이 어떻게 되었을지 내년 봄에 캐보기로 했습니다.

겨울 반찬으로 먹으려고 남겨두었던 배추에는 진딧물이 번식하고 있었습니다. 진딧물이 심한 배추는 뽑고 겉잎은 시래기를 만들기 위해 말렸습니다.

지난주에 김장을 하고 남은 큰 무들은 땅에 묻어둔 독에 저장했습니다.

11시가 넘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조계환, 박정선 님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두 분은 정토회 농사를 자문해주고 있습니다. 올해 농사를 평가하고 내년 농사를 계획하는 회의를 함께 했습니다.

올해는 동네 어르신이 몇 년 동안 방치되어있던 비닐하우스 두 동을 주셔서 실험 삼아 고추를 재배했습니다. 고추 수확을 마쳤지만, 여전히 일이 많습니다.

“아직도 고추가 달려요.”

“이번에는 심하게 농사가 잘 됐어요.”

“그래서 실패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웃음)

“아직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추나무도 뽑아야 하고, 물 소독도 해야 하고, 땅도 뒤집어야 해요,”

농사를 전담하는 사람이 없고, 스님과 수행팀이 사회활동을 그대로 하면서 틈이 날 때만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짓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공동체 행자들이 주말마다 돌아가며 농사일을 도왔지만 서울에서 오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의는 어떻게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농사를 지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농사와 자급자족, 선농일치, 농사 수련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습니다.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로 박수)

회의를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밥상에는 오전에 수확한 배추가 올랐습니다. 생배추로 먹어도, 살짝 데쳐서 쌈을 싸 먹어도, 달큰하고 맛있었습니다.

농사 회의를 모두 마치고, 스님은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니 날이 완전히 저물었습니다. 7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에서 대학생을 위한 세 번째 강의가 열렸습니다. 이번 주는 ‘인생관’이 주제였습니다.

스님은 지난 강의 주제였던 ‘세계관’, ‘역사관’의 핵심을 정리해준 후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현상도 결과가 나타났다고 하면 반드시 그 앞에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건이 움직였다면 힘이 가해졌다고 말할 수 있죠. 어떤 현상이 있으면 반드시 그 현상을 일으킨 원인이 있습니다.

인연과(因緣果)의 원리

봄이 되었을 때 정원에 새싹이 텄다고 합시다. 그럼 여기에는 반드시 이 싹을 틔운 씨앗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씨앗이 없는데 싹을 틔울 수는 없잖아요. 싹이 텄다고 하면 반드시 씨앗이 있었어요.

그런데 씨앗이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싹이 튼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온도나 습도가 안 맞으면 싹을 틔울 수가 없잖아요. 씨앗이 있다고 반드시 싹을 틔우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싹이 텄다는 건 반드시 씨앗이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예에서 인(因)이 씨앗이고 연(緣)이 밭입니다. 그래야 과(果), 다시 말해 싹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와요. 우리는 보통 ‘인과’라고 말합니다. ‘그건 다 인과다’ 이렇게 말하죠. 정확하게는 ‘인연과(因緣果)’예요.

인연에서 연을 무시해버리면 사회적인 것을 무시하는 셈입니다. 종교는 주로 인과를 얘기합니다. ‘이 결과가 다 본인의 책임이다’ 이렇게 얘기하죠.

앞에 앉은 이 학생을 예로 든다면, 이 학생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는 자신의 수행 정도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안 돼요. 이 학생이 결혼하게 될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에도 영향을 받아요. 아무리 이 학생이 착해도 못된 남자를 만나면 인생이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주위 환경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나는 못된 남자를 만나서 괴롭다’, ‘이러저러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주로 연을 탓하는 거예요.

사회운동이나 사회주의는 주로 연을 탓합니다. ‘환경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렇게 말해요. 종교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도 종교적으로 보면 여기에 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어느 한쪽에 편중돼 있어요.

그러나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요. 인연과를 모두 얘기합니다. ‘내가 어떠냐,’ ‘내가 자라난 사회적 조건이 어떠냐’, 이 두 가지에 의해서 나의 삶이 규정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씨앗을 좀 더 좋게 만드는 것을 ‘수행’이라고 해요. 밭을 잘 가꾸는 것을 ‘정토’라고 합니다.

수행에서는 자기 변화를 강조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입장에서 볼 때는 여러분 전체가 연이 됩니다. 여러분 입장에서 볼 때는 제가 연이 되겠죠. 자기가 인이고 다른 사람이 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는 연을 개선해줘야 해요. 우리가 사회운동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의 고통을 얘기할 때 개인의 고통도 살피셨지만 연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예컨대 아기가 죽어서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은 아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도록 해서 괴로움을 해소해주시는 일도 하셨지만, 카스트라는 계급 제도와 남녀차별이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런 건 다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는 거예요.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인과도 아니고 연과도 아니고 인연과 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런 모습이 된 원인도 일본, 중국, 미국과의 국제 관계만 연구해서는 알기 어려워요. 거기다 한국 사회가 과거에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국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인 연관을 파악하는 사회학과 시간적인 연관을 파악하는 역사학을 공부해야 내 개인의 삶을 위해서도 그렇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스님은 인연과를 설명한 후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결국에는 뭐하려고 그래요?

"제가 고등학생에게 ‘네 소원이 뭐냐?’라고 물으면 학생은 ‘공부 잘하는 거요’라고 대답하겠죠. 그러면 제가 또 물어봅니다.

‘공부 잘해서 뭐할래?’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가죠.’
‘좋은 대학에 가서 뭐할래?’
‘그래야 좋은 회사에 취직하죠.’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뭐할래?’
‘그래야 돈을 많이 벌죠.’
‘돈 많이 벌어서 뭐할래?’
‘그래야 큰 집 사고, 좋은 차 사죠.’
‘좋은 차 사고, 큰 집 사서 뭐할래?’

이렇게 계속하면 끝에 가서 대답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도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여러분도 지금 ‘좋은 배우자를 만나겠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겠다’, ‘유학 다녀와서 어떤 일을 하겠다’ 이런 계획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쭉 해서 결국에는 뭐하려고 그래요?”

“죽으려고요.”

“죽으려고요? 그건 굉장히 비관적인 인생관이네요. (모두 웃음)

이렇게 물어보면 대다수는 마지막에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하면 왜 행복할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첫째, 돈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이 적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명제가 전제되어 있어요. 둘째, 지위가 높거나 권력을 가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셋째, 인기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하고, 인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기로 먹고사는 직업이 요즘 연예인들이죠. 인기 있는 연예인들을 보면 엄청나게 행복해 보이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여러분은 연예인을 만나보거나 연예인과 상담할 일이 별로 없지만, 저는 돈 있는 사람들도 가끔 만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가끔 만나고, 인기 연예인도 가끔 만나요. 돈과 지위와 인기가 있으니 행복해야 할 텐데,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훨씬 고민이 많아요.

돈이나 지위나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상상하며 살아가는데, 죽을 때까지 그것을 한 번도 못 이뤄보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대다수는 돈도 뜻대로 못 모아보고, 출세도 원하는 만큼은 못해보고, 인기도 마음껏 못 누려보잖아요.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지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요행히 그것을 이룬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요? 막연히 생각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누구 한 사람을 찍어서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인터뷰해 보세요. 돈 벌고 출세하고 인기 얻는 것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그래야 행복할 거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과연 행복해지냐’라고 마지막에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 하는 답이 나옵니다.

2600년 전 붓다의 삶 vs 지금의 내 삶

이걸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이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위가 높았습니다. 또 왕궁에서 살았으니까 당연히 재산이 많았죠. 그리고 기록을 보면 태자 시절에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다 버리고 출가를 했어요. 그걸 가지고 있을 때 이미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부처님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저항하는 가르침을 펼친 게 아닙니다. 그 당시의 기득권층에 속했지만 그 기득권을 갖고 있는 게 인생의 바른 길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은 거예요. 누가 저항을 해서 내려놓은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수행자라는 가장 열악한 삶의 조건을 택해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 살면서도 본인이 행복했어요. 그리고 괴로워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부처님의 삶과 비교해 보세요. 지금 우리는 내가 가진 조건에 대해 여러 가지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수준은 옛날 왕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먹는 데 껄떡거리고, 입는 데 껄떡거리고, 사는 집에 껄떡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 문제 갖고 괴로움이 계속되고 있어요. 이렇게 인생의 고뇌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행복하기 위해서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지금처럼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데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좋은 집 사고, 이렇게 계속 가더라도 여러분이 기대하는 목표에 살아있는 동안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요. 도달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하잖아요. 그렇다면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부처님이 태자 시절에 문제의식을 가졌던 부분이에요.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살았지만 인간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겁니다. 오늘날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국과 유럽에서 과거의 종교적인 관점과는 전혀 다르게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개인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결국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라는 문제예요. 여러분은 지금 대학생이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계획이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데에 매달리고, 졸업하면 재벌 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데에 매달리고, 취직하면 거기서 또 눈치 보고 승진에 매달리며 살아야 하겠죠. 이런 식으로 계속 살면 죽을 때까지 늘 눈치 보고 살지 않을까요?

시험 치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자기 필요에 의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협의나 양보를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하고, 헌신을 하더라도 내가 결정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자기가 스스로 결정해서 살고 있어요?

지금은 젊다고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길을 정년퇴직할 때까지 쭉 한 번 그려 보세요. 계속 매여서 살아야 하고, 계속 눈치 봐야 하고, 계속 껄떡거려야 합니다. 그런 데서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를 한 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렇다고 공부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이제는 점수 따기 위해서, 시험 치기 위해서, 남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공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돈 좀 더 받기 위해서 사는 길 말고 다른 길을 선택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공부를 하더라도 그냥 필요에 의해서 공부하는 거예요. 친구보다 더 앞에 가서 뭐할래요? 친구를 밟고 올라가서 뭐할 건데요?

이렇게 개인적인 삶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성공이 실패가 된 이유

이번에는 사회적인 삶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시골에 살던 한 소년이 공부를 잘해서 경성제대 법대에 갔다고 합시다. 고시에 합격해서 검사가 되었어요. 승승장구해서 지방검찰청장까지 올라가서 결혼도 하고 좋은 집에 살았어요. 그 정도면 그 당시에 굉장히 출세한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하루아침에 매국노가 됐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인생이 이렇게 된 걸까요?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한 건 없어요. 남을 때린 적도 없고, 도둑질한 적도 없고, 성추행한 적도 없고, 거짓말하고 욕설한 적도 없고, 술 먹고 취해서 행패 피운 적도 없고, 법률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개인적 하자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친일파라고 해서 잡혀서 감옥에 가고 재산을 압수당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이 하루아침에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느님이 외면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사주 때문도 아니고, 전생에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니고, 나쁜 행동을 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잖아요. 절이든 교회든 종교 활동도 열심히 했고, 부모도 잘 섬겼고, 조상도 잘 모시고, 법률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잖아요. 어제까지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뭘 잘못했기에 갑자기 이렇게 벌을 받아야 해요?

이처럼 개인적 윤리와 도덕만 갖고는 우리의 인생을 다 설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종교를 갖고도 설명이 안 돼요. 우리의 삶은 남하고 관계 맺고 있는 속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관계, 즉 공동체 속의 나로 존재합니다. ‘나’는 개인으로서의 나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나예요.

우리가 일본 식민지 지배를 받을 때도 개개인은 다 자기 직분이 있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잘 지어야 하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를 잘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를 잘해야 하고, 기업 하는 사람은 기업을 잘 운영해야 하고, 경찰은 도둑을 잘 잡아야 하고, 공무원은 행정을 잘해야 해요. 이처럼 각자 자기의 인생 목표가 있고 직분이 있어요.

그런데 당시 2천만 동포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가장 저해하는 요인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나라를 빼앗겼다’라는 거예요.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개인에게는 다 각각의 자기 과업이 있겠지만, 공동체 전체로 볼 때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관건인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 속 주인공은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는 잘 살았는지는 몰라도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무 역할도 안 했잖아요. 역할을 안 한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쩌면 공동체 발전을 저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의 검사는 독립운동가를 잡아서 감옥에 넣어야 했으니까요. 그것이 자신의 직분이었잖아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당시의 법에 따르면 다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했기 때문에 자기는 배운 그대로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개인의 삶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좋은 직장에 다니기를 꿈꾸지만, 그것만 갖고는 여러분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해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씨앗인 인을 돌보는 동시에 주어진 밭인 연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일제 강점기 때는 ‘나라의 독립’이었어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삶

이렇게 그 당시 전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일을 ‘시대적 과제’라고 합니다.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는 것을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아는 게 역사의식이 아니에요. 역사를 공부하면서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때 ‘역사의식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시대적 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시대적 과제를 모르면 시대의 요구에 역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는 뭘까요? 그 답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겁니다. 지금은 서로 답이 다르니까 누가 옳은지 잘 모르지만, 30년쯤 지난 뒤에 지금을 돌아보면 시대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아주 분명해질 겁니다. 그것을 미리 파악해서 그 방향에서 자기 인생의 길을 설정해야 합니다. 내가 의사가 되든, 노동자가 되든, 농업을 하든 관계없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 속의 검사가 역사의식이 있었다면 검사직을 그만두고 독립군이 되는 길도 있었겠죠. 그런데 반드시 그것만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 행동해야 하는 길은 아니에요. 검사직을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시대적 과제가 나라의 독립이라는 걸 알면 독립군이 잡혀왔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감옥에서 빼내 주는 방법이 있겠죠. 그것도 눈치 보이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형량을 좀 줄여서 구형하는 방법도 있고요. 그것도 눈치 보여서 도저히 못 한다면 자기가 받은 월급 중 일부를 독립군 자금으로 지원하는 길도 있겠죠. 꼭 자신이 가진 지위나 재산을 다 버리라는 건 아니에요. 이 사람이 광복 후 친일 매국노 명단에 올라 있더라도 조사를 했을 때 정기적으로 독립군 자금을 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참고가 되겠죠. 조사해 봤더니 이 사람이 정말 중요한 때마다 독립군을 빼내 준 경우가 있다고 하면, 오해를 벗어날 수 있겠죠.

역사의식을 갖자고 해서 모든 삶을 다 팽개치고 그것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발전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개인의 삶이 나아간다면 더 좋지만, 혹시 역방향에 섰다 하더라도 그 역방향의 역할을 최소화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야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는 거예요. 인생을 설계할 때는 항상 두 가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째, 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
둘째,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두 가지가 인연으로 결합해서 내 삶의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처럼 너무 헐떡거리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남이 쌓아놓은 지식 덩어리를 기억하는 데 몰두하거나, 남이 줄 세우는 끝에 붙어서 아우성치며 살기보다는 조금 더 다른 길을 모색해보면 좋겠어요. 설령 그렇게 살더라도 자기중심을 딱 잡아서 헐떡거리지 않고 사는 길을 가보면 좋겠습니다. 이런 제안을 드리며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박수)

곧바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학생들은 강연을 들으면서 생겼던 의문을 자유롭게 이야기했습니다.

  • 일제강점기에는 독립, 독재 시기에는 민주화가 시대적 과제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통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보면 통일을 원하지 않는 비율이 높은데 통일이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통일이 시대적 과제라고 한다면 대학생들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나요?
  • 일제시대 검사 이야기를 들으며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관습, 윤리, 도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운이라고 설명합니다. 운도 인과 연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운은 인연과 상관없는 독립적 개념인가요?
  • 20대 초반에 스님 말씀을 들었을 때 공감이 많이 갔는데, 최근에 돈독이 많이 올랐어요. 강의를 들으면서 ‘그래도 돈이 많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가족과 재산으로 다투고 스트레스받아도 고급 외제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많이 변한 거 같은데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 스스로에게 ‘취업할 수 있을까?', '더 높은 회사에 상향 지원해도 될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런 질문을 잠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님은 인생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곁들여 자세하게 답변해주었습니다. 10시가 넘어 질의응답을 마쳤습니다. 대학생을 위한 마지막 강의를 마치며 스님은 ‘이제 노땅이 된 것 같다’며 웃었습니다.

“어떻게 조금 도움이 되었어요?”

“네!”

“저도 이제 늙었나 봐요. 제가 정토회를 처음 시작할 때 여러분 같은 대학생들과 함께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기성세대는 제 말을 아무도 안 들어주었거든요.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제 경험이 이제는 여러분과 교감이 좀 덜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노땅이 되었나 봐요. 저는 영원히 노땅이 되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웃음)

그래도 저로서는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최대한 이야기한 것이니까 참고하셔서 공부하시면 좋겠습니다.” (모두 박수)

대학생을 위한 강의를 제안한 것은 스님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박수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모둠별로 앉아서 강의를 듣고 난 소감과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직 수능 잘 보고 싶고, 학점 잘 받고 싶어 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지, 돈이 정말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시대적 과제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는데, 막상 나에게 닥친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여서 아직 제 가슴에 와 닿지 않았아요. “

“강연에서 말씀하신 인, 연, 과 중에서 나는 그동안 ‘인’에 대해서만 고민을 했지 ‘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크게 느꼈습니다.”

“오늘 인생관 강의를 통해 앞서 세 번의 강의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좋았습니다. 시대적 과제를 내 직장과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앞에 있는 상황만 보고 나를 돌아보지 않았는데, 세 번에 걸쳐서 스님의 강의를 듣고 나니 무지가 제일 무서운 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정답보다 더 귀한 질문을 하나씩 품은 청년들은 활발하게 자신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다른 날보다 조금 더 길었습니다.

청년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님은 서초 법당으로 돌아와 원고 교정을 한 뒤 하루를 마쳤습니다.

전체댓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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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감사드리며 참가자분들께도감사드립니다^^

2020-01-01 18:53:19

무지랭이

유연한 사고를 지닌 노땅을 그려봅니다. 고맙습니다~^^

2019-11-30 17:30:35

생각하며 천천히 글로 써도 어려운 것들을.. 말로서 순간적으로 내보내시는 능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2019-11-30 15: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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