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0.22 INEB대회 기조연설
“삶 속에서 깨달음이 살아 움직이려면”

안녕하세요. 스님은 2019 INEB 대회 개막식에서 ‘깨달음의 생활화’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후 한국으로 출발했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예불을 드리려 법당에 왔으나 법당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방에서 예불을 드렸습니다. 동이 트지 않아 어두운 새벽 6시, 스님은 산책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작은 손전등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비추며 걸어가니 동네 개들도 따라나섭니다. 큰길로 나오니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청소를 하며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가게도 하나둘 보입니다. 한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달려갑니다.

이 곳 비르(Bir) 지역은 패러글라이딩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합니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히말라야 산맥을 등지고 하늘을 가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손님이 오다 보니 이 산골짜기에 식당, 카페, 민박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문이 닫힌 가게들을 지나쳐 패러글라이딩이 끝나는 곳에 오니 눈앞에 절경이 펼쳐집니다. 멀리 눈 덮인 산이 보였습니다.

“이야! 경치 좋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았습니다. 동쪽 하늘은 불그스름하고, 서쪽에는 발아래로 산 능선들이 구불구불 흘러갑니다.

마을로 접어드니 군데군데 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곳 벼는 한국 벼 보다 키가 컸습니다.

“벼가 키가 크면 쉽게 쓰러져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개량을 해서 키가 작은 벼로 농사를 지어요.”

수련원 앞에서부터 따라오기 시작한 온 동네 개들은 여전히 스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일행처럼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합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밝아왔습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잠시 만끽했습니다.

1시간 동안 산책을 하고 수련원에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따뜻한 죽, 수련원에서 직접 만든 빵, 따뜻한 우유와 함께 시리얼을 먹었습니다.

잠시 휴식한 뒤 개막식이 열리는 야외무대로 이동했습니다. 무대 주위에는 유기농 밭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청중은 카펫을 깐 계단식 잔디밭에 앉았습니다. 햇빛은 흰 천으로 가렸습니다. 햇빛은 강렬했지만 바람은 선선했습니다.

INEB(국제 참여불교 네트워크)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INEB를 창립한 슐락 박사님은 법륜스님에게 이번 대회에 참가하여 앞으로 INEB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조언해달라고 여러 차례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간곡한 요청을 받아 하반기 국내 강연 일정을 어렵게 조정하여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9시부터 개막식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일본에서 온 참가자들이 일본식으로 예불을 올렸습니다. 반야심경과 비슷한 발음이 들렸습니다.

INEB 이사장인 하르샤 님의 환영사를 하고 이번 대회를 주관한 디어 파크를 대표해 프라샨트 님이 인사 말씀을 했습니다. 이어서 톈진 팔모 스님과 법륜 스님이 무대에 올라 촛불을 밝혔습니다.

먼저 톈진 팔모 스님이 발표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원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탐진치라는 잡초에 물과 비료를 주어 키우기보다 아름다운 꽃과 풀을 키워야 해요.

자비심은 항상 미소 짓고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엄한 사랑 같은 자비심도 있어요. 분노가 아닌 엄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해야 합니다.”

다음은 법륜스님의 차례입니다. 스님은 _“만나서 반갑습니다. 날씨가 아주 청명하네요. 여러분 마음도 오늘 날씨처럼 맑았으면 좋겠습니다.”_라고 인사하며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의 생활화

“오늘 주제가 깨달음의 문화인데요. 저는 이 주제를 ‘일상 속에서 깨어있기’ 또는 ‘깨달음의 생활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깨달음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너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깨어있느냐를 주제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장사를 하든, 직장에 출근을 하든, 가족을 거느리고 생활을 하든, 하루하루 이런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저는 두 가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나의 문제이고, 하나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사람의 문제입니다.

첫째,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세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부모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번뇌가 많고 괴로움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이나 지위 등 사회적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내가 어떻게 오늘과 같은 맑은 하늘처럼 내 마음을 항상 맑게 가질 수 있을까요?

붓다께서는 우리의 괴로움이 나쁜 행동 때문이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일어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우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까요? 누구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누구나 지나 놓고 보면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됐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어제 달라이 라마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 귀에 들리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인식 상의 오류’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맞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해서 ‘아! 이거다’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실제와 다릅니다. 이렇게 인식 상의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첫째, 감정이 흥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나거나 탐욕이 일어나서 그 감정에 휩쓸려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인식 상의 오류가 시정되면 감정은 가라앉고 금방 평정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인식 상의 오류가 생겼느냐에 더 중심을 둬야 합니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개는 던지는 흙덩이를 쫓는데, 사자는 던지는 사람을 쫓는다.’

개가 흙덩이를 쫓는다는 것은 드러난 현상에 따라서 문제를 풀려고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자가 사람을 쫓는다는 것은 본질을 꿰뚫어서 문제를 푼다는 뜻입니다. 흙을 던지는 사람을 공격하면 모든 것이 멈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곳에서 행동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내가 찾고 싶은 것을 찾을 수도 없고, 나도 모르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을 밝히게 되면 물건이 어디 있는지 금방 알 수 있고, 자기가 필요한 것을 금방 찾을 수 있어요. 그것처럼 인식 상의 오류가 시정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인식 상의 오류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첫째,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없고, 너무 큰 것을 알 수가 없고, 너무 작은 것도 알 수가 없고, 너무 긴 시간의 변화도 알 수가 없고, 반대로 너무 짧은 시간의 변화도 알 수가 없어요. 오늘날은 여러 가지 기계를 이용해서 먼 우주도 알 수 있고, 미세한 원자의 세계도 알 수 있지만,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이런 시공간적인 한계 때문에 사실을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오해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부처님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어요.

둘째, 상대적으로 인식한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물컵과 물병이 있습니다. 이 물컵은 물병보다 작아요. 이 물컵이 작다는 것은 상대적인 인식입니다. 만약 이 물컵을 뚜껑과 비교한다면 크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 물컵이 작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입니다. 오랫동안 이 조건 속에서 물컵을 인식하다 보면, 이 물컵은 작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 물컵이 객관적으로 작은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인식 상의 오류로 인해서 우리는 ‘차이’를 ‘차별’로 잘못 인식하게 됩니다. 사람은 각자 살아온 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물컵과 물병 사이에서 늘 물컵을 인식한 사람은 물컵이 작다고 인식하게 되고, 물컵 뚜껑과 물컵 사이에서 늘 물컵을 인식한 사람은 물컵이 크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 사람은 물컵이 작다고 주장하고, 한 사람은 물컵이 크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갈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경험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은 상대가 왜 작은 것을 크다고 하고, 왜 큰 것을 작다고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객관적 존재는 본래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인식할 때의 조건 속에서 크다 작다고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대승불교(Mahayanist Buddhism)에서는 이것을 철학적인 표현으로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 물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선불교(Zen Buddhism)에서는 이것을 ‘다만 그것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근본불교(Theravada Buddhism)에서는 이것을 ‘연기되어 있는 것이지 실체가 없는 ‘무아’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불교, 대승불교, 근본불교 모두 근본적인 차이는 없고 용어가 다를 뿐입니다. 올바르게 인식하게 되면 우리들의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진리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 나를 본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진실을 보게 되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직접 경험을 해야 합니다. ‘담마 토크’는 연기, 무아, 무상을 직접 체험하여 고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제가 즉문즉설을 할 때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서 고민이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질문 속에는 이미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어요. 첫째, 남편이 술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편이 술을 안 먹을 수 있게 제가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도와줄 수가 없어요. 제가 만약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트럼프나 김정은의 생각부터 먼저 바꿀 것입니다. (모두 웃음) 그래서 저는 먼저 이렇게 답변합니다.

‘저는 남편을 바꿀 능력이 없으니까 남편을 고치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물어보세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저에게 찾아와서 묻는 이유는, 첫째,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이 남편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남편과 헤어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헤어지길 원했다면 아마 저한테 찾아와서 묻기 전에 본인이 먼저 결정을 했을 거예요. 그런 이유 때문에 질문한 분은 지금까지 괴로워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남편이 술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여성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물어봅니다.

‘이 남자와 헤어질 수 없다면, 괴로워하면서 같이 살래요? 괴롭지 않으면서 같이 살래요?’

이 여성분은 괴롭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남편이 술을 먹어도 좋다고 당신의 생각을 바꾸세요.’

그러면 이 여성분이 의아해합니다. 여러분들도 의아하죠? 여성이 다시 질문합니다.

‘술은 나쁘잖아요.’

제가 다시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당신 남편이 술을 먹는 것을 어떡합니까? 남편이 술을 못 먹게 할 수 있나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당신의 현실이잖아요. 그러면 남편과 헤어질 수 있나요? 당신은 헤어질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유일한 탈출구는 남편이 술을 먹어도 좋다고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당신 남편의 입장에서는 매일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술이라도 먹어야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당신 남편에게는 술이 알코올이 아니라 약이에요. 그러니 ‘우리 남편에게 있어서 술은 약입니다’라고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 여성의 가정은 점점 평화로워집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술을 먹고 와도 이 여성이 짜증을 내지 않고 ‘아! 내가 약을 줘야 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먹고 오니까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약이니까 남편이 밖에서 먹고 오지 않으면 부인이 직접 차려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가정이 평화로워지고 남편은 점점 술을 적게 먹게 됩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살펴보면 이것이 바로 정해진 것이 없는 ‘무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를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험하고 체험해서 삶의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느냐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자신을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담마’를 공부해야 합니다. 남편이 술을 먹든, 아이가 공부를 못하든, 내가 암에 걸렸든,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속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변화가 필요하면 변화를 도모해야지 괴로워하고만 있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해서 자신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이제는 이 좋은 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 약을 먹고 나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렇게 하면 낫습니다’라고 아주 적극적으로 말할 수가 있어요.

셋째, 지금까지의 내 삶이 남으로부터 도움을 얻으려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에게 구걸하면서 살 이유가 뭐가 있어요? 조금이라도 남을 돕기 위해 재물을 기부하고, 재능을 기부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 좋잖아요.

자기 삶이 괴로워서 아우성치던 사람이 이렇게 변화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연을 착취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일회용을 쓰지 않고, 손수건이나 물컵을 가지고 다닙니다. 한국의 경우 날씨가 추워져도 난방을 적게 틀고 내복을 입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천합니다.

또 배가 고프거나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보통 사람 같았으면 로힝야 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지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행을 통해 삶이 바뀌게 되면 한반도의 평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회 정의를 위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일반 대중도 사회 정의를 위해 행동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미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검은색, 흰색, 노란색 털을 가진 새끼를 차별하나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피부 빛깔을 가지고 차별을 하나요? 그건 개보다도 못한 인생이에요. 동물 세계에서 암수를 차별하는 것을 봤나요? 그렇다면 여성을 차별하는 행위는 짐승보다도 못할 일이에요. 그래도 우리는 사람인데 짐승보다는 조금 나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접근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말에 동의를 합니다. 이렇게 ‘담마’(Dharma, 불법)를 너무 특별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서 담마가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괴로움 속에 살던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면 첫 번째로 하는 행동이 기부입니다. 자기도 남을 돕고 싶다며 기부를 합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봉사활동을 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대한 이해도 올바르게 하게 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제가 서양의 교육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가 전부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저는 출가를 했습니다. 저에게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이것은 오직 붓다로부터 받은 지혜입니다.’

이 붓다 담마는 모든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해준다고 생각해요. 저의 작은 경험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 감사합니다.”

참가자들은 발표 내용에 공감하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며 집중했습니다. 발표를 마치자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모든 참가자가 모여 법당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INEB 활동가들은 서로 자리를 양보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사진 촬영을 하고 30분간 차를 마시며 휴식했습니다. 많은 참가자들이 스님께 와서 ‘훌륭한 법문을 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한 참가자는 스님의 발표 내용 중 술 먹는 남편을 둔 아내의 예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좋은 질문이라며 대화를 나누고, 다른 청중을 위해 질의응답 시간에 다시 질문해도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느새 휴식시간이 끝나고 발표를 해준 두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My question is little bit practical. I have been working with a community in Karnataka. I just want to know how to practice compassion. I'm working with the community which is from ancient time they do this work. I'm working with the students. I teach them religion. The parents don't encourage them to study. They just smash them and tell them from my grandfather we are doing this work. So I feel sad, so please guide me how to practice compassion in this situation?

제 질문은 좀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저는 카르나타카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고대 조상 때부터 같은 일을 해왔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종교에 대해 가르치는데 부모들이 자녀들을 공부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애들을 때리기만 하고 조상들도 이 일은 해왔으니 우리도 이 일을 하는 거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슬퍼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비심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비심을 키운다고 하는 표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아요. 진실을 알게 되면 자비심은 절로 나오게 돼요. 고추를 따거나 벼를 심거나 베는 일을 아이들과 같이 하게 되면, ‘내가 먹는 밥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구나’ 하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서 직접 듣게 됩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이 밥을 아껴 먹어야겠다고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자꾸 어떤 의무나 주장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같이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붓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했어요.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나쁜 사람은 없어요.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에요.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누구나 다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이 일은 좋은 일이라고 너무 강요하는 것에 저는 찬성하지 않아요. 붓다의 가르침은 아무리 좋은 일도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필요를 느끼고 해야 그 일이 지속 가능합니다. 강요하는 것은 언젠가 다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마음가짐을 바꾸면 가정에 평화가 온다고 하셨는데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선불교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마음가짐을 바꿔서 군국주의에 따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줬어요. 술 마시는 남편을 보고 아내가 마음만 바꿔 산다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변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스리랑카는 타인에게 의존성이 높아지는 사회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생존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적이지 않게 도울 수 있을까요?”
“세계화 시대에 불교의 가르침, 지식의 상품화, 과학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다른 사람을 도우는 사람들이 지칠 때, 어떻게 포기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개막식이 끝나고 스님은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 뒤 공항으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급하게 서두르며 점심을 먹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스님이 떠나려고 하자 디어 파크 수련원의 프라샨트 님이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 저희 수련원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나중에 또 오셔서 많이 가르쳐주세요. 디어 파크 수련원에서도 쓰레기 제로 운동을 하고 있어요. 쓰레기는 퇴비화하고 유기농 밭을 일구고 있답니다.”

“잘하고 있네요. 정토회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환경운동을 하고 있어요.”

INEB 견학으로 정토회를 방문했던 스님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2년 뒤 한국에서 INEB 대회를 할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스님은 함께 한 국제국 활동가들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하고 밝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습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차는 부지런히 떠났습니다.

다람살라 공항에 도착한 스님은 가까스로 델리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델리에서 다시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내일 한국에 도착한 스님은 전주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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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사트바

감동적인 법문입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_()_

2020-09-03 22:50:58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1-30 19:20:59

감로향

정말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셔서 이곳 저곳에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스님 감사합니다_()_

2019-10-28 09: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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