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15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
"베푸는 것이 곧 이익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하루 종일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기획위원회는 미래에 정토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수립하고, 전체 사업을 점검하는 회의입니다.

오늘 회의를 하기 위해 창원, 진주, 통영, 대전 등 전국 곳곳에서 온 기획위원들은 오랜만에 만난 도반들과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0시 30분이 되자 삼귀의 반야심경과 함께 제10차 기획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6개 분과에서 지난 3개월 동안의 진행 상황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가장 중요한 안건인 ‘제10차 천일결사 사업 방향’에 대해 천일준비위원회에서 발표했습니다.

기획위원들은 천일 준비위원장의 발표를 경청한 후 의견을 보태기도 하고,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면서 10차 천일결사에는 어떤 과제에 집중하면 좋겠는지 다양한 의견들을 내었습니다.

스님도 발표 내용을 경청한 후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1차 만일결사를 처음 시작할 때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짚어주었습니다.

“1차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 우리는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불교중흥의 목표는 통일이 되었을 때를 예상해서 전국에 읍면동이 5천 개라고 생각하고, 첫째, 우리가 사는 마을 읍, 면, 동 5천 여 곳마다 5천 개의 수행자 모임을 만들자. 둘째, 수행자 모임마다 법사를 1명씩 배치하자. 셋째, 사회를 정화하려면 인구의 1%가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불교 중흥의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민족중흥의 목표는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입니다. 1차 만일결사가 앞으로 4년 남았는데, 4년 안에 통일이 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남북 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남북 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자가 이뤄진다면, 통일에 준하는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JTS의 목표는 아시아의 유니세프 같은 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유니세프에 버금갈 정도로 어린아이들을 돕는 전문 기구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기획위원들은 1차 만일결사의 목표를 기준으로 했을 때 우리는 어디까지 왔고, 앞으로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불교대학, 수행 법회 등을 포함한 교육연수 사업에 대한 발표와 조직 구조 개편에 대한 많은 의견 교환이 있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먼 길을 달려와 하루 종일 회의하느라 모두들 수고가 많았다고 격려한 후 저녁 8시 30분이 되어 오늘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회의만 해서 어제 경전반 입학 법문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전체 내용은 다음 주 경전반 입학식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경전반에서는 ‘금강경’을 먼저 공부하고, 그다음에 ‘반야심경’을 공부합니다. 대승경전은 많지만 다 공부할 순 없잖아요. 그리고 한국 불교에는 화엄사상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화엄사상 전체를 공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의상조사가 요약해 놓은 ‘법성게’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선불교에서는 육조 혜능대사의 ‘육조단경’과 삼조 승찬대사가 쓴 ‘신심명’을 공부합니다.

불교대학에서 ‘불교의 변천사’ 과목을 공부할 때 전 세계에 퍼진 불교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내용은 잘 몰랐잖아요. 경전반에서 직접 경전을 공부해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근본불교니, 대승불교니, 선불교니 이렇게 이름이 달라도 내용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것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한국 불교는 선불교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불교를 그대로 따르면 될까요? 아닙니다. 선불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화 되고 학문화 돼서 지금 중생들이 갖고 있는 고뇌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또 새로운 불교운동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불교란 바로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뇌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즉문즉설을 듣거나, 깨달음의장에 갔다 오면 많은 사람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고뇌를 해결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이 종교화 되자 일어났던 대승불교의 관점, 대승불교 또한 종교화 되자 일어난 선불교의 관점을 살려야 합니다. 정말 대중의 고뇌를 해결하고,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도 놓치지 않는 길을 가야 해요. 이것을 공부해야 왜 정토회가 전국 방방곡곡에 이미 절이 많은데 가정집에서, 빌딩에서 새로운 불교 운동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이 새로운 길을 가는 우리는 수행자이지 신자가 아닙니다. 마음이 청정한 자가 수행자고, 마음이 청정한 자가 머무르는 곳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예요. 그러면 장소가 빌딩이든, 가정집이든 중요하지 않아요. 스님이 있느니, 없느니 이런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행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기도를 합니다. 수행을 해야 업식으로 인해 일어나는 감정들에 놀아나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업의 물결에 휩쓸려서 바다에 빠져 아우성치는 중생의 삶에서 그 업의 물결 속에서도 안전하게 운전하는 배가 되는 수행자의 길을 가는 거예요.

이 길은 나만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다 이 길을 가야 해요.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기 때문에, 나만 행복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들도 행복해야 되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붓다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가 죽는 것도 안 되고, 상대가 살기 위해 내가 죽어도 안 돼요. 나도 살고 상대도 살아야 해요. 즉 나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이익을 보고 상대가 손해를 보면, 상대가 오래 못 참으니까 과보가 나에게 돌아옵니다. 상대가 이익을 보고 내가 손해를 보면, 내가 오래 못 참기 때문에 내가 중도에 포기하게 됩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고, 나도 이익이 되고, 상대도 이익이 되는 상생이 되어야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있고 과보도 없어요.

우리는 베푸는 것이 곧 이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이 도리를 알아서 ‘당신은 왜 나를 이해 안 해줘?’라고 하지 않고,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거예요. ‘왜 나를 안 도와줘?’가 아니라 내가 형편이 되는대로 도와주면 돼요. ‘왜 날 사랑 안 해줘?’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관점을 이렇게 딱 바꿔야 해요. 이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보시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는 길을 상구보리라고 한다면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은 하화중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필요한 물질을 베푸는 ‘보시’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나의 재능을 베푸는 ‘봉사’ 예요. 그래서 보시와 봉사를 하는 거예요.

수행이란 말속에 수행, 보시, 봉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수행의 의미를 더 나눈다면 나의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을 수행이라 이름 붙이고, 다른 이의 행복을 돕는 걸 보시와 봉사라는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정토행자는 이 세 가지를 함께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을 위한 수행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과연 그럴까요?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남편이 나를 이해히주지 않는다, 아내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괴롭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이 범부 중생이에요. 그런데 수행자는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든, 안 해주든 상관할 필요 없다. 그건 그 사람의 문제다. 괴로운 것은 내 문제다.’ 하는 관점을 가지는 자입니다. 그런데 더 적극적인 수행은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애초에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남을 돕는 것이 정말 자기를 이롭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행과 남을 돕는 봉사는 둘이 아니에요. 즉 보시하고 봉사하는 게 결국은 자신의 수행을 돕는 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 따로 있고, 보시와 봉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보시, 봉사를 통해서 나의 수행이 더 깊어지는 거예요. 내 수행이 깊어지면 저절로 보시와 봉사의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합니다.

불교대학에서는 남 탓하며 살다가 내 문제임을 자각하고 내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에 더 중점을 뒀습니다. 경전반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곧 나의 수행을 돕는 거구나.’를 알아서 적극적으로 보시도 하고 봉사를 해야 해요. 명상하고 절하는 수행뿐 아니라 봉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과 갈등하는 자기를 돌이켜보는 수행도 함께 해야 됩니다.

다시 한번 경전반에 입학한 것을 축하드리고요. 경전반에서 경전의 내용만 이해하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배운 것을 직장에서, 가정에서 실천해야 해요. 특히 정토회에서 업무를 맡아서 계속 연습하는 것이 진정한 경전반 수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반 다니는 동안에 무엇이라도 책임지고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하루 종일 기획위원회 회의를 한 후 울산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두북에서 하루 종일 봄맞이 농사를 지을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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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나도 좋고 남도 좋고, 나도 이익이 되고, 상대도 이익이 되는 상생이 되어야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있고 과보도 없어요." 감사합니다.~~^^

2020-04-03 19:52:09

이지은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상생의 길을 가야 과보가 없다라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2019-03-20 00:30:55

정지나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 의해 움직이려하는 나를 자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9-03-19 13: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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