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14. 출가재일 기념 법문, 경전반 입학 법문 촬영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께서 진리의 길을 따라 도를 얻기 위해서 출가하신 음력 2월 8일 출가절입니다. 스님은 출가절을 맞이하여 서울 정토회관에서 전국 생중계 방송으로 기념 법문을 했습니다.

오전 10시,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듣기 위해 200여 명의 대중들이 정토회관 1층 법당에 자리했습니다. 더불어 160여 개의 전국 정토법당에서 3000여 명의 대중들도 생중계 방송을 보기 위해 스크린 화면 앞에 앉았습니다.

전국 정토법당은 오늘 출가절을 시작으로 일주일 뒤인 열반절까지 8일 동안 용맹 정진 기간을 갖습니다. 매일 법문을 듣고 300배 정진을 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오늘은 출가절이자 동시에 8일 용맹 정진의 입재일입니다.

스님은 먼저 출가하기 전의 부처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12살 때 농경제에 참석하여 ‘왜 하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불행해져야 하는가’ 하고 깊은 사색에 잠겼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습관의 노예로부터 벗어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에 대해 법문을 했습니다.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핵심은 ‘소비주의’입니다. 뭐든지 많이 가지고 많이 쓰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이 오늘날 빈부격차를 더욱더 조장하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에 나고 있는 사건들도 전부 쾌락을 즐기다가 생긴 일이에요. 어떤 인기 연예인 한 사람의 문제라고 보시면 안 돼요. 인기가 있든, 돈이 있든, 지위가 있든, 세상에서 교만한 자들이 벌이는 이런 일들은 사실 범죄예요. 여러분들은 이런 걸 못해봐서 껄떡거리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범죄입니다. 2,600년 전에 노예들을 함부로 버리는 것과 지금 이런 사건들이 무슨 차이가 있어요?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하는 겁니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미세먼지 문제도 결국은 우리가 소비주의에 중독되어서 일으키는 문제예요. 단순한 쾌락의 문제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잘못돼서 생기는 전 지구적인 문제냐 하는 차이밖에 없어요. 이겨야 하고, 더 가져야 하고, 더 잘나야 한다는, 이렇게 우리가 세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오욕락(五欲樂)이에요. 그러나 붓다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이런 삶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이렇게 확연하게 정리가 됐기 때문에 왕위를 버린 거예요. 붓다는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 있던 왕위도 버렸는데, 우리는 지금 해탈의 길로 가겠다면서 없던 왕위도 자꾸 가지려고 해요. 그러면서 붓다의 길을 따른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어린 시절 농경제에 참여했을 때 우리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가진 모순을 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이 길은 아니다, 이 길을 통해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라고 깨달은 거예요. 남이야 고통스럽든 말든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면 내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만족을 얻고자 욕망을 채우게 되면, 욕망이 더 커져서 끝이 없게 됩니다. 결국 껄떡거림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견주어서 보면 이것은 나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도 맞받아치겠죠. 그것이 과보예요. 원인을 만들고 결과를 받게 되는 거죠.

부처님은 ‘이 길은 올바른 삶의 길이 아니고, 자유의 길, 평화의 길, 행복의 길이 아니다’라고 확연히 알았기 때문에 미련이 끊어진 거예요. 그 전에는 아버님의 요청도 있고, 어머님의 요청도 있고, 부인도 있고, 아기도 있으니까 어쨌든 왕궁 안에서 길을 찾아보려고 오랫동안 탐구했어요. 그러나 ‘이 길은 아니다!’라고 확신이 드니까 아무런 미련이 없었던 겁니다. 속된 말로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보듯이 왕궁을 떠난 거예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이것은 아니다’라고 확신이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출가를 ‘유성출가(踰城出家)’라고 합니다. 왕이 못 돼서 포기한 게 아니라, 왕이 될 수 있었는데도 버리고 뛰어넘었다고 표현해요. 그래서 싯다르타가 출가할 때 성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답을 얻기 전에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오지 않겠다. 독약을 먹고 죽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죽든, 나는 돌아오지 않겠다.’

이렇게 외치고 길을 떠났고, 또 시종을 돌려보낼 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친지들에게 얘기해라. 나는 어떤 사람의 꼬임에 빠져서 출가한 게 아니다. 또 천상의 복을 얻기 위해서 출가한 것도 아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너무 안타까워하지도 마라. 나는 내가 가장 원하고,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길을 떠나서 6년의 긴 고행과 정진 끝에 새로운 길을 찾았어요. 우리가 정진을 어떻게 할 거냐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삶에 대한 관점이 먼저 정리가 돼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하고 얘기해보면 삶에 대한 관점조차 아직 정리가 안 된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여기 와서 수행을 해보겠다고 하는 건 참 가상해요. 복 비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와서 수행하는 걸 보면 참 가상해요. 제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절대 뭐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측면에서는 또 한심할 때가 있어요. 왜 와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담배 피우는 것과 똑같아요. 여기 계신 분들은 담배 안 피우죠? 지금 여러분들한테는 담배 안 피우기가 어려워요, 쉬워요?”

“쉬워요.”

“그래요. 누가 ‘담배를 어떻게 하면 안 피우냐?’라고 물으면 ‘그냥 안 피우지!’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담배 피우는 사람들에게는 담배 안 피우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사실은 담배를 피우는 게 어려운 일이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담배를 피우려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선 돈이 있어야 하죠. 담배 사러 가야죠. 그러면 한참 걸어가야 하잖아요. 담배를 산 다음 담뱃갑을 뜯어야지, 담배를 빼야지, 성냥도 있어야지, 그어서 불 붙여야지, 피워 물어서 빨아야지, 빨면 목구멍 따가운데 참아야지, 재 떨어야지, 주위에 눈치 봐야지, 일이 엄청나게 많잖아요. 그런데 담배를 안 피우는 건 아무 할 일이 없어요. 그냥 안 하면 돼요. (모두 웃음)

그런데 담배에 중독이 되면, 안 피우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돼요. 우리가 볼 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는데 그 사람에겐 오히려 그것이 쉽고, 반대로 안 피우는 건 그냥 안 피우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안 피울 수가 있느냐!’ 하게 됩니다.

어떤 것에 중독이 돼 있거나 집착이 돼 있으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소비에 중독이 돼 있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신문이며 언론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나쁜 놈들!’이라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담배를 어찌어찌하다 피워서 중독이 되듯이 그 사람들도 쾌락에 중독이 된 거예요. 유튜브에서 그런 동영상을 보는 데 중독이 되든지, 클럽에 가서 그런 일을 하는 데 중독이 되든지, 술을 먹는 것이 습관이 되든지, 그렇게 되면 그 일을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 자체가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는 ‘저 나쁜 놈!’이라고 하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감옥에 가서 몇 년 살고 정신을 차려서 돌아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사로잡힘에서, 그 집착에서, 그 중독에서 벗어났을 때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꿈에 강도를 만나 놀라서 도망을 열심히 다니다가 눈을 떠보면 ‘꿈이구나!’라고 하게 되잖아요. 눈을 떠야 ‘꿈이구나! 쓸데없이 도망 다녔네. 눈만 뜨면 될 일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부탁하고 도망을 다녔던가?’ 이런 생각이 들죠. 어떤 악몽을 꿔도 눈만 뜨면 끝이잖아요. 꿈의 종류에 아무 관계가 없어요. 또 그 악몽을 오래 꿨든 금방 꿨든 그것도 아무 관계가 없어요. 눈 뜨면 그냥 없어져요.

습관성이 돼 있으면 안 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담배 피우는 습관처럼 이런 중독성을 까르마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업식이에요. 우리는 지금 다 그런 업식을 갖고 있어요. 그 업식을 바탕으로 해서 가치관도 일어나고, 생각도 일어나고, 감정도 일어나는 겁니다. 담배 연기를 맡으면 우린 역겹다고 느끼지만, 담배 피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좋다고 느낍니다. 담배를 보면 우리는 치우지만 그 사람은 갖고 싶어 합니다.

그처럼 업식에 의해서 마음에서는 감정이 일어나고, 말이나 행동이 충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감정이 일어나면 통제가 안 됩니다. 다 자기감정의 노예가 돼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법석을 피우잖아요.

또 우리들은 각자 사유체계나 고정관념에 의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이라면 기독교의 관점으로, 옛날 유생들이라면 유교적인 관점으로 사물을 다 평가합니다. 내가 지금 옳다, 그르다 할 때도 전부 각자의 사유체계에 따라 평가하는 거예요.

이 껍질이 벗겨져야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담배를 끊고 보면 담배는 건강에 나쁘지, 돈 들지, 다른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공기를 나쁘게 만들어서 해를 끼치지, 한마디로 백해무익하지요. 그런데 담배 피우는 습관이 든 사람은 ‘담배를 왜 못 피우게 하느냐? 왜 길거리에서도 못 피우게 하느냐? 왜 세금을 올리느냐?’라고 오만 가지 주장을 해요. 여러분들도 이런 업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온갖 문제제기를 하고, 그래서 만 가지 번뇌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첫째, 우리가 업식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이치적으로 자각해야 해요. 둘째, 여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담배 하나 끊는 것도 쉽지 않고 음식 먹는 습관 하나 고치기도 쉽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성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더욱 어렵지요. 그러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노력하면 개선이 됩니다. 이 고정관념을 탁 깨버리는 게 ‘깨달음의 장’이에요. 그건 일주일만 해도 효과가 확 납니다. 그런데 무의식이라고 하는 이 까르마는 순간적으로 일어나요. 부딪히면 바로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찰나에 깨어있지 못하면 거기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꾸준한 연습이 필요해요. 그 꾸준한 연습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부처님도 출가하기 전에는 중생이었어요. 훗날 부처가 되니까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이 태어났다’라고 표현을 못했을 뿐이지, 정확하게는 출가하기 전까지는 그냥 중생이었습니다. 출가한 것은 자기의 본래 길을 찾아 나가겠다고 삶의 방향을 전환한 것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보디사트바’라고 합니다. 중생은 중생인데 부처의 길로 가는 중생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깨달음을 얻고부터는 ‘부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가를 해야 보디사트바가 돼요. 바로 그 출가의 핵심은 삶에 대한 가치관의 전환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까르마로부터 일어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해요.

담배 피우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에 비유해서 설명해 볼게요. 첫째, 지금 내가 담배 피우고 싶은 욕망은 아직 극복을 못했지만, 아무리 피우고 싶더라도 안 피워야 해요. 일단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 하면 더 이상 피우는 행위는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이게 계율이에요. 이걸 ‘피우고 싶다, 안 피우고 싶다’ 이렇게 접근하면 안 돼요. 일단 멈춰야 해요.

두 번째,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이 생각, 이 마음, 이 습관이 있는 한은 언제든 자기도 모르게 담배를 피울 가능성이 있어요. 계율을 어길 위험을 늘 안고 있는 거예요. 계율을 어기면 반성하고 다시 또 지켜야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이 까르마를 소멸시켜야 합니다. 이 업식을 소멸해야 해요. 그건 하루아침에 되지 않아요. 오늘부터 담배를 안 피우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오늘부터 되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가야 그게 소멸돼요. 그냥 세월만 흐른다고 소멸이 되는 게 아니라, 욕망이 일어나는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해요. 제어하거나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걸 알아차려서 사라지도록 하는 거예요. 이게 선정(禪定)을 닦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다’라고 하죠.

그런데 담배라고 하는 것이 본래 좋은 게 아님을 확연히 알아야 해요. 담배가 독임을 확연히 알아버리면 피우고 싶은 욕망과 습관이 완전히 끊어지는데, 우리는 확연하게 본질을 꿰뚫어 아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저건 나쁘다’ 이렇게 의식으로 아는 거죠.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끊었다가도 또 피우게 돼요. 이렇게 확연히 본질을 꿰뚫어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는다’라고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훌륭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윤리 도덕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계율조차 안 지키면 그건 윤리 도덕도 없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수행을 할 때 선정만 닦고 계율을 안 지키면 옛말처럼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계율만 지키면 어떨까요? 심리가 억압되고 있기 때문에 이건 도덕군자와 같아요. 남한테 피해는 안 주지만, 자기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 대부분이 지금 감정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아예 그걸 안 지키는 사람은 수행자라고 할 수도 없고, 수행자인데 얼굴 인상이 안 펴지는 사람은 그걸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모두 웃음) 그래서 우리가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늘 유지해야 해요. 놓치면 또 하고, 놓치면 또 하고요. 그리고 본질을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의 까르마의 근본적인 감정을 늘 움켜쥐고 있어요. 그래서 늘 남을 시비하며, 이런 감정이 나로부터 발생한다는 생각을 못 해요. ‘나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탁 확인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보면 자기감정은 못 보고 늘 남을 탓해서 문제제기를 하잖아요. 먼저 관점이 딱 잡혀야 수행이 안 되더라도 자기가 넘어지고 자기가 일어날 수가 있는데, 관점이 안 잡히면 넘어졌을 때 남 탓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수행을 시작할 때 수행문을 먼저 읽는 이유가 관점을 바로잡기 위해서예요.

오늘 출가재일을 맞아서 여러분들이 삶의 관점을 확실하게 가지고 부족한 자기를 봐야 합니다. ‘아, 내가 이게 부족하구나. 이게 나의 극복 대상이구나’ 이렇게 과제가 딱 잡혀야 거기에 집중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개선을 할 수 있어요. 이런 관점을 딱 갖고 있지 않고 적당하게 가니까 자꾸 이 집 갔다가 저 집 갔다가 하잖아요. 출가가 안 되고 가출이 되는 거예요. (모두 웃음)

오늘 출가재일을 맞아 우리가 정말 ‘나를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나, 자연을 위해서나, 오늘을 위해서나, 미래를 위해서나,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붓다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이런 출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법문을 마치고 나서 대중들이 명상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곧바로 정토회관 3층으로 이동해 경전반 입학 법문을 영상으로 녹화했습니다.

경전반 입학식은 다음 주에 전국 정토법당에서 각각 열리게 되는데, 오늘 녹화한 법문을 입학식 날 시청할 예정입니다.

법문을 촬영할 때 해외 활동가 몇 분이 자리했는데요. 촬영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해외 활동가들과 악수를 나누며 언제 한국을 떠나는지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 후 다음 일정을 위해 평화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평화재단에서는 오찬 모임을 하며 찾아온 손님 네 분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연이어 미팅을 가진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정토회 기획위원들과 기획위원회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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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나를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나, 자연을 위해서나, 오늘을 위해서나, 미래를 위해서나,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4-03 08:03:29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3-27 21:51:47

이백우

감사합니다 ㆍ

2019-03-18 15: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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