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4.1 통일학교 제 3강

 


 

스님께서는 오늘도 새벽예불과 기도 발우공양을 함께 하시고는 대중공사를 통해 환경적인 검소한 생활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검소하게 살면서 환경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화장실에 사람이 없는 데도 불이 켜져 있고, 사무실 곳곳에 사람이 없는 곳에 전등을 켜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환경실천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속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에코붓다에서 점검을 안해서 그런가요?

실천이 불편하다고 느낄 것이 아니라 실천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대중들에게는 환경실천 교육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안 살고 있다면 우리의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화되어 버립니다. 실천을 몸에 배게 해서 생활화 하면 좋겠습니다그리고 낮에는 창문을 열어서 자연채광을 최대한 이용해서 전기를 아껴 쓰도록 해야합니다.”라며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근검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도록 하며 대중들에게 환경운동을 이야기 하려면 우선 내가 몸에 배어야 함을 다시한번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대중공사에서 참회를 할 때 몇가지 고쳐야 할 것들도 지적해 주셨습니다. 참회를 할 때, ‘예불 참석시 1분 늦었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밖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대중살이가 참 팍팍해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 , ‘1분 늦었다, 몇 분 늦었다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변명조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2시간 늦었다는 것은 많이 늦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지만, ‘조금 졸았다. 1-2분 늦었다.’는 것은 조금 늦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참회가 자기변명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의 발로참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보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건강을 위해 두북이나 문경으로 가서 몸과 마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보자고도 제안해 주셨습니다.

 

대중공사 이후에 스님께서는 오늘 통일학교 제3강을 위해 집무실에서 강의준비를 하셨습니다.

 


 

오늘은 통일의병학교 세 번째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오늘도 역시나 강의 5분 전에 좌석이 이미 꽉 찼습니다.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모든 행사는 언제나 어김없이 정시에 시작합니다. 참석자들이 아직 덜 와서, 준비가 덜 돼서 같은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걸 익히 아는 참석자들인지라 일찌감치 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다리는 모습이 선생님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어제 역사 강의할 때 지도를 놓고 영역을 표시하면서 했으면 효과가 높았겠다는 말씀으로 가볍게 서두를 꺼내셨습니다. 어제 강의는 상고사에 대해서였는데, 상고사가 찬란한 영광의 역사였다면 오늘은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할 차례라고 하시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대의 흐름을 환기시키기 위해 어제 강의를 약간 상세하게 요약해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눈부신 청동기 문명을 이루고 한나라, 배달나라, 고조선으로 발전해 옵니다. 그러다 고조선 문명은 2500년 전 즈음에 발전 속도가 중원에 뒤지게 됩니다. 청동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다 보니 그에 안주하여 철기문명의 발달이 늦어진 것입니다.

 

청동문명은 주로 제기와 무기로 사용되는 데 반해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가 뛰어난데다 생활도구로 만들어지니 농업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중원에서는 철기문명의 발달로 양자강 이남이 개척됩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전부 건조지대, 초원지대입니다. 석기로는 나무를 벨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온대산림지대인 양자강 이남이 개척되어 중원지역에서는 물질적 토대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또 무기가 발달하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나라들이 부국강병책을 추구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제자백가라고 부르는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BC 3세기에 들어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지만 곧 망하고, 한나라가 다시 통일하면서 고조선을 침입합니다. 이 때는 이미 생산량이나 인구나 무기나 중원 쪽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고조선은 번조선, 막조선, 진조선 세 부분으로 분할된 시점이라 한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가장 서쪽에 있던 번조선의 후예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환기에 해모수가 일어나 단군직을 계승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부여라고 하게 됩니다.  

 


 

부여 역시 한나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면서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 침략군에 대응하는데 기존의 부여 왕이 투쟁에 미온적이라 동쪽으로 보내니 ?겨나니 동부여, 부여의 본진을 차지한 것이 북부여, 그 북부여를 계승한 것이 바로 고구려의 고주몽입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주몽을 나라의 시작으로 삼기 때문에, 주몽이 왕위에 오른 BC 37년을 시작으로 보지만, 중국 쪽 기록에는 부여까지 고구려로 봅니다. 부여시대는 부여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열국시대라고도 하는데 맹주역할은 부여가 합니다. 나중에는 고구려가 맹주 역할을 했지요.

 

부여의 후손은 고구려, 백제, 동부여 세 갈래로 나뉘는데, 서로 자기가 적통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백제의 경우, 소서노의 두 아들이 부여의 적통은 맞는데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면서 주몽의 아들이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소서노의 두 아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합니다. 본토에서 남하하기는 했지만, 백제 역시 자기들이 부여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의 5국 시대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 발해의 이국시대로 이어집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북쪽으로 흑룡강까지 올라가 영토를 넓힙니다. 영토가 늘면서 고구려인이 소수가 되고, 다수는 말갈족이 되지요. 왕족이나 중요한 간부들은 고구려인이지만, 중하급 관리들은 대부분 말갈족이었어요. 발해가 고구려 말갈연합정부라는 주장이 있는데 청나라가 한족비율이 많고 한족 관리를 많이 등용했어도 연합정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입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도 이처럼 자세하고 생생한 강의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나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머릿속에 역사의 흐름이 잘 정리됩니다.

 


 

발해가 신라에게 망했다면 그 영토가 신라 땅이 되었겠지만, 요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요나라 땅이 됩니다. 고려가 의식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사람과 영토는 신라를 계승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에 고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와 발해를 건너뛰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게 된 겁니다. 고려는 정신적으로 굉장한 역사의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지 못했어요. 북벌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북쪽의 요나라와 금나라에 막히면서 점점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옛 땅을 되찾자는 북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려에 이런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배달시대의 기록을 남겨놓은 게 고조선이고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의 역사기록을 남겨놓은 게 고구려이고 발해 때 일부가 복원됐지만 망하면서 불타버렸는데. 고려가 역사의식이 있었으므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같은 데 옛 기록이 일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에서 주자학이 들어옵니다. 주자학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신진사대부들은 중하급 관리 밖에 될 수 없고 상층관리는 세습이었어요. 신진사대부들이 국가를 개혁하려고 해도 기득권 세력 때문에 안 되니까, 무장인 이성계를 내세워 새 나라를 세우고 친명정책을 취합니다. 고려가 동북지방이 우리 땅이라 생각했지만 힘에 밀려 못했다면 조선은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어요. 조선은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죠. 우리 역사가 중국에 앞섰다든지 문명이 앞섰다든지 하는 기록은 읽는 것만으로도 불온하게 여겨서 금서로 폐기해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조선은 역사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도 불온하다고 반대 주장이 일어나고, 우리글을 언문이라고 무시하고, 달력도 중국 것을 기준으로 하고, 심지어 청이 들어선 후에도 명나라 연호를 계속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스님께서는 이 시점에서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시며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사를 평가할 때, 하나는 사람을 기준으로, 또 하나는 나라를 기준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나라는 자주적인데 백성이 괴로운 경우가 있고, 백성은 먹고살 만한데 나라가 자주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자주적이었으나 당나라와 오랜 전투 속에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생기고 그것을 막으려다 보니 독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망하고도 백성들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니 부흥운동이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북한을 보면 그 전철을 밟는 것 같아요. 남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주적인데,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지고, 이탈자가 생기니까 독재를 더 심하게 합니다. 반면 신라는 삶이 윤택하고 문명의 수준도 높았습니다. 고려도 문명이 굉장히 발달했지요. 조선도 초기에 명나라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세종대왕 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한글이 창제되는 등 백성의 삶이 굉장히 좋아졌지만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이 별로 없어서 나중에 화근이 됐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 국토가 완전히 유린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지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와서 도와줬는데 사대부들은 그것 때문에 더욱 명나라에 충성하는 길로 갑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완전히 속국이 됩니다. 왜란, 호란 두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는 완전히 피폐해집니다. 이것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영조와 정조였죠. 그러나 역부족인 상황에서 정조가 죽고 어린 아들 순조가 등극하면서 외척이 등장합니다. 정조가 죽은 후 100년 동안 나라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합니다. 당시 서구열강이 몰려올 때인데 나라를 혁신하지 못하고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죠.

 

그럼 그 시대의 변화가 어땠냐. 1800년에 11살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이 너무 어리니까 처음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 나중에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이 세도정치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게 매관매직이죠. 돈 주고 관직을 샀으니까 본전 이상 뽑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이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순조가 죽고 헌종이 역시 8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가 또 일찍 죽습니다. 직계가 없다보니 저 멀리 강화도 시골까지 찾아가서 왕의 7촌뻘을 모셔다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바로 철종입니다. 국가는 쇠락의 길을 걷고 맙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얘기를 듣다보니 참가자들 가운데 개탄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옵니다. 우리가 현재 분단의 고통을 겪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구한말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층 더 안타깝고, 사무치는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결국 민중의 불만이 표출되는데 제일 먼저 터진 게 홍경래의 난이라고 불리는 서북민중봉기입니다. 또 진주민란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국이 봉기한 삼도민중봉기도 있었죠. 이런 국내 혼란 속에서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 즉 천주교가 몰락양반과 양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졌는데 아무리 탄압해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거기에 의지하는 것을 보고, 최제우 선생이 서학에 맞서는 동학을 세웁니다. 그러나 혹세무민한다 하여 최제우 선생은 1864년 대구에서 참형을 당합니다. 최제우 선생이 전라도 남원에 피신해 있을 때 용성스님이 출가하신 덕밀암에 8개월간 숨어 사셨어요. 해월선사 보호하에. 천도교에서는 덕밀암이 교주가 피신해있던 성지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최제우, 최시형의 제자인 손병희와 해월의 제자인 용성스님이 손잡고 3.1운동을 전개하는 인연이 됩니다.”

 

이렇게 역사의 사담(私談)을 곳곳에 풀어내 주시니 스님의 역사 강의는 그래서 더 재미있고 생동감있게 들립니다.  

 


 

아편전쟁 이후 유럽이 중국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조선에까지 눈을 돌립니다. 외세가 점점 다가오는데 국내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아무도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외부적으로 개방의 요구가 강해지는 때에 내부적으로는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세력을 잡고 개혁을 펼칩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망가진 법도와 체계를 바로잡는 개혁이었으나 외부에 대해서는 개방을 해야 할 시기에 쇄국정책을 취했어요. 대원군은 원래 개혁적인 사람이었는데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판단을 잘못하면서 결국 반개혁 세력으로 평가받게 되죠. 이런 가운데 신문물이 들어오고 개화파가 등장합니다. 젊은 개화파들이 개혁하겠다는 뜻으로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킨 게 갑신정변입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청나라 군대에 제압당하고 개화파는 일본으로 도망가 나중에는 친일파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개혁파였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어요.”

 

대원군이나 개화파나 모두 처음 뜻은 좋았는데 시대를 잘못 읽으면서 역사의 평가가 뒤바뀌었습니다. 이래서 역사의식이 중요하고 역사를 바로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해지자 아래로부터 개혁이 시도됐는데, 바로 동학혁명입니다.

 

동학혁명은 삼도민중봉기와는 달라요. 전국 조직이 있었고 개혁적인 이념과 지향점이 있었고,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전국적인 파급력이 있었어요. 전주감영을 접수할 정도로 실행력과 힘도 있었죠. 그러나 임금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니 조직원의 대부분이었던 농민군들이 자진해산합니다. 해체 후 정부가 지도자를 잡아들이니 2차 봉기가 일어나죠. 그래서 정부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청나라 군이 들어오니 일본군도 자동으로 따라 들어옵니다. 정부가 외세를 끌어들여서 국민을 제압했으니 이런 상항에서 국민이 정부를 불신할 수밖에 없죠.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2천만이 안됐는데 그때 20만이 죽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민중이 죽임을 당한 거죠

 

이러면서 청의 군대가 일본 군대와 맞붙은 게 청일전쟁입니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갑니다. 더불어 전쟁 보상으로 대만도 일본에 할애됩니다.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가 우리보다 더 길어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 후 이에 분노한 민중이 봉기하여 을미의병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1차 항일의병입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가 사할린 섬을 일본에 내주게 됩니다. 2차 대전 후 사할린뿐 아니라 일본의 북방 4개 섬까지 소련이 가져가긴 하지만, 지금 동북아의 영토분쟁은 모두 일본의 침략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할린, 댜오위다오, 독도 모두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역사문제입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진지하게 사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가운데는 해양세력으로 미국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로 미국과 일본이 서로 용인한 게 가쓰라테프트 조약입니다. 협약설립 후 일본은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통감부를 설치하고, 을사늑약과 함께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경찰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합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니 이것이 제 2차 의병인 정미의병이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일본은 국내 모든 의병운동의 씨를 말리겠다며 철저히 탄압하는데, 이러면서 대다수가 국외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발전해갑니다.”

 

스님께서는 당시 백성의 도탄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 너무 오래 굶주린 할머니가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가 노는 것을 보고 펄펄 끓는 물에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손자였다는, 너무 끔찍해서 믿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북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무껍질로 간신히 연명하던 어린아이가 변비에 걸려 항문을 수저로 파냈다는 얘기, 사람 잡아먹은 얘기 등을 숱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불가촉천민을 도우려고 저 머나먼 인도까지 날아가는데, 북한 실상을 보시곤, ‘내 민족이 굶고 있는데 멀리 와서 이러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엄청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스님께서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한 이유였습니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의병출신들은 대부분 만주로 건너갑니다. 삼도민중봉기 시기에 이미 국내에서 많은 농민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넘어가 빈 땅, 주인 없는 땅을 일구며 살고 있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러 넘어가는 사람들 중엔 국내의 땅과 집을 팔아 이주하여 그쪽에 학교도 세우고 군대도 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1914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됩니다. 그러니 국내에서도 독립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3.1운동이 일어나 들불처럼 번져가고, 전 세계에 나가있던 독립운동가들도 곧 독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상해에 모여들어 상해임시정부를 세우지요.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라는 게 패망국인 독일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지, 승전한 연합군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일본은 당시 연합군 세력으로 승전국이 되어 중국 내 독일이 차지했던 이권을 가져갑니다. 그러니 한반도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독립이 진척되지 않자 실망한 사람들이 다시 북간도와 만주로 넘어가 일본과는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무장투쟁에 들어가죠. 1920년도 6월의 봉오동 전투나 10월의 청산리전투는 조선 게릴라 군이 일본의 정규군과 싸워 이긴 사건으로 우리 민중에게 크나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비폭력투쟁도 무장투쟁도 실패하면서 이때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소비에트가 건설된 후이므로 젊은 독립군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입니다. 당시 국제사회주의의 흐름은 민족해방세력과 공산주의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일어나고 조선에서도 조선판 국공합작인 신간회가 1927년에 조직되어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협력하게 됩니다.

 

 

 

당시 코민테른의 정책은 11당주의였습니다. 중국 내에서 공산당을 또 하나 만들 수 없으므로, 동북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들은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연군에 소속돼서 활동합니다. 당시 동북연군의 주요 구성원이 조선인이었어요. , 소련 영역내에는 소련 공산당 소속의 독립군들도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조선 공산당이 있었고, 사회주의 계열이지만 그보다 조금 온건한 여운형,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장개석의 지지를 받는 광복군이 있었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카이로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게 카이로 회담(19231127)인데 참석국이 미국, 영국, 중국이었어요.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이 만났는데 장개석 밑에 김구 선생이 있었으므로 장개석의 강력한 주장으로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을 독립시킬 것을 약속한 거죠. 그러나 나중에 독립 약속을 번복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고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분단시켜 소련군정, 미군정이 실시됐어요.

 

 

 

초기 북한 정부에는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파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연안파, 소련유학파, 조선공산당,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 세력이 혼재돼 있었어요. 북쪽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친일청산이 빨리 이뤄졌습니다. 남측은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임정파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는데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적인 필요에 따라 식민시대의 관료를 다시 등용해서 민중들의 반발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은 누구도 사회주의 요소를 드러내기 어렵게 되고, 저쪽은 자유주의 요소를 드러내기 어렵게 되었죠. 분단이 길어지고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서로를 적대하다보니 더욱 사상적으로 편협해지고 분단이 점점 길어지게 된 겁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9천년 역사의 광대하고 활달한 정신도 가지고 있지만, 1천 년 동안 강대국의 속국으로 지내온 비굴함과 지난 2백년의 피해의식이 뒤엉켜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에 스며있어요. 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의 부정적인 요소를 보고 자학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과 국가, 문화를 유지해온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게 6천년의 뿌리가 있기에 나온 거예요. 2002년 월드컵의 폭발력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일제 식민지배 이후 100년의 한, 민중의 고통 측면에서 200년의 한, 민족 전체로 보면 1천년의 한을 풀 수 있는 게 바로 통일입니다.”

 

스님께서는 통일이 되면 다 해원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거나, 네 편 내 편을 떠나 다 원한을 풀어주고 대통합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일본과도 손잡고 중국과도 손잡는데, 북한과 손잡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북한과 손 잡을 수 있다면 남한 안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왜 함께 하지 못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통일을 해서 과거를 청산해야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한도 풀리고 자존감도 생기고 희망도 생긴다는 스님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통일을 통해 어떤 희망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밟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며 다음 강의를 약속하시곤 3강을 마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의 후 JTS 해외활동가 보고회장에 잠시 들렀습니다. 라오스 JTS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배혜정, 박용대 님과와 필리핀 JTS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이재곤 법우님의 보고회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도착하셨을때 이미 보고회 끝나고 뒷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3분의 활동가는 스님께 삼배를 드렸고, 스님께서는 라오스에서 짓고 있는 학교는 다 마무리 하고 왔는지등 모든 활동들을 잘 마무리 하고 왔는지 물으시며 수고했다며 용돈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녁시간에는 스님께서 산행을 갔다올까 하시다가 점검 못한 원고가 있어서 다시 집무실로 들어가셔서 원고수정과 강의준비를 하는등 업무를 보셨습니다.

전체댓글 9

0/200

등불

감사합니다<br />덕분입니다.()()()

2015-04-05 06:58:59

^^^^

대단합니다!1천년의 한을 풀려,천년앞을 내다보시는 스님의 혜안!<br />&lt;최제우 선생이 전라도 남원에 피신해 있을 때 용성스님이 출가하신 덕밀암에 8개월간 숨어 사셨어요. 해월선사 보호하에. 천도교에서는 덕밀암이 교주가 피신해있던 성지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최제우, 최시형의 제자인 손병희와 해월의 제자인 용성스님이 손잡고 3.1운동을 전개하는 인연이 됩니다&gt;<br />

2015-04-05 03:25:11

이규원

천재과학자인 아인쉬타인도 인간의 뇌의 3프로를 사용했다는 설이 있던데 우리스님의 천재두뇌는 거의 100프로를 사용하시지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이유는 다양한각도로 바라보시고 모든영역을 섭렵하셔서 논리적사실적 통찰력으로 설명해주시니 그저 신비롭고 놀랐기만 합니다.재미있고 쉽게 그러면서도 가슴에 와닿도록 강연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015-04-04 23: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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